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 1-9절 18-23
오늘 본문의 가장 분명한 예수님의 의도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고자하시는 내용은 18절부터 23절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유는 두 가지 던지기, 함께 던지기라고 몇 주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가지 던지기라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할 때에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데 한 가지를 말씀하는 듯하지만 그 가운데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고 숨은 뜻을 함께 증거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드렸는데 저희 장모님이 인천의 교회 권사님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권사님들은 금요 심야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다 참여를 하신답니다. 기도가 뜨겁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인천의 한 교회 이야기와 우리교회의 권사님은 무엇을 하는가?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이러한 이야기들이 들려질 때에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 부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 곧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와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았다라고 말한다.
(세상 속에서도 교회에 나와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세가 된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
►돌밭에 뿌려진 것 처음에 기쁨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있을 때에는 곧 넘어지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드려지는 말씀들이 자신의 지식을 충족시키거나 자신의 행복을 주었을 때 그것이 즐거움으로 다가왔으나 그 속에 믿음의 뿌리가 없음으로 금방 말라버린다는 것, 그 신앙이 식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진 말씀은 염려, 재리, 유혹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쁨으로 신앙 생활합시다. 믿음으로 신앙생활 합시다. 말하지만 항상 믿음과 신앙으로 이겨나가기보다 그것에 이미 패배한 상태로 예배가운데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있다라는 것 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틀림없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믿음과 신앙으로 살아가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원하는 열매를 맺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에 이러한 도식이 보여 집니다.
►우리는 두 가지의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있는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는 예수님이 없는 세상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교회 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학의 교집합을 통해 이러한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 안의 도식은
이러한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사람들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
그런데 가장 많은 %를 가진 집단은 어디일까요 다른 곳이 아닙니다.
중간 지대에 속한 분들이 가장 많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은 회색지대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이득이나 편리에 의해 교회에서의 행동과 가치가 변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불편하면 예배를 빠지고 조금 맘 상하면 성도들과 목사를 도마 위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도마 위에 올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를 우리는 남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세상을 저울질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변화 되는 것, 곧 예수님이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 주는 것 그것이 교회교육의 목적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이 쇠뇌교육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데 표현은 다르지만 예수화를 시킬 수 있다라면 그것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많은 행동들이 필요한데 결단과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비유 중에서 첫 번째의 비유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비유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씨 부리는 자는 단지 그저 들판에 씨를 뿌리러 나간 ‘한 농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문자적으로 ‘그 농부’이며, 그는 땅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중요한 귀중한 씨(천국말씀이라고 18절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를 가지고 옵니다.
천국은 땅과 씨가 만날 때 온다는 것을 알려 주고 그것은 씨와 땅과의 결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씨는 씨 뿌리는 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땅’이 자신을 위해 말씀의 씨를 받아 들일 때 삶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은 싹이 트고 뻗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믿음으로 받는 사람들은 꼭 반응하게 되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질문도 하게 되어집니다.
즉 ‘들판을 가로지르는, 단단히 굳어진 길에서 씨앗이 튕겨 나아가는 것처럼, 나에게서 말씀이 튕겨 나아간 것 아니야?
그것이 나에게서 자라나고 있는가?
그래서 나의 동료들의 압력과 비웃음을 견디고, 음식에 관한 규례를 지키는 무리에게 배척당하는 것에 맞설 수 있는가?
나는 단지 평범한 교인에 불과한가?
비록 30배 밖에 되지 않지만 나는 열매 맺고 있는가?
어쩌면 나의 사역의 부분을 하나님이 늘려 주셨고 나는 60배의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나를 책임감이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올려두시고 내 안에서 100배의 성장을 이루게 원하고 계시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이 비유를 들은 원래의 청중과 독자들이 자문했을 만한 것들이다.
씨 뿌리는 자는 동일하며 씨도 동일하다라는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씨는 예수님이 뿌리고 그것을 받는 사람들은 신자고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씨 뿌리는 자와 그 씨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산하는 열매도 전적으로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이 첫 번째 비유에는 당시 예수님의 사역이 일어나고 있던 일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청중의 다양한 반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유는 거울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를 보여준다라는 것입니다.
이후의 비유들 또한 그러합니다. 그 비유를 듣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가?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비유, 누룩비유, 밭에 숨겨진 보화, 진주비유, 그물비유 이런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에 와있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현재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같이 신앙 생활하는데 어떤 사람은 열심히 100배의 열매를 맺으며 어떤 이는 60배의 열매를 맺으며, 어떤 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밭에 덜어져서 결실을 맺는 씨와 같은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해라는 단어를 그냥 지적, 영적 수용력을 뜻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 건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것은 ‘지적으로 영적으로 수용되면 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으나 그것이상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면서 이해하는 사람들은 지적, 영적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확신 할 뿐 아니라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삶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거둘 때 그냥 앉아서 재물을 얻고자하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백성이 만들어낼 풍성한 결과는 이 세상가운데에서 투쟁 속에서 만들어낼 상황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획일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100의 열매를 낼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100의 열매를 맺고자합니다. 여러분도 열매 맺기를 원합니다. 옆사람을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100배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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