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마 25:1~25:13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예배 시간을 정한 후에는 제 시계가 잘못 되었으면 몰라도 정한 시간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예배 지만 제가 시간을 지킬 수 없는 예 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결혼식 예배입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는 미 리 준비시켜서 신랑과 신부가 예배 시작 전에 나와 있다가 정각에 시작 합니다만, 간혹 신랑이나 신부 중 어느 한쪽이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예배는 한 사람으로 도 예배를 시작할 수가 있지만 결혼 식만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진행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본 의 아니게 늦어지고, 사실 목사의 책임은 꼭 아니지만, 하객에게 얼마 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성품이 아주 칼칼하신 분이신데 결혼식 주 례를 맡았다가 신랑이나 신부가 늦어지면 아예 주례를 그만두고 밖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그 목사님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새 가정을 출발하는 첫 발자국부터 연착이 되면 그런 가정은 기대할 것 이 없다는 해석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그럴 만한 권위가 없어서 신랑 신부가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례를 맡은 목사로 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본 인들도 물론 그렇겠지만 사실 주례자는 더 애가 탑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혼인잔치는 하 루뿐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계속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예식은 낮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나 밤에 거행하는 것이 보통이 었다고 합니다. 신랑 되는 사람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러 시 간을 즐기다가 한밤중에 신부의 집 을 향해 행진합니다. 한편 신부는 신부의 친구들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는 자기 의 친구들인 들러리들과 함께 나아 가 신랑을 영접하여 등불을 켜고 신랑의 집을 향해 떠나는 연등 행렬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말씀의 경우처 럼 신랑의 행차가 의외로 늦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하늘의 별빛은 하나둘 더 빛나기 시작합니다. 입 빠른 신부의 들러리 가운데 한 사람이
"혹시 이 거 우리 바람 맞은 거 아냐?"
"중간 에 샛는지도 모르지"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들러리 처녀는 한 술 더 떠 서 신부에게
"야, 오늘밤은 아무래 도 신랑이 안 올 것 같으니까 그냥 자자구"
이렇게 부추깁니다. 이렇든 저렇든 밤이 점점 깊어가니까 신부 의 들러리 처녀들은 긴장이 풀리고 졸리기도 해서 하나 둘 잠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까 열 명 의 들러리 처녀가 졸음을 이기지 못 하고 그만 다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었는데 밤의 고요를 깨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 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 라."
그때 미리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 로운 다섯 처녀는 잔칫집에 등불을 켜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 섯 처녀는 뒤늦게 시장에 가서 기름 을 등에 채워 가지고 잔칫집에 도착 했지만 이미 잔칫집의 문은 닫힌 후 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안타깝게 문을 두드리며 문 을 열어 달라고 애걸했지만 이미 닫 혀진 문에서 들려오는 신랑의 목소 리는
"나는 당신들을 전혀 알지 못 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 유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마태 복음 24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4 장을 소위 '종말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될 일에 대하 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장 3절 이 하를 보시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 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사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이 말씀을 더 실감할 수 있는 천년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계속해 서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중에 가장 중요한 결론 의 말씀을 24장 44절에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신랑 되신 주님이 더디 오시지만 반드시 오신다는 결 론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열 처녀 비유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처음 받은 이 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초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시대 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커다 란 기대를 가지고 메시야가 오실 것 을 기다렸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났 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기다 리던 메시야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잠들었을 때 메시야 가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 민 누구도 모르게시리, 아니 베들레 헴에 사람들이 호적하러 와서 그렇 게 우글거렸어도 그 누구도 모르게 어느 여관 말구유 위에 오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고 한 약속은 성 도의 소박한 바램에 불과했지 우리 들을 위한 약속은 아니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 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점 불신앙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역사는 절망 과 파국을 향해 계속 치닫게 되는 어느 날 '때가 찬 시각'이 있다는 사 실을 기억하세요. 신랑은 마침내 오 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둔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열 처녀의 비유를 이 해하는데 보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 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 습니다. 가령 이 말씀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열 명'이라는 숫자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녀는 무엇 을 뜻하는가?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 는가? 다섯 명씩 반으로 나눈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것에 대 해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런 식으 로 접근하다보면 주신 말씀의 중요 한 정신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여기 열 명의 처녀를 등장시킨 이유는 소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유 대인들은 흔히 사람을 셀 때 열 명 단위로 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는 사람이 열 명이 모인 곳에는 어 느 곳에든지 유대인 회당을 세우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 의 슬기로운 처녀와 다섯 명의 미련 한 처녀로 다섯 명씩 나눈 것은 메 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는 두 부 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조적 으로 보이기 위한 그 이상의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의 교훈은 오늘 우리가 기억해 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의 핵심입니 다. 신랑을 영접하는 혼인잔치를 기 다렸다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 였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은 오 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 니까?
