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 3장

스네어 2014. 12. 6. 16:23

성전 미문 치유 사건의 의미 행 3:1~3:10 ·

 

 

사도행전은 18절의 선교 지상(至上)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복음이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차례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산되었고,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어 남쪽의 헬라 지역으로, 그리고 에에게 해협을 건너 로마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팽창은 자연스레 되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시련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전개 과정에 따라 예루살렘 내에서 복음이 강력히 선포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 첫 번째 기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지상 교회에 주님의 사역을 위임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아직 교회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점점 아름답고 풍성해져 갔지만 교회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을 즈음에, 주님께서는 성전 미문의 하체 장애인을 등장시키셔서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가를 알게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선천성 지체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애인은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말씀 한마디로 완치되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성전 미문의 장애인이 즉시 고침 받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전 입구에서 사도들이 장애인과 마주침 (= 주님의 관심이 머무는 곳,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

 

1-2=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본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가면서 나면서 못 걷게 된한 사람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사람은 무려 40년 이상을 불구로 지내온 하체 장애인이었습니다. 사건의 전개로 보아 이 사람이 선천적인 장애인이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의 대표적인 존재 아닙니까? 그러니까 본문에는 교회의 상징적인 존재가 매일 습관처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모습과 일상적으로 늘 구걸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지체 장애인이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관심이 바로 이런 사람에게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교회가 관심 가져야 할 대상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도들이 성전 입구에서 하체 장애인과 마주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장소에 스스로 올 수조차 없는 나면서 못 걷게 된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40여 년간 장애인으로 살면서 사회적으로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이 사람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태어나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보며 외적인 장애와 함께 내적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좌절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또 어떠합니까? 그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 없이 항상 그곳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정도의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이 장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교회가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장애인이나 소외된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과 달리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귀찮은 일 정도로 여겼습니다. “주님, 저 많은 사람들을 빨리 돌려보내십시오.”

그들은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막았던 사람들이고, 소경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을 때 조용히 하라고 하며 소경의 소망과 울부짖음을 막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이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에도 그 장애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베드로와 요한에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까닭은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마음도 가게 되고, 주님의 눈이 주목하는 것을 우리의 눈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사역을 사도들과 교회에 위임하실 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제자들아,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너희에게 위임한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

내가 원하노니, 너희의 손을 내게 다오. 지치고 힘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나의 손이 되어 다오.”

사랑하는 성도들아, 너희의 귀를 나에게 다오.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신음하고 있는 그 신음소리를 내가 너희의 귀를 통해 듣기 원하노라.”

우리가 우리의 손을 주님께 드리면 우리 손은 주님의 손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귀를 주님께 드리면 그 귀는 주님께 쓰임 받는 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성전에서 무엇을, 또는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 목사를, 찬양대를, 혹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보십니까?

눈으로 주님을 모신 사람, 마음으로 주님을 모신 사람, 귀로 주님을 모신 사람은 자연인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을 가집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님께서 나의 손과 발, 눈과 귀와 심장을 통해서 보고 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그 장애인을 주목하며 우리를 보라고 함 (= 계속해서 바라봄, 눈과 눈을 마주침)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 주목하여’(아테니사스) 라는 동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눈길을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그 장애인을 진지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을 단지 물질적 구제가 필요한 대상 정도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동일하게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한 인격이요 영혼으로 여기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장애인의 바라보는 동작, 보거늘’(에페이켄) 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반응이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주목하다라는 뜻인데, 이에 비해 베드로의 바라봄’(아테니조)은 더 적극적이고 애정이 담긴 행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들은 그 장애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절망적인 자세로 성전 미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보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 절망 속에 깊이 빠져 있는 장애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던진 사랑의 말입니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땅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채워질 때까지 시선을 주고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 사람에게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먼저 우리를 보라고 말하면서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눈으로 대화를 해보셨습니까?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눈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가야바의 뜰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을 때 심문받던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고, 이때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미문의 장애인 거지를 바라보는 베드로의 눈빛은 아마도 실패자인 자신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담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주님의 그 눈빛에서 놀라운 생명의 힘과 용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주로 어떤 것을 담고 있습니까? 우리 주위의 불신 세상은 우리의 시선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요?

