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롬 8

스네어 2015. 1. 22. 09:57

참 해방의 본성

로마서 8:1-9

 

캐나다에 빅토리아 대학의 교수로 있는 K. R. Bradley 교수님께서 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년간 로마의 문화를 깊이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의 문화라는 것은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 그 관계에 있다' 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로마를 방문하면 2000년 전에 있었던 굉장한 문화 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해서 그 많은, 엄청난 그 장엄한 유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합니다만은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노예가 만든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지었고요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많은 노예가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그 노예들의 핏자국을 보는 겁니다. '인류가 무엇을 건설했다'고 볼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하는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올시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fides obsequium,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철학자들의 글 속에도 나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나귀는 내 말을 못 알아 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우리는 보기가 민망해서 혹은 그림이라던가 영화로 나올 때 보면 간단하게 옷을 그 치부를 가리운 옷을 입혀서 나옵니다만은 원래 노예는 옷이 없었어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그렇게 해서 일을 시키고 그리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고요.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요 일체 말을 못하게 했어요.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 버려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던거죠,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같은 로마의 운명을 이루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던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은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요.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이것이 노예입니다. 생각하면 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노예생활 속에도 "노예 해방"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어요. 이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루어진 수단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주 당근과 같은 거예요. 고분고분하게, 온유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면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요. 그 어느 순간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에게 자유를 줍니다. 더구나 세상 떠나기 전에 자기를 위해서 한평생을 수고한 가장 충성된 노예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면서 자유하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이러한 노예 해방의 특권을 얻기 위하여 생각이 있는 노예들은 더욱더 충성을 다했다는 거죠. 한평생 충성을 다했어요. 자유의 길을 바라보고. 언젠가 자유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충성을 했다. '그 충성이 오늘의 로마의 문명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것 같아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길들여진 노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문화화 된 노예. 이제 해방이 되었지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은 그는 절대로 자립할 수가 없었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었다가도 자립할 수 없어요.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어서 다시 옛 주인에게 가서 "나를 노예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다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또는 밖에 나와서 성공한 노예가 있었어요.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힘써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수고해서 부자도 되고, 지위도 얻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도 노예 출신이 있고요 심지어는 노예 출신 가운데 왕도 있어요. ,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서 노예화된 노예의식 때문에 욕망과 무질서와 폭력과 나태, 방탕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타락의 노예가 되요. 네로 황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국은 노예에서 황제까지 올라갔지만은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노예 근성이 있더라고요.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자기도 말할 수 없이 괴롭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죠.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인간의 노예상태를 간단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다' 하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혹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자유하고 싶지만은 가난하다 보니 이 소중한 자유를 반납해 버리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잖아요. 무식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한 자에게 매여 살 수 밖에 없잖아요.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34절에서 말씀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 이라고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그 마음을 다스릴 때, 그는 저주 의식에 매입니다. 가책 의식에 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예상태에 살아갑니다. 어느 사이에 거듭거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말이에요. 그런 상황 속에서 끌려가게 된다는 말씀이죠.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네가지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투기적 자유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미래를 향해서 자기 몸을 던져버릴 수 있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그런 자유, 통쾌한 자유지요. 그러나 여러분,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넓은 선택의 영역을 지니고 살아갑니까? 흔히 말하는 영어의 "I have no choice"라는 말이 있어요. 선택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 순간 노예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선택의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재적으로. 간혹 그런 분들이 있더만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요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하고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만부득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선택이 없습니다. 이거 뭐 팔자거니 하고 삽니다.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소, 그게 바로 자유인입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현재적으로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선택한 데 대해서 나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사는 데까지 살자.'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계속적으로 넓은 중에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번째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을 지는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선택을 어정쩡하게 해놓고 책임을 안지겠답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내 책임을 내가 넉넉하게, 그것도 기쁨으로 져야합니다. 그 사람이 자유인이요. 뿐만 아니라 연대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내가 자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줘야 됩니다. 그런 자유여야 참 자유죠. "나는 자유다" 하고 휘젓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에게 억압을 주고 불행함을 주고 불편함을 준다면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명예욕과 지위욕과 물욕을 극복할 수 있으면 달인이 된다" 하는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별것도 아닌 명예욕의 노예가 되가지고 어느 사이에 저렇게 비참해지는 것을 보고요. 지위욕, 그거 대단합니다. 좌우간 국회의원에 한번 출마했던 사람은 죽기 전에는 그 욕심을 못 버린대요. 아편보다 더 하다고 그러대요. 그 지위에 대한 정치적인 욕망, 여기에 노예가 되어가지고 처절해지고 제 명에 못 가는 사람 많죠. 어찌 생각하면 그것도 큰 병입니다, 이게. 물욕, 욕심이 그렇게 많아요.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 네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와 술과 마약과 도박. 그 중에 제일은 도박이니라. 여러분 무슨 말인 줄 알겠습니까? 잘 모르시죠? 도박이라는 거, 생각하면 그 얼마든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안하면 그만 아니요. 그런데 아니치 못하는 거예요. 이거 한번 빠진 사람, 죽기 전에 못 고칩니다. 정말 힘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못 고치는 거예요. 담배 그것도 그렇잖아요. 담배 하나 끊는 것, 아니 그까짓 것 안피우면 그만이지 뭐. 근데 그걸 못 끊는 거예요. 그리고 비행장에 가보면 한쪽 구석에 앉아가지고 요렇게 하고 빨고 있는 거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고. 왜 이 모양이요? 사람들이 말이요…… 이게 노예가 된 거예요. 어찌 생각하면 우리 자유인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요. 안하면 그만 아니오 그까짓 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남의 얘기처럼 들립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도 뭔가, 지금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을 가고 있어요.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야할 일은 또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악이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깊이 빠져 들어가서요 어느 사이에 이렇게 비참해졌는데 내 스스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의식이 노예화 되고 성품까지 노예로 바꾸어졌을 때, 다시 돌이키기가 어려워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958년인가 봅니다. 그때 서울 안에 십자매 바람이 불었어요. 모조리 십자매를 키우면 돈 번다고 해서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여전도사님이 혼자 사는데 방안에다가 십자매를 엄청나게 많이 키웠어요. 그거 치우라고 그래도 "아이구 뭐 심심한데 뭐." 그러고 키우더니 이게 값이 떨어졌어요. 아주 망조가 들었는데 할 수 없이 십자매를 놓아주었지요. 새장 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십자매를 이제 창문을 열고 나가라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이 자유, 십자매가 새장 안에 있을 때는 쿠렁쿠렁 하더니 이걸 열어놓고 나가라고 그러니까요 나가 가지고 뱅뱅 돌다가 다 집안으로 다시 돌아 왔더라구요. 그리고 살지 못하더라고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어느 사이에 우리가 노예화 되어가지고 살았어요. 자유하지도 못할뿐더러 자유를 지킬 수가 없어요.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나라들을 방문해 봅니다. 공산주의 40, 50년동안 했지요. 이제 자유를 얻었어요. 해방이 됐는데 왠걸요. 어느 사이에 인간성이 완전히 타락이 되어 버렸어요. 변질돼 버렸어요. 하나같이 게으르고 불신실하고 무책임하고. 공산주의의 이론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이유가 부자 때문이라는 거죠. 그게 바로 혁명이라는 거요. 혁명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그만 체질이 돼 가지고 자기 책임을 질 줄을 몰라요. 무책임해요. 그리고 소리만 지르면 뭐가 되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간간이 보면은 나라를 향해서 뭐 달라, 뭐 달라. 그거 누가 주는 겁니까? 나라가 줄려면 세금 받아야지요. 주는 자 없이 어떻게 받는 겁니까? 기회의 평등은 잃어버리고 성과의 평등만 주장하는 거예요. 달라고 소리만 지르는데 뭘 가지고 주자는 얘기요? 일도 안하고 월급은 달라구요? 어디 이런 세상이 있습니까? 그 강도지! 이게 그만 체질화 되어버렸어요. 어느 사이에 성품화 되어버렸어요. 그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의 역할이 있고야 자유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36절에서 인자가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할 때만이 자유하리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충족케 하시고 비로소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과 말씀으로만이 자유를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거예요. 요한복음 832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게 아니요. 그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죠. 내가 스스로 자유 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 길 외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입니다. 이 속에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의 자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이기는 확실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해방 56년 동안 자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자유라고,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보겠다고 '잘 살아보세'를 외쳐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유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기 전에는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었고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권력의 보좌에 앉아서도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부자라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하다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한 사람만이 자유인입니다.