형식이 내용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 운 다섯 처녀의 삶이 전혀 다른 것 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똑같이 혼 인잔치에 들러리로 초대를 받았습니 다. 그들은 똑같이 기쁨으로 신부의 들러리로 초대한 것에 응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 다. 그리고 보세요. 그들은 똑같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지 혜 있는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올 때 까지 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 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 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하고 했습니 다. 미련한 다섯 처녀만 졸며 잔 것 이 아니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도 다 같이 졸며 잤습니다. 그들은 피곤하 니까 졸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같이 등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처해 있던 상황이나 삶의 방법은 지 혜로운 다섯 처녀나 별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혜 있는 처녀들과 미련 한 처녀들의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름의 준비였습니다. 지혜 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 녀는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의견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우리는 이 기름을 성령님으 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 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성 령님이라면, 등불에 불을 켜면 기름 이 점점 줄어드는데, 그러면 성령님 이 우리 안에서 점점 없어진다는 말 입니까? 기름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 면 없어지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 게 있다가 없어질 수 있습니까? 이 것은 성령을 하나의 상품처럼 생각 하는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인격이 신 성령님은 한번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같이 계십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경우에 성 령이 기름으로 상징된 것이 사실입 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서 기름만 나오면 그것을 다 성령으 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만 보면 다 성령이라고 생 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불이 번쩍이면 성령이 오셨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노이로제에 걸린 성도들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름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을 다 성령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는 좀 더 넓은 의미 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오늘 주신 말 씀에서 등불의 기름은 우리 그리스 도인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 앙의 내용, 또는 삶의 내용을 주님 께서 우리에게 기름으로 가르치셨다 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안에 갖추고 있어야 할 삶의 내용, 다시 말하면 신앙의 내용이 결핍되 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교회에 다니는 많은 분들이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내용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형식이 무 엇입니까? 등이라든지, 결혼잔치에 초대를 받는 것이라든지, 그 잔치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만 가지고도, 그 형식 이 있기 때문에 내용도 있을 것이라 고 착각하면서, 내용에 대해서는 고 민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 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 시간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형식 입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엄격히 말 하면 그것도 형식입니다. 우리는 많 은 경우 이런 형식에 참여했기 때문 에 자연스럽게 '나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게 되기 가 쉽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있으면 자연히 내용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 말은 절대로 형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 없는 내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 없이 기름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콩껍질 없이 알맹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릇이 기름은 아닙니다. 껍 질이 알맹이는 아닙니다. 내용이 있 을 때 형식은 내용을 표현하는 아름 다운 사건일 수가 있습니다. 형식 그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내용이 없는 형식 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 셔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밤 늦게 신랑이 오니까 그때에서야 드 디어 내용이 있는 사람과 내용이 없 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 것입 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이것 을 객관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삶 속에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그 위기에 어떻게 반 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평탄하게 별 어려움 없이 지낼 때는 그것을 모르고 살겠 는데 어려움이 찾아오니까 불평하 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짜증내고, 신앙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라고 합니다. 신앙의 형식만 있었 지 그 내용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알맹이가 확실하다면 많은 위기 앞 에서도 내 삶을 주장하시고, 인도하 시고 함께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을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 려운 일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인 생의 가장 커다란 위기, 다시 말하 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되 는 그날, 주님 앞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알맹이를 내보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던 어리석 은 다섯 처녀처럼 형식에만 집착하 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일마 다 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고 부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의 내용입니다. 내용 없는 형식 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밤늦 게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도 착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을 보았습니다. 기름 이 있기는 조금 있는데 넉넉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로운 다 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습 니다. 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 름을 빌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얼른 볼 때 지혜로운 처녀들이 너무 인색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교훈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내용이란 빌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 람에게 전도해 보면 자기 아이들이 신앙생활 하고 아내가 신앙생활 하 는 것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 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카고의 무디신학교 총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 박 사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다."
이 말이 맞습니까? 그렇습니 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 하고 말하면 내 아 들은 '하나님 할아버지' 하고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 아들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 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 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으니까 내 아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 세례식을 가집 니다. 각자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 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고백이 있어야 세례를 받게 됩니다.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지는 않지만, 이제 장성해서 자기 자신이 신앙을 고백해야만 입 교하여 세례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자신이 거듭난 경험 이 있으십니까? 자신이 예수 그리스 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 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 니다. 혼인 잔칫집의 문이 닫혔습니 다. 한번 닫히면 다시 열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말씀해주 고 있습니다. 범사에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랑이 오기 전에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게도 기름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쳐 버렸 습니다. 언제나 기름을 살 수 있다 는 사실이 미련한 다섯 처녀로 하여 금 오히려 기회를 놓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회가 언제나 있다고 생 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교회에 나 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기회가 언제나 그렇게 주어지는 것 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내 인생 의 기회의 문이 아주 닫혀 버릴 수 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 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새 성 전 성구 마련을 위해 헌금하려고 합 니다. 오늘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이 헌금을 늘 하는 것 아닙니다. 내 평생에 한 번일 수 있습니다. 내일 은 우리의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 다. 기회의 문이 닫힐 수도 있습니 다. 닫힌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주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드리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하 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 무도 모릅니다.