성도들은 불신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를 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우리를 본받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거하는 우리를 보고 주님을 믿음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우리를 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 미문의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외치던 사도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불신 세상을 향하여 자신있게 외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킴 (= 생명의 역사, 내가 받은 은혜를 나 눔)

6-7=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 베드로의 말을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들에게서 물질을 받고자 하는 걸인의 바램을 일언지하에 포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표면적 이유 뿐 아니라 또다른 중요한 내면적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은과 금이라는 표현은 금·은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런 미문처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한 당시의 유대교를 빗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걸인이 앉아 있는 미문은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의 입구 역할을 하는 문으로서 금과 은으로 장식된 사치스런 문이었지만, 정작 유대교는 성전의 화려한 외양에 비해 이미 능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없거니와라는 표현은 자신이 이제부터 행할 일이 물질적 동정의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더 위대한 일일 것임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 장애인에게 적선을 베풀 생각은 않고 그의 불구의 몸을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는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요하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 가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가 미문의 하체 장애인을 예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킨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는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전치사 을 직역하면 ‘~안에(in)’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의 이름으로라는 번역은 베드로가 장애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단지 걷기 위한 수단으로 준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줍니다.

하지만 원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In the name of Jesus Christ)’ 라는 표현은 장애인이 자신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적입니다(2:12).

장애인이 자신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8) 그가 예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강력한 생명의 능력을 현저히 나타내는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외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독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리킨다면 그가 말한 은과 금은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6절은 성전이 상징하는 유대교와 그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신 후에 말씀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성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본문의 장애인은 외식에 물든 유대교의 화려한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동정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자신의 병든 육신을 고침받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귀한 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물론 은과 금도 중요합니다. 돈으로, 물질로 세상을 도우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본문의 의미를 정말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과 금이 큽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큽니까? 은과 금이 소중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주어야 하는 것이 은과 금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까?

 

중세에 한 교황이 사제들을 모아놓고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창고에 재정이 넘쳐 납니다. 사도들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나갔소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명령하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참으로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화입니다. 흔히 현대를 물신 숭배 시대라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풍조는 어느새 성도들의 의식까지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번영의 신학과 세속주의에 물든 한국 교회는 베드로의 외침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심지어 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의 영역에까지 예수님의 자리를 물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때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여기 하체를 쓰지 못해 앉아 구걸하는 장애인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남들의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는 모습이 낯설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현대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성전 미문에 앉은 이 거지와 같이 은혜의 보좌 깊숙한 곳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성전의 문간만 맴도는 영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같은 장애인인 나에게 찾아오셔서 생명을 나눠주시고, 사랑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내가 받은 그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주신 사랑과 은혜를 다른 장애인에게 증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

 

일으키는 사람

사도행전 3:1-10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인구의 약 10% 정도가 장애인이라고 합니 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상의 많 은 장애인들이 자신과 죄와 잘못만 으로 장애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 실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만 저들이 장애인이 된 데에도 우리 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앉은뱅이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었습 니다. 저가 앉은뱅이로 태어나게 된 것은 자기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 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 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어떤 뜻과 계획을 위하여 어떤 사람 들을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습 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오해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깊으신 하나 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 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 니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불공평하 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세 상을 공평하게 창조하시지 않으셨습 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세상을 불공 평하게 창조하시었습니다. 어떤 사 람은 건강하게 또 어떤 사람은 건강 치 못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건강치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애인으 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 잣집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 어떤 사 람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게 하셨습 니다.

물론 불공평한 것보다는 공 평한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최고의 덕목은 아닙니다. 하나 님은 공평한 것보다 더 훌륭하고 아 름다운 세상을 생각하시고 계획하셨 습니다. 그것은 섬김과 사랑 그리고 감사와 은혜가 있는 불공평한 세상 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이 그렇 지 못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 여 진심으로 저를 돕고 섬기는 것입 니다. 도움과 섬김을 받는 건강치 못한 사람은 저들의 섬김과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불공평함은 오히려 섬김과 은혜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도울 것도 없고 도 움을 받을 것도 없는 세상, 섬길 것 도 없고 섬김을 받을 필요도 없는 세상은 생각처럼 좋은 세상 아닙니 다. 그런 세상보다는 좀 불공평한 것처럼 보여도 서로 사랑으로 돕고 섬기고 사는 불공평한 세상이 헐씬 더 훌륭하고 아름답습니다.