여러분, 옛날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옛날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아팠던 사정, 그 과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만은 그것에 매여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지불된 엄청난 대가를 다시 확인하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의 길과 사랑의 길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와 사랑과 생명과 성령의 역사 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고 여러분, 세상이 어떻게 흔들려도 여러분의 심령에는 무한한 자유함이 있어요. 거기에 창조적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

 

성령이 증거하시는 바 로마서 8:12-17

 

어떤 날 호랑이 새끼가 어미 호랑이와 놀고 싶어서 등에 업히기도 하고 목을 끌어안기도 하고 여러 모 양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답니다. 어미 호랑이가 이것을 귀찮게 여겨 서 물리치려고 해도 끝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크게 으르렁대면서 목덜미를 물려고 하니까 이때 에 새끼호랑이가 겁이 나서 물러서면서 하는 말이

"나 호랑이 새끼 맞아?"

그랬답니다. 어미가 말하기를

"그럼 내가 낳았지. 그러니까 너 는 호랑이다."

또 물어 보았습니다.

"나 어미 호랑이의 새끼 맞아?"

자꾸 물어 보니까 귀찮아서 끝에 가서 하는 말이

", 이 개새끼야"

그랬답니다. 졸지에 그만 호랑이가 개가 되고 말고요 어미 호랑이는 또 역시 개가 되고 말았어요. 작은 새 끼는 강아지가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여러분 정체감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누굽니까? 여러분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많 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 됨의 정체, 사람됨의 정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정체를 잃어버릴 때 문제가 되는 것이올시다. George H. Bush 라고 하는 미국 전 대통령을 아실 것입니다. 그가 대통령 현직으로 있을 때 에 한적한 시골의 초등학교를 방문 하게 되는데, 거기서 큰 곤혹을 치렀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꼬마,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앤소니 핸드슨이라고 하는 이 꼬마가 부시 대통령에게 말하기를

"할아버지, 할아버지 대통령 맞습니까? 증명해 보세요."

