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롬1:16-17절

스네어 2009. 1. 21. 14:22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롬1:16-17절)

우리의 믿는바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고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증명하는 단어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동정녀에 의해 탄생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사 40일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마 약속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거대한 시각을 가지고 보자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란 사실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혹은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지혜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언제나 흔들리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얻은바 구원이 무엇인가? 에 대하여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어떤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신가?

또한 어떤 능력을 행사하시고 계신가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1. 우리는 왜 복음의 능력을 부끄러워할까?

16절 말씀인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는 원래 강조적인 표현으로 곡어법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자랑하십시다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돌려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에 사도바울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복음을 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16절 한절 속에는 복음과 관련된 중요한 단어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복음, 믿음, 능력, 구원의 단어들이 상호간에 짝을 이루는데 복음과 믿음, 능력과 구원이 연관 되어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은 능력으로만 가능하게 되며 그리고 이 네가지 어휘는 다시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않다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규정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말라 다른 우상을 새기거나 절하지 말라 살인하지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나 율법을 지켜 구원 얻을자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죄의 본성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번번히 어기게 합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역시 믿음을 가져야한다는 조건부 구원아닙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 되는 조건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설명함으로서 그것을 믿음으로 선택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을 못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단 0.1%도 내가 할것이 없고 오직 복음자체가 나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고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 얻는 일에 대하여 99.9%를 하셨고 내가 해야 할 일을 0.1% 라도 남겨놓으셨다면 내가 맡은 0.1%마저도 완수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단 0.1%라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비록 내 책임의 한계가 0.1%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은 예외 없이 좌절하고 실패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때문에 복음을 늘 부끄러워하고 자신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결과를 내자신에게 늘 묻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자신의 책임한계를 느끼게 한다면 율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책임한계를 100%로 규정했다면 복음은 0.1%로 규정했다는 것뿐 다를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썩어진 사람입니다. 제가 그 시체를 살려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시체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를 살려줄테니 눈만 한 번만 깜박여봐라

아니 3초동안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아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나만 쳐다봐라 ....

가능한일입니까? 죽은 우리가 어떻게 쳐다본다는 말입니까?

이미 썩어진 상태에서 무슨 힘을쓴다는 말입니까?

전혀 감각이없는 시체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100%의 능력으로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데 우리는 손하나 까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이라고 말씀하실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의 차이는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어차피 살려내실 때 모두가 시체였다면 시체인 우리를 살려내셨다면 왜 믿음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믿는 자는 살려내고 믿지 않는자는 살려내지를 않으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한 우리의 반응이거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며,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이 모든 것들은,

내 선택과 내 결단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결과입니까?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안에서 일으키신 나를 거듭나게 하셨고 내 눈을 뜨게 하셨고 죽었던 내 심령이 살아나게 하시사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맞습니다라고 맞 장구 치면서 고백하게 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좀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전2:1-5절을 찾아봅시다. (264-5쪽)

 

왜 이 말을 써야 했었느냐하면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것과 같이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에 본인들이 이해하고 선택했다고 고린도 교인들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난 똑똑하고 신령해서 이 말을 알아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너희들은 덜 똑똑해서 덜신령해서 안 믿었다 혹은 늦게 혹은 아직도 덜 믿고 있다는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들은 너희의 머리와 생각으로 너희가 이해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너희 속에 성령께서 작업하셔서 알게 된 것이며 네가 똑똑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의 심령에 간섭한 결과로써 믿음이 생긴 것이다”이 말을 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으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되었습니까? 처음부터 알고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롬10:13-14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 ”

믿지 않고서는 주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서 나느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 낼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알수가 없습니다. 누가 가르켜주어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입니다. 전파하는 자는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하거나 이해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무능하고 무감각한 심령을 대수술해주시고 베푸신 은혜와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약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여러분이 잘못선택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맞으면서 고치도록 되어있는 존재로 서게 하시고, 맞게 선택하면 칭찬과 상급 속에서 영광의 자리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되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정당한 반응을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거기에 정당한 반응을 하도록 우리에게도 작업하사 결과적으로 완성의 자리에 까지 이루어 내실 것이 복음 속에 감추어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십니까?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엄청난 선전포고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아픔과 슬픔과 좌절과 낙망들

뿐만 아니라 생각 해야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손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죄에서 꺼낼 뿐만 아니라,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아름답게 하사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기로 작정하시고 시작하셨고

그 일이 이룰 때까지 열심을 가지시고 미련하고 완악한 인생에 찾아오셔서 간섭하신 의지의 손길이 바로 복음이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일, 성령의 사역임을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일도 아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도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하고, 기도도 무시로 성령 안에서 해야 하며, 봉사도 성령으로 봉사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 사업, 가사 일까지라도 성령님을 제외시키고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일이란 없습니다. 만일 성령님을 제외시키고 일한다면 지극히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일뿐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도록 내어드리는 작업을 우리는 날마다 해야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은 헬라어로“두나미스” 즉 다이나마이트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면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하듯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견고한 성벽들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견고한 자아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아집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격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파괴하는 힘보다 더 큰 힘은 바로 건설하는 힘이요, 살리는 힘입니다.

모든 살리는 힘중에서 가장 큰 힘은 바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힘이 가장 큰 힘입니다.

복음은 죽은자를 살리며,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이요 간섭입니다.

