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와 밭의 비유 마 13:1-23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비유 말씀은 41개나 됩니다. 비유만큼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하는 것도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보다 1만달란트 비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래토록 기억할 수 있게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물질을 선하게 사용해야한다는 점을 경각시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하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은 어렵지 않게 가르치셨습니다. 삶에 지친 민중들에게 딱딱한 교리나 이론적인 사변은 오히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서기관이나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보다 더 귄위가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그 가르침이 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변가로 나가시자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앉아 가르치시는데 멀리서 씨를 뿌리는 자의 모습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방금 읽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비유의 제목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이야기 주제도 달라집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밭의 비유’라고도 할 수 있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밭의 비유라는 제목을 정하면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 네 종류의 밭 중에서 자신은 어느 밭에 속하는지 평가하고 옥토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교훈이 주어질 것입니다. 만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정하면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낭비와 손해에 대해서 언급하는 비유가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실망치 않고 노력하면 결국은 좋은 땅에서 얻은 결실로 능히 그 손해를 보상받게 될 것 이라는 교훈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모든 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씨앗입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씨앗이 어느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다릅니다. 같은 이슬을 먹고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듭니다. 오늘 말씀의 네 종류의 밭을 보며 자신은 어느 밭에 속하는지, 자신의 문제는 무엇인지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말씀은 제한이 없습니다. 비나 태양이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리지 않고 내리듯이 하나님 말씀도 가리지 않고 임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갈리는 것일까요? 동일한 은혜가 주어짐에도 어떤 사람은 그 은혜를 받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할까요?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닫고 있으면 주변에서는 홍수가 나도 자기 안에는 가뭄만 계속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10) 곧 마음을 열라는 뜻입니다.
옛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파종법이 우리와 달랐습니다. 우리는 땅을 갈아엎고 평평하게 고른 후에 씨를 뿌리던지 아니면 따로 모판에서 키운 어린 싹을 밭에 심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먼저 씨를 뿌린 후 밭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곳이라도 나중에 갈아엎을 생각으로 씨를 뿌립니다. 돌밭은 석회암층을 말하는데 이곳은 불과 땅 깊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은 땅을 갈아엎을 때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다 보면 이런 네 종류의 밭에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길가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입니다. 그래서 땅이 단단해져 있습니다. 씨가 이곳에 떨어졌지만 단단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새가 kf아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주님은 19절에서 길가 밭을 해석하시면서 악한 자가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 밭이 길가밭이 되어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선입관들로 인해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위로는 소크라테스가 지나가고 플라톤이 지나갔습니다. 아담 스미스와 칼 맑스가 지나가고, 니이체가 지나가며 단단해져버렸습니다. 이에 더해 예부터 내려온 전통, 자기의 경험, 자기 생각들로 인해 아주 콘크리이트처럼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런 편견들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쉬운 비유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이 비유들이 마치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처럼 여겨집니다. 10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자 예수님은 이는 천국의 비밀에 관한 말씀이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며 13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렇지만 사실 비유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얼마나 이해하기 쉽습니까?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말씀처럼 되었는가? 14, 15절 말씀이 그 이유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문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귀는 둔하고 눈을 감았으니 아무리 쉬운 말씀을 해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단단해져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고 대화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입관이 있으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이 지역 사람은 이래’, ‘이 나라는 이래’ 하며 우리는 이미 선입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사귈 수도 없고, 그 속 깊숙이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말씀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이성으로 자기 경험으로 다 제한시켜 놓으면 도무지 믿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하고 믿고 나가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돌밭
돌밭에 뿌려진 씨는 처음에는 보통 땅처럼 자랍니다. 그러나 흙이 얇기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자 타고 마르고 맙니다. 뿌리 없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 돌밭에 떨어진 씨를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입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뿌리 없는 신앙은 말씀으로 인해 환난을 받을 때 곧 시들고 맙니다.
초신자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모임에도 참석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좀 시들해집니다. 그러다 신앙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면 쉬 돌아서고 맙니다. 옛날, 옛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무엇이든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영양분과 습기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때는 오히려 외부에서 환난이 불어 닥칠 때입니다. 뿌리는 세찬 바람이 불 때 더 깊어집니다. 나무는 차가운 겨울의 한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뿌리내리지 않은 것들은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문제 앞에 지지 마세요. 이 문제를 신앙으로 이기고 나면 우리 신앙의 뿌리는 더 깊어져 있을 것입니다.