끝으로, 주님과의 만남은 갑자기 이루어집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어 느 한 순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다시 올 때 도적같이 오겠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 는지는 모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우 주적 종말'이라고 합니다. 우주적 종 말뿐 아니라 개인적인 종말도 있습 니다. 오늘밤에 우리 개인의 종말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 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사건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 니다. 그러나 우리와 상관없는 사건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합 니다.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무디(D. L. Moody)는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 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하나 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한 순간 찾아온 죽음 앞에서
"땅은 물 러가고 하늘은 열린다. 내 주께서 나를 위해 오신다"
하고 고백하였습 니다. 그는 평소에
"여러분, 어느 날 신문에서 무디(D. L. Moody)가 죽 었다는 보도를 보실 것입니다. 그 보도를 믿지 마세요. 저는 죽은 것 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갔기 때문 에 여기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언젠가는 이 박 목사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 소문을 믿지 마세요. 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것입 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돌 아온 어린 소녀가 자기 엄마에게
"엄마, 교회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 데,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을 준 비하는 거래요. 그게 맞아요?"
이 엄마는 딸이 너무 귀여워서
"암, 맞 구말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이 어린 소녀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습 니다.
"엄마, 엄마는 작년에 미국 갔 다오시고 금년에 구라파 가시는데, 다른 나라 가실 때마다 여행 준비 열심히 하시던데 왜 천국 갈 준비는 안 하세요?"
"·····?"
인생의 가장 진지한 여행, 육체를 버리고 떠나가는 이 마지막 여행 에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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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천국(교회)은 마태복음 25:1-13
어떤 흑인 성도는 이런 싯구를 남겼습니다.
왕이시요 으뜸되신 그가 / 장래에 오시리니 / 그가 오실 때 / 목화 따는 나를 보시리라.
하늘의 천군들이 / 소리 높여 외치는 소리 / 그대들은 들을지어다. / 그가 오실 때 / 목화 따는 나를 보시리라.
사람들에게 내동댕이침을 받고 / 죽기까지 고통당하신 / 그가 오실 때 / 목화 따는 나를 보시리라.
미움받고 천대받으시며 /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 그가 오실 때 / 목화 따는 나를 보시리라.
그가 오실 때! / 그가 오실 때! / 성도들과 천사들이 / 면류관을 드릴 때 / 배척당하신 그를 향해 / 호산나를 외치리니 / 그가 오실 때 / 나는 목화밭 가운데서 / 무릎을 꿇으리라.
목화밭 일터에서 깨어있어 자기 임무에 충실했던 한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입니다. 실로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런 유의 삶이야말로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고도 신랑에게 약속받은 그 날을 대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깨어있는 신부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예수 재림 준비의 교회 모습을 비유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25장 1절에 「그 때에 천국은…」이라고 함은 마태복음 24장의 예수 재림의 때를 말하고, '천국'은 그때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때에 천국(교회)은,
Ⅰ. 예비하는 처녀성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혼인잔치를 예비하는 처녀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신부집으로 장가오는 신랑을 신부의 친구들이 맞이하러 나가는 정경을 그린 것입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요 신부의 친구인 처녀들은 신자(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신자들을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엡 5:22, 계 19:7, 21:2).
다시 말하면 예수 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교회는 처녀들이 잔치준비를 하는 경우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결혼이란 대단한 경사 중의 경사였습니다. 아니 결혼은 모든 인류의 경사 중의 경사입니다. 유대격언에 '여섯 살부터 60세 노인까지 결혼행진곡에 발맞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 결혼은 경사 중의 경사였습니다.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새 신랑과 신부를 맞는 온 마을의 경사였습니다.
저들의 혼례식은 저녁에 베풀어졌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옵니다. 그 때에 그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면서 그 잔칫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랑신부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그 집에서 일주일 가량 머물면서 흥분된 축제를 계속하였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예수 재림 직전의 교회는 잔치준비를 하는 처녀들의 집과 같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흥분 속에서 신랑을 대망하면서 깨어 준비하는 상태에 있어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방심하거나, 나태하거나, 교회의 존재적 의미와 사명을 망각하여, 현실주의에 동화하거나 타협하거나 빠져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잔치를 준비하는 일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 기분으로, 그런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Ⅱ. 유사성(비슷함)의 교회를 보여줍니다.
