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롬 8

스네어 2015. 1. 10. 10:35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 롬 8:12~8:17

 

우리들의 생활 속에 유행하고 있는 유행어 하나가 있습니다. 심리학적 용어이지만 전에 들어보지 못한 유행어인데 요새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상 허언증.' 모르시는 분이 많은 것 같네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짓말을 해놓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것을 사실로 믿어줄 때, 그만 자신도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로 믿게 된다는 겁니다. 이병은 중증입니다. 이건 큰 정신병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 병은 병원에 입원해서 2년을 거쳐야 고칠 수 있답니다. 큰 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병자가 병원에 있어야 되겠는데 밖에 나와 돌아다니니까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부인하는 것, 거짓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거짓을 사실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거짓을 사실로 인정하고 그 생각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사람들이 살아간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러니까 나라가 흔들리고 세상이 흔들리고 도대체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그런 형편에 빠졌습니다. 진실이 무너졌으니까 말입니다. 큰 비극입니다.

 

정체의식의 진실성이 문제입니다. 사상가 찰스 핸디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만의 가진 생각이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그가 누구의 자녀냐 하는데 있다. 누구의 자녀냐? 또는 누구의 자녀라고 믿느냐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누구의 부모가 되는지 생각하면서 정체의식이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의 세상을 혼란하게 만든 거짓된 사상이 뭡니까? 온 세계를 흔들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생각을 흔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세상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지나 간 것 같지만은 공산주의 철학, 사상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금도 그냥 남아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 사상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 보면 찰스 다윈(Charles R. Darwin)의 유명한 종의 기원이 있습니다. 종의 기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책이 아닙니까? 이것이 이렇게까지 큰 문제를 일으킬 줄도 몰랐거든요.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종의 기원이 무엇일까 생각하여 나온 것이 진화론입니다. , 어이가 없지만 전 북한에서 공부할 때 중학교 2, 3학년 때 아메바, 단세포 생물에서 우리 인간이 진화되었다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중학교 1, 2학년에다가 그렇게 가르칩니다. 아메바, 아메바, 단세포 동물, 단세포 동물. 그래서 우리 인간의 뿌리는 단세포 동물이요. 저기의 미생물 같은 아메바가 뿌리라고 그렇게 주입하여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것이 조금 조금씩 발전해서 하등동물이 고등동물이 되고 고등동물이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공산주의자를 만들 때에 그들이 취하는 원리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진화론. 둘째, 사회발전사. 세 번째, 볼셰비키 당사. 이 세 가지를 통달하고 나면 요샛말로 빨갱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의 뿌리가 뭐냐? 사람은 동물이다. 동물로부터 왔다. 그것입니다. 그걸 아주 깊이 세뇌 시키는 겁니다. 사람은 동물이다. 그런고로 약육강식이 있고 적자생존이 있는 것이고, 생존경쟁이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세상은 싸움의 터전이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진화론 교수가 한평생 진화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이 많아서 손자들과 함께 동물원을 방문하고서 큰 참회를 했습니다. '내가 옛날에 동물원에 왔을 때는 원숭이를 볼 때 마다 저놈이 내 할아버지라며? 저놈이 내 조상이라며? 하고 들여다보니까 비참하더라.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할 때에 동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더라'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작가 스티븐 코비(Steven Covey)오늘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매일매일 우리 일상 속에서 작건 크건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며 선택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첫째는 주도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알고 선택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리고 선택한 바에 책임을 져야 된다 이거예요. 항상 그러해야 한다. 그리고 반사적 선택을 조심하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마치 강아지 꼬리를 밟으면 깽 하는 것처럼 인생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동물적인 것이다. 둘째는, 목적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오늘 현재는 이 모양이지만 이것이 가지는 목적은 뭐냐? 장래성은 뭐냐? 생각하고 선택해야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다시 말합니다. 원칙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인격자의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구원 사역의 총 주제가 무엇이냐 이겁니다. 딱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계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요. 사역의 총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요한복음 316절 복음중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게 했다'는 거예요. 자녀 되게 독생자를 줬다. 십자가가 뭘 말하느냐?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는 십자가의 사건 후, 부활하신 다음에 그 거룩한 성체로서 맨 첫 번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7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클라이막스의 복음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 그렇게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이다. ,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하면 스스로 자기 자격을 비하한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는 자격에 있어서 스스로 미달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해. 자녀의 자격이 없어.' 그것입니다.