돌밭은 또한 그 마음속에 바위처럼 단단한 상처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속에 우울증의 바위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노와 상처의 바위 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릅니다. 겉으로는 신사 같아 보이고 대단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바위덩어리들이 차지하고 있어 예수가 도무지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이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주는 참된 기쁨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런 분들은 환난의 때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공격적이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분이나 상처를 못 이겨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정치 과잉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특히 심합니다. 오랜 분단과 전쟁의 상처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념으로 인한 분노의 바위덩어리가 우리 민족 가운데는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기 반대파를 보면 괜히 분노가 솟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신앙이 예수님에게로 깊이 뿌리내리는 것들을 방해합니다.
바위 덩어리와 같이 굳어진 마음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 앞에 노출되어 깨지지 않고는 결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귀를 즐겁게 하는 잔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석을 부수는 망치와 방망이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 말씀은 방망이입니다. 돌과 반석을 깨뜨리는 방망이입니다.
제가 진정으로 거듭나게 될 때 제게 경험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불방망이와 같았습니다. 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을 듣고 깨졌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마치 방망이가 제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어찔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내 자아가 깨지면서 심한 통곡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우리 속 중심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지지 않고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떨기 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에는 잘 자라지만 곧 가시떨기에게 추월을 당하고 맙니다. 모든 잡초들이 그렇듯이 가시떨기는 생명력이 더 강합니다. 양분을 다 빨아 먹습니다. 위로는 햇볕을 막기에 힘차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가시떨기 밭 신앙에 대해 22절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여기에 일락 즉 세상에 대한 즐거움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염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을 전적으로 주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관심이 딴 곳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앉아서도 열심이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식이 몇 프로 올랐을까에만 관심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헬라어로 “메림나오”입니다. 이 뜻은 ‘마음이 나뉜다’는 의미입니다. 염려하면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걱정, 집안일 걱정, 회사일 걱정을 하니 말씀이 들어오겠습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시간은 최소한 이런 걱정을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들립니다.
재리의 유혹 또한 우리 에너지를 다 빨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물질은 단순한 중성적 존재가 아니라 주인과 같은 권세가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우리 사랑의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갑니다. 양분이 물질로 다가는데 어떻게 말씀의 씨앗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잠언서의 아굴의 기도가 좋습니다. 잠언서에서 아굴은 그 평생에 두 가지 것을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여러분 물질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으면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친척들의 모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궁핍하면 담을 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아굴의 기도는 물질의 위력을 무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마음은 전심으로 하나님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물질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쾌락이란 것도 우리를 말씀의 은혜에 빠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골프에 빠진 사람은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머릿속은 그린필드를 해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바둑에 푹 빠졌습니다. 일주일 내내 바둑만 두다 주일 예배 강단에 오르니 사람들의 머리가 온통 바둑돌로 보입니다. 검은 머리는 흑돌처럼 보이고 흰머리는 백돌처럼 보입니다. 이 목사님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소리 내어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바둑의 유혹이 사라졌다 싶어 기도를 마무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는 그만 마지막 “아멘” 할 것을 습관적으로 “아다리” 하고 말았답니다.
잡기에 능하고 재주가 뛰어나면 하나님 믿기가 힘듭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전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자에게 돈 버는 비결을 묻기 위해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그 청년을 절벽에 서 있는 나무 옆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에 매달리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그 말대로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그 부자는 이번에는 한 손을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열망했던 청년은 이 명령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부자는 마지막으로 그 나머지 손마저도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당황한 청년이 외칩니다. “그러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자 부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런 자세로 한 번 들어온 돈은 결코 놓지 말게. 그게 부자 되는 비결일세”
이처럼 우리 주님을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놓치면 죽는 자세로 주님께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고 배고픔을 잊은 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좋은 땅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을 보면 항상 풍성합니다. 요즘은 농사 기술이 발달해서 한 톨의 볍씨에서 850개의 쌀알이 나온다고 합니다. 백배의 축복이 전혀 불가능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설명하기를 23절에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축복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 있습니다. 말씀에 전념하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 풍성한 결실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는 가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의 문제는 생명의 길이, 축복의 길이 바로 여기 있는데 욕심만 앞서고 마음만 급하다는 데 있습니다. 충분히 하나님 말씀 읽으십시오. 예배에 전념하십시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열매 있는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나 이런 방법을 마치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결코 돌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빨리 앞서 갈 수 있고,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씨뿌리는 자를 위한 주님의 격려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렸는데 일부는 길가로 떨어지고 일부는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져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때문에 실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이런 실패와 손해들을 능히 보상해 주기 때문입니다.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날에는 그동안의 수고나 아픔은 깨끗이 보상을 받습니다.
