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도우시는 주(사50:1-11절)
50장은 주고받는 이야기대상에 따라 3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3절은 하나님께서 선민백성에게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에게”
4-9절은 “나로, 나의”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구속사역에 대하여 특히 고난과 승리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고
10-11절은 “너희 ”선지자인 이사야가 선민백성에게 경고하는 대목으로 구분되어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면서도 그 한절한절에 각사람의 형편에 따른 하나님의 처우가 들어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살펴보면
1절에는 이스라엘법에 명시되어있는 이혼서와 노예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혼서에 관해서는 신24:1-4절에 명시되어 있고 노예에 관해서는 레위기25:39-55절에 나옵니다.
이혼에 관해서는 2가지로 구분지어지는데 하나는 이혼서를 첨부한 그러니까 순전히 남편마음에 들지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이혼당할경우에 여자에게 주어지는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 경우 즉, 간음이나 간통으로 인한 이혼의 경우 증서없이 내좆을 수 있고 더러는 돌로 쳐죽임을 당하기때문입니다. 이러한점에서 아내된 남유다가 남편된 하나님께 대하여 정조를 버림으로 인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남유다가 당하는 고난은 바로 남편되신 하나님께서 막무가내로 고의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때문임을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노예에 관해서는 “너희를 팔았느냐” 할 때에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21:7절이나 느헤미야6:5,8절에 보면 빚 때문에 자신의 자식을 팔기도 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빗대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바벨론에게 팔았다고 항변하는 남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유다를 친히 파신적이 없음을 증명하시려고 반문하고 있는데
“너희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다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팔리고 내어 보냄을 입은 자녀들을 보면서 기분좋아할 아버지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찾아오셨고 친히 부르셨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전혀기대하지 않고 무시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불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하기위하여 친히 이땅에 독생자 그리스도예수를 보내시고 갖은 고난과 학대 고통과 조롱 수치 욕보임을 당하게 하면서까지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온것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고, 건강한자를 부르러온것아니요 병든자를 부르러왔지만 죄로 인하여 팔리고 병으로 인하여 내어보냄을 받은자들이 반응하지 않음에 대하여 애타하시면서 “내손이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하십니다.”
과거에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땅에 이르기까지 “홍해사건”을 바다가 마르며와 “요단강사건”을 하수가 광야가 될것이며라고 대표적사건을 묘사하시면서 과거에 너희들을 이끌어 내었던 그 능력많으신 여호와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절에서는 출애굽시에 내렸던 아홉번째의 재앙인 “흑암의 재앙”을 상기시키면서 빛되신 주님을 향해 나아오라고 권고하고 계신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더러 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피하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충동울 받을때가 있습니다. 직면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그런환경을 맞을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할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를 그렇게 죽는데까지 따르겠다고 했으면서도 어린 비자앞에서 모른다고 맹세하고 저주하며 떠나가는 모습이 종종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통곡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정말 자신이 나약함을 발견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러면서 자신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오늘본문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입장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행하셨으며 내가 하낭님께 어떻게 대했는가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게 하십니다.
분명한 이유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코 하나님의 손이 짧아져서가 아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아니 환경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해지고 의심하는자에게 과거에 행하신일들을 상기시키면서 확신과 격려 위로를 주시고 계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이 짧아져서가 아니었구나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나의 죄된모습 하나님과 더불어 살만큼 거룩하게 구별되지 못한 나의 죄된모습이 있음을 알게하십니다. 이밤에 여러분에게도 처지나 환경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깨닫는 은혜로 인하여 기쁨이되고 감사가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미움받을짓을 한것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붙잡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4-9절은 그 유명한 종의 노래중 3번째 노래입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예수께서 자신을 노래하는 시적운율이 있는 내용으로서
42:1-9절과 49:1-7절 그리고 52:13-53:12절을 포함해서 4개의 종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일종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의 사역을 노래하고 있는 1 인칭관점의 노래로서 42장과 49장은 주로 성품과 권위 주요임무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면
50장과 53장은 구속사역을 위한 고난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특히 53장은 처절한 대속수난에 대해서 애처로운 심경과 모든수난을 치루시고 만백성앞에서 위대한 구원을 베푸신 벅찬감동을 애절하고도 힘있게 노래하고 있는것입니다.