 

여러분, 가정교육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뭡니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것도 좋고,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공부가 잘 안 된다고 아이가 가출하는 게 문제입니다. 아니 자살까지 하는 거예요. 나는 이 집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 , 이것 참 우리 아버지는 나를 이렇게 소중한 아들로 생각하고 기대하는데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래도 나는 이 집 아들이 아니다. 아니 아들 될 수 없다. 아들 됨을 사양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공부를 못해도 아들은 아들이죠. 자녀라고 하는 그 입장에서부터 생각해야 되겠는데 이걸 부정하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소위 '양자설'로 상징하여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양자라는 게 뭡니까?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겁니다. 양자는 선발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하는 겁니다. 양부모가 누구든 좋아요. 고아원에서든 길거리에서든 누구든 딱 선택해서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그러면 아들입니다. 그의 과거를 물을 필요도 없고 자격을 물을 필요 없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치원 정도 다니는 시각장애자 어린아이가 나와서 피아노를 칩니다. 이 아이는 천재적이랍니다. 피아노를 배운 것도 별로 없는데 악보를 본 일이 없는데 그냥 들리는 대로 친답니다. 소리가 들려오면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정확하게 그걸 텔레비전 프로에 나와서 이렇게 하는걸 보니까 물론 그 아이가 피아노 치는 자세나 뭐 그런 건 제 마음에 안 듭디다. 그러나 곧잘 치는 거예요. 소리가 천재적이에요. 모두들 감동케 했는데 더 감동케 한 것은 이 아이가 그 어머니의 양녀예요.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예요. 이 얼마나 감동스럽습니까? 전에도 그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여러분, 양자를 삼을 때 시험보고 합니까? 양녀를 둘 때, 자격을 묻는 겁니까? 아니에요. 누구든 상관없어요. 어떤 병자라도 상관없어요. 어떤 장애인이라도 상관이 없어요. 내가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 하면 아들이에요. 이게 양자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아요. 은혜와 율법의 관계 속에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네로 황제, 그는 노예였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입니다. 노예가 양자가 되고 양자가 왕이 됩니다. 그 유명한 네로 황제입니다. 전혀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과거의 신분을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돌아 왔을 때에 그가 아버지를 앞에 놓고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 앞에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머슴의 하나로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아들의 말입니다. 이건 율법적 관계입니다. 자격 없지요. 아니 머슴은 아무나 하나? 머슴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랑곳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잃었다 얻었고 죽었다 살았노라. 너는 내 아들이다.' 그 아들입니다. 나는 성경을 볼 때 마다 그 장면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 녀석이 어쩌자고 그 창피한 얼굴로 잔치에서 먹고 앉았잖아요. 염치없지요. 멀쩡한 녀석이 아니 무슨 자격으로 거기 앉아있는 거예요? 그 환영하는 잔치에 마치 금의환향이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원래 신앙인이라는 사람이 대개 그렇게 좀 멀쩡하거든요. 염치없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율법적 관계를 깨끗이 불식하고 아버지가 나를 아들이라고 하면 아들이에요. 이유 없어요. 자녀라고 하면 자녀란 말입니다. 온전히 은혜의 관계로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 할 때에 옛 가족과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집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격은 양부모가 준 것이에요. 자기 자신의 자격에서 온 것이 아니고 행위도 아니고 사상도 아니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하시고 높은 권세를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새 가족의 신분을 믿어야 되요. 옛날 관계는 끊어버리고 새 관계에서 새 가족관계, 새로운 아버지와의 관계를 내가 바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아주 여렸을 때 본 책에 그런 게 있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효히꼬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종교가죠. 그런데 그 가가와 도효이꼬가 원래 고베 시장의 서자입니다. 첩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를 낳아서 본처 자녀들하고 같이 키웠습니다. 그러니까 본처 자녀들이 미운 오리새끼처럼 본 거예요. 얼마나 구박을 하겠어요? 