아 이거 부시가 난처하게 됐습니다. 대통령 증명서는 없거든요. 그래서 기껏 하는 것이 Driver's License, 미국 사람들은 그 게 제일 큰 증명서거든요. 운전면허증을 떡 내 놓으니까

"여기에 대 통령이라고 써 있지 않잖아요."

크래디트 카드를 보여도

"여기에도 대통령이라고 써 있는 게 없잖아요."

대통령 맞느냐고, 어린아이의 말에 뭐라고 대답 할 길이 없네요. 쩔쩔 매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니까, 운동장에 나섰더니 거기에 까만 썬그라스를 낀 아주 우람하게 생긴 대통령 호위하는 분들이 쫙 모여들고, 커다란 리무진 자동차가 거기에 있어서 거기에 올라타는 걸보고 그때에 이 꼬마가 하는 말이

"와 진짜다."

그랬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 가 뭡니까? 도대체 뭘 보고 인정하라는 겁니까? 머리를 보나 팔을 보 나 행동을 보나 생각하는 걸 보나 하나도 하나님 닮은 데가 없어요. 하는 짓들이 믿음이란 조금도 없어 요. 이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고요? 만일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당신들이 살아 있기 어려 워요. 이렇게 행동하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염치도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뭐냐 하 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지는 못합니다. 증거가 있어 야 됩니다. 누군가가 증거해줘야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실적을, 성과를, 열매를 보여야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 니라고, 89절에 명백하게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 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이 두 가지,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 젊은 목사, 이름을 대지 않겠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같이 지내면서 가만히 보니깐 좀 시원치 않아서

"당신 예수 믿어요?"

하고 물었어요.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신학대학 총장인데."

저 쪽에 서 다시 물어 봅니다.

"당신 아버지, 신학대학 총장과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요."

또 심각한 말을 했습니다.

"나 목사"

라고. 그러니까

"당신 목사라는 직업하고 당신 예수 믿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요?"

대단히 심각한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직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에요. 철학자 루소는 인간을 이같이 개탄하며 탄식조로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보통 인간들이 십대는 과자에 움직이고, 이십대는 연인에 움직이고, 삼십대는 쾌락에 움직이고, 사십대는 야심에 움직이고, 오십대는 탐욕에 움직인다. 이 오십대가 넘어서기 시작하면 이 명예에 욕심을 가지는 거예요. 때때로 보면은 면 위원으로 나오겠다고 재산 다 털어넣는 사 람이 있어요. 도위원 한번 하겠다 가 재산 망쳐버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 명예, 하찮은 명예, 여기에 다 목숨을 걸어요. 하찮은 일에. 정말 시원치 않은 일에 목숨을 걸고 인생 다 망쳐버리는 불쌍한 사람들 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왜 이 러는 것입니까? 왜 인간은 고작 요 거 밖에 않되느냐 그 말이요. 이것 이 루소가 개탄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성령 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요. 남이야 뭐라고 말하든 그 얼굴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이요.

로마서 723절 이하에 보면 사도바울은 많이 고민합니다.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 만 짓는다. 죄가 나를 사로잡아 오 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 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자 신을 객관시하고 자기 정체를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오직 성령이 나를 자유케 하시는 거다.' 그리스도의 영이 모든 죄와 율법으로부터 나를 자유케 합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요,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신비롭게 영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그 로 인해서 성령 안에서 자기 정체감 을 확인하게 될 때 이것이 그리스도 인이란 말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다 가 세상을 떠난 어느 장로님, 임종 직전에 제가 만났을 때, 그는 무릎 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뭘 하고 있는 겁니까?",

"회 개하고 있습니다. 일생 동안 지은 죄를 다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왜 요?",

"회개의 기도를 못하겠습니다. 회개하려고 '아무 때, 아무 때 그 내 잘못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라고 회개하자마자 옆에서 음 성이 들려옵니다. '그 때도 내가 너를 사랑했다.' 그래서 회개하려고 하면 또 '사랑…….' 나는 감사의 기도 외에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 제가 그랬어요.

"장로 님 참 예수 잘 믿습니다."

여러분 회개하고 뉘우치고 가슴을 치고 이 것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죽어가도 그런 회개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 됨 을 확인하고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 한데도 그 위에 더 크고 놀라운 하 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셨음을 깨달으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끌려가고 있을 때, 그 인도함을 받을 때 바로 이것이 그리스 도 인이에요. 이건 율법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내 몸은 밝은 이 성의 지배를 받고 내 이성은 영의 지배를 받고 내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에 인도함을 받을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유명한

"천로 역 정"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극찬해서 이걸 성경 다음으로 가는 책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 모두가 다 이 책을 한 번쯤 은 다 읽은 줄 압니다. 그런데 그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하늘나라를 향해 서 멀리 여행을 떠나는데, 그 어느 곳에 가서 한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 방에서 누가 청소를 하는데 그저 비로다가 먼지를 열심히열심히 쓰니 까 그 먼지가 일어 나가지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얗게……. 쓸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 방이 어지러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을 보았어 요. 이제 인도자에게 묻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저것이 율법이니라. 바르게 해보려고 애쓰고 또 애쓰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가 많아지고 점점 더 어지러워지느니라."