우리 인생의 수고가 그렇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노력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 모든 수고의 곡괭이 끝에 금맥이 발견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나간 모든 수고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전도의 수고도 그렇습니다. 전혀 열매가 나타나는 것 같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뿌린 열매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손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서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 내가 거두는 전도와 부흥의 열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뿌려놓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렇게 옥토에 뿌려진 씨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때 우리는 지난 모든 수고에 넉넉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를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그러했습니다. 무리들은 떡만 먹고 신기한 기적을 구경하기 위해 주님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길가 밭처럼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와 같이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초대교회를 이루고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으며 결국 로마 사회를 뒤집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고라면 어떤 실패에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좋은 결실을 얻게 될 날이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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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마음 마 13:1-9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영적인 마음가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똑같은 설교를 듣지만 한 사람은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는데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경우기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마음가짐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네 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닫힌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듣고자 하는 것과 듣지 않을 것을 미리 결정합니다. 그렇게 미리 선택하여 듣지 않기로 한 것에는 마음을 닫습니다. "축복
얘기는 듣자. 그러나 돈 얘기는 듣지 말자."하고 말입니다.
말씀을 소극적으로 듣는 사람들도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듣지만 발뺌할 여지를 만들어 둡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내리면 강풍에 문이 쾅 닫히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마음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들은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마음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한 분들은 대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아가 강한 것입니다. 자아는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막는 차단막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아를 철저히 비우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 혼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돌밭과 같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은 말씀을 들을 때 감격이 있고 찬양도 신명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내려 확고한 기초를 다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할렐루야를 외치지만 위기 때에는 쓰러지고 맙니다. 그들은 말씀을 깊이 연구하거나 성숙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다만 지옥을 면하고 축복을 받는다는 보증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축복과 고난을 동시에 긍정적으로 보는 종교입니다.
감정을 앞세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은 신앙생활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믿음이 자라나지가 않습니다.
옛날에 하던 간증 설교를 보면 이런 류의 설교가 많이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 바위 위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바위가 뜨거워지면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에 와 닿으며 그때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
그러한 간증을 들은 저도 삼각산, 북한산, 계룡산, 설악산 등을 다니며 여러 번 나무 잡고, 바위 잡고 뜨거운 기도를 해 보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믿음과 인격이 성숙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때의 명예로운 계급장일 뿐, 얼마 후에는 그대로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통제하는 못하는 그런 계급장 신앙,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에 또 넘어지고야 마는 그런 계급장 신앙, 인간관계가 어려워질 때 세상 사람과 똑같이 화를 벌컥 내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그런 계급장 신앙,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그런 계급장 신앙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적 교만에 빠진 사람도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조그마한 신앙적 성취로 교만에 빠지므로 얼마지 않아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 남보다 기도 조금 더 하고 성경 조금 더 읽으면 아주 대단한 존재로 변한 줄 알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만 받으면 다 된 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처럼 조그마한 신앙적 성취를 보고 교만에 빠지게 되면 어느새 마음이 돌밭과 같이 되어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지게 됩니다.
3. 어수선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집중된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돈 때문에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천년의 신비를 연상 짓는 고상한 학 한 마리가 한 다리로 서서 영원을 묵상하는 듯 보여도 그 앞에 지나가는
개구리를 보면 정신없이 잡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몇 푼의 돈에 신경질을 내고 인격을 파는 경우를 흔히 발견합니다.
그러나 축복은 소유(hav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being)에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은 물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격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마음이 어수선해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또한 실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가시떨기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나 마음은 멀어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가 당나귀 귀처럼 되어 성경 본문만 읽어도 설교의 서론이며 본론을 짐작할 정도이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손과 발의 움임과 결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국 성도들은 입과 귀만 천당에 갈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이런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는데 천국에 가보니 저 멀리 빨래줄이 있었습니다. 빨래줄에는 빨래 집게가 있고 빨래 집게에는 무언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사람의 "주둥아리"였습니다. 말만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니 주둥아리만 천국에 온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즉 결실하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이것은 참으로 의미 없는 일입니다. 이런 태도를 수정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할 뿐만 아니라 그 음성 자체가 자신의 삶에 큰 의미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저의 경험으로 감사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힘찬 찬송은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을 잠재우는 좋은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4. 헌신된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음을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이 마음에 가장 합당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열린 마음, 순종하는 마음, 주의 깊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준비되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음성 자체가 대단한 의미와 파워를 지니게 됩니다.