그 형님들 속에서 천대받으며 살았습니다. 하루도 그는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겨울에도 저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우울증 환자입니다. 그런데 구세군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북을 치면서 '예수를 믿으세요.' 노방전도를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세요. 그러니까 이 어린 아이가 따라가면서 뭐라고 물었는지 아십니까? "첩의 아들도 구원 받습니까?" ", 그럼요." 그리고 그를 따라가서 예수를 믿고 오늘의 가가와 도효히꼬가 된 겁니다. 그는 평생 늘 외우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첩의 자녀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난 첩의 자식이 아니다." 보세요. 첩의 자식으로 자랐으면 아주 망나니가 되고 말았을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로 자랐어요. 이렇게 일단 양자가 되면 그 옛날 부모가 가졌던 빚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죽으면 아들이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양자가 되면 그날로 관계가 딱 끊어지기 때문에 아버지가 진 빚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 이제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이렇게 양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녀의 정체의식을 가져야 하고 자녀의 가치관을 가져야 하고 자녀로써의 생활양식을 키워가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점입니다. 아들은 됐는데 아들답지를 못해요. 아들로 살아가지를 못해요. 이게 문제란 말입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기를 성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양식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어야 된단 말입니다. 하루하루 바꿔나가야 되요.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동양의 성자인 공자는 말합니다. 성스러운 인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사색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다. 이건 가장 높은 것이다. 생각해서 공부해서 사람이 바뀐다. 이건 정말 귀한 거죠. 두 번째는 모방에 의해서 바뀐다. 이건 제일 쉬운 것이다. 좋은 사람 만나면 좋아지고 나쁜 사람 만나면 나빠지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모방에 의해서 쉽게 하나님의 자녀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경험에 의해서 인격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그것이 사색에 의해서도 아니고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얻어맞아요. 진노의 채찍을 맞아서 멀쩡히 건강한 사람이 병들기도 하고 사고가 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어려운 사건들로 전쟁도 겪고 많은 사건 속에서 강한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성장합니다. 자녀의 정체의식을 이렇게 확실하게 키워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들이 왜 있어야 하느냐? 이 사건들을 통해서 우린 사랑을 배웁니다. 부모의 사랑도 배우고 형제의 사랑도 배우고 특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배웁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오늘 특별히 "성령이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사건에 부딪칠 때 성령에 감동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강하게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 나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잠시도 의심하지 마세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성경은 아들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로마서는 말합니다. 그거 무슨 말입니까? 이건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내 의지의 세계가 아닙니다. 신비롭게 이상하게도 번연히 잘못되는 일도 있고 잘못하는 일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일, 그런 행위가 우리 주변에 있지만 성령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십니다. 성령의 감화, 신비로운 감화 속에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 주십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정체의식을 바로 하는 순간 세상이 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에 이웃은 내 형제가 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인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이런 하나님의 자녀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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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앙인의 신앙간증 롬 8:26~8:28