예비하는 교회와 처녀는 준비과정이 서로가 비슷하다는 사실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1. 초대의 유사성입니다.
열 처녀들이 모두 함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5장 1절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외적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일반적 초청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역시 섞여 사는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을 봅니다. 왕의 잔치에 거절하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이들은 기꺼이 초대에 승낙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무리가 섞여 들어왔습니다(마 22:1-14).
2. 신분의 유사성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에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이 처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혹은 신자, 혹은 교인, 예수 믿는 사람, 그리스도 형제, 성도 등등과 꼭 같은 이름입니다.
3. 시기의 유사성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에 보면 「그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25장 6절에 보면 「밤중에…」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환난 중에 살았습니다. 어둠의 때에 살았습니다. 노와 때와 같이 사람들이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자기의 일에 분주해 하는 어둠의 때에 함께 시간을 받고,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4. 형태의 유사성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에 보면 슬기로운 자들이나 미련한 자들이나 모두 다 등을 가졌고, 기름을 담을 그릇도 가졌습니다. 말하자면 똑같이 조직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신랑(예수)에 대한 애정과 사랑과 봉사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조직의 일원으로 목사요, 장로요, 집사요, 권사요, 교사… 등등이었습니다.
5. 연약의 유사성입니다.
마태복음 25장 5절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들에게 모두 있는 공통성이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똑같이 인간적인 연약성이 있었습니다.
6. 종말지식의 유사성입니다.
신랑이 밤중에 오는 것을 똑같이 알고 있었습니다(마 25:6). 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함께 들었습니다(마 25:6). 신랑을 맞아야 된다고 하는 필요성도 공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함께 행동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6-7절에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라고 하였습니다.
Ⅲ. 차별성의 교회를 보여줍니다.
그 때에 유사성의 교회는 외적으로 모두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교회(천국)는 내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요, 궁극적인 차이였습니다.
그 차이를 가리켜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구분짓고 있습니다(마 25:2). 그 내용은 확실하고 간단합니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절에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릇'은 중생받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보배를 담은 교회의 직분이름도 됩니다. 여기 '기름'은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신을 기름으로 말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그리고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게 이것을 부으셨다고 하였습니다(사 61:1-3, 눅 4:17-21, 히 1:9, 요일 2:20, 27).
성령이 말씀이라고 하는 기록된 매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딤후 3:16, 벧후 1:21).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성령의 검'이라고 하였습니다(엡 6:17).
그렇다면 그릇에 기름을 담고 있었다는 말은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① 본질적으로 중생체험을 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②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체험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릇에 기름이 없다는 말은 처음부터 중생체험의 역사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고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마 16:16). 처음부터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롬 10:9-10). 그저 교인행세를 한 것입니다. 흉내를 낸 것뿐입니다. 성령은 우리 그릇에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그 그릇에 기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있는 체 한 것뿐입니다.
이러한 차별성이 언제 드러나고 마는가?
신랑이 올 때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0절에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할 그때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차별성을 지상교회에서 부분적으로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최종적 차별성은 그 날, 그 때에, 주님이 오실 때에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Ⅳ. 예수께서 들려주신 그 때에 천국(교회)에 관한 비유의 교훈입니다.
1. 결코 우리 안에 있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 꾸어줄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본문에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애원한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마 25:8)고 하는 화급한 요청은 실상은 거짓말입니니다. 저들에게는 본래부터 기름이 없었습니다(마 25:3). 그렇기에 저들은 육적인 요청을 합니다. 기름(성령)을 좀 나눠달라고 하였습니다(마 25:8). 참 어리석은 육의 말입니다.
성령은 사람이 빌려주거나 나눠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령을 주관할 성령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이 부족하다는 것은 본래부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각자 각자의 개인적 체질과 성품은 남에게 빌려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신만이 소유한 고유의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은총의 인생을 타인에게 빌려주거나, 또 타인이 내게서 빌려 갈 수가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받은 구원의 생명은 내 스스로가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돈을 주고 거래하려고 했던 시몬이 돈(은)과 함께 망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행 8:18-20).
2.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저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잔칫집 문은 이미 닫혀버리고 말았습니다(마 25:10). 그 후에 그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마 25:11)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물론 저들은 기름도 없이 왔습니다. 그러자 그 잔칫집 문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고 하는 엄숙한 거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3. 주님의 재림날짜와 시간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5장 13절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의 재림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처녀성의 신분과 내용과 자질을 가지고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저 유명한 테니슨(Tennyson)은 죄의 대가를 너무 늦게 발견한 귀네베레(Guinevere) 여왕 앞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늦네, 늦네. 아주 늦네. / 어둡고 싸늘한 밤이 되었네. / 늦네, 늦네. 아주 늦네. / 그래도 아직은 들어가리. / 늦네, 늦네. 너무 늦네. / 이제는 들어가지 못하네.