먼저 말씀을 가까이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죠지 뮬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가버린 날은 잃어버린 날과 같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결실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만큼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 뜻은 정말로 말이 많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말이 있는 만큼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백톤의 말보다 일그램의 실천을 중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교만해지는 사람은 밥 먹고 체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돌아서서 또 염려하는 사람은 밥 먹고 설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진정한 양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마태복음 7장 24절과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이 세상의 시험은 비처럼 위에서 덮치고 바람처럼 옆에서 흔들며 창수가 난 것처럼 밑으로부터 성도의 심리를 파고들어 미혹하나 말씀의 반석 위에 서 있으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함으로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선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삶의 위대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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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신앙 마 13:7-8 ; 22-23
벤쟈민 J. 스타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란 글이 있습니다.
① 자기 기만적인 성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며 나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한계점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자기에게 속으며 살더라는 게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 그랬고, 국어선생님이 계신다면 "네 주제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수학선생님은 "네 분수를 알라" 그랬겠지요. 지리선생님은 "네 위치를 알라" 그랬을 테고 미술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② 두 번째 비생산적인 행동입니다. 창조적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창조적으로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을 허비한다.
③ 세 번째 실패자는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지 아니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④ 네 번째 예의 없는 행동입니다. 실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고 잘못을 사과할 줄도 모르고 윗사람들이나 동료들에게 무례합니다.
⑤ 다섯 번째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더라.
⑥ 여섯 번째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실패자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아니 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오염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⑦ Trouble maker들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걸핏하면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논쟁을 일으키면 자기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똑똑하다 인정을 받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⑧ 여덟 번째 실패자는 우선순위를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에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벤자민 스타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여 결국 실패자로 전락할 뿐 아니라 주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곡 없는 논밭, 열매 없는 과일나무, 거둘 것 없는 인생,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가시밭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가시밭 신앙」입니다.
일년동안 애써 가꾸어 왔는데 거둘 것이 없는 논밭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나무가 잎만 무성이 달고 있다가 주님께 혼이 난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나무입니다. 마치 열매를 많이 맺은 것처럼 잎만 달고 폼만 잡고 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주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 없는 신앙생활을 싫어하십니다.
II.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이곳은 토양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씨가 떨어졌을 때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자라다 보니 땅 속에 가시나무 뿌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곡식과 가시가 같이 자라는데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라버렸습니다.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들더니 마침내 곡식을 질식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가시밭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열심히 듣습니다. 은혜도 곧잘 받습니다. 믿음자라는 소리가 쑥쑥 납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충성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주일 받은 은혜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월요일 밤이면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와장창 납니다. 수요일쯤 되면 한숨소리가 푹푹 터져 나옵니다. 금요일쯤되면 불평소리 터져 나오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한 두 번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행동에도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보면 밑바닥에 가시뿌리가 보입니다. 그 가시뿌리가 은혜의 자양분들을 다 빼앗아 먹고 말았습니다. 그 가시에 남도 찔렸고 자신도 찔렸습니다. 찌르는 인생 실패합니다. 사랑의 보자기로 감쌀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III.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언제부터 가시떨기가 생겼습니까? 처음 에덴 동산에는 가시와 떨기가 없었습니다. 저주받을 때 하나님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겠고 그래서 창세기 3장 17절 이전에는 가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주를 나타내는 이 가시는 신앙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으로 나타납니다. 타락이후 가시떨기는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라는 당연한 부산물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은혜는 단절되고 가시떨기는 풍성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산야에 가시떨기는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고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죄 중에 살았고 내가 지금 죄 중에 아이를 또 낳습니다. 원죄가 우리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다. 그 죄의 뿌리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 철저하게 뿌리를 박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속도로 번져 인간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멸망의 길은 쉽고" 그랬습니다. 지옥 가기는 쉽다는 얘기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지옥은 가게끔 되어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가라지는 자랍니다. 가시는 뿌리를 박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죄악은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악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밭에 서너 개의 싹이 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가시 떨기는 많아지고 곡식은 힘을 잃게 됩니다.