바로 옆방을 들어가 보니 까 그 옆방에는 먼지가 똑같이 많은 데 쫙 다 물을 뿌리고 그리고 청소를 하니까 깨끗하게 청소가 되요.

"이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성 령이니라. 이건 은혜의 역사니라."

여러분 내 노력으로 바로 해 보려 고, 뭐 큰 일 해보려고 몸부림치고 애써보세요. 볼수록볼수록 점점 더 먼지만 나요. 점점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여러분이 체험 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성 령, 역사 안에서만 깨끗하게 모든 율법과 죄와 허무함과 불의함으로부 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또 한 가지는 오늘 성경은 분명 히 말합니다. 양자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본 아들이 아니에요. 잘못된 자녀지만은 이제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두려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했고, 양자의 영을 받았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양자의 영이 있다는 거지요. 양자됨이 이루어졌다는 거죠. 그건 자유의 영이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양자라고 하면 은 전에 내가 속했던 그 가정의 모 든 문제와 내가 무관합니다. 신분과도 무관합니다. 옛날에 내가 종 의 노예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이제 오늘 내가 귀족에게 양자 되면 귀족 입니다. 그 날부터 귀족입니다. 이 것이 양자라는 것이에요. 또한 옛 집에 모든 책임과 또 그 부채로부터 무관합니다. 옛날에는 부채는 꼭 갚아야 되요. 요새 보니까 뭐 감옥 에 가서 몇 달 살다 나오면 다 끝난 다고 합디다만은 옛날엔 그렇질 못 했어요. 한 번 빚을 졌으면 갚아야 되요. 죽을 때까지 갚아야 되요. 못 갚으면 자식이 갚아야 되요. 자 식이 노예로 팔려가요, 돈이 없으면. 그리고 또 몸으로 팔려가서 마누라 도 팔려 가는 거예요. 이렇게 빚이 무서웠어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내 본 집이 지금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서 나는 꼭 노예로 팔려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예요. 그러나 그 누 군가가 와서 이 사람을 다른 집으로 양자로 데려 가면은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이게 기가 막힌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 에 '우리는 다 같이 빚진 자' 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예요. 우 리는 그래서 모든 옛 빚으로부터, 죄의 빚으로부터 자유했다 하는 말씀이고요.

또 하나는 이제 양자 된 이 집의 모든 신분을 내가 그대로 일시에 물려받는 겁니다. 유산도 물려받고 신분도 물려받아서 역사에 보면은 클리우디우스라고 하는 황제, 로마 황제의 아들 네로가 있습니다. 그 네로는 원래 노예의 자식입니다. 노예의 자식인데 클라우디우스 황제 의 양자가 되어서 대 로마 제국의 왕이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양자가 되면 바로 그 순간 이 집의 모든 권리를 내가 물려받고 뿐만 아니라 그 신분까지 그 명예까지 다 물려받는 것이요. 이 양자올시다. 참 문제가 좀 있습니다. 외국에는 양자 법이 많아요. 중국에도 그렇고 서양엔 더더욱 그런데 우리는 참 이 문제의 문제가 많아요. 그래서 이 아이들을 외국 까지 팔아먹고 말야 이렇게 돼서 부끄러움을 사고 있지 않습니까? 우 리의 자녀들을 우리가 양자 해야 되겠는데 이게 잘 안돼요. 보세요. 이 이게 핏줄기의 고정관념 때문에 문제요. 그래서 양자를 해서 외국 가서 그 핏덩이를 데려다가 잘 키워 가지고 노니까 또 친부모를 찾겠다 고 한국까지 옵니다. 이게 망조라 는 거예요. 얼마나 슬픈 얘기입니까? 양부모가 좋아서 알선해 줍디 다만은 왜 이러해야 되느냐 하는거 에요. 낳자마자 단 한 번도 젖 한 번 먹여보지 않은 어머니를 왜 어머 니라 불러야 됩니까? 이게 유교적 고정관념이에요. 양자 되었으면 이 제는 그 집, 엄연히 그 집 아들이요 그 집 자녀입니다. 그 도리를 다 해야지 뭘 이제 그걸 뭐 2030년 전 핏줄기를 찾겠다고 몸부림치고 만났다고 울고……. 이거는 세계 사람들이 보면서 참 웃긴다고 그럽니다 이게. 부끄러운 일이올시다. 양자 됐으면 잊어버려. 그리고 오 늘 내 신분만이 이것이 내게 주어진 신분이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권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자 양자할 때, 양자 해놓고 키워가다가 쓸만하면 호적에 올리는 겁니까? 그게 아니에요. 그저 핏덩이든 몇 살이든 일단 먼저 딱 호적에 올려놓고 양자를 만든 다음에 그 다음에 양자로 키워가는 거죠. 이것이 양 자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자녀나, 우리의 수준이나 우리의 어떤 도덕적 수준 묻지 않아요. 먼저 양자 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도록 키우시는 거예요. 양육하시는 것이 란 말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할 때마다 늘 마음에 생각나는 얘기가 하나 있어요.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 다. 장로님에게 아들이 없어서 늦게, 그냥 괜찮다괜찮다 하다가 나이 많아져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이 것도 또 우리 고유한 문화지요. 그래가지고 하나 양자를 했어요. 아 주 어린 걸 했으면 차라리 좋을 걸 한 네 살인가 그렇게 되는 아이를 하나 양자를 했어요. 걔 생일날이 됐어요. 제가 갔었는데 걔 생일날 음식을 다 차려놓고 감사기도를 했어요. 감사기도 하고 나니까 여기 에 놨던 맛있는 과자 몇 개가 없어 졌어요. 기도하는 동안에 애가 갔 다 감춘 거예요. 장로님이 이걸 놓고 눈물을 흘리는 걸 보았어요. 이 거 내 아들인데 내가 네게 다 주었 는데, 오늘도 죽으면 이 재산이, 큰 빌딩이 네 건데 왜 너는 그렇게 과자를 갖다가 감추느냐 이거예요. 이건 고아원에 있을 때 버릇이거든 요. 이 집의 양자가 됐지만은 아직 도 그 버릇이 좀 남아 있어서 이걸 고치기가 어려워요. 많은 시간이 걸리더만요.

