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태복음 5장

스네어 2007. 11. 10. 14:16

마 5장 48절 온전하라

 

현실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IMF가 지나갔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가정이 많고 물질적인 어려움, 자녀의 이탈, 오히려 IMF시대보다 더 힘든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면 흔들리고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원합니다.

신약과 구약의 가장 큰 주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뭐 중요하지 않은 주제가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율법, 사랑,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집중되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팔복(구복-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자)을 말씀하신 후에 두 가지 주제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한 가지는 인간과의 관계를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앞서 인간관계를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지금가지 우리가 이해하는 패턴과 달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 5장 21-48절까지는 반복적인 패턴을 사용하여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 있는데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대해 말할 때에 굉장히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향방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내가 어떠한가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움찔거리도록 놀랄 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먼저 ‘살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살인이란 동사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이 동사는 십계명을 말할 때 출 20:13절에 쓰인 동사와 같은 고살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고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유 없는 살인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없는 살인’이것을 비유한다면 지나가다가 길가는 행인을 칼로 찌르고 아프시겠습니다.

아유 죽으셨네요...ㅎㅎㅎ..

차를 몰고 가다가 인도로 질주하여 사람을 무차별 살인하는 것 고살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1991년 10월 20일 20명을 중경상을 입히고 2명의 어린이가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회 진출에 실패하고 면접마다 떨어져서 사회에 대한 또 사람들에 대한 증오의 마음을 가지고 여의도 공원으로 돌진해서 사람들과 함께 죽으려는 결심으로 이런일을 감행 했다는 것입니다.

‘고살’의 의미를 갖는 사건 물론 이일은 손자를 죽인 범인을 신앙을 가진 할머니가 양자삼아서 헤피엔딩으로 끝났으나 우리는 이일을 고살로 기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유 없는 살인을 ‘증오’로 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 증오를 품는 것을 통해 모욕을 당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창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증오의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을 통해 모욕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증오는 현대에는 법정에서는 판단 받지 않는 내용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는 그 증오의 마음이 판단 받을 내용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분노, 증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서기관들은 이러한 증오나 모욕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누군가 이러한 일들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간이’ ‘바보’ ‘라가’라고 말하는 삶들이 있다면 그들은 청문회로 불러오게 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배 드릴 때의 자세를 말합니다.

형제와 화목한 뒤에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 이후에 송사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연계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 사람보다 계산에 빠른 민족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간 동안 재판관을 매수하여 너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너의 예배의 시간에....

증오의 마음을 통하여 예배에 손해요 현실의 손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천국의 자녀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예배는 관계 회복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화해는 하나님과의 화해임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이 밤에도 기도하려고 이곳까지 나왔습니다.

삶에 증오나 미움과 다툼이 있다면 이 시간 회복이 있는 저녁이 되며 특별히 성도와 성도 간에 성도와 이웃 간에 용서가 필요하다면 이 시간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주제부터 굉장히 길게 이어졌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예수님은 일곱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로 문제를 옮겨 가십니다.

여기에서는 정죄 받는 것이 단순히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유발하는 태도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선정적인 책, 연극, 영화, 잡지, 인터넷을 통하여 일부러 음욕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이 계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부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함을 보고 스스로 거세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가 아님을 본문을 문맥상 살펴 볼 때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능한 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다루기를 원하시며 복된 삶의 일부인 마음의 청결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철저히 잘라 버리길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인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이혼 문제는 지금과 같이 예전에도 뜨거운 이슈였다는 것입니다. 이혼은 1세기 모든 고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어떠한 공식 절차 필요 없이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1세기 시인 마살 이라는 사람은 무려 12번 이혼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의 계명을 따라 ‘무엇인가 부적절’한 것을 보았을 때에 이혼 증서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부적절한일 굉장히 큰 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보수적인 삼마이 학파에서는 순결치 않은 것을 말하지만 일반적인 힐렐학파에서는 아침 식사 준비 중 빵을 태우는 일 이혼 사유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힐렐학파가 이 시대의 주류였고 바울 또한 바리새 힐렐학파 였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영향을 받은 사람일 정도였다.

예수님은 또한 재혼을 수반하는 이혼은 분명이 간음이나 다름없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또 재혼이후 불행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혼 이전에 그가 이혼을 하게 되는 계기를 올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팔복과 연결시켜 “온유한 사람, 화평케하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삶,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 그가 자기 아내를 어떻게 내어 쫓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이혼이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맹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맹세를 존중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맹세에 대해 크게 생각지 않았고 서기관들은 이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을 걸지 않은 맹세는 모두 파기 되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늘을 걸고 맹세합니다.

예루살렘을 걸고 맹세합니다. 자신을 걸고 맹세합니다.

이런 것은 깨뜨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서기관들이 허락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의를 깨는 것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이었고 지금의 사람들도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맹세에 대한 내용들을 예수님께서도 인지하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맹세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37절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 말씀은 우리의 말들이 믿을 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 할수 있을때 예 아니오 할수 있을때 아니오 하는 것이 진실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 같은 진실함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모습은 진실하기를 축원합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보복이다.

출 21:24에 있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이 유명한 말씀은 보복을 정당화 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허용적인 법률이 아니라 제한적인 법률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보복하는 태도는 삶의 일부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눈을 뽑으니 시원하네,이를 뽑으니 시원하네가 아니라 남을 상해를 입히는 행위가 악하고 내가 그 보복하는 것또한 악하기에 서로가 조심하라는 것을 깔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에서는 그런 것들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개가 나를 기만했어 내가 그에게 보복할테니 기다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태도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을 이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보복은 부당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오른빰 치는 삶이 왼빰도 친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가 겉옷도 취하려한다. 오리를 가자던 사람이 십리를 가자고 한다 보복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보복의 내용은 부당한내용으로 나오게 되는데 우리의 대처는 어떻게 할것인가. 하나님 나라 백서의 온전함은 어떤 것인가?

만델라라는 사람이 한 이야기 중에 그는 이런 일을 했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부당한 강요를 당할 때에 그것을 완수했다 라는 것입니다.”

학대를 당하는 사람이 부당한 일을 시킨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38절부터 42절까지를 보면서 예수님의 강력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부당한 대우를 하는 그들을 놀라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고, 주고, 또 주는 그런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42절)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웬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슈는 이웃을 사랑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그 문제는 힘든 일이기에 새로운 나라의 법입니다.

이 주제는 앞의 주제와(보복) 연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 그들은 서기관들이 이런 모든 일에 규제를 두었습니다. 그 규제는 이웃에 대한 범위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들의 이웃이 아니다.

여러분들 알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 선한 사마리아인들 그들의 규정에 따르면 그들은 이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맨 마지막 규정에 이르기를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규정을 삽입을 하고 인간적인 연약함을 용인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인기 있는 말이었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허용적 법률이 아닌 제한적인 법률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확대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통하여 우리는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 구성원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까? 불가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바꾸어 나가라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이 당시까지는 필리아 즉 우정, 에로스 즉 성적 사랑, 스톨게 가족간 사랑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아주 다른 사랑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품이라는 것입니다. 상품자체는 있지만 공급이 없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그 사랑이 너무 넘치는 시대이고 예수님의 놀라움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안에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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