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갈 5장

스네어 2013. 5. 18. 09:19

그리스도인의 자유(갈 5:1-15)

 

예수 믿는 것은 우리가 조금 착해지고 개조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소유가 좀 늘어나는 것,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내 죄는 십자가 위에서 처단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용서해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서 죄를 십자가에서 처단했기 때문에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또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이것이 예수 믿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면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 나님께 속한 빛나는 아름다운 것들 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우리의 생애 가 끝난 다음, 우리들은 이 영광의 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빛나는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서 마련하신 엄청난 축복들을 영원토록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들 중에 가장 빛나는 상속이 있다 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형상이 내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식이라면 아버지의 집 얻는 것 보다, 아버지의 패물을 갖는 것 보다, 아버지의 재산을 갖는 것 보 다 더 큰 상속이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상속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날마다 이루어지고 우리가 천국에서 눈 뜰 때, 완전하게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있는 영광을 경험 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주께서는 이제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까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갈라디아서 5 장, 6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누릴 가 장 첫 번째 삶의 모습은 '자유'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면 형제, 자매로 만나면서 이 자유를 누립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들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 집에 같이 있을 수 있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손님입니다. 우리가 그 손님을 환대 합니다.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마련해줍니다. 그렇지만 손님은 자유롭게 냉장고 문을 못엽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자유가 없습니다. 규칙 속에 삽니다. 또 다른 한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없는 일이지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규칙 속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러 갔다 돌아온 아들은 오자마자 혼자 난장판을 피웁니다. 신발을 제 마음 대로 내던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 도 제 마음대로이고 그리고 냉장고 문 여는 것도 제 마음대로 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스탈린 같은 독재자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고 그의 권위에 매여 서 숨도 제대로 못쉽니다. 그런데 스탈린 딸은 그 앞에서 해롱거리며 아빠 손잡고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더라구요.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의 자 녀로 엄청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다시 하지 말아야 될 것 있습니다. 종의 멍에를 매면 안 됩니다. 우 리들이 과거에는 죄의 종노릇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 리에게서 그 죄의 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규정하는 율법 의 그 얽매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 죄로 정하는 율법이 다시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래도 조금은 해야되지 않느냐 율법을 행해야 된다.' 아니, 율법 범죄함을 정죄하는 것을 모두 없애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적으로 율법을 없애버린 자유를 이야기하자 '그러면 그렇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 만은 지켜야 될 것 아닌가 아브라함 에게 주신 약속, 할례는 지켜야한 다.' 그렇게 꼬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할례는 특별히 이스라엘 본토 사람들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습 니다. 왜냐하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기 때문에 아픈 것도 모를 적 에 할례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방 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 외과적인 수술인 할례하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피했습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 리가 받는 구원과 너희의 구원은 다르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이 할례를 통해서 구원이 왔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는 우리 구원의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네가 할례 하나만 받은 것 그것을 자랑하는가 아니다, 원래 율법을 지키려면 모든 율법을 다 지 켜야 한다. 할례 하나만 아니라. 너 희들이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면 너희들은 그리스도에게 서 끊어진자로다. 주께서 나를 위해 서 행해주신 그 일을 모독한 자이고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령 안 에서 믿음으로 좇아 우리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것을 누리고 살고 소망 하고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삶 의 내용은 사랑으로 좇아 믿음으로 봉사하고 믿음으로 수고하는 것이 지, 수고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 사랑 때문에 나도 모르 게 봉사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누룩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하나만 딱 지키라고 해놓고 사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 하나가 반죽에 붙으면 그대로 있지 않고 계속 부풀어져 반죽을 커다랗게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적은 율법 하나만 지키라는 말에 속지 말아라.

 

그것은 결국 다시 율법으로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라. 야, 너희들 이 할례 받은 것 자랑하느냐 아예 거세해라."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 그러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자유를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사 도 바울이 또 말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 유하리라."(요8:36)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심으로 우리에게 완전 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나는 자유자 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도 내가 인생을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간의 자유를 선포할 때 집회 결사의 자유, 주거 이 전의 자유, 종교와 생각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보다 더 엄청난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그 죄를 규정하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요 그러면 자유했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아도 된다는 말인 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13절부터 15절까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는 자기 욕심껏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는 자유입니다. 우리들은 자유를 마음대로 방종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타락한 본 성의 충동에 따라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자유가 있습니까 탕자 의 비유에서 보면 탕자는 아버지께 졸라서 자기 재산을 갖고 아버지 집을 나가는 자유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자유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자유는 이런 소모적인 자유, 소극적인 자유, 도피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적극적입니다.