 

2.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7절은 복음이 어떻게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되는가? 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느날 마르틴 루터는 법왕청에서 무릎으로 가파른 빌라도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고행을 아무리 행하여도 그의 마음엔 평화가 오지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던 롬3:20절 말씀을 생각하면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데... 내가 뭔가 헛수고를 하는구나!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교회는 100년 동안 지었어도 완공을 보지 못한 성 베드로 성당을 위하여 속죄권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속죄권을 사면 천국에 갈 수있는 것 처럼 선전하였던 것입니다.

“돈을 주고 천국을 갈수있다면 .... 부자 외에는 천국 갈 사람이 없겠구만,

“그런데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성경은 말했지않는가!” 저것은 아닌데... 생각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는데

롬1:17절 말씀이 부딪쳐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랑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며 바로 죄인을 살리는 믿음을 제공하는 원천이라는 말씀에 평안과 위로가 왔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 그때 나는 새로 탄생하였고 열린문을 통하여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류에게는 두가지 숙제를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이고

둘째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수가 있는가 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선언한 이 말씀으로 두가지 숙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범죄한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가 회복되는가의 물음입니다. -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르틴루터의 고뇌처럼 롬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쪽에서 해주시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사람이 어떻게 죽지 않고 영생을 하느냐인데

성경은 갈3:11-12절에 두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사는 길이요 또 다른 하나는 행함으로 사는 길입니다.

두 길은 사람에게 영원히 사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행함의 길,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오직 한길 믿음으로 사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기만하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믿음의 길은 어떤 길인가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구약민수기21장에 나타난 놋뱀 사건으로 생각해봅시다.

백성들이 먹여주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합니다. 애굽에서 살 때에는 마늘과 부추와 기름진 곡식들을 잘 먹었었는데 하면서 의식주에 대한 불평이 많아지자 하나님은 불평의 대가로 불뱀을 장막에 보냅니다. 불뱀에 물리기만 하면 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백성들은 모세를 잡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에게 중보기도를 합니다. 살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주신 처방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 것이다 말씀합니다.

조건은 하나님 쪽에서 내세우신 것이고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결국 죄로 말미암아 멸망으로 끝날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의를 드러내주시고 이에 대해 인간이 응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벧전3:18절에는 이러한 여건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불의한자를 대신한 이유가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누더기를 입고 있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그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으니 어서 그 옷을 벗으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나에게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입고 있던 이 누더기 옷을 입고 네 대신 죽으러 가니 너는 나의 이 의의옷을 입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거라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여라 그러면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가 되시고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요 믿음의 길입니다.

이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나타나서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떻게 사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히11:6절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조 아담의 범죄에는 바로 이것이 결여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고 그 결과로 관계는 단절되고 교제는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의심만큼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길은 바로 완전한 의탁을 말합니다.

줄타기선수 브론디가 나이야가라 폭포를 건널 때 관중들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건넜을 때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브론디는 관중을 향해 외칩니다. 이번에는 한사람을 등에 업고 건너겠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에 있는 신사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능히 해내리라고 믿으십니까? “암 할 수있고 말고”

“그렇다면 선생님이 업히시겠습니까? 신사는 펄쩍뛰었습니다.

그는 믿었으나 의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느 꼬마가 자원해서 등에 업히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묻습니다. 괞찬겠니 그러자 꼬마가 대답합니다. 걱정하지않아요

왜냐하면 저분은 나의 아버지시니까요! 참된 믿음은 의뢰하고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의를 의심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최초에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는 참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 모든 민족들을 학대하고 포로로 잡아가고 강포하며 패괴하며 살육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는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들을 삼키되 잠잠하십니까?

이말을 다시정리해보면 “왜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며 선하고 의롭게 하는 자들이 세상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질문을 세상을 보면서 가끔은 던지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왜 기도했는데 이런일이 일어납니까? 정직하게 산 보상이 무엇입니까?

양보하고 산 가치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주신 답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입니다.

“합2:3-4절에서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거짓되지 않는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라

지체 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었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보상을 요구하는 차원이고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확신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가치는 세상에서 표시가 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표가 하나님을 믿는 보답이 세상에서 보란 듯이 나타나 주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기도하면 어려운 문제들이 착착 해결되고, 못된 놈들 놓고 기도하면 꺼꾸러져서 망해야 되고 건강이 않좋은 사람은 다 안 믿는 사람들이어야되고 믿는 사람들은 풍성한 물질과 건강한 육체를 소유하면서 고통과 근심이 없는 생활을 해야할 것아니겠느냐는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세상에서는 답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다만 의인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신다는것입니다.

세상에 악한자들이 일어나고 나쁜일들이 많아져도 결단코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가진 너에 대하여 가진 나의계획은 절대로 방해받거나 너를 붙들고 있는 나의 손안에서 빼앗기는 일이 없다는 확언이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내가 꺼내놓아야 되는 조건이나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도로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시는 절대적인 간섭에 대해 결단코 변개치 않는다 믿음입니다.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게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이것이 우리가 믿는바 신앙의 핵심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가장 영광되고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가지시는 간섭 즉 사랑과 열심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됐고 역사적으로 시행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아래 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세상의 조건과 세상의 힘이 아닌,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그 힘으로 저와 여러분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뿐 만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바로 세상의 힘과 세상의 수단과 방법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믿고 인정할 때 우리는 세상의 어떤 고난과 고통 앞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잃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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