 

12살짜리 신앙이 아주 좋은 어린이가 중한 병을 얻어서 점점 약해지고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임종 앞에 서 있는 72세 되신 할아버지가 이 손자를 붙들고 너무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할 것인데……, 나는 살만큼 살아서 이제 가도 되지만 너는 이제부터 귀한 생을 살 것인데 12살에 이렇게 먼저 가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울었습니다. 이 어린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할아버지, 아닙니다. 나는 가장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2년 동안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또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12명 친구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12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처럼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저는 가장 행복한 하나님의 아들로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손자를 붙들고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이 간증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탈 벤 샤하르(Tal Ben-Shahar)라고 하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지금 하버드 대학 현직 교수인데 최근에Happier라고 하는 책을 내놓았는데요, 타임즈나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긍정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2002년에 이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학생이 8명이었습니다만 2년 후에는 강의실에 무려 855명의 학생이 등록을 합니다. 그만큼 명 강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강의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일의 성취를 위하여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 내일의 성취를 위하여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 오늘의 행복이 없다면 내일의 행복도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의 6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다워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너무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남이 죽거든 나도 죽을 줄 알고, 남이 슬프거든 나도 슬플 줄 알고, 슬픔과 기쁨을 인간적으로 수용하라. 보통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평범하게 인간다우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다우면 다 수용될 수 있는 건데, 자신을 뭘 그렇게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겁니까. 인간은 인간다워야 행복할 수 있다. 둘째,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의 교차로에 있는 것이다. 어떤 행복의 조건에도 의미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의미를 깨닫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행복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미의 문제를 강조합니다. 셋째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마음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재앙으로 보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삼으라. 그것이 행복의 길이다. 넷째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생각은 항상 단순해야 한다. 집중적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다. 과거에 매이지도 말고 또 불확실한 미래에 너무 매일 것도 없다.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다섯째, 마음과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그래서 운동도 하고 식생활 습관도 바로 잡아서 몸을 건강하게 함으로써 마음도 건강해지고 마음이 건강함으로 몸도 건강해진다. 몸과 마음을 별개시하지 말고 함께 건강하게 그렇게 가꾸어 가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뿐더러 감사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한 끼의 식사를 하면서 한 사람을 만나면서 미소를 잃지 말고 늘 고마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과 그 감사를 표현하는 그런 작은 감사에서 행복을 찾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분의 말씀하는 골자는 이것입니다. 현재의 간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신앙인의 간증이 있을 때, 비로소 미래도 영원한 세계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과거의 아픔과 고통, 미래의 불안, 이것을 극복하는 현재적 신앙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먼 미래만 바라볼 것도 아니고 문제는 현재, 현재에 깨닫는 현재적 신앙 간증이 있어야 미래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28)"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는 것이 이 문장의 주문장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헬라어로 '오이다멘' 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안다' 하는 말입니다. 현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다. 나는 알고 나는 이렇게 간증하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사랑을 아는 자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알고 있어요. 사랑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깨끗한 마음을 만듭니다. 사랑은 단순하게 듣고 단순하게 봅니다. 사랑 외의 세계를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또한 사랑은 기적을 믿습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서 생각지 못한 세계, 밝은 미래, 예측하지 못했던 큰 세계가 있음을 그 기적을 믿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매력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사랑을 압니다. 사랑을 알고 보니까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또 하나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압니다. 그 큰 소명을 들으면서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구원의 놀라운 경륜과 큰 시나리오를 봅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 속에 나의 한 역할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큰 섭리 속에서 나 지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 큰 뜻 안에 내가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과거를 봅니다. 잃어버린 과거는 없습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미래를 봅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나 자신의 현실을 봅니다. 이 현실이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간증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감사의 차원을 이렇게 영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If, Because of, in spite of . If란 말은 조건적입니다. 이리하면 감사하고 저리하면 감사하겠다고 하고, 일생동안 이리하면 감사하겠다고 이거 일생동안 감사 못합니다. 또 하나는 Because of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러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저러하기 때문에 감사한다. 이것도 중단됩니다. 참된 감사와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의미가 있으니까. 의미라고 하는 초연한 새로운 진리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안 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어요. 그런고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은총을 대할 때에 그는 감사할 수 있어요. 그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에요.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본래적 의미를.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의 능력에 있고, 그의 지혜에 있고, 그의 사랑에 있습니다. 시발점, 그 근본의 오리지널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나고 사랑 안에서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쉽게 말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큰 사랑은 네 살 전에 받았습니다. 네 살 전에 세상에 태어나서 애지중지하는 그 귀한 사랑을 받고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 살 전의 일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만일에 네 살 전에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특별한 사람입니다. 혹 여러분이 어머니의 젖 먹던 생각이 납니까? 그 사람은 5살까지 먹은 사람이에요. 그 소중한 것, 그 소중한 사랑은 기억에 없어요. 이건 믿음이에요. 그러나 사실이에요. 사랑 받았어요. , 받구 말구요. 누구의 사랑이라도 다 사랑을 받아서 오늘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내가 모르고 있는 거죠. 근본적으로 생명에는 사랑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함께 하고야 생명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표면을 보지 말고 깊은 세계를 봅시다. 현상을 보지 말고 의미의 세계를 봅시다. 거기엔 하나님의 뜻이 있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었어요.

 

또 하나 우리가 간증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Final Triumph입니다. 마지막의 최종승리입니다. 저 끝에 가서는 사랑이요. 저 끝에 가서는 승리요. 저 끝에 가서는 영광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을 조금 깊이 살펴보면 원문과 달리 번역된 것은 우리말에 주어가 빠졌다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했는데 누가 이루냐는 것이죠. 헬라어에는 '호 데우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도한다고 하는 그 주어가 우리 여기선 지금 우리 문장에서 잠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래서 빌립보 112절에선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164절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씌움에 합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인의 합당한 악에 지으셨느니라."