우리는 등불이 없나니 / 회개하지 않음이라. / 이것을 배우라. / 신랑의 마음은 관대하리라. / 너무 늦네, 너무 늦네. / 이제는 들어가지 못하네.
등불이 없이 아주 늦네. / 어둡고 싸늘한 밤이 되었네. / 오! 들어가게 하소서! / 등불을 찾으리이다. / 너무 늦네, 너무 늦네. / 이제는 들어가지 못하네.
우리는 못 들었나 / 달콤한 사랑의 목소리 / 오, 늦을망정 들어가 / 그의 발에 입맞추게 하소서. / 아니, 아니 너무 늦어 / 이제는 들어가지 못하네.
너무 늦다는 소리는 기회상실의 망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그 미래는 확실히 현재보다 1,000배나 나은 축복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천국)를 통하여 그 때에 주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그 때의 교회는 처녀성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처녀성의 교회가 간직한 비밀의 약속은 성령과 말씀, 곧 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교회, 살아있는 교회는 그릇에 기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으로 잔치를 준비하는 즐거운 집입니다. 말하자면 대망의 미래를 약속받은 '처녀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 비록 외적으로는 미련한 처녀들과 섞여 사는 불완전한 지상의 교회일지라도, 실상 약속받은 처녀(교회)들은 주께로부터 친히 우리 그릇에 담아주신 기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대망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처녀성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전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진리입니다. 그 재림의 징조는 성경을 읽는 자는 깨닫고, 역사의 벽보를 보는 자는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계의 징조가 예수의 재림약속을 소리쳐 외치고 있습니다.
확실히 현재보다 1,000배나 나은 행복은 오늘이 아닌 내일에 있습니다. 인간편이 아닌 주님편에 있습니다. 세상이 아닌 하늘에 있습니다. 잔치를 준비하는 깨어있는 처녀들의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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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 마 25:1~25:13
요즘 세상은 온통 어떻게 하면 건강을 유지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살을 빼서 계속해서 건강한 생활을 9988234를 할 것인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연예계 스타들도 다이어트 비디오를 만들어서 팔기도 합니다. 저도 금년 일 년의 제 개인적인 삶에서의 최대의 성과는 살을 뺀 것입니다. 많이 빼서 중간에 더 이상 빼지 말라는 성도님과 의사 선생님의 권고도 있어서 중간에 그만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살이 쪘습니다. 계속해서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면 요요현상이 납니다. 다이어트를 하고 나면 다시 살이 찌는 일이 벌어지는데 왜 그렇습니까? 요요현상이 왜 일어납니까?
완전히 습관으로 정착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삶의 습관이 변화된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일시적으로 하는 것은 요요현상이 나고 일시적으로 살을 뺀 것은 진짜 자기 몸무게가 아닙니다. 6개월이고 1년이고 계속해서 그 몸무게를 유지할 정도로 삶의 습관이 변화 되어야 비로써 그게 자기의 정상적인 몸무게가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요요현상이 발생을 합니다. 잠시 잠깐 받은 은혜가 있을 때 요요현상이 발생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신앙생활에서 요요현상이 없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우리 신앙의 요요현상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25장 1절에 ‘천국은 마치’ 하고 이야기 합니다. 천국에 대한 비유가 나올 때 마다 많은 경우에 예수님이 천국은 ‘마치’라고 이야기합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신랑이라고 비유한 것도 아니고 신부라고 비유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 열 처녀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 처녀와 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신랑을 맞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뒤에 잔치가 나오는데 어떠한 환경 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지 먼저 그 배경을 한번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식사하는 습관을 보면 헬라인들은 하루 세 번 식사합니다. 로마사람들은 네 번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전 10시경 그리고 해진 후에 이렇게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했습니다. 두 끼를 먹는데 그 대신 잔치는 언제나 밤에 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잔치는 아침상이 잔치 상입니다. 생일상도 아침에 받고 잔치를 아침에 하는데 상당히 많은 나라의 풍습은 잔치를 밤에 합니다. 팔레스타인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아랍권도 그렇습니다. 제가 가본 나라 중에서 영미 쪽만 빼놓고 다른데서는 거의 저녁을 늦게 먹습니다. 특히 날이 더운 나라일수록 저녁을 늦게 먹습니다. 낮에 낮잠 자는 시간이 있는 나라마다 저녁은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저녁식사를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밤 11시에 식당을 가도 아주 붐빕니다. 그리고 그때 잔치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잔치도 보통 저녁에 있었던 잔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의 잔치는 두 번 초청을 합니다. 제일 먼저 ‘오시겠습니까.’ 라는 것을 먼저 묻고, 온다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서 거기에 맞게 잔치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잔치가 딱 준비 됐을 때 다시 오라고 합니다. 저는 군대 생활을 국방부에서 했습니다. 제가 한 일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파티 주선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명 파티에서부터 300~500명 파티까지 연초가 되면 하는 한미연합사 전체가 하는 그러한 장군들의 파티가 있습니다. 근데 언제든지 그 파티를 할 때는 카드를 만들어서 그 밑에 RSVP찍어서 전화번호를 적습니다. 이건 “꼭 참석 여부를 가르쳐주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그럼 전화번호가 있으면 바로 전화가 옵니다. 참석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식탁마다 이름을 선임 순대로 놓고 파티를 마련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연락하지는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준비 됐을 때 연락을 해서 잔치에 참여하게 합니다.