오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기는 했지만은, 그저 어떤 사람은 무당 끼가 좀 있어서 어떤 사람은 점보는 끼가 좀 있고 어떤 사람은 그저 그 못된 끼들이 아직도 남아있었어요. 가끔 보면은 한심한 짓을 좀 해요. 그러나 양자됨은 분명해 요. 이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어 요. 그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 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 이게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예 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심지어는 하나님이란 말씀도 없어요. 주기도문 가운데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고 끝났어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요. 누가 날더러 아버지라고 부를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 이 교회에 못 나옵디다만은 가 끔 몸이 아파서 못 나온다는데, 대 전에 있어요 그 청년이. 그런데 가 금 교회에 나와 가지고는 내가 예배 마치고 나가기만 하면 붙들고

"아버님, 아버님"

자꾸 그래서 아주 힘들어요. 그래

"내가 어떻게 니 아버지냐?"

그러니까

"아버지고 말고 요."

요새도 가끔 내가 운동을 하다 보면은 전화가 왔다고 그래요. 그래 누군가 받으면은

"아버님 안녕하세요."

그래요. 글쎄올시다. 진짜 내 아들이 날더러 아버지라고 부르면 나를 기쁜 게 하는 것이지만 자 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청년이 날 더러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누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것입니까? 마찬가지 로 감히 하나님을 누가 아버지라고 부를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 불러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 바로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에요. 성령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빠라고 하는 말 은 이건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나 한국어나 만국 통일어요. 아주 어렸을 때는 아빠 아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빠 아버지' 하고 번역을 한 겁니다. 너무너무 귀한 말 씀이에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바로 거기에 내 정체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후 사라고 했습니다. 후사, 이거 또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 가 되었습니다. 이 물에는 수압이 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물 속에 깊이 들어가면 파열돼서 죽습니다. 사람이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물 속 깊이 탐색하기 위해서 아주 강철로 굉장히 튼튼한 강철로 배를 만들었어요.

"프레시호"

라고 하는 배를 만들어 가지고 바다 깊이 들어갔는데 이건 강철이니까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파열이 됐어요.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바다 깊은 속에 물고기는 삽니다. 그 깊은, 수압이 높은 그 속에도 물고기는 살아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이거예요.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그 물의 수압과 물고기의 자기 몸 안에 있는 압력이 같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후견인이 됨으로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정해 주실 때, 비로소 우리 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레 미제라블' 이라고 하는 소설 여러분이 잘 알 겁니다. 레 미제라블에 그 보면은 이 빅토르 위고의 책 가운데 고아소녀 코제트라고 하 는 소녀가 나옵니다. 불쌍한 고아입니다. 지금은 양부모가 돌아보아 주기는 하지만은 여러 가지로 어렵 습니다. 밖에 나가서도 업신을 받고 가정 안에서도 그렇고 집안에서 나 밖에서나 정말로 겨우겨우 어렵 게 살아가는 모든 고통을 겪고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장발장이라고 하는 엄청난 부자가 저의 후견인이 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할 때 애는 그 때부터 신바람이 납니다. 거침없이 활발하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후견인이요, 그리스도가 내 후견인이요, 성령이 이것을 증거 해 주실 때 신바람 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나의 나 됨을 증거 하십니다. 그런고로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오직 그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랑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을 당해도 문제 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되는 일입니다. 병들었습니까? 그 건 하나님의 사랑이요, 실패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이 있음을 성령이 증거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눈앞에 십자가 가 있을 때, 요한복음 18장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 하는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로 그렇게 믿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도 그 크신 성령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 의 자녀임을 확증 받을 수 있을 때 모든 사건에서 모든 환경에서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내영의 축복

