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린도 전서 14:13-25

스네어 2012. 7. 26. 17:04

사도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야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한계를 본문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첫재로 명료함의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헬라인의 언어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마치 대한 민국의 언어가 한글인것과 같이 고대에 자신들의 언어와 발음의 아름다움을 그들은 찬미를 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들은 바, 바, 바 라고 들린다고 해서 그들은 야만인을 바바리안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치 언어의 사투리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재로 개인적인 온전함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덕을 세우기를 원하는 데 그들은 방언으로 덕을 세우기 보다 그들의 한계를 보게 된다.

셌째로 외인들에 대한 영향력이 없는 것을 볼수 있다. 당시에는 크리스챤의 지정석이 있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지정석이 따로 있었다.

제가 어릴대도 남녀의 자리가 정해져 있엇고 장로석, 권사석 다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들은 나뉘어진 상황에서 기도하는 모습과 말하는 모습에서 남들이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함으로 그들을 당황시켯다.

그러한 모습은 당시 방언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의 고려;해야할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엔 마음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6-17절은 축복을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 기도가 그들에게 들려져 알아들을수있는가?

(대표기도) 고린도식 방언과 사도행전식의 방언의 차이점이 있다. 알아들을 수있는 말을 하는 사도행전식의 방언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하나로 모으는 방언이 행전의 방언이 되어진다. 그러나 고린도의 방언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들은 목청을 높이고 서로 경쟁적인 말들을 했다.

그러면 바울 당신은 방언을 했는가? 18절에 바울은 방언을 더 한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다국어를 구사하는 언어의 달인이었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루스드라에서 앉은 뱅이를 고쳐준 사건이 있었다. 그때 그 지방 사람들이 바나바는 제우스신이라고 별칭을 붙이고 바울에겐 헤르메스라고 별칭을 붙인다. 헤르메스는 언어의 발명자, 웅변의 신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의 자유구사할수 있는 바울의 실력을 보고 그들이 놀라서 이러한 별칭을 붙이고 말을 하는 데 말이 입이 붙어 있는 말이 아니라 말의 기술, 어법, 논리가 헬라의 어떤 철학자 보다 놀라움을 가지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고후 11:6절은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다.....실제로는 이말은 자신의 겸손의 말이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 보다. 일만마디 방언보다 더 낫다. 방언보다 알아들을 수있는 다섯마디 하나님의 말씀이 귀함을 말하고 있다.

공동체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더 중요시 하라. 순위 말씀- 기도

22절엔 방언은 믿지 아니라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핝다. 믿는 자들을 위한것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기도할때 그들을 배려 할 필요가 있다. (더 뜨거운 기도/ 그들이 알아듣는 기도/ 우리의 착각과 우리의 아집은 버려야 한다. / 그러나 우리가 모여 기도할때 더 크게 더 외쳐 기도할 필요가 있다.)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것이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함께 은혜가 된다. 25절에 기도하면 변화, 숨어있는 것들이 드러남. 하나님께 경배를 돌리게 된다.

방언의 유익과 방언의 한계를 우리가 본다. 교회에 무엇이 덕이 되는가가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바울의 관심이 거기 있고 하나님의 관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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