 

여러분, 악을 너무 그렇게 원망하지만 마세요. 어떻습니까? 악한 사람 덕에 잘된 사람 많아요. , 그거 못된 친구 덕에 바로 된 사람도 많고, 그 많은 역경 때문에 오늘의 내가 된 것도 사실 아닙니까? 그런고로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시작했다는 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모든 일이 시작이 됐어요. 그런가하면 현재는 선으로 향하는 과정입니다. 하나의 프로세스입니다. 잠깐 마음에 안 든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왜 저런 일이 있을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꼭 필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없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있어야 할 일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다 큰 의를 이루고 큰 선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이건 과정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는 이런 진리를 조금 인정을 합니다. '과거에 어려운 일, 뭐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이렇게 됐다' 하는 생각을 좀 합니다만 현재 당하는 일을 통해서 미래에 이루어질 선에 대해서는 바로 깨닫는 사람이 많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좀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니 이것이 다 필요한 거라고, 저 앞에 있는 Final, 최종 승리를 위하여, 최종 의()를 위하여 이것은 있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난 늘 생각도 하고 혼자서 웃곤 합니다만 혹, 여러분, 전쟁영화를 보십니까? 혹은 서부활극 같은 걸 보십니까? 총을 쏘고 대포가 터지고 폭탄이 터지고 난리를 치면 모두가 다 손에 땀을 쥐면서 걱정을 하면서 구경을 합니다만 저는 걱정 안 합니다. 왜요? 저 주연배우는 안 죽게 돼 있으니까. 절대로 안 죽어요. 안 죽도록 시나리오는 돼 있어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반전 반전해서 결국은 파이널, 해피엔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의 고통은 앞에 있는 선()을 위한 과정일 따름이요, 또한 때로는 모순도 있고 불의함도 있지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신앙 간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십니다. 시편에서는 계속 강조합니다. 욥기에서 말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잠깐 이해가 안 되더라도 묵상하며 기다리세요. 곧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악이 굴러, 돌고, 돌아서 반전, 반전해서 역전하여 하나님의 선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증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런고로 우리는 해피엔드를 믿습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믿습니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삼대 테너가 있지 않습니까? 그 테너의 한 사람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압니다. 이분을 특별히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는 41세 때 1987년 오페라 라보엠을 연습하다가 졸도합니다. 혈액암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머리칼이 다 빠지고 손톱이 다 빠지는 그런 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를 아끼는 온 세계의 호세 카레라스의 팬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했고 저도 이 방송을 들었습니다.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호세 카레라스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온 세계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는 이 병을 이기고 나와서 다시 노래를 부릅니다.

 

