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태복음 8장 이야기

스네어 2007. 11. 9. 20:25

 

 

 

 

마 8장 23장-34장

예수님의 권능

 

성경을 볼 때 지식적인 면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시대적인 배경과 당시의 문화적인 면을 파악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성도들은 성경 옆에 나와 있는 각주가 전체인 듯 바라보고 그것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을 전체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성경을 바라보는 것은 뜨거운 가슴보다 차가운 이성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도들이 가끔씩 예리한 질문을 하는데 쉽게 알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오늘 말슴을 통하여 깊이 있게 성경을 바라보고 우리가 갖는 성경의 의문들도 풀리기를 바랍니다. 그럴려면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다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의 표현을 보면 갈릴리를 바라보면서 저자는 바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더 큰 시야를 가지고 있는 누가 같은 경우에는 그곳을 ‘림네’ 호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의 차이는 세계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누가의 시각과 공관복음의 저자들의 시각적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의 시각은 사도행전을 쓰고 있고 유대인에 대한 복음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것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성경에서는 어떻게 바다에 대하여 표현할까요?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천국에는 바다가 있을까요 없을 까요? 계 21:1

성경에서는 더 이상 천국에서는 바다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가봐야 알죠가 아마도 정답이 될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옛날부터 바다에는 라합이 살고, 리워야단이 산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물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65편에서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자기 힘으로 산을 평정하시고 바다의 흉융과 물결의 요동함을 잠재우시는 분 그리고 89편에서는 주의 위대하심을 기리고 있습니다.

즉 주께서 바다의 흉융함을 다스리시고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

주께서 라합을 파쇄하시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라합을 이집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을 압제함을 나타내기도 하며 실제로 바다에 나가 폭풍을 만나는 것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반기에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때에 성지 순례팀이 만난 갈릴리 바다는 너무도 평온한 곳이었습니다.

따스한 물, 깨끗한 호수 너무도 좋고 평온한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일 년에 몇 번씩 그 호수가 뒤집히고 요동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휘몰아치는 폭풍을 잠잠케 하실 때에 제자들이 느낄 경외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들 가운데 또 다시 질문이 던져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권을 행하시는 분이구나라는 그것을 인정하길 원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지쳐 계십니다.

자연적인 노곤함으로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주무시고 계시는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육체적인 노곤함과 잠을 주무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통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호수에 내리치는 변덕스러운 폭풍으로 인하여 치명적인 결과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교회라는 배를 향한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의 권능을 신뢰한다면 그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수 있음을 믿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도, 직장도, 자녀도 이렇게 승리로 인도 하실 줄 믿습니다.

 

흥미로운 말씀이 있는데요..

24절에 큰 놀이라고 말씀되고 있는데 이 큰 놀은 일반적으로 지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 쓰나미를 상상하시면 대충 이때의 풍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지진이 작렬할 때에 650m의 파도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파도는 그 정도의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파도가 작렬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폭풍을 꾸짓고 계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일에 대한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함께 악한 영들의 발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영들의 발악도 예수님의 한 번의 외침 속에 잠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사역을 하고 계시는 지역은 가다라 지방의 사역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다른 공고안복음에는 거라사 지역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지역은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인데요 유대의 관습 속에도 그들이 통재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의 미신이 있는 곳이고 악한 영들의 활동이 강한 지역임을 권성달 전도사님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면 예수님 당시에도 당골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죠....

제가 미아동에서 사역을 하는 데 들은 이야기입니다.

무당을 하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장로님, 권사님들도 주된 고객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 의지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말은 하고 있지만 다름 방법이 있는가를 찾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지역 거라사 지역은 이런한 것이 암암리에 허용되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유대인들이 양돈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의 신전에 재물을 드릴 때에 돼지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법으로 금지 되었지만 그들도 밤중에 찾아와 이방의 신전에 드릴 돼지를 사가는 데 그것이 그냥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닌 성업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양돈이 2000마리이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가다라 지방으로 가신 예수님의 축귀사역을 보면 두사람의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악의 세력이 굴복하고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판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과 그분의 메시아가 모든 귀신들을 철저히 파멸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귀신이 일깨워 준 능력으로 예수님이 참 메시야 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이미 이르렀는가?

그러한 두려움은 그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나오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지금은 마지막 때, 종말의 때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때를 좋은 때 즐거운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귀신들도 종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것들과 교섭하지 않습니다.

다만 명령하시고 그대로 진행 되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교섭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섭이라는 것은 그 후에 그들의 존재가 있어야 하지만 그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가길 청하고 그들은 갈릴리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 가다라 지방은 갈릴리와 바로 인접한 마을입니다.

그들의 최후는 죽음으로 결론이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결국, 귀신의 결국, 사탄의 결국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하여 원수의 머리를 부수고 있는 것을 말씀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믿는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이 임할줄 믿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사탄은 범접지 못함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삼겹살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돼지면 맛난 저녁인데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에 대해 전능하신 일을 행하신 것이고 둘째로 인간이 귀신 보다 더 중요함을 나타내시고 계시며 또 이방의 풍속을 쫓는 이 마을에 대하여서도 엄중히 경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을 보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의 다른 점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35-5:43, 누가복음 8:26-39절의 내용과 상의한 점을 보면 그곳에서는 한 사람인데 또 주석가들은 대표성을 가진 귀신들린 사람들 중에서 가장 권력이 강력한 한사람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다시 말하면 귀신 들린 많은 사람들이 거라사, 가다라 지방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대표성을 지닌 사람이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두 배로 늘리기 (doubling) 인데요 이것은 셈어의 특징을 알면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었다가 아니라 첫째로는 이런 일이 여기에서 한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번이상 나타났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의 격언대로 어떤 문제는 둘 혹은 세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확증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나타내고자하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더블링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기사의 진실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후대의 사람이나 그 당시의 사람들이여 들을때에 진실한 사건임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마9:27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실세 두 소경이 따라오며 마가복음 8장 22절에 나타난 사건과 다르게 두 사람으로 나왔고 또 마태복음 20:30에서의 여리고를 지나다가 만난 두 소경의 이야기와 달리 다른 공관복음의 소경 마가복음 10:46절-52절의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사건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여리고를 지나다가 구걸하는 한 소경 과 다르게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태복음의 두 배로 늘리기 즉 더블링은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실이 진실이다 라는 것을 알라는 마태의 이야기가 지금도 들려 진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믿어지시길 예수님의 축원합니다.

우리는 체험이나 경험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진실입니다. 진실입니다.

믿으십시오...우리의 삶에서 이것을 믿을수 있느냐 믿을 수 없느냐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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