불공평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으로 서로 돕고 섬기는 생활입니다. 사랑과 섬김 그리고 감사와 은혜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공평해 보이 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장애는 얼마든지 믿음으로 극복이 될 수 있 다는 것입니다. 극복된 장애는 이미 장애가 아닙니다. 극복만 될 수 있 다면 장애도 은사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장애인 중에 송명희씨가 있습니다. 그는 뇌성마 비 환자입니다. 그는 자기 몸하나 제 마음대로 가누기가 힘든 중증 장 애인입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송하고 간 증합니다.

 

자신에게는 남에게 있는 건 강과 재물도 지식도 없지만 그러나 남에게 없는 것도 자기에게 있다고 간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평 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송합니다. 그 것은 얼마나 엄청난 찬송인지 모릅 니다. 세상에 뇌성마비 환자로 평생 을 하나님 원망을 하고 살아도 얼마 든지 이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하 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간증 하고 찬송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 운 일인지 모릅니다.

장애는 쉽지는 않지만 얼마 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장애는 반드시 극복이 됩니다. 그리 고 장애는 극복이 될 때 엄청난 힘 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도 은사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 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을 향하신 하나님 의 뜻과 계획을 우리가 다 잘 알 수 는 없지만 가장 분명하고도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저들을 사랑으로 돕고 섬기기를 원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건강한 사람들이 어떻 게 그리고 무엇으로 저들을 돕고 섬 길 수 있는가? 물론 물질로 저들을 돕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도 본문에 보니 구걸하는 앉은뱅이 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도 성 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 어려운 사람 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요즘도 전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찬송가를 부 릅니다. 목탁을 두드리면서 구걸을 하는 사람을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 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 들이 불교를 믿는 사람보다 더 구제 를 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거의 틀림없이 저 들을 찬송대신 불경을 외우며 구걸 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모든 구걸하는 사람들이 목탁을 두드리지 아니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구걸할 수 있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작 은 돈이라도 열심히 어려운 이웃들 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서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저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들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것입 니다. 저희 교회에도 지체장애인 직 원 한 사람과 시각 장애인 목사님 한 분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을 할 때 계산으로는 좀 손해가 될는지 몰 라도 장애인들을 고용하여 저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저들에게 안정적인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앞 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 다.

 

그러나 몇 푼의 돈으로 저 들을 다 돕고 섬겼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저들에 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한 푼의 돈 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자신들에 게 은과 금은 없지만 자신들에게 있 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위에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그 앉은뱅이는 예수 그리스 도를 만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 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는 일어날 수 있다고 저 는 믿습니다. 믿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저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 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미즈노 겐죠라는 장 애인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고열에 뇌를 상하게 되었고 그 후 그는 뇌성마비 환자가 되어 보는 것과 듣는 것 외에는 아 무 것도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경을 읽던 중 예수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 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절 말 씀 즉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 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 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 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 이라"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참으로 변 화된 놀라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 놀라운 삶을 간증하는 시 를 지어 발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모음표와 자음표를 만들어 한자 한자 글자를 손으로 짚어가면 자신이 쓰려고 하는 글자를 짚을 때 눈으로 신호를 하여 글자를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지은 시중에 '내 마음 속에'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기쁨이 있다.

내 마음속에 희망이 있다.

내가 나아갈 길이 있다.

그건 그리스도 예수가 열어 주신 것

어두워도 헤메이지 않아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기쁨의 길이 있다.

 

예수를 믿음으로 환경은 아 무 것도 바뀐 것은 없지만 그의 온 삶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번 에 자신의 모든 삶의 장애를 극복하 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저들 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는 오늘날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인들에 게 물질도 베풀고 직장도 마련해 주 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성전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그것을 놀랍게 생각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저들의 마음이 열려지게 되었고 그 날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에서 찬 송을 한 사건은 전도의 효과를 발생 하여 초대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 는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입 니다.