처음 노래를 부를 때, 그 음정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점점 나아졌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와서 부를 때 보니까 아 괜찮아졌어요. 많이 건강해졌어요. 왠지 그의 노래 소리에는 우리 마음에 부딪쳐주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울리는 바가 있습니다. 그는 투병 중에 온 세계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기도를 몸으로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증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큰 은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믿습니다. 신앙인은 알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보고 있습니다. 신앙인을 매일매일 느끼며 살아갑니다. 아니 간증하며 삽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지난날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었고 오늘이 합동하여 내일의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간증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지내온 것 뭐, 이런 일 저런 일, 건강과 질병과 마음에 안 드는 일, 마음에 드는 일,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마음에 안 드는 일도 많았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큰 기쁨도 있었어요. 더 큰 은혜로운 사건들도 있었어요. 여기서 우리는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고 오늘의 현실이 다시 한 번 합동하여 미래의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함께 작용을 해서 역사해서 새로운 세상을 이룰 것입니다. 새로운 용기로 이제 미래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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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간증 롬 8:31~8:39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널리 알려진 유대인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Viktor E. Frankl)박사의 생생한 간증으로 그의 소중한 경험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가서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 앞에 섰습니다. 그는 알몸이었습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홀랑 벗고 알몸으로 비밀경찰 앞에 섰습니다. 직업도 빼앗겼고, 의사 자격증도 빼앗겼고, 가정과 아내와 옷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밀경찰은 그가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그것도 풀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시계를 풀어주었습니다. 조금 있더니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뽑아 놓으라고 그랬습니다. 한평생 끼고 있던 결혼반지도 뽑아서 주었습니다. 마지막 결혼반지를 빼앗기는 순간, 번개 같은 생각이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게슈타포여, 나에게서 당신이 빼앗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나에겐 아직도 남아 있소.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자유라는 것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내 마음에 평화는 내가 지키는 거요. 당신이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자유, 이것은 내 것이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거 아닙니까?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물질이야 있다, 없다 하는 것 아닙니까? 건강도 있다,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심령 깊은 속에 있는 자유함, 이건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제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 준 교훈 중에 일생동안 잊지 않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옛날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에 이 말을 한번 했더니 얼마 전에 어느 젊은 목사님이 절 만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가르쳐 준 그 말을 나는 일생동안 내게 주신 좌우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 그게 뭔가? 나도 다 잊어버렸는데 무엇인지 말해 보게." 그랬더니, "목사님 아버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문제시 하지 아니하면 문제가 안 된다.' 그겁니다."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내가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저가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나는 저를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아무리 나를 괴롭히려고 세상이 이렇게 나를 들볶아도 내 마음에 평안은 내가 조용하게 지키는 겁니다. 자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가 내면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올시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논리를 전개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전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정치적, 경제적, 혹은 가정의 여러 가지 많은 권위주의에 눌려 살았는데 여기서부터 해방되어야겠다고, 아니 해방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난에 쪼들리는 사람이 돈 벌었으니까, 맨 밑에 있던 사람이 이제 높아졌으니까, '자유다' 외쳐보는데 아니라는 것이죠. 익명의 권위, 보이지 않는 권위에 어느 사이에 노예가 되어 버렸더라는 겁니다. '익명의 권위' 대단히 소중한 용어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에서는 개인이라는 게 없고, 개인의 자유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끌려가며 사니까요. 그러다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순간, 개인이 생깁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식이 생깁니다. , 그런데 이 자기 자신이 없다가 있어지는 순간 자기가 자기에게 노예가 되더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있어요. 돈 없다가 돈 있으면 자유가 아니에요. 그저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가 억압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내가 자유인이더냐 말입니다. 그게 아니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세심히 비판하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째, 이익이라고 하는 것. 거기에 노예가 되었어요. 개인이 없을 때는 그저 끌려가며 살면 됐지만 이제 내 것을 챙겨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익에 눈을 뜨게 되요. 어떻게 하면 이익을 더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얼마를 가질 수 있을까? 돈 벌기 위해서 혈안이 돼 버렸어요. 돈 귀신에게 홀렸어요. 정신없어요. 그래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을 하고, 뭘 하고, 뭘 하고 해서 돈만 벌면 내가 원하는 완전한 자유가 올 것이라고 착각을 했어요. 아니에요. 돈이 생기는 순간, 자신은 엄청나게 비참한 인간이 돼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익과 경제성의 노예가 되고 시장성의 노예가 되요. 그래서 자꾸만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이보다 저게 더 좋고, 저보다 이게 더 좋고 상대적 부, 상대적 빈곤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정신이 없어요. 그리고 요새 와서 가장 문제되는 거 하나 있지 않습니까? 여론의 노예가 되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해서 그래서 신경을 씁니다. 젊었다고 하나 늙었다고 하나……,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어제 저녁에도 어떤 분을 모임에서 만났는데 한 10년 만에 만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분이 나한테 인사를 하는데 잘 못한 것 같아요. 딱 인사하더니 "목사님, 건강하게 보입니다." 고거까지는 잘했어요. 그 다음 얘기가 "왜 이렇게 머리가 많이 빠졌어요?" 