바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 파티를 하는데 잔치가 시작을 했을 때는 어느 정도 늦게 오는 손님을 받습니다. 받는데 일단 그 유해 시간이 지나고 잔치에서 집주인이 인사를 하고 식사가 일단 시작이 되면 대문 앞에 걸어 놓았던 환영 팻말도 다 걷어내고 그 다음에 늦게 오는 손님의 입장을 사절합니다. 그 당시 예수살렘의 잔치의 풍습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한 잔치의 풍습 속에서 이 열 처녀의 비유를 예수님이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특히 이것은 혼인 잔치입니다.
혼인 잔치는 나름대로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먼저 신랑 측과 신부 측이 만나서 신부 집에서 신랑과 신랑의 아버지가 가서 혼인 서약을 합니다. 정혼을 하는 것입니다. 정혼을 하고 나면 신랑과 아버지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집에 가서 그때부터 신랑은 신부와 함께 있을 집을 자기 집 마당에 따로 짓습니다. 집이 다 됐는지 판단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정혼한 신부는 그때부터 자기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구별 되어서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서 그 모든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외간남자와 상대하지 않고 법도를 지키며 정결하게 이제 신랑이 올 때까지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집을 다 지어야 옵니다. 한국에도 재혼을 하는 부부는 옛날에는 보쌈이라고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팔레스타인도 그런 풍습입니다. 결혼은 상대 집에 가서 여자 하나를 약탈해 온다는 개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갑니다. 밤에 신랑의 친구들이 앞에 가서 왔다는 신호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신랑이 들어갑니다.
그때 신부 측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은 나와서 보지 못합니다. 전부 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랑 측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여기에 열 처녀는 바로 신부의 친구들 열 처녀를 이야기합니다. 신부의 아버지나 형제들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게 방문은 빼꼼히 열어보고 신랑이 확실히 진짜인지 확인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거 말고는 풍습 상 나와서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랑과 친구들이 신부와 신부 친구들을 데리고 신랑 집으로 갑니다. 신랑 집으로 가서 거기에서 일주일간 잔치를 합니다. 그 잔치하는 동안에 신랑과 신부는 신랑이 지었던 집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완전히 막아 버립니다. 일주일동안 그 안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신랑의 친구가 바로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합궁한 소식을 기다립니다. 합궁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신랑 친구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연회장에 나와서 ‘신랑 신부 드디어 합궁했습니다.’ 공포하면 그 때부터 잔치가 더 흥이 나는 겁니다. 바로 그 합궁의 기쁜 소식을 들으려는 신랑의 친구로 세례요한이 자기를 비유했습니다. 일주일간 잔치를 하는데 마지막 칠 일째 신랑 신부가 함께 나와서 가장 큰 잔치를 합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입니다. 천국의 혼인 잔치도 이와 비슷하게 나가고 그 결혼 풍습 자체가 우리 복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처음 정혼하는 때가 예수님이 처음 오신 때이고 아버지 집에 가서 다시 오는 게 진짜 결혼 하러 오는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이미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종말의 관한 신호가 이런 모든 배경가운데 열 처녀 비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부의 친구인 열 처녀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는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은 오늘날의 두 가지 것을 헬라어로 똑같이 등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램프-주로 실내에서 쓰는 것, 또 하나는 횃불-주로 실외에서 쓰는 것. 지금 여기서 이야기 하는 등은 두 번째 횃불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실외에서 들고 신랑 집까지 가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횃불의 문제는 15분이 지나면 꺼지기 때문에 기름을 함께 준비해야합니다. 여기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구분이 됩니다. 둘 다 신랑이 올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다섯 처녀만 기름까지 준비해서 횃불이 계속 탈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기 말씀의 초점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아닙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초점이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처녀가 왜 미련합니까? 미련한 이유는 세상 적으로 어리석어서 미련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면에서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금방 오면 바로 바로 일이 처리되어 횃불 하나 가지고 되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고, 생각 보다 더디올 것을 생각 하지 않고 있다가 더디 오니까 기름이 준비 안 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런즉 깨어있으라.’ 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여기서 “깨어있으라.”라는 말에서 사실은 미련한 다섯 처녀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이 늦게 오니까 다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졸았다는 의미에서 깨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제대로 준비를 해라. 정말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면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가 ‘깨어있으라’ 라는 말로 표현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저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로, 지금 믿는 사람이 함께 있지만 전부 다 한 종류가 아니고 두 종류라는 겁니다. 본문 말씀을 그대로 하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있고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듯이 횃불만 준비한 사람과 기름을 같이 준비한 사람으로 갈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그중에 어디인 것 같습니까? 횃불 하나 가지고는 15분 밖에 타지 않습니다. 지금 신랑이 데리러 와서 신랑 집에 가서 거기서 잔치까지 하려면 이럴 때 계속해서 횃불이 필요한데 그건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천국에 대해서 신랑 집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는 준비되었다고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두 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의 믿음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은 믿음입니다. 해가 뜨면 없어집니다. 잠시 잠깐 믿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환란이 있거나 조금만 어려움이 있거나 조금만 다른 일이 있으면 믿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을 계속해서 가지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합니다. 근데 그냥 그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면 좋은데 두 번째로, 그 두 종류의 사람의 운명이 결국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로 비유되는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는다고는 하는데 겉으로는 모양이 있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고는 하는데 정작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다림이 없는 사람. 이런 본질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한번 보십시오.