오늘날도 우리 동안교회가 장애인들을 따뜻히 품어주고 저들에 게 복음을 전하여 주어 저들이 동안 교회에서 성전에서 기뻐 찬송하고 노래한다면 그것을 통하여 많은 사 람들의 마음이 열려지게 될 것이고 그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 전도의 문 이 열려 다시금 교회가 부흥하고 성 장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 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장애인들을 받아 주십시다. 저들에게 기회를 주십시다. 그리고 저들과 함께 사십시다. 그것이 하나 님의 뜻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줄로 믿습니다. 조금 불편하다 고 힘이 든다고 그리고 손해를 본다 고 저들을 외면하며 저들에게 기회 를 주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을 슬프게 하여 드리는 일이라는 사 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안에 있는 소망부 를 도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소 망부가 계속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 도록 기도와 물질로 지원해 주시기 를 바랍니다. 많은 교사들과 교인들 이 소망부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 며 헌금해 주시는 것에 대하여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길 목사님의 목회를 위 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 영길 목사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시각장애자입니다. 처음 에 목사님을 청빙 할 때 장애인 사 역을 위하여 청빙을 하였습니다. 그 러나 옳은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시 각장애자에게 청각장애자들과 언어 장애자들을 맡겨 놓으니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장애인 사역은 헌신된 비장 애인이 하여야 더 좋다는 사실을 발 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부터 김 목사님 에게 일반 교구 사역을 맡기게 되었 습니다. 아무래도 장애가 없는 목회 자보다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이 이런 저런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래 도 저는 우리 교회가 김 목사님이 마음 편하게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 가 된다면 정말 우리 동안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 혜와 축복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혼자 생각으로 이 다음에 우리 아들 결혼주례를 김목사님에게 부탁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 다. 어떤 면에서는 분명 사람들이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서는 충격적인 일일 수도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저와 저의 자녀가 믿음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면 분명 그것은 근사한 일이 될 것이며 목사님의 주례를 받은 우리 자녀는 분명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을 받 아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는 아니 될 것입니다. 소자 한 사람 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으시겠 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장애인 들을 아주 저속하고도 비속한 말로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들 이야기합니 다. 그러나 그것은 정 반대의 말입 니다. 장애인은 저들의 표현대로 하 자면 재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재수 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복 있는 사 람들입니다. 저들 한 사람 한 사람 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가보 면 장애인들의 천국이라고 하리만큼 저들에 대한 배려가 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진국이기 때문에 그 런 것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선진 국이 된 것입니다. 장애인들에게 붙 어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 문에 저들이 선진국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장애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 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불공평 해 보이는 일 속에도 하나님의 깊으 신 뜻이 있다는 사실은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애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 분들이 그와 같은 어려운 일을 당하 신다면 믿음으로 극복하실 수 있기 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장애인 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김으로 저들에게 붙어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다 받아 이 땅에서도 성공하 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 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 사도행전 3:1-10

 

A. 이름에 대하여

 

1.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모든 것에는 각각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도 이름이 있고, 회사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름 속에는 평판이 있고, 인격이 있고, 권위가 있어서, 그것에 따라 좋은 이름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이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회사들도 브랜드 파워(brand power)를 가지고 비즈니스를 합니다. 상표 하나만 가지고도 로열티를 받아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많은 기업들이 자기 기업의 브랜드, 이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코카콜라입니다. 코카콜라는 전세계적으로 안 들어간 나라가 없어서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름 하나만 가지고 많은 매상을 올립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이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권위, 능력,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과 인격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름은 마치 그 사람을 대표하는 인감도장과 같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다윗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서 골리앗 장군과 싸워 이기고 승리하지 않았습니까(삼상 17:4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다른 이름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기묘자’, 놀라운 자, ‘모사’, 가르치는 자,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9:6). ‘메시야’(9:25),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1:21), 구원자, ‘임마누엘’(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이렇게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고 멸망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목사였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 18031882)예수, 그의 이름은 이 세상 역사 속에 새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패배가 없습니다. 불행이 없습니다.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항상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항상 승리합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번창합니다. 창대케 될 수 있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본문 말씀 사도행전 3110절에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열심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 수백, 수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이 점점 퍼져서 유럽과 아메리카를 거쳐 한국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했던 초대 교회에는 많은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말씀은 초대 교회의 기사와 표적 중에서 사도행전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이 기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그들에게 구걸을 하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놀라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도와 베드로와 요한이 주의 복음을 전하자 남자만 5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10:17).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1:12). 기도를 응답받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14:13). 기쁨이 충만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16: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병 고침을 받습니다(3:16). 구원을 받습니다(10:13).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벧전 4:14). 죄악에서 용서를 받습니다(요일 2:1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일상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이름을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여러분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미문에서 구걸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B.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