그랬어요. 아하, 이 사람, 이거 인사 잘 못하는군……. 그렇잖아요? 그 말 한마디 그거에, 그래 뭐 내가 할 말이 없더라구요. 내가 하고 싶은 말 딱 하나 있는데 '당신은 더 빠졌수' 그러려다가 그럴 수도 없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은 했습니다만 속은 '당신은 더 늙었어.' 그래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거 보세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이거 신경 쓰는 거 그만합시다. 신문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형수술이라는 게 요새 유행 아닙니까? 이 가운데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성형수술 한번 이상 한 사람은 안 한 사람에 비해서 자살률이 3배가 높답니다. 이해가 갑니까? 아예 손을 안댄 사람은 그렇거니 하고 살아요. 대기 시작한 사람은 신경을 쓰는 거예요. 내가 이거 잘했나, 못 했나, 남들이 뭐라고 하나, 뭐라고 하나…… 마지막에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참 비참한 거예요. 여론의 노예가 되는 것, 요새 보니 여론 때문에 사람들 신경 많이 씁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나? 아 그거 좀 잊어버리고 살면 안 돼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요? 한 세상 그리 살다 가는 건데 뭐 좀 초연할 수 없겠습니까? 여러분, 진정한 자유가 뭡니까? 참 자유는 내면세계에 있고, 그중에 가장 중요한 자유는 양심의 자유예요. 그리고 또 중요한 건 신앙의 자유예요.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자유할 때, 이보다 더 귀한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자유인의 간증이 오늘 성경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32절 말씀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었다는 얘기죠. 주었다면 받아야죠. 그런고로 받은 자의 마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를 쳐다보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절대적 풍요의식, 바로 그것이 믿음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당연히 주시죠. 안 줄 리가 없지요.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고 손자 손녀들이 있습니다만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주실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용서하실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줄 것이다. 자신만만한 거예요. 아니 나는 다 받았다. 아니 더 필요가 없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았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 그 첫째가 죄사함이요, 사죄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이 죄의 속박입니다. 죄를 지은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죄를 다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의식에 삽니다. 아니 감기만 걸려도 저주받은 것 같아요. 아시겠어요? 그런고로 죄의식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았어요. 최고의 자유는 죄사함 받은 거예요. 그리고 죄책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요. 저주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로마서 8장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815절에 말씀합니다. 우리는 양자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양자의 영을 받고, 양자의 특권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특권, 이것이 바로 자유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은사를 주십니다. 여러분,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제 그 자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다 은사적인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하는 일은 다 그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그저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고, 또 혹은 잔소리를 한다 합시다. 혹은 때로는 매를 친다고 합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은사입니다.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은사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자유인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34)."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누가 나를 심판하리요. 누가 나를 비판할 것이냐구요. , 굉장한 자유인의 간증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저주의식과 비판의식과 열등의식에 삽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얘기가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도 사랑이요, 질병도 사랑이요, 이러 이러한 일도 사랑이요. 뜻대로 안 되는 것 더 큰 사랑이에요.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임종 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한평생 내가 기도했습니다만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내 소원대로 됐더라면 아주 망가질 뻔 했습니다. 내 소원대로 안 된 것을 감사합니다.' 왜요? 그게 선물이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소원대로 되면 됩니까? 안되죠. 이대로 내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작품이요 최고의 선물이다. 그것이 자유의식이요. 자유인의 의식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37)" 그렇죠. 그가 나를 사랑하니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어요.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걱정할 것이 없어요. 그가 나에게 영원한 나라를 약속해 주었으니 내가 오늘 이런 일 저런 일로 마음 쓸 필요가 없습니다. 최종 종착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니까 말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넉넉히 이기는 이 사랑의 뿌리는 첫째는 용서요. 그 다음에는 대속이요. 그 다음에는 은사요. 그 다음에는 사명입니다. 이 사랑 안에 내가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인도의 간디(M.K. Gandhi)의 중요한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에 부모님과 이주해 와 살면서 영국에서 자랐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영국 아이들은 커요. 체구가 크고 인도사람들은 체구가 작아요.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하기를 '영국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먹어서 저렇게 크구나. 우리는 채식을 하니까 이게 빈약하구나. 그렇지, 우선 좌우간 몸부터 커야 하겠다. 그래야 뭐가 되지.' 그래서 몰래 몰래 고기를 사 먹었어요. 집에선 안 먹는 고기를 밖에서 자꾸 사 먹다 보니까 돈이 모자라서 아버지의 지갑을 훔쳤어요. 아버지의 돈까지 훔쳐가면서 고기를 사 먹었고, 또 영국 아이들이 하는 그대로 담배도 피우면서 육체적으로 먼저 건강해야 뭔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더랍니다. , 그래 육체적으론 좀 건강해지는 것 같은데 양심이 편하질 않아요. 못할 짓을 많이 해서 너무 괴로워서 할 수 없이 1년 후에는 아버지에게 장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동안에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댔고 고기를 사 먹었습니다. 뭐 어쩌구, 어쩌구 했습니다. 대단히 잘못했다는 편지를 썼더니 아버지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그 아들에게 그저 노발대발하며 크게 꾸짖을 줄 알았는데 웬걸요.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그 마음엔 착잡합니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하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끌어안으면서 '잘못된 줄 알았으니 됐다. 다시는 같은 일을 하지 마라.' 거기서 그는 용기를 얻고 생각했습니다. 사랑, 사랑의 최고는 용서다. 용서만이 자유함을 주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비폭력적인 사람으로 일생을 살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요. 넉넉히 이기는 자요.