거기에 네 종류의 땅이 나옵니다. 길가가 나오고 얇은 흙이 덮인 바위가 나오고 가시덩쿨이 나오고 좋은 땅이 나옵니다. 네 종류의 땅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그 네 종류의 땅 중에 싹이 난 것은 세 종류입니다. 얇은 흙이 덮인 그 밑에 바위가 있는 곳에서도 싹은 났습니다. 가시덩쿨에도 싹은 났습니다. 그런데 얇은 흙이 덮인 바위에는 햇볕이 쬐니까 말라 비틀어 죽었습니다. 가시덩쿨에 싸인 싹은 가시덩쿨이 더 흥황해서 잡아먹습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직 마지막에는 좋은 땅에 뿌린 씨앗만 백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처음에는 싹이 세군데 납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꺾이는 겁니다. 여기 나오는 미련한 처녀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문제가 이렇게 다양하게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결과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천국 문에 들어가느냐. 문 밖에서 쫓겨나느냐. 둘 중의 하나의 차인데 이 차이가 가장 큰 차이입니다. 천국 안에서 영광이 조금 다른 것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가서 조금 부끄러울 뿐이지 지옥 안 갔으니까 얼마나 다행입니까. 문제는 여기서 경고의 말씀은 천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못 들어갈 수 있다는 엄청난 경고 두려운 경고입니다.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입니다. 내일이 예수님 오시는 날. 오늘 밤 예수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고대하고 기다린 사람이 몇입니까?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진정으로 기다린 사람이 몇입니까?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지난 2000년 동안 크리스마스를 2000번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또 다른 절기. 그냥 캐럴 부르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 부르고, 그 분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았네 하고 끝나는 일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때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 될지를 다시 한 번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생각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오시는 그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내 마음에 인식하고 있으면 되느냐. 그건 성경에서는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 맞춰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처녀의 비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비유가 아닙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15분 타고 마는 횃불만 있어서는 안 되고, 기름으로 계속해서 그 불이 탈수 있어야 합니다. 기름을 이야기 할 때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성령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기름이라는 단어가지고 똑같은 단어로 해석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마지막에 이 기름이라고 하면은 그 결혼식의 환경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것을 표현한 것이지 기름이라는 것이 있어야 되니까 기름은 성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바르지 않게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말은 ‘그런즉 깨어있으라.’ 라는 말입니다.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깨어 있으라는 게 무엇이 연결이 됩니까? 깨어있다는 것은 곧 언제나 주님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삶. 일반적인 모든 기다림이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삶을 이야기 합니다. 그럴 때 깨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보고 사모하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내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서 밭을 계속적으로 소유해야만 합니다. 진주장사가 좋은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 진주를 사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재산 전부 팔아서 그 진주를 소유해야만 합니다. 천국은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고대하는 마음만 갖는 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의 행동으로 결단하고 여러분의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사듯, 여러분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사듯 여러분의 삶을 드려서 참으로 기다리는 자의 삶을 온전히 살아야합니다. 제가 미국에 갈 때 가기 한 달반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숟가락 하나 새로 산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살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미리 결혼한다고 처갓집에서 준비해 놓은 것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 외에는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미국 가서 살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가는 곳이 추운 곳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북쪽입니다. 겨울옷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한국식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음식만 이민가방으로 하나 가득 가지고 갔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아야 되니까 미국에서 살 준비만 전부 해가지고 갔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유학 오는 학생들 보니까 별 준비를 다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요리학원을 다녀서 일식을 배워왔습니다. 일식집에서 일하는 게 시간당 임금이 제일 비쌌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일을 안 해도 충분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생활비를 번겁니다. 그런 식으로 오는 사람들이 다 준비를 해왔습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미국 가서 사는 것도 이렇게 수많은 준비를 하는데 천국 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준비가 없이 삽니까?
