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태복음 11장 25절-30절

스네어 2008. 2. 27. 09:53

 

 

 

 

 

 

 

 

 

 

 

 

 

 

 

 

 

 

숨겨진 진리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11장 25절- 30절

 

지난시간 지난주 금요일입니다. 반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현재의 생활 속에서 여러분은 얼마나 반응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반응하지 않는 성도들을 통하여 기독교 가운데 신기한 것들이 생겨 나기 시작을 합니다.

 

현대는 종교 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산꼭대기에 올라가는데, 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잘 닦여진 고속도로 같은 길도 있고, 비포장 도로도 있고, 오솔길도 있고, 사람이 지나보지 않아 숲을 헤치고 가는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기독교가 제일 좋은 길로, 제일 빨리 올라간다고 하지요. 다른 종교도 힘든 길이지만, 언젠가는 정상에서 만난다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에큐메니컬운동(연합운동,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즘(Ecumenism)이라고도 불리우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분열된 기독교회가 하나로 합치고, 나아가서 신 구교(카톨릭과 개신교)가 하나 되자는 운동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나 그 속에는 세계 종교를 통합해 다가올 적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맞이하려고 하는 검은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을 통하여 혼잡한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입에서도 그냥 교회 다니면 되지 꼭 예수만이 천국의 통로라고 해야하는가 라는 이상한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느 곳에나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자 라는 주장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까? 자신들이 열심히 하지 못함을 통해 그것을 변명하기 위한 방향에서 나온 열심히 없는 사람들을 통한 변명으로 소산이라고 봅니다.

기독교는 사생종교가 아닙니다. 오로지 진리인 말씀과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참된 종교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다른길이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고 그 다른길이 없기에 지금도 세계에 선교사님들과 많은 성도들이 생명을 바쳐 그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더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저는 그의 죽음을 들으면서 너무 놀라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요청은 요한을 사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어떤 모습으로도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가마에서도 그는 죽지 않았고 그는 참수를 시키려하는데도 칼이 부러지고 방법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 후 그를 밧모섬으로 유배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듣고 그토록 당혹하고, 고라신과 벳세다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벅찼던 예수님의 주장은 도데체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자가가 모든 계시의 중심임을 조용히 주장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본문 27절의 아들이라는 이 용어는 특별한 것임을 말하고 계시고 예수님 자신이 모든 계시의 중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가치관에, 덕스러운 행동에, 자연에, 인류 역사에 흩어져 있는 그 어떤 계시가 있을지라도 ,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님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숨기기도하시고 드러내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알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천국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드러내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와 온유함으로 오는 자들에게는 드러내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대사라고 주장을 하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권능과 예리함으로 무장되어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오는 긍휼을 나타내 보이면서, 아버지 곁에서 오신분입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대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만이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십니다. 요한도 제자들도 ‘지혜로운 자도’ ‘어린아이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인격은 신비이고 우리의 제한된 지능으로 알 수 없음을 인식해야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냥 신비임을 인정함이 중요합니다.

 

넷째로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참대고 고상한 것을 많은 것을 발견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고 예수님 당시까지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거룩한 성자로 불리우는 마하트마 간디에게 친척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바바키, (간디의 애칭)당신은 평생을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찾았습니까?” 간디의 대답은 “아니오 , 아직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였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들을 통해서만이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참선이나 절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아버지의 본성을 공유하고 계시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다시 이해해 보면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통해서 즉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예수님을 잘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또 다른 병폐를 보면 얄팍한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아는 듯이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별로 싫어합니다. 제자훈련의 과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는 몇 년, 적개는 몇 개월의 과정을 수료하고 자신이 진정한 제자인냥 생각하는 그 모습이 위험합니다. 진정한 제자훈련의 나중모습은 훈련 뒤 나타나는 참된 그리스도를 위한 진정한 희생이 뒤따라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희생과 봉사가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매력적으로 그리고 기독교를 배타적이고 편협한 종교라고 그토록 미움을 받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진리가 무엇인가요?

 

반응하는 사람들이 맛보게 되는 일 들입니다. 저는 숨겨진 진리를 위해 알기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숨겨진 진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이 맛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숨겨진 진리를 나타내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오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이 싫어하고 배척하는 그 복음의 진리를 진정으로 돕기 위해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 부르는 들이 있는데 그 들은 복음에 반응하는 자들이고 특별히 마음이 강팍하고 굳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에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에 힘듬이 있고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이미 반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반응하여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오라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 먼저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돕고 섬기는 주님의 마음을 말씀합니다. 왜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서 배우라라고 하십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하라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복음에 순종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진정 일을 할때에 쉽게 낙담하고 힘들다고 그 일들을 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반응할때에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때의 반응을 하나님탓, 예수님 탓으로 돌리며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야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낳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은 이제 지쳤다 사명을 그만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다짐을 합니다.

다음교회에서는 이렇게 사역해야지 구역예배는 적당히 교사, 성가대, 봉사, 안내는 절대 특히 전도는 안해~~~!!!

다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요? 사명을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십니다.

내가 구역장, 조장, 찬양대, 찬양단, 교사, 봉사, 식당일, 안내, 전도 등의 일들을 예수님이 감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더 깊은 쉽이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니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더 깊은 쉼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발견되어 집니다. 그 쉼은 주님과의 협력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매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멍에를 아시나요 한쌍의 소가 어깨를 가로지르게 하여 어께에 매는 것 그들이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함께 끌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들어 목에 대는 것 이것이 멍에입니다.

은유적으로 유대인의 젊은이들이 ‘바르 치츠바’라는 것을 성인식 때하게 되는데요 율법을 준수하겠다고 그들이 다짐하며 율법을 써써 자신의 이마에 매기도하던것을 성인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바르 미츠바를 중요시하고 여자들은 바트 미츠바라고 성대하게 그 잔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스러운 헌신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이 충성을 자신과 같이 하자라고 말씀합니다. 자신과 함께 멍에를 매고 자신의 힘의 균형을 더하시고 우리에게는 힘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숨겨진 예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참으로 큰것입니다. 그것에 반응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배고픔, 핍박, 모욕, 박해, 순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라면 주와 함께라면 참된 위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 숨겨진 진리를 통해 남은 한주도 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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