 

1.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새 - 기도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3:1)

 

여기에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두 가지 배경이 나옵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정규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도 이 관습을 본받아서 하루에 3번씩, 아침, 오후, 저녁에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 시간을 정해 놔야 합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가는 도중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임재를 깨닫게 하시며, 더 나아가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5517절에서 다윗 왕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도 하루에 3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 610절에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하루에 3번씩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존케 하시고, 대신 원수를 갚아 그를 모함했던 동료들을 멸망케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모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붙드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고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23942절에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좇아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습관을 좇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침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5:3). 낮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88:1). 밤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88:1; 26:9; 14:23). 새벽기도(1:34), 철야기도(6:12)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깨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권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 15331592)기도는 하늘의 축복을 받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축복받은 사람,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배고픔이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가난이 떠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죄악이 떠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바로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한참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면서도 미국과 싸우겠다고 옛날 총을 들고나옵니다. 이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지독한지 아십니까?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굶주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메카(Makkah), 성지를 향해서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패배해도 다시 열정이 생겨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덤벼드는 것입니다.

선한 열정도 기도를 통해서 생기지만, 악한 열정도 기도를 통해서 생겨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새벽에 냉수를 떠놓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합니까?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대상에게 기도를 해야지 잘못된 대상에게 기도를 하면 죄악과 저주에 빠지고 악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이 파멸되는 것도 모르고 계속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축복을 주시고,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건강을 주십니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번창케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 남편이 사업을 하려다가 사기를 당해서 집과 재산을 몽땅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다가 결국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비로소 겸손히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돌봐 주시옵소서.”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도 그렇게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가정에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모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군대를 갖다와서 30대 초반에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20년 전 사기 당한 금액의 100배 이상으로 번창케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사기 당한 것이 그대로 사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사기 당하고 망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아들을 통해 거부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갑절로 축복하십니다. 100배로 축복하십니다. 번창케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지금 배고프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그것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만사 형통하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미문에서 구걸하거늘 - 질병, 결점, 남의 도움을 바라는 인생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3:23)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아름다운 문, 미문(美門)에 앉아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이 상대적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도 구걸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지라도 성전에 있는 거지는 다릅니다. 이 거지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만날 수 있었지, 다른 곳에 있었으면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전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22절에 보니까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선천적인 앉은뱅이로 태어나 이미 40대가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이라면 혹시 자라다가 다리가 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나이 40이 넘었으니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팔자려니,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벌써 수십 년간 거지 노릇을 해왔습니다.

아마 이 앉은뱅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는 평생 앉은뱅이요, 거지로 살 줄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나이 40이 넘은 그 거지도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남으로 병 고침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두 끼 먹을 몇 푼을 구걸했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엄청난 것을 주었습니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받고 엄청난 축복과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 세상을 살면서 절대로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팔자를 비관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성경을 읽는 순간부터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046절 이하에 나오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향해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적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직업이 달라졌습니다.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문제를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달라집니다. 가난하다 할지라도(1:21), 병들었다 할지라도(왕하 20:1),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앉은뱅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지처럼 자기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지 못하고 자꾸 누구에게 의존하고 도움을 구합니다. 운명을 한탄합니다. 비관에 빠집니다. 절망합니다. 이런 정신적인 앉은뱅이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도 겉은 멀쩡한데 영적으로는 앉은뱅이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립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기도하고, 스스로 하나님 만나고, 충성·봉사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영적 앉은뱅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병 고침을 받은 것처럼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시간 깨끗이 고침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마을에 아들 하나를 둔 거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마을에서 3대째 거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품은 착하고 순한데 아주 게을렀습니다. 몸이 건강하니까 노동을 해도 먹고살 수 있는데 거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때만 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왜 그렇게 거지로 사느냐고 물으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그 사람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지가 뭐 어떻습니까? 얼마나 편안한 직업인데요. 세금을 냅니까? 농사 지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저 밥 한 끼 얻어먹으면 식사가 해결되고, 아무데서나 자면 되지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거지 팔자가 상팔자입니다.”

