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장 1-7절
제목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삼았는고 하니, 첫째는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읽을 이사야 본문에 들어있는 구절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 사도가 일찍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하나님의 열심’(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이라는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깨닫고 그렇게 강조했던 하나님의 열심, 구약의 표현으로 하자면, ‘여호와의 열심’을 여러분들도 깨닫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본문 안에서
그렇다면, ‘여호와의 열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인, 이사야 9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나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은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시라.”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말뜻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회개를 요청하는 선포를 합니다. “이스라엘아 돌아와라!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사 1:5) 반대로 이스라엘을 위로하신다면, 용서와 소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그러한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를 우리는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본래 글 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대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사야라는 예언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러한 책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날마다 사람들이 많은 시장이나 성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리를 치는 예언자 이사야가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을 들으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자신의 일을 이루실지를 조심스럽게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언이 선포되어도 ‘언제, 어디에서’와 같은 정확한 내용은 없기 때문에,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이사야 9장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본문 말씀에 명확하게 나와 있지도 않았는데도, 즉흥적으로 ‘아, 여기에 예수님이 예언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더욱 풍성한 의미를 건너뛰는 자세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 14절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사야가 살던 시대 보다 700년이나 이후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이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살았던 시대에, 이 예언의 말씀이 뜻하고 또한 그러한 본뜻에서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점차 구체화되어지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열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세웠던 이스라엘 왕국은 100년도 채 지나지 못해서,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이 떨어져 나간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이런 역사를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한 일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그래요. 땅도 비옥하고 물도 충분했던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했습니다. 강대국에 정복되어 영화로웠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노예가 되던지 피난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하 15:29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북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 갈릴리와 납달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본문 9장 1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다.” 바로 앞 절인 8장 22절을 읽으면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그렇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북이스라엘의 지역입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에, 그곳의 피난민들이 자연스럽게 동포의 나라인 남유다로 내려오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규모의 난민을 먹이고 입히고 살리는 일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대하 30장에 의하면, 남유다의 왕은 북이스라엘의 난민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니, 너희 앗수르 왕의 손에 남은 자들이여, 여호와께 귀순하라”(7-9절) 그러므로, 이제 본문 9장 1-2절이 이해되실 것입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사야의 예언은 계속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나라를 창성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그리고 이제는 무거운 멍에와 채찍 그리고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어져서 자유케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4절; ‘미디안의 날’을 잊어버리지는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삼켰던 강대국의 위협은 여전히 남왕국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북이스라엘에게 공평과 정의를 베푸는 남왕국에게는, 고통 대신 즐거움을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5절처럼, 이제는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중요한 본문으로 넘어갈 시간입니다. 6-7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배경에서 ‘한 아기’와 ‘한 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6절의 ‘한 아기’와 ‘한 아들’은 한 사람을 말합니다.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두 번 반복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6절은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났고, 우리에게 주셨다”입니다. 나실 것이 아니라, 또한 주실 것이 아니라, 이미 났고 이미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을 통틀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믿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아까 말씀 드렸던 그 시대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바로 남왕국의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우리는 6절에 나오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누가 떠올랐을까요? 바로 왕입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 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르는 찬양: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시편 2편의 말씀은 왕이 등극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쉽게 말씀 드리면,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호와를 다르게 일컫는 ‘엘로힘’이 아니라, 그냥 단수형인 ‘엘’을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왕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 이루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엘로힘보다는 작은 하나님(엘)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7절이 이해가 됩니다: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지금까지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사야 9장의 말씀을 보다 자세히 보았습니다.
이제 보다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호와의 열심’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인간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사단의 종이 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돌이키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사단의 체제가 노예와 억압, 고통과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통치는 공평과 정의이며, 평강과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대리인을 통해서 그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시작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이라는 족장이었고,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들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통해서 왕국을 세운 이후로는, 바로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이 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메시야’하면, 왕-예언자-제사장 이렇게 3등분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본래 ‘메시야’는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려던 맥락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서에 종종 등장하는 메시야 약속은 왕의 모습을 많이 닮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가랴 9-14장에 가득 들어있는 메시야의 모습은 다름 아닌 왕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바로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까 앞에서 저는 4절의 ‘미디안의 날’을 기억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이 ‘미디안의 날’이라는 것은 사사시대의 ‘기드온의 시대’를 뜻합니다. 기드온은 최초로 왕이 될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삿 8:18). 그러나 그는 “나는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겸손히 거절했습니다(삿 8:23). 이렇게 이사야의 예언에서 기드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메시야 곧 왕이라고 해서, 자신만의 권세로 다스리는 것이 아닌, 기드온과 같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메시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이, 오늘 우리의 본문 예언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미완료, 즉 미래형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 ‘여호와의 열심’이 10년, 100년, 500년, 700년이 지나서,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던 것입니다(갈 4: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열심’의 최종 결정체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의 ‘여호와의 열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메시야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1장에서 특별히 왕들의 족보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만이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처음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셨던 말씀으로 이사야(61:1)가 약속했던 참된 메시야, 곧 참된 왕의 사역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눅 4:18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다.” 사단의 포로였던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관계를 회복시키신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다시 본문 앞에서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과거에, 몇 달 전에 혹은 몇 년 전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서 치밀하게 준비된 완벽한 선물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하고도 치밀한 준비는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중심에는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로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10달을 수고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죄악으로 죽어버린 우리의 생명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서 수고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고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고 높은 자신의 자리를 버리면서까지, 그리고 최고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는 겟세마네의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까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위대한 기간이 바로 이 사순절이라는 것을 감사함으로 묵상하시는 오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말씀은 그 당시의 왕이었던 히스기야를 생각하게 합니다. ‘히스기야’란 ‘하자크’(힘)에 ‘야웨’가 더해져서, ‘야웨가 나의 힘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힘을 얻어서 살았던 사람이 히스기야였습니다. 사실 본문의 상황에서, 남유다 역시 강대국의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앗수르의 18만 5천명의 대군이 쳐들어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자신의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거룩한 자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본래 히스기야 자신을 가리켰던 말씀이 장차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자신의 값진 믿음을 끝까지 지켰더니, 결국 장래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되는 영적인 원리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두 명의 왕을 말해주는데, 한 명은 어려울 때 믿음을 버린 아하스 왕입니다(7장). ‘아하스’라는 이름의 뜻은 붙잡히다/사로잡히다 입니다. 말 그대로 그는 강대국의 세력 앞에 사로잡힌 인생으로 살고 맙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이 있는데, 바로 끝까지 여호와를 자기의 힘으로 삼은 히스기야 왕입니다. 이사야서의 가장 중심인 36-39장엔 히스기야가 여호와만을 힘으로 삼아서 앗수르 대군 18만 5천명을 이긴 기적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아하스가 아닌 히스기야의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는 세 번째 메시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어렵고도 길게 구원의 역사를 만드셨던 것일까? 단 6일 만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지루하고 고통스러우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저는 이것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 질문의 해답은 제가 드릴 수 없는 차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도록 치밀하게 준비된 ‘여호와의 열심’과 또한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으로 삼았던 히스기야 말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묵상하다가, 저는 오늘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여호와의 열심’으로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믿음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호와의 열심’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이 ‘여호와의 열심’을 품어야 한다는 도전이 아닐까요! 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순전한 믿음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이 히스기야의 순전한 믿음을 품어야 한다는 도전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의 기도제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여호와의 열심’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바울 사도가 가졌던 ‘여호와의 열심’과 히스기야의 믿음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려는 그 열심,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려는 그 열심, 그래서 우리가 예배당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내가 히스기야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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