로마서 8:5-11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것 을 모두가 다 원하는 것입니다. 내 가 싫어하는 것을 남도 싫어하는 것 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은 무엇입니 까? 지금 세계는 두사람의 빌이 세 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빌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사 람은 빌 클린턴, 한 사람은 빌게이츠입니다. 한 분은 권력을 가지고 세계를 통치하고 한 분은 돈으로 세 계를 통치한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두가지는 언제나 같이 움직이게 되어져 있습니다. 언제나 손을 잡게 되어있고 하나가 발전하면 하나가 따라오고 하나가 자리를 하면 다른 하나가 언제나 자리를 함께 한다고 합니다. 권력을 잡으면 항상 돈이 따라오게 되고 또 돈을 가지게 되면 권력은 항상 그 손을 잡아 주기 마련인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 나라 재벌 들이 외국에 가면 그 나 라 왕이 오고 수상이 오는 것을 TV로 보면서 '우리 나라 재벌들이 세계의 지도자들을 움직이는구나'하 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의 대통령 이 움직이고, 소련의 수상이 찾아오고 북한은 아무도 찾아가기 어려운 데 우리 나라 재벌이 가니까 김정일 이 숙소까지 찾아옵니다. 놀라운 일 이잖아요? 그러니까 뭐니 뭐니 해도 money의 힘이 그렇게 세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이 두 가지는 항 상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것예요. 그래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런 것을 좇아가게 되고 사랑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재벌은 아니라도 돈에 대한 소망과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줄기를 따라가 보 면 모두가 그런 자리에 이르르게 되 는 것입니다. 사람은 꿈과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꿈을 갖느냐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꿈에 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 적인 꿈 영적인 소원이 있는가 하면 육적인 소원 육적인 꿈을 가진 사람 이 있습니다. 사람의 앞날은 개인이 나 국가나 어떤 꿈을 갖느냐가 중요 한 것입니다. 위대한 꿈을 가진 분 들이 세계를 향하여 큰일을 하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은 꿈을 가진 민족 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꿈의 역 사입니다. 멀리 메시야 시대를 바라 보고 꿈을 바라보며 국가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보면서 온 세계 민족 가운데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을 것을 언제나 바라보고 살 아온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민 족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도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에 대통령이 된 후 전 국민을 향하여

"우리는 이 세대 안에 달나라를 정복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꿈을 땅에서 달 로 끌어올린 지도자가 바로 케네디 대통령인 것입니다. 그는 이 땅을 먼저 떠나갔지만 미국은 정말로 그 의 꿈대로 1969년에 아폴로11호가 달나라에 가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의 꿈은 결단코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믿음 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멀리 바라보고 믿는 것은 언젠가는 내앞에 있게 될 것이고 보지 않고 믿는 것 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놀라 운 꿈을 갖고 살아갈 때만이 사람답게 되고 또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발 전 할 때에는 꿈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그 꿈에 의하여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머물러 설 것입니다. 잘못된 꿈 을 꾸면 퇴보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꿈의 사람이 아닙니까?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지내고 남 의 머슴으로 지내지만 그는 늘 꿈을 꾸었습니다. 꿈대로 한사람은 축복 을 받고 한사람은 전 애굽을 통치하 는 총리의 자리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 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274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 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 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 실 것이라"하였습니다. 다윗은 영적 인 꿈을 꾸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 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중 에 권력도 가지게 되고 부자가 되는 꿈을 꾸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꿈을 가지고 자라감으로써 물질의 축복도 받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하고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듯이 우리 모든 성 도들은 날마다 꿈을 가지고 하나님 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점이 어 디 있습니까? 꿈이 없다는 것입니 다. 꿈이 있어도 잘못된 꿈을 가지 고 있습니다. 육의 소욕, 즉 정욕적이고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꿈을 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꿈이 없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 까 초등학생 4명이 길거리에서 600 만원을 주웠어요. 이것을 어디에다 썼느냐 하면 오락실에 가고 먹고 비디오 보고 하는데 4명이 이 어마 어 마한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어릴때 깨끗한 마음으로 파출소에 신고하면 TV에라도 나오겠지 하는 이런 꿈이라도 꾸어야 할 텐데 그것까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이 때는 큰 꿈을 꾸어야 어른이 되어 그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꿈 을 지워버리고 살아가는 거예요. 어 떤 가정은 부모와 14살된 아이 등 온 식구가 도적질을 하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가 30대 후반, 40대 초 반이에요. 건강한 사람이, 한 가정이 아이를 데리고 도적질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럴지라도 어머니가 못하도록 말려야 하고 꿈이 있는 아이라 면 부모를 향해 한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꿈이 없습니다. 꿈 이 잘못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지 잘 살겠다는 꿈은 잘못된 꿈입니 다. 어떤 부부는 대구에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꼬여서 부인을 그 교 장 선생님과 동침하게 하고 그것을 미끼로 일년내내 1억 몇 천만 원을 뜯어내었어요. 남편 되는 사람이 인간입니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다고 그렇게 하는 여자는 그게 여자입니까? 이 시대 는 꿈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 같이 옷도 잘못입고 무슨 메이커 제품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냥 부끄러움을 가릴 정도밖에 옷이 없었습니다. 화장품이 있었습니까? 잘 먹기를 했습니까? 자동차나 아파트가 있습 까? 정말 모두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람답게 살려 는 꿈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으면 훌륭한 자녀로 기르려고 하는 꿈, 자식은 좋은 훌륭한 자식이 되려는 꿈, 단순하지만 그래 도 자기 주변은 행복으로 채우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그마한 꿈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이렇게 살면 되는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 많은 분이 교회에 나오셨어요. 목사님이 반갑고 안타까워서 그분과 얘기를 나누었습니 다.