그러다 하루는 그 동네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들에게 거지로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평생 남의 도움만 받고 살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이제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돕는다고요? 거지가 어떻게 남을 도와줍니까?”

당신도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으면 팔자가 달라집니다. 당신도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지 부부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었습니다. 그러자 생각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3대째 거지인 이 부부가 예수님을 믿고 거지생활을 청산했습니다. 4대째 거지 될 뻔했던 아들이 공부를 해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남한테 의존만 하려던 생각을 바꾸어서 남을 도우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남의 도움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남의 도움만 받으려는 것은 거지적인 발상입니다. 이제는 거지 근성에서 벗어나서 남을 돕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도 돕고, 자식도 돕고, 이웃도 도와야 합니다. 남의 도움만 받을 것이 아니라 남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살아야 합니다.

나라도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가난해지지만 돕겠다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부유해집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남을 돕겠다는 사람이 많고 후진국일수록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까, 도움을 주는 것이 좋습니까?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했습니다. 거지 근성, 앉은뱅이 근성, 잘못되고 부정적인 생각을 다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시고 앞으로 남을 돕는 건강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3:46)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하니까,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무언가를 바라보아야 이루어지지 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아도 좋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극장 프로그램을 보면 극장에 가고 싶고, 술병을 보면 술 마시고 싶고, 도박판에 가면 도박하고 싶고, 춤추는 사람을 보면 춤추고 싶어집니다.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은 파멸에 빠지고 맙니다. 더럽고 추한 것을 보면 더럽고 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아야 합니다. 창조적인 것, 축복된 것, 사랑스러운 것을 보아야 합니다. 행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승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라고 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바라보자, 베드로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만약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 동전 몇 푼을 주었더라면 한 끼 먹고 끝났을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내가 가지면 내 것이요, 남이 가지면 남의 것이 됩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요, 있다가도 없는 것이 돈이요, 변덕스러운 것이 돈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다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내 마음속에 계십니다. 도둑질 당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병을 고침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시편 1248절에도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한테 버림받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6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믿는 둥, 마는 둥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전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414절에도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시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죄를 용서받고(24:47), 문제를 해결받고(14:1314),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14:2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마귀와 함께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에는 도둑놈’, ‘강도처럼 나쁜 이름도 있지만, 항상 불러도 싫증 나지 않는 좋은 이름도 있습니다. 그 이름이 뭡니까? ‘어머니라는 이름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 그 이름에서 벌써 감동과 감화를 받습니다. 항상 좋은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건강하던 남편이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아내가 여보, 여보하고 깨워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란 아내는 남편을 겨우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가갔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았더니 신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정신과 쪽으로 공황장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황장애란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가 임해서 온몸이 마비되는 증세였습니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자,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야기도, 새벽기도에 나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까지 닿았고 그 사닥다리에 남편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남편을 떨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검은 옷 입은 사람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하고 외치면서 그를 밀어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후로 남편은 얼굴이 점점 훤해지기 시작하더니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보통 일상생활에서는 알 수 없지만, 기도하고 영적인 눈을 뜨면 이런 것이 보입니다. 귀신, 병마가 들어가서 병을 유발하고, 악한 마귀가 들어가서 악하게 만들고 죄짓고 불신하게 만들고 저주와 어려움에 빠지게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마는 물러갈지어다!”

가난 귀신은 물러갈지어다!”

조상 귀신은 물러갈지어다!”

흑암의 세력은 물러갈지어다!”

분쟁과 싸움과 다툼은 물러갈지어다!”