해방 후 우리의 산들이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에 소나무 한 두 그루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홍수가 나면 흙탕물이 온 내를 뒤덮곤 했습니다. 번식력이 강한 나무가 없을까? 연구하고 있을 때에 독일의 한 산림학자가 가시나무를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산야에 가시나무를 심었더니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번져 가는지 소나무마저 다 질식시킬 만큼 온 산에 가시나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죄는 무서운 번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내 영혼을 잠식시키려는 악마를 퇴치하지 아니하면 마귀와 관계를 단절하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IV. 신앙생활의 가시떨기들
이처럼 지독한 가시떨기의 구체적인 이름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서 두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 세상의 염려, 둘째 재리의 유혹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이 두개의 가시 외에 "일락" 즉 세 상의 쾌락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 4장 19절에서는 "기타 욕심"이 라는 가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공관복음을 종합해 보면 네 가지의 가시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세상의 쾌락, 기타 욕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의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에 행복한 신앙생활을 맛보며 살아가려고 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은혜 받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그것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란, 비바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적은 방해꾼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게끔 되어있습니다. 불평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썩었느냐? 세상이 왜 이렇게 안달라지지?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다 달라진다 할지라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 문들어져도 내가 변하면 세상은 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추운 겨울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찬바람이 옷깃에 스며들고 단추를 잠가도 안되고 고개를 숙여도 안됩니다. 그래 서 생각다 못해 옷을 벗어 뒤집어 입었습니다. 단추부분이 뒤로 가고 뒤가 앞으로 왔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뒤가 좍 달라 붙는게 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부르릉~ 속도를 내는 순간 바로 그 앞에 얼음짱이 있어서 꽈당! 넘어져 저만큼 날아 퍽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몇십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뿔사 이런 사고가? 큰 사고 같지도 않은데 목이 180°휙 돌아 가 있는 겁니다. 이거 오토바이가 문제가 아니다. 목부터 돌려놓고 보자. 어깨 밟아라. 힘있는 청년들이 어깨를 밟고 목을 제자리 갖다 놓겠다고 180°돌리는 사이에 모가지가 부러져 죽었답니다. 남의 목은 왜 돌려요? 내 관점을 바꾸고 내 시선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나면 세상은 달라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염려
공관복음서가 공히 첫 번째 가시 떨기로 들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때로 의식주에 대한 염려들이 겉보기에 무해한 것 같으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 에 뿌려진 은혜의 씨를 질식시키는 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해 무익!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 바로 그것이 "염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 "염려"라고 하는 말이 메림네오입니다. 이 말은 물어뜯는다. 찢는다. 쪼갠다 + 마음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내 인격을 파괴합니다. 내 행복한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게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염려는 날카로운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철저히 지키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주일 날마다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우리 삶의 존재가 바뀌어 지는 행복을 얻어야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 일거리들 때문에, 염려거리들 때문에, 우리는 믿음생활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안달하고 속을 썩이는 걱정,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찌들게 만들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실패로 만들어 가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을 갉아먹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2. 재리의 유혹
두 번째 가시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물질 자체가 가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Neutral - 중성입니다. 그러나 분명 재리의 유혹은 가시떨기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는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단번에 질식시키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의 한 질식은 아주 서서히 일어납니다. 오늘 비유의 잡초들처럼 서서히 성장합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들은 신령한 싹들을 찌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서 물성이 영성입니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보면 영성의 차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생활의 비유, 천국생활의 비유를 성경에 37가지를 남겨 주시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 어떤 비유보다도 많은 17가지가 물질에 관한 비유입니다.
훌륭한 설교가 스펄젼은 말하기를 "네가 회개했다고 하나 너희 전대 돈주머니를 회개하기 전까지 나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하나 네 돈주머니를 열기까지 열려진 네 마음을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큰 상금과 명예가 걸려있는 경마대회 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 기수가 신나게 앞장서 달리는데 그 앞에 땡그렁 금화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유혹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말에 서 내려서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한참을 달렸습니다. 속력이 막 나려고 하는데 또 금돈이 하나 땡그렁 떨어지며 반짝 빛이 났습니다. 다시 내려서 그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마땅히 일등을 하여 명예와 상급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 기수는 명예도 상급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황금을 줍기 위해 멈추기 때문에 상급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미끼에 걸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결실치 못하는 자여!
3. 세상의 쾌락
세 번째 가시떨기는 "이 세상의 쾌락"입니다. 좋은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을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건 무서운 일입니다.
오락은 마치 "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약은 인간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유흥비 마련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신앙과 진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가시떨기입니다.
