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14-17
금식에 관한 질문
예전에 새벽예배에 이 시대를 이끌고 가는 정신을 두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가지는 프레그머티즘,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현대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가치의 인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를 다시 들어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프레그머티즘의 예를 들면 영화~~~
모든 것이 옳고 모든 사상이 맞는 것처럼 이야기 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관을 생각을 다 옳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우리의 잣대로 주셨고 지도자로 목사님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청종하길 원합니다.
교회는 변해서 누구의 이야기 듣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되어도 목사가 이야기를 해도 담임목사님 말도 부목사말은 우숩죠.....
무거운 이야기를 먼저 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 같아서
가벼운 이야기로 가겠습니다.
다이어트 이야기입니다.
요즘 세상은 다이어트 열풍이 불었습니다.
예전엔 저처럼 통통하면 잘 살아보인다 라고 말했지만 요즘은 뚱뚱한 사람은 영 아니라고 말한다.
다이어트 열풍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살을 빼기위해 지방흡입을 하고 배에 보톡스 주사를 놓기도 하고 요즘은 식이요법으로 숙변을 제거하기도 한다라고 들었습니다.
요즘의 새로운 문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가끔 중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사람들이 저를 보고 놀라기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날씬한 것이 좋고 웰빙이다 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시대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당연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이끌고 있는 주된 관심 주된 문화가 그것은 금식이라는 유대인 세계의 아주 중요한 신앙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금식은 신앙의 척도이었습니다.
신앙의 척도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금식하는가를 따라서 그 사람의 믿음이 신앙이 신실한가를 판단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의 척도를 여러 가지로 말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시간, 성경의 통독, 구제, 선교를 통해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모습이 있는 것처럼 그 당시에 금식을 얼마나 하는 가는 큰 신앙의 척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우리가 적어도 주일 3부 예배는 드려야겠다는 생각처럼 정해진 금식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앞에서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처럼 당시 유대 종교의 관습을 다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느 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신 것은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슬픔의 표현이다.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에게만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로 오신 이때는 금식을 해야 할 슬픈 날이 아니라 천국 백성들을 모으는 기쁨의 날이다 신랑이 있는 동안은 금식할 수 없다 금식해서도 안 된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두 번째는 왕이 오신이상 옛 관습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규범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막 시작되고 있는데 예규범을 적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의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새 헝겁 조각을 낡은 옷에 대지 않는 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행위와 의식들을 지키면서도 왜 그것을 행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금식의 참된 의미와 참된 사실은 무엇인가요 금식을 통한 용서와 하나님과의 교제, 기쁨이라는 것인데 그들은 금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신앙의 모습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오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중단되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옛 규정을 통하여 천국이 가까워지는 기쁨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신랑의 손님들이 어찌 슬퍼할 수 있겠는가?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일주일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모처럼 찾아온 기쁨의 시간이요 유희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잔치를 즐겼고 그 모든 경비는 신랑가족이 지불했습니다.
모든 손님은 모두 공짜로 즐길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혼인집 손님들 “호이 휘오이 투 님포노스” 라는 것은 단순한 하객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들로 혼인잔치가 거행되는데 돌보는 자들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을 가르켜 신랑의 친구다라고 말했고 본 장에서는 제자들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신랑친구들의 임무는 잔치가 끝날 때까지 잔치를 주관하고 잔치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일이 되어도 금식할 필요가 없었고 그 잔치에만 충실할 필요가 있음을 그들의 전통을 들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공식적인 금식일 들이 있었습니다.
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 아빕월 9일 중의 하루였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일주일에 두 번의 금식을 하던 것이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를 잘 묘사하고 계시고 그리고 거기에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하나님께만 귀속되었던 신랑의 역할을 맞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62:5 호 2:16 예수님은 기쁨을 가져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슬픔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금식하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함께 슬퍼하고 즐거워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배조각정도로 여겨서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낡은 관습과 주장위에 붙여서 그들의 낡은 습관과 정통에 붙이려는 행위 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새 포도주를 그들의 낡은 부대 속에 넣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는 발효되면서 많은 거품을 내기에 그 포도주를 담을 수없는 낡은 부대 그것은 옳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가죽 부대, 새로운 옷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틀을 만들면 그것에서 쉽게 탈피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굳어져서 그것을 전부 인양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수원영락교회는 이제 바약으로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운데 접어들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전통입니다.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있을 때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일들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굳어진 관습은 어떤 것인가요?
저의 굳어진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로교 신학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나를 그 틀 안에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 머리와 지식으로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가운데는 성령의 임재를 깊이 사모했고요 또 능력의 행함을 사모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은 이런 이야기 까지 합니다.
아직도 방언해 방언 그것 하지마 그것 아무 소용없어 필요 없어 하지마 기독교 무당들이나 그런 것 하는거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사를 부어주시고 자제하려고 하지만 언어의 은사를 우리에게 주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주의라고 다른 신학을 비판하고 있을 때에 우리가 스스로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의 어려서부터의 모습을 보니 저도 은사를 사모했고 능력 행함을 저의 눈앞에서 보면서 믿지 않으려하는 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이천석 목사님의 집회에서 7살이었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보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 않았고 하지만 커가면서 이천석 목사님의 안수 해주심을 기억하고 자랑스러운 자부가 있었던 이중적인 모습도 있었습니다. 은근히 싫어했지만 속으로 그것이 자부가 되는 것들 말입니다.
올해 저는 인생의 신앙의 터닝 포인트를 갖게 되었습니다. 알파수련회, 찬양세미나, 교회부흥회, 성령 치유 수양회를 통하여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감동시키시고 일어나는 일들과 일어나지 않은 장래의 일까지도 믿어지게 만드시는 귀한일 들이 있었습니다.
제천으로 가신 문 목사님과 찬양세미나를 가게 되어서 그곳에서 치유하는데 저는 그곳에서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손에 금가루를 뿌려주셨고 그것이 긴가 민가 했습니다.
손에 금가루가 뿌려진 것을 저는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로 나타나는 현상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 목사님은 쓰러져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저는 그냥 생각 속에 왜 저래 정도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저에게 이러한 표증이 아니라 스스로 믿게 하시는 귀한 일들을 허락하시고 제가 알고 있던 신학과 성경에 대한 지식이 너무도 작고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헝겊을 가지고 제 옷에 부쳐 보려 했지만 헝겊은 제 사상과 생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생각으로 새 옷을 지어 입으니 다른 사람이 되어 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새 포도주의 생각을 저의 옛사람에 부대에 넣으려 했더니 그 발효됨의 강력함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격으로 다가 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생각과 자존심으로 포장되어 있는 저와 여러분의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그 마음을 만져주시길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그를 변화 시키시고 새 옷과 새 부대되어 진실한 성도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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