우리 인간의 생활을 파괴하고,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하고, 불신앙 속에 있게 하는 모든 악한 마귀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공부 못하게 하는 것도 마귀고, 말 안 듣게 하는 것도 마귀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서 마귀를 물리치면 천사가 호위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4.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 치유, 기적, 찬양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3:710)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다 만약 앉은 채로 끌려 올라왔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의사라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런 엄청난 일을 했을까요?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약해서 오그라든 다리가 쫙 펴지게 되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앉은뱅이는 병 고침을 받아서 집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친구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응답받고, 병 고침 받고 나서는 집으로 갑니다. 감사치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앉은뱅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근수근거렸습니다.

저 사람,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 아니야?”

조금 전까지도 앉은뱅이였잖아?”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절망에 처한 사람이 소망을 얻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하게 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아니, 자네 같은 사람도 교회에 나가나?”

당신 같은 사람이 축복을 받았단 말이야?”

여러분도 힘을 얻고, 능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변 사람들,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까지 깜짝 놀라게 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전에는 가난과 싸워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죄악과 싸워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어둠과 싸워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과 능력을 주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앉은뱅이의 움츠러들었던 다리가 쫙 펴지듯이, 가난과 저주는 물러갈 것입니다.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의 저자, 마를린 힉키(Dr. Marilyn Hickey) 여사가 오늘날 목사님이 되어 여러 가지 사역을 하게 된 데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43세의 전기기사였는데, 귀신에 사로잡혀서 얼마나 난폭했던지 아내를 때리고 학대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다시 교회에 나가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죽을 각오를 하고 계속해서 교회에 나갔고, 어느 날 그 사실을 들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오더니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칼을 떨어뜨릴지어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칼을 떨어뜨리고 뒤로 자빠지더니 벌벌 떨면서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자, 아버지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일어났는데, 그 뒤로는 증세가 심해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날마다 하나님, 남편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남편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버지는 정신병원에서 나오게 되었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모두 목격한 딸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어, 지금은 방송국을 세우고 전세계 사람들에게 이 간증을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가정에서 저주 속에서, 불신앙 속에서 강퍅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핍박과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하고 외치십시오. 그러면 가난도 물러갑니다. 저주도 물러갑니다. 병마도 물러갑니다. 우리가 쫓아내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 불치의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라기서 42절에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기뻐하고, 찬송 부르는 것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어도 나가긴 나가야 하는데.’ 하면서 미적거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뻐하고 없고,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고, 왜 사는 지 모릅니다.

돼지같이 먹기 위해 사는 사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같이 일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는 짐승같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짐승은 평생 주여”,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달라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C.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항상 의지하여서 승리하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에 엄청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아이에게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이가 눈을 뜨지 않고 계속 잠만 자는 것이었습니다. 안과에 갔더니 선천성 녹내장이라는 희귀한 병인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천성 녹내장은 안압이 올라가 시신경이 죽으면 실명되는 병이기 때문에, 평생 안압이 올라가면 수술을 해서 안압을 낮춰 주어야 하는 병이었습니다. 수술을 해도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은 0.1%였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완치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이가 2시간 30분 동안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담당 의사는 아이의 눈에 홍채가 없고 전체적으로 눈이 기형이라서 실명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엄마는 의학적으로는 못 고쳐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이를 퇴원시키고 나서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예배 등 모든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시옵소서. 아이가 눈을 뜨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3개월이 지났습니다. 전혀 물체를 보지 못하던 아이가 어느 날 장난감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 보니, 홍채가 생겼다며 의사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 후 눈이 급속도로 좋아져서 아이의 눈은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 전세계에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시고 영광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번창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받아 정치도 바르게 되고, 경제도 안정되고, 북한에도 주의 복음을 전파하여 통일을 이룩할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통일됩니다. 공산주의는 물러갑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축복받고 주변 나라에 선교하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먼저 축복받고 그 일에 앞장서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항상 부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롬 8  (0) 2015.01.22
롬 8  (0) 2015.01.10
레 27장  (0) 2014.11.28
바알, 아세라, 몰렉  (0) 2014.11.19
레위기 5대 제사  (0) 201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