"선생님 이제는 거짓말하고 다니면 안됩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런 것 다 버리세요. 예수 믿으면 버려야 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 거짓말하지 않겠어요"

 

"선생님 술 담배도 끊어야 해요. 건강도 해치고 가난도 술로 인해 온 것이니 끊어야 합니다."

", 노력하겠습니다."

"도박도 하지마세요"

 

",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자 들 따라 다니고 바람피우는 것 그것도 끊으세요"

"아니 그것까지 끊으라구요?"

하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안나오더래요. 여러분 다 끊으세요. 왜 끊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왜 버려야 하는지 아십니까? 이런 것들은 사람의 꿈을 빼앗아가고 이런 것에 매이면 꿈이 없어집니다. 술에 취하 면 그 술이 인생의 영광스러움과 가 치와 능력과 희망과 소망을 끊어버 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버리는 거예요. 화투치고. 술먹고. 바람피우고 하면 무슨 꿈을 꿉니까? 개꿈을 꾸든지 뱀 꿈을 꾸든지 전설 의 고향 꿈을 꾸든지 좋지 않은 꿈을 꾸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꿈 을 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민족이 되어 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류 역사 에 세계를 향하여 위대한 일을 한 것은 땅을 바라보고 동물적인 욕구를 따라간 민족이 세계를 향해 큰일 을 한 개인이나 민족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온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사람답게 살고 힘있고 능력 있게 살고 지혜와 영광스러움과 인간의 무한한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 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그 인격이 훌륭한 인격이고 그의 생활이 건강한 것입니다. 오늘 교독문에 있는 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경외하 는 것입니다. 내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 하시면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 하나님 이 내 청춘으로 독수리 같게 하시고 내 병을 고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셔서 내 생명을 모든 저주와 멸망과 파멸에서 건져 주신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꿈이 있는 사람, 소원이 있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 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하워드 휴즈는 1976년에 이 땅을 떠났는데 그는 소년 시절부터 꿈이 있었는데 최고로 부자가 되고, 위대한 비행사가 되고, 영화 제작자 가 되고, 유명한 골퍼가 되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정말 그 꿈대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 에서 끝이 났습니다. 같은 부자인데 도 록펠러는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꿈을 꾸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세계 적인 명문대학인 콜롬비아 대학을 설립했고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교회 인 리버사이드교회를 건축했고 수많은 교회를 짓고 인류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했습니다. 그 뿐아니라 자신 도 한없이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고 그의 자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고 큰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휴즈는 자기의 가정도 파괴 되고 한가지 욕심, 즉 땅의 생각을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그 자신은 물 론 그의 자손들도 복을 받지 못하고 끝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골프도 그가 죽음으로 끝이 나고 영화도 끝나게 되고 비행기 조종도 끝이 났습니다. 영화 도 끝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꿈 을 갖되 영적인 꿈을 가지면 하나님 을 잘 섬기는 인간의 참 가치를 회 복하게 되고 이땅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영적인 축복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를 믿으면 멸망받지 않습니다. 예수가 주인입니다. 구원의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만 의 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가 우 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에게 열쇠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거기 에서 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주 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축복을 약속하고 영적인 비 밀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 한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구원 을 얻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 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빨강, 파랑, 노랑 그리고 흰색, 검정색 다섯가지 색깔이 있으면 모든 색깔을 다 만들어 낼 수 있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우리가 확 실히 서 있으면 모든 문제는 그에게 서 답이 나오고 풀어지고 해결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해결하여 주십니다. 오늘의 일도 내일의 일도 민족의 일도 세계의 일도 그는 다 넉넉히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늘에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보내어 주셔서 범죄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잘못을 저질르고 도망을 쳤습니다. 집을 나가니 얼마나 고생 이 되겠습니까? 이것저것 닥치는대 로 일을하며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많은 딸을 낳고 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이 집을 나간 거예요 저는 죽으면 죽었지 집에는 못돌아 간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순순히 집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또 집에 가면 아버지가 나를 그냥 놔 둘 리가 없는데 그 많은 죄를 짓고 돈을 다 없애고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찾아 오 신거예요. 그 때 저는 생선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생선 사러 오신 손님 인줄 알았더니 우리 어머니가 오신거예요. '삼환아' 하면서 어머니 가 그냥 우시는 거예요. '나는 너 밖 에 없다. 네가 이러면 어떻게 하느냐. 집으로 돌아가자' 제가 말했습니다. '집에 가면 어버지한테 맞아 죽 을 텐데요'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편안하게 안심시키셨습니다. 나를 데려오면 하나도 때리지 않고 용서 해 주겠다고 아버지가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 수님을 따라가면 죄인은 죄인이지 만 아버지가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죄는 크지만 아들이 더 귀 하다는 것입니다. 네가 돌아오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돈이냐, 아들이냐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우리 교 인들이 아이들 문제가 있어서 저에 게 오면 절대로 저는 절망되는 말은 안합니다. 나를 보라는 거예요 아이 때는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 로 용서해 주고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십니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 이땅에 보내주셔서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을 죄에서 풀어주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버지를 향해 찾아 갈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을 통하여서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 속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 으면 멸망치 않습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문제는 아버지를 통하여 받는 모든 축복이 아들 인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5,6 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 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 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 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사람 은 두가지 생각 밖에 없습니다. 하 나는 육의 생각이고 하나는 영의 생각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생각입니다. 육의 생각은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땅의 것들 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 다. 인간의 가치는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 과 다른 것은 영적인 생각을 하고, 영적인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래서 동물은 눈 하나만 못뜨고 고장이 나면 그 동물은 죽습니다. 어떤 생명이든지 눈만 보지 못해도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 다. 헬렌켈러를 보세요. 사람은 사람 의 육에 있는 어떤 문제가 영적인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 에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이 병들지 않고 살아 있으면 그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뛰다가 걷지 못하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리 뿐 아니라 팔 다리가 다 없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리가 있는 사람보다 더 마음으로 건강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다고 행복합니까? 볼 것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리 가 있다고 좋은 것을 찾아 갑니까? 다리가 있어도 가면 안될 곳을 찾아다니고 길이 아닌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영 적인 피조물입니다. 주님을 찾고 주 님을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과 함께 걸어 갈 때에 인간의 아름 다움과 가치와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생각 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영적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영적 인 생각을 한다고 하니까 기도원에 가서 밤낮으로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라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날마다 기도실에서 금식하고 살아라 그런 말은 아닙니다. 영적인 생각을 우선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직장을 가도 사업을 해도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영적 생각 을 가지고 직장을 가고 공부하고 사 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의 것만을 가지고 하는 사업 과 영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는 사업 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자녀를 기르고 가정생활하고 사람을 사귀는데 우리는 영적인 것을 언제나 우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이 바로 영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안되느냐? 성경은 그렇게 말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에 우선하면 더 잘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 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 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 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 먼저 영적인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육의 것을 주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도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었겠지만 그 약속을 교회에 다녀와 서 만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 선 입니다. 밥을 가져다 놓으면 숫가락을 먼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손을 먼저 모으는 거예요. 먼저 하 나님, 먼저 예배, 먼저 기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민족이, 하나님을 먼 저 하는 정치 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육신 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절 에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육의 생각은 문제 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가 없어 이해가 안된다는 것입니 다. 왜 젊은 애가 저렇게 기도하고 헌금하느지 이해가 안된다는 거예요 이 바쁜 세상에 돈버는 가게를 문닫 고 교회에 간다 이해가 안되는 거예 요 '저 집이 왜 저러냐?'하고 이상하 게 생각하는 거예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땅의 것 동물적인 것만 있으 면 된다고 하는 삶입니다. '사람은 그게 아닌데...'하고 이 세상 육에 속 한 사람은 영적인 것을 이해 할 수 가 없고 또한 그러한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 랑해주지 않아요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영적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줄 믿습니다. 부 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저도 우리 아이들 너무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 보다 더 멋있고 잘 하는 아이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늘 말해요