 

빌립보서 4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것이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자유인만이 할 수 있어요. 그 자유의 뿌리는 용서입니다. 여러분, 용서하는 자가 자유인이요. 용서받는 자도 자유인이요. 사랑의 뿌리는 용서에 있고, 용서받은 감격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해방은 방종이 아닙니다. 무질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십자가 안에 감취어진 엄청난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받아들이면서 사죄 받은 자의 감격, 용서받은 자의 감격, 엄청난 사랑을 받는 자의 자유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또다시 다른 사람을 자유케하는 능력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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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회복시키소서 롬 8:19~8:27

 

모든 사람들은 다 각자 나름대로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어떻게 회복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론]

로마서 8:22 피조물이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에게는 탄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 만드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아픈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탄식은 비명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에 지르는 비명, 사람들은 비명을 안고 삽니다.

 

목회자는 많은 인간들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거의 90%정도가 매주70시간 정도지냅니다. 중노동입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가족하고 지낼 시간이 없어 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가 시간을 못내 주니까 가족과의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75%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안고 삽니다. 그 스트레스는 살고 죽는 문제의 스트레스입니다. 엄청난 위기입니다. 목회자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데 위로와 격려를 받을 기회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목회자의 75%는 거의 친구가 없습니다. 왜 친구가 없을까요? 시간이 없고 만나도 대화의 주제가 틀리기 때문에 점점 친구가 떨어져 나갑니다. 외롭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이야기 할 사람이 없습니다.

 

50%는 생계 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약50%100만원 미만의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너무 열악합니다. 한국교회 90%이상이 약 300명 미만입니다. 너무 어렵게 사는데 믿음으로 사니까 문제가 없을 뿐이지 어렵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신자들로 받는 문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목회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이런저런 행동도 하지만 지나친 기대가 목회자들로 난처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함께 많은 기도가 함께 가야합니다. 기대만 하면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주셔야 합니다. 목회자는 아픔과 탄식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탄식하기 때문에 속으로 상처를 입고도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처와 아픔은 목회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한 모든 피조물에게 있다고 합니다.

 

1. 왜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까?

첫째, 로마서 8:29 허무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탄식하며 사는 문제는 인간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벨인데 숨을 쉰다는 헤벨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숨을 쉬고 들이 마십니다. 들이 마시는데 내 뱉지 못하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허무는 숨에서 나옵니다. 숨이 끝나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탄식하며 살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로마서 8:21 썩어짐 때문입니다. 썩어졌다는 것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사람 앞에 있을 때는 멀쩡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설수록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나 하고 탄식해 합니다. 상처를 줄려고 준적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툭툭 던지는 말이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데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것을 나중에 압니다. 상처를 주는 것은 조심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만 결국 속에 있는 죄악성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는 것도 우리가 보기에는 상처도 아닌데 괜히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 받는 것도 인간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상처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죄악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일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 로마서8:22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아나니. 인간이 가진 생의 절망 때문입니다. 안 되는 것 때문에 고통하고 절망합니다.

 

2. 이 탄식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살 것인가

로마서 8:26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문제와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아시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뿐 아니라 그분이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손으로 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누구도 일으켜 세워줄 수 없습니다. 그냥 들어줄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다 씻어 내주는 거룩한 신령한 강물입니다. 눈물이 흐르면 우리 속에 상처를 다 씻어내 준 것입니다. 놀라운 위로와 치료의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그분이 눈물과 상처를 다 쓸어버리시고 하나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기 전에 마음을 먼저 바꾸십니다. 안 되는 사업, 안 되는 가정, 부부관계 여러 가지 문제를 아무리 기도해도 환경은 안 바꾸어 주지만 마음을 바꾸면 그 다음에 환경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다 했지 환경을 바꾸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은혜가 임하면 환경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환경보다 크고 문제보다 크신 그분이 우리에게 힘을 더하십니다.

 

일곱 뿔을 가지신 그분이, 일곱 눈을 가지신 그 분이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고난으로 믿음이 자라 하나님 일을 합니다. 교회는 본래 고난 속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애통하며 기도해야 됩니다.

 

한국 교회가 평안할 때는 부흥된 적이 없습니다. 늘 고난 속에 애통하며 탄식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시대에 필요한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시키십니다. 19071월 평양에서 대 부흥운동이 일어나 그해에만 삼심만의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참담한 시대였습니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고종의 민비가 죽고, 고종이 퇴위 당하였습니다. 민족의 고난을 당할 때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 일정 시대 해방 후 혼란 가운데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교회가 평안해지니까 고난과 가난문제가 사라지고 인권문제 없으니까 서서히 교회가 침체하여 오늘까지 온 것입니다. 세계교회도 다 고난 받는 교회만 부흥합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공산당에 찌든 가운데 나라입니다. 러시아의 교회는 구소련 체제들 군부독제에 시달린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교회를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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