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비유들
마 13장 10-17
마태복음 13장은 일단 마태복음의 1부를 끝마치고 있는 부분입니다. 14장부터는 심판에 대해 심도있는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13장은 마태복음의 1부를 끝맺음하면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 비유들을 하나의 주목할 만한 장안에 명확하게 모아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비유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비유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견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성경을 보면서도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상적으로 한 교회 한 목사님 안에서 말씀을 배워왔다면 다른 이견들이 없을 것입니다.
비유에 대한 말씀도 정상적으로 듣고 배웠으면 다른 이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이 내일 들으면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모습니다.
요즘 방송 설교들 많이 나옵니다.
좋은 점들도 있지만 방송설교의 단점은 너무 많은 신학의 복합 속에서 말씀의 혼란을 줄 수 있음이 저는 안타깝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해서 보지마세요 하면 저는 실력도 없는 것이 이런 느낌이 있어서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송설교는 분명 여과 될 필요가 있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상황 속에서 여러분을 가장 잘 아는 목자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방송설교는 누구나 돈만 내면 할 수 있고 이단들도 나와서 설교할 수 있고 신학이 검증되지 않은 분들이 나올수 있다는 것을 덧붙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송설교를 들을 때에 좀더 검증을 한뒤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설교는 그냥 설교 자체에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본문 비평, 삶이 녹아 있어야하는 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비유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비유라는 것은 가르칠 목적으로 두 개의 주제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이해 시키는 것입니다.
비유는 수세기동안 이런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세부 사항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라는 주장이 있었고 그것이 풍유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게끔 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풍유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명확한 예수님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른 상징을 가지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이것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그러나 상징적인 것이 유대 시골뜨기, 갈릴리 사람들에게 별무리가 없이 다가와야 하는 해석이라면 비유라는 것은 풍유가 아닌 비교라는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풍유와 다르고 다르게 알아야하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풍유적인 해석을 함으로 신학 또한 혼란한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말로 ‘마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헬라어에서는 다른 뉴앙스를 가지게 되는데 ‘파라볼레’ 비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이 던지기’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이가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때 지혜로운 어머니는 아이를 향해 이야기를 합니다.
가령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면 옆집아이의 예를 들어서 옆집의 철수가 돈을 훔친 것이야 그런데 그 아이를 그냥 잘했다고 했더니 그 아이가 나중에는 더 큰 도둑이 되었단다. 그런데 영희 집에서는 영희 어머니가 같은 상황에서 그 아이를 혼을 내었지 그랬더니 그 아이가 지금은 너무 바른 아이로 성장되고 있더라.
아이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한가지 이야기를 두가지 이야기로 듣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만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 이것이 비유라는 것입니다.
비유 장 마태복음 13장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가 그것을 듣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셨는데 비유는 사람의 주의를 끌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며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을 다룰 때도 주의를 끌 수 있는 대화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쳤습니까?
이 질문은 10-17절에 나오고, 34-35에서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1절을 봅니다.
회당에서 바닷가로 이동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 점점 적대적으로 되어 갈수록 더 공개적인 장소로 이동해 나아가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반응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칫 예수님 혼자만의 고립을 가쳐 올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중을 매료시키는 예수님의 비유의 탁월함은 그들을 더욱 공개적인 장소로 나아올 수 있게 했고 그것은 마치 우리 할머니들이 약장수들만 오면 그곳에 나아가 경배하는 모습과도 같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비유가 계시의 수단이었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가치있게 여기 셨다는 것입니다.
35절에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그러나 비유는 보도록 허락된 사람들을 위해서만 계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16-17)‘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비유는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만 배부른 사람들 너무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진리는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지 않는 사람들, 증오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들에게는 오히려 그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어도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2절에 이 말씀은 불공평해 보이지만 이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그 근육은 쇠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육을 사용하면 더 활발한 근육이 될 것입니다.
비유는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어두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비유라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에 볼 수 있는 것처럼 무리(초청함을 받았으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처럼 들리지만 제자들(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신비를 보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세 번째 이유는 비유가 사람들에게 결단을 하도록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번뜩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번뜩임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번뜩임 그것은 받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보면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이는 보고... 듣고...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움이라’
예수님은 비유로라도 그들을 깨닫게 하고픈 간절함이 있는데 그들이 거절함에 지금 좌절된 사랑의 외침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왜 그 비유들을 여기서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는 마태복음의 전체적으로 보여지는 특징과도 같이 명확성과 단순성을 위해 비유들을 모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13장 안에는 일곱 개의 비유가 있는데 그중에 세 개는 마태에게 특별히 중요하며 그래서 그는 그 비유들을 예수님의 해석까지 제공을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천국의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통해 어떻게 그처럼 사람들이 양극단으로 나뉘는 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천국자체가 엄청난 신비라는 것을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엄청난 분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36절을 읽어 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분리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13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가장 큰 것은 분별하고 자신 앞으로 나아오라는 강력한 호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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