"너는 너 무 훌륭해, 너는 나보다 너무 잘한 다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

그러 면 아이들이 고슴도치도 자식은 사랑스럽답니다. 아이들은 그것이 이 해가 안되나 봐요? 아니예요 저는 정말 우리 아이들이 잘하는 것 같아 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내가 아 가씨라면 우리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예요 왜 그렇습니까?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스러운 것이지요.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떤 때에 우 리를 사랑합니까? 외모를 보고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의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보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줄 믿습니다.

그 다음 9절에 보면

"만일 너 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 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절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 도 살리시리라."

여기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집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 가 오실 때만이 참으로 밝은 얼굴이 될 수 있고, 밝은 마음을 가질 수 있고, 평안함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6:19에 우리 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3:16에는

"성령이 너 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내안에 거하십니까? 집에 는 주인이 있어야 하듯이 인간의 주 인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사람이 살 아 있고 주님이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내안에 오심으로 나 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로 말미암 아 다시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 이 무슨 말씀이예요? 죄는 사망입니 다. 죄는 적든 크든 죄의 값은 죽음 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이 있고 긴장 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은 죄를 피하려고 하지만 죄는 언제나 추적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있든지 죄가 따라 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 서 죽으심으로 내 죽음은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성 도에게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아니할 뿐 아니라 다시 사는 것입니다. 누구로 말미암 아 살 수 있습니까? 내 의나 내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나 위하여 죽고 살아나심으로 그의 거룩한 의 로 말미암아 내가 의로워 지고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안에 이러한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모시고 1999 년과 2000년을, 아니 더 나아가 남 은 미래를 영적인 축복을 받아 누리 며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소원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땅을 떠날 때는 저 영 원한 나라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신령하고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롬 8  (0) 2015.01.10
행 3장  (0) 2014.12.06
레 27장  (0) 2014.11.28
바알, 아세라, 몰렉  (0) 2014.11.19
레위기 5대 제사  (0) 201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