 

탕자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탕진 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 떠난 그 삶은 절망이었고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결심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다시는 내가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집에 그 품군으로라도 써달라고 해 야겠다.' 그리고 그는 돌이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에게 집을 나가는 자유도 자유이지 만 돌이켜서 아버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자유입니다. 탕자는 집에 돌아 갑니다. 맨발로 누더기를 걸쳐 입고 아버지 집에 갑니다. 그 세월과 그 고생이 그 얼굴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누더기 입은 그 사람이 이 집 아들인줄 몰랐습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저 동구 밖에 그 아들이 나타나자 상거가 먼 데, 아직 거리가 많이 먼데 알아봅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 눈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나이도 뛰어넘어서 그 아버지는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 고 뛰어 달려갑니다. 뛰어 달려가는 이 노인의 발이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덥석 껴안습니다.

 

껴안은 그 가슴이 사랑입니다. 더러워질 때로 더러워진 그 목에 입을 맞춥니다. 맞추는 그 입이 사랑입니다. 온통 사랑입니다. 여러분, 탕자 가 외롭게 집을 나가는 것이 자유라 면 그처럼 풍성한 아버지의 사랑의 품속에 뛰어드는 것도 자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주 밖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나가서 외롭게 발을 떠는 것도 자유라면, 내가 내 잘못을 깨닫고 우리 주님 앞에 돌아 서서 주님의 품속에 뛰어드는 것도 자유입니다. 적극적인 자유입니다.

 

긍정적인 자유입니다. 생명의 자유 입니다. 풍요를 향한 자유입니다.

 

우리들은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자 유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뛰어드는 자유, 아버지와 함께 영원 을 기뻐하는 자유, 아버지를 즐기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마다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즐기는 자유예요.

 

 

그런가하면 자유의 두 번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입니다. 내가 자유인이니까 내 것을 먼저 선점하지 않습니다. 내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자유입니다. 섬기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섬김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종 노릇 하는 것, 어떻게 보면 남편은 아내의 종입니다. 직장 에서 화나고 분이 차올라와 사표 내 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누라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사표를 다시 구겨놓고 상사의 명령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종처럼 그렇습니다. 과거 같으면 그래도 월급봉투라도 한 달에 한번 가져다주면서 "내가 벌어온 것 받아" 하며 목에 힘 줄 수 있는데, 요즘은 온라인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명세가 다 드러납 니다. 세상에 그런 종이 어디있어요 IMF, 그 어려운 시절에 남편들 이 아내들의 종입니다. 설것이 먼저해 주세요 자유가 생깁니다. 설것이 하면 자유를 누릴수 있는 길을 열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광산교회가 대한민국에서 이것 하나만 바로 선다면 교회를 바꾸고 이 사회를 바꿀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이 섬기 는 직분이고 종노릇하는 직분인줄 알고 실천한다면 한국 교회에 혁명 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자유니까, 율법과 상관없단 말인가 무 율법(無律法)가 반율법(反律法)인가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 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면 그 다음 에 하나님을 향한 모든 계명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 지 다 이루었습니다. 그것 뿐만 아 니라 "네 이웃을 사랑하면..." 5계 명부터 10계명까지 그 안에 다 포함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반율법주의자나 무율법주의자가 아니라 하나 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자유의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를 얽매어 놓은 모든 죄와 그리고 그것을 죄로 규정하는 규범인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는 악에게 지지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유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는데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이런 적극 적이고 능동적이고 온전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엄청난 상속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날마다 이루 어가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이 자유를 이 땅에 서 누리고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사용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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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갈 5:16-26)

 

장거리 경주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심판에게서 남은 바퀴수를 듣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합니다. 이렇듯 신앙에도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 점검이란 바로 성령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마3:30), 신앙에도 그 열매의 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성령의 사람들이며, 성령과 교통하고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으니 곧 성령의 사람, 성령께서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성령의 열매를 통해 우리는 우 리 자신의 신앙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첫째,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함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향한, 곧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독생자 예수의 죽음심으로 인간에게는 참 부활과 죄에서 해방이 선포되었으니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요3:16). 하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 의 동기는 따라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시기심이나, 공명심으로 인간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발견하게 되며, 비로소 사랑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 에게는 희락과 화평이 넘쳐납니다.

 

인간의 참된 기쁨과 평화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환경의 변화로 부터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참된 기쁨과 평화는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거할 때만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만이 우리는 참된 감사와 기쁨을 맛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원리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히 폐하지 않으며, 제일입니다(고전13:13).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인 그는 바로 사랑을 알 며, 사랑함으로 희락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둘째,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갑니다. 성령께서 그로 인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성실하시며 섬세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인가를 압니다. 그래서 그는 환난과 시험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래 참 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예수님의 재림을 오래 참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의 성실하심을 알기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구원을 오래 참으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인생에 대해 오래 참고 계심을 알기에 우리들은 자비와 양선을 배웁니다. 또한 주님의 깊으신 뜻을 알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오래 참으며, 자비와 양선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주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는 온유와 절제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십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고집불통이 던 우리의 완악함을 깨우치고, 계도하십니다.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전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 한 사람,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또한 절제가 성령의 열매인데, 절제란 자기절제를 말합니다. 자신을 제 어하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자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을 제어 하며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께 의뢰하십시오. 성령의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열매로 여러분은 결실을 맺게 되실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성령의 열매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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