오늘 50장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좀전에 말씀드린바와같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고난에 처해있고 어려운환경에 몰려있는 그들을 대신하여 친히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시며 그들을 사랑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때로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그냥 용서하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는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자신이 그 죄로 인한 고통을 고난을 채찍을 수욕을 친히 담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절이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마치 나의 죄를 대신하여 말없이 죽임을 당할 어린양이 보입니다.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너는 내 죄를 대신해서 그 죄값을 담당하기위해 죽는거야” 그 주인이 말하는대로 고개만숙이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입니다. 그 주인대신 자신이 죽임당할줄 알지만 그저 순종하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어맡기듯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 어린양은 거역지도 아니합니다. 안죽겠다고 소리지르지도 않습니다. 내가 왜 주인대신 죽어야 하느냐고 반항하거나 두려워서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합니다.
오히려 내가 해야할일이 마땅하다고 자기를 때리는자에게 등을 맡기며 주인대신 죽겠다는 각오로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아니합니다. 이 어린양은 바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 이 못되고 이 죽어마땅한 죄인이요 괴수인 나를 대신하여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죽기위하여 아무말없이 순종하고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무력해서가 아니었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습니다.
말없이 순종하셨다는데 그 크신 사랑이 있습니다.
내 대신 이라는 그 갚을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자신이 죄없이 고난당할 때, 애매하게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리스도예수를 생각하며 그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을 때 고난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줄로 믿습니다.
4절에 지혜를 주신다고 하지않습니까? 7. 9절에서 도우신다고 하지않으십니까?
수난을 참고 모욕을 참는것도 애매한 고통을 참는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됩니다. 내가 아무리 강심장을 가지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해서 억울한 일에 대한 분노는 쉽게 가라앉는 것이 아니더란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수치스럽게 하신뜻이 무엇이며 고통을 주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만하면 그보다 더한것도 감당할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강담하도록 도우실줄로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핍박하고 여러분을 못살게하고 여러분에게 문제를 주는자들 모두가 구원받아야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나도 그러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죄없다 하시고 의롭다하시며 나와 가까이 계셔서 돌보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세 번째로 그러한 확신을 주실려고 9-11절까지는 승리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9절-10절을 한번더 읽습니다. “주 여호와께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너희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자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는자에 대한 심판 멸망의 경고인과 동시에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여 소망이 없이 절망가운데 빠져있는자에게 낙심하지말고 오직 구원자되시는 예수님만 온전히 의뢰하라고 권고하고 있는것입니다.
열왕기하4장에 보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중에 과부가 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남편이 선지자되기위해 공부하다가 빚만지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수차례와서 빚을 갚으라고 재촉했습니다. 이제 채주가 와서 내일까지 빚을갚지않으면 두 아둘을 종으로 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던 이여인은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일이면 당신의 아들들이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아시지않습니까? 내가 당신만을 경외하고 바라는줄을 하나님께서 아시지않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보내십니다. 엘리사가 과부에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랴 어떻게 해주랴 있는 것을 말해보아라 그랬더니 고작 기름한병뿐입니다.
이웃들에게 가서 있는대로 그릇을 빌어오게 해서 그곳에 기름을 채워서 기름을 팔아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부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과부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일 수 있습니다.
남유다의 포로생활이 우리의 생활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더 힘들고 고통스러운문제가 우리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사업의 문제등으로 극한고난가운데 있을수있다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주시는 분명한이유를 깨닫고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환난중에 소망을 잃지말고 낙심에 빠지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산소망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 가지 시헝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지 않을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것은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장차 그리스도의 나타나실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하나님의 의는 영영하시고 구속의 은혜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뢰하면 “할수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못한일이 없느니라” 의지하는자를 반드시 도우실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 - 원문 직역은 '섬광(불꽃)으로 너 자신을 둘러쌀
불을 지피는 자'이다. 여기 '섬광(불꽃)'이란 지속적으로 타는 것이 아니라 잠시 큰
광채를 내지만 곧 스러지고 마는 문자 그대로의 불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본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인생 여정에서 역경을 만날 때 자신의 보잘것 없는 능력으로 그것을
헤쳐보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영매, 마법 등에 의존하
는 영적 무지에 빠졌던 백성들 혹은 인간 철학의 교묘한 올무, 거짓 종교, 무신론, 자
기의 등에 빠져 있는 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결국 그 의존하는 것으로 인하
여 멸망하고 만다. 이것은 마치 빛과 열기를 기대했던 불에게 삼키움을 당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무튼 10절과 본절은 인생 여정, 특히 역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와 자신이나 우상을 의지하는 자를 비교하고 그 결과를 뚜렷이 대조시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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