오락이나 운동가운데 골프가 꽤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데 밥만 먹으면 골프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골프에 미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골프공이 사망의 음침한 곳에 빠질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게 골프채가 있음이라. 골프의 막대기와 골프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도다. 필시 그것들은 우리 영혼의 숨통을 막아 질식시키고 말게 끔 되어 있습니다.
4. 기타 욕심
이에 대하여 마가는 너무나 많은 잡동사니 가시와 찔레들을 "기타 욕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기타 욕심은 끊임없는 욕심을 말합니다. 빈손 들고 온 인생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는 "내가 죽거들랑 관에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내 손을 밖으로 내밀어 벌려 놓아라. 빈손 들고 온 인생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하나 빈손 들고 가는 게 인생이니라. 이게 인생입니다.
어떤 부자가 죽었습니다. 기자가 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친께서 얼마나 남겼습니까?" 그 아들이 의미 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다 남겼습니다" 이 짤막한 대답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아무리 많이 가졌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모으면서 살아왔다고 하나 다 남겼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무저갱이라고 합니다. 심연이라고 합니다.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채워보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면 더! 더! 더! 하는 소리가 제일 많이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에까지 와서도 세상염려 근심 욕심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얼굴 한 번 제대로 펴고 웃지 못합니다. 못된 잡초와 가시덤불에 짖눌려 철야하며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하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됩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 생각을 엉뚱한데 빼앗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 와서 자아와 인정욕구 때문에 자기를 긁으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귀 영화 명예 너무 얻으려 하지 마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V. 가시 떨기를 제거하고 옥토가 되십시다
은혜 받는 길, 옥토로 만드는 일, 열매 맺는 일, 좋은 신앙인이 되는 일, 어려운 일 아닙니다. 내 마음의 밭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까?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서 갈아엎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신령한 단비를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걸핏하면 남편도 찌르고 아내도 찌르고 자식도 부모도 찌르던 돌짝 밭이 되어있습니까? 영적 지도자도 찔렀고 그 돌멩이에 농부 되시는 주님도 찔렸습니다. 돌을 뽑아 내십시오. 이제 우리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우리를 질식시켰던 가시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하고 정원사는 좋지 않은 가지를 잘라야 하고 과일나무의 못된 가지는 전지전정을 잘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들을 보니까 모를 심어놓고 잡초를 뽑아 주고 김매기를 하더라구요. 벼가 어릴 때는 괜찮은데 이만큼 자라다 보면 그것들이 목을 찌릅니다. 그러면 또 들어가서 김을 매줍니다. 이런 고통을 싫어하기 때문에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도끼로 잘라야 할 가시나무를 그냥 내버려두었고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할 찔레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버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과나무보다 가시나무에 더 호기심이 많았고 포도나무보다 찔레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요?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투하는 사람을 보니까 눈이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고 턱이 깨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줄줄 흐릅니다. 그러나 혈과 육의 싸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처절한 싸움이 영적인 싸움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잘라야 합니다. 친구를 잘라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해야 됩니다. 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고 유혹의 가시를 치고 쾌락을 자르고 습관을 뽑아버리고 정욕을 불살라 버리고 잡초 인생을 알곡 인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시밭 인생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VI. 결론 : 가시가 쓰일 곳
만일 어린아이가 가시를 가지고 놀다가 가시에 찔리면 소리를 지르고 가시를 대동댕이 치고 울면서 엄마~ 하고 달려옵니다. "엄마, 가시가 박혔어!" 그러면 엄마는 반지그릇 에서 바늘을 뽑아다가 머리카락에 슥슥 문지릅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콧김을 후~ 후~ 쐬더니 가시를 뽑아줍니다.
그것들이 좋아서 그것 얻으려고 몸부림을 하다가 찔렸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만족이 있을 줄 알고 그것 움켜쥐고 살아가다가 가슴이 멍들어 지고 말았습니다. 쾌락과 함께 놀다가 친구의 배신에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파괴되어지고 분해되어지고 와 해되어지고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할 수 있는 일은 가시를 팽개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할 곳 없어 두손들고 옵니다.
재물이 좋아 아버지를 버리고 재물 따라 갔다가 창기에게 찔렸습니다. 친구의 배신에 찔렸습니다.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배에 만족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군과 양식이 얼마나 많은고 주여 날 받아 주시옵소서.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1.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2.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3.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4.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예수께로 오십시오. 가시를 버리고 가시밭 인생 집어치우고 열매맺는 행복한 신앙생활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길가를 갈아엎는 것입니다. 돌을 뽑아 내고 가시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주여 참아 주시옵소서 열매맺는 삶을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