여러분 정말 천국 가는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이 한 준비는 뭐가 있습니까? 어떤 준비를 하고 삽니까? 정말 천국을 고대하고 있는 백성이라면 여러분의 삶에서 그런 준비하고 있다는 면을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들 결혼해서 열심히 돈 모아서 작은 아파트 사야 되고, 작은 아파트에서 큰 아파트로 옮겨 가야 되고, 인생의 계획들은 많이 합니다. 천국의 갈 계획은 여러분의 인생의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여러분 진짜 천국백성 맞으십니까? 혹시 짝퉁 아닙니까? 여기 미련한 다섯 처녀는 짝퉁 천국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경고하고 있는 것은 다 믿고 천국 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돌이켜서 자기 삶을 돌아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내 삶속에 준비된 기름이 있는가. 깨어있는 삶인가. 과연 천국 갈 준비를 온전히 하고 있는가. 그걸 한번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확인을 해보고 제대로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준비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삶은 일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앙적 요요현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어떤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면서 그러다가 응답받고 나면 언제 주님 믿었냐는 듯이 그냥 주일 날만 왔다가고 더 이상의 헌신도, 봉사도 없고 이렇게 생활하다. 또 어려우면 하다말다 하다말다. 이게 요요현상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잘 믿는 거 같다가 어느 순간에는 계신지 안계신지 하는 것이 요요현상입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완전히 신앙생활이 내 삶속에 습관으로 되어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해도, 누가 관리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언제나 말씀 가까이 하고, 기도하고, 언제나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 생활이 편하게 된 생활, 완전히 습관으로 잡힌 생활,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생활. 이때가 신앙의 요요가 없어지는 때입니다. 다이어트의 요요현상과 똑같습니다.
일순간에 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되는 것은 완전히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삶이 습관으로 잡혀야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편해집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도 편해지고 삶의 일부가 됩니다. 이미 여러분 주변에 봐도 그것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직책을 맡으면 열심히 하고 직책이 끝나면 아무것도 안하고, 이 생활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전천후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오르락 내리락이 심한 신앙은 바른 신앙일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물질생활 깨어있습니까? 주님이 오심을 준비하면서 되어지는 물질생활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길이 깨어 있습니까? 주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여러분의 인생의 계획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신앙적 요요를 여러분이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내버려 두면 잘 믿을 학생들을 고등학교만 가면 교회생활 못하게 막는 게 신앙의 부모들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 될 수 있으면 못하게 하고, 임원은 더욱 해서는 안 되고, 그런 식으로 자꾸 막고, 아이에게 신앙의 요요를 강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때는 잠깐 신앙생활 안 해도 된다. 이걸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을 미련한 쪽으로 가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삽니까? 여러분 정말 천국을 소망하고 삽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삽니까? 천국과 이 세상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여러분 둘 중에 어디를 택하겠습니까? 먼저 천국을 택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천국이 더 났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풍요로운 생활을 해도 천국이 더 났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편하고 좋고 멋있는 일들이 내게 기다리고 있어도 천국이 내게 더 났다는 확신이 여러분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그 확신이 있는 삶을 살면 이 세상의 것을 누릴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 세상의 것을 누릴지라도 거기에 종노릇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먼저 잡을 수 있는 참된 크리스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님이 천국의 백성이라 칭하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주고 있습니다. 깨어있으라. 제대로 준비된 삶을 살라. 정말 천국의 소망이 있느냐? 부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주님이 오시는 바로 이때를 맞이해서 다시 주님이 분명히 오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마음에 갖고 계시고 바로 그 주님을 온전히 기다리는 삶. 주님이 오심을 준비하는 삶. 언제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삶의 계획도 하고 인생의 판단을 하는 삶. 이런 복된 삶을 사시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