삼성그룹에서 500명의 인원을 감축한다는 인터넷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수원이라는 지역적 특징이있기에 이 기사는 제게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즘 즐거운 간증들을 접하게 되어집니다. 실패속에서도 낙망하지 않는 이야기들 자신의 삶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어집니다. 나도 저러한 삶을 살아야지 진정한 삶을 살아야지 실패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낙망치 아니하고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호를 나타내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창조적인 고난을 주고 계시고 계십니다. 한 개인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그의 삶을 통하여 사회전체 교회 전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창조적이 고난이라고 말할수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을 욥에게도 허락하셨고 신약에서도 눅 13장에서 솔로몬의 망대가 무너짐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일들 소경이 눈을 뜨지 못함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으로 우리에게 창조적인 고난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이 있더라도 참고 인내하고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면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볼수 있습니다. 12장까지는 굉장히 믿음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 나타나 있으나 본장에서는 뜬금없이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교회에서 여러은사와 즐거운 일들으 통하여 현실의 문제를 등안시하고 이상적인 것만을 찾을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야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인 현실이고 현실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오늘 말씀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순결하며 자족할 줄 알고 충성스럽고 담대하고 하난미을 예배하는 삶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을 베풀게TTmq니까?
13:1엔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형제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서의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즐겨하셧습니다. 형제사랑을 말씀하는 그리스도 그러나 여전히 지역 교회가 분열과 경쟁 다툼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지금 중국의 지하 교회에서 아랍권에서 믿는 성도들과 같은 상황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계는 없고 그들은 오로지 예배하는 일들 하나님의 일들을 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돌보는 일들을 서로 도와서 교회를 유지하였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교회들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그룹그룹이 활성화 된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룹 구역, 교육부서, 찬양단, 섬김의 모임가운데서 서로 사랑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나가 되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사역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할수 없고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나눌수 있는 주님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관대하게 표현되길 히브리서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13:2에 말하는 말씀은 당시의 상황을 알면 더 쉽게 이해할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지방은 숙박비가 비�고 여관이 이교도적인 관습과 범죄에 빠져있더라는 것입니다. 성지 순례를 가서 이탈리아 봄페이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여관들엔 이산한 상징들이 그려져 있고 또한 성교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된 모습입니다. 이러할때에 순회전도자들을 가장 쉽게 도울수있는 모습은 어떤것입니까? 집을 개방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접대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고무적인 일들가운데하는 가정이 정도와 가르침의 장이 되어지고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정을 개방하고 가정을 전도의 모임 장소로 개방하였던 모습이 가장 고무적인 모습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지금은 서서히 우리의 가정의 문들이 닫혀가고 있습니다. 구역예배를 가정에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정에 들어가야할 축복들이 막혀가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가정을 모임을 위해 개방하라고 권면합니다. 손님 접대를 정규적인 사역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룹모임이 활성화 될 때에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 질줄을 믿습니다.(come on over)우리집으로 오세요-일반적인 모임은 사교적연회이다 격식을 차리고 주인의 태도는 편안하고 여유가 흐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연회는 말씀 중심의 연회다.모여서 말씀을 먹고 간증이 있고 대화를 나누고 간단한 식사를 나누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연회이다.
사랑은 실제적인 책임을 져야합니다. 13:3절은 갇힌자를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갇힌자는 포괄적으로 생각할때에 소외당한 노인들,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선교지. 버림받은 아이들등등 갇힌자 억눌린자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거룩한 손길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선교사들이 있고 감옥에서 오지에서 신음하는 손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수원영락교회는 어떤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우리교회에서 그러한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더 크게 아름답게 그러한 일들을 감당해야 할것입니다. 힘있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수원영락소망대학이 나의 사역으로 다가와야하고 홈스쿨이 선교사역 동참이 나의 현실로 다가와야 우리의 현실적 사역이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더욱 아름답게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
기자는 “형제 사랑”에 대한 강연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결혼안에서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전에 마태복음 6장을 통하여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이혼 문제는 지금과 같이 예전에도 뜨거운 이슈였다는 것입니다. 이혼은 1세기 모든 고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어떠한 공식 절차 필요 없이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1세기 시인 마살 이라는 사람은 무려 12번 이혼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의 계명을 따라 ‘무엇인가 부적절’한 것을 보았을 때에 이혼 증서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부적절한일 굉장히 큰 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보수적인 삼마이 학파에서는 순결치 않은 것을 말하지만 일반적인 힐렐학파에서는 아침 식사 준비 중 빵을 태우는 일 이혼 사유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힐렐학파가 이 시대의 주류였고 바울 또한 바리새 힐렐학파 였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영향을 받은 사람일 정도였다.
예수님은 또한 재혼을 수반하는 이혼은 분명이 간음이나 다름없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또 재혼이후 불행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혼 이전에 그가 이혼을 하게 되는 계기를 올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팔복과 연결시켜 “온유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삶,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 그가 자기 아내를 어떻게 내어 쫓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이혼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우리 크리스찬들이 암암리에 범하고 있는 죄악이 무엇입니까? 칠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 생활이 회복되는 삶이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세 번째로 자족하라고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에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 6: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하셨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변질되어가서 우리의 경제활동이 합리화되어가고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에 가르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입니까? 신앙에 장애가 되는 경제활동은 우리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70-80인생을 살고 남길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입니다. 성도의 신앙다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말씀이 이제는 우리 구역장 본받아 나도 땡땡이 치겠네,,,우리 장로님 신앙 본받아 나도 예배 늦겠네....나도 권사님 신앙 본받아 십일조 안하겠네...
돈은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도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소유를 가질수 있다는 보장을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보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물질관을 생각하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인간들은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하거나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던 행실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저의 믿음을 본 받으세요.아마도 비웃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우라는 것입니다. 마 11:29 나의 멍에를 배우라, 바울은 빌 3:17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살전 1:6-7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으니~~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딤전 1:16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시대는 가고 지도자는 바뀔지라도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영원히 바뀌지 아니함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가 변하지 않는 다면 복음또한 바뀌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다른교훈에 끌리지 말시길 바랍니다. 13:8-9엔 예수그리스도가 변함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