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여호수아 6장

스네어 2013. 11. 22. 09:19

 

성경본문 : 수 6:1~6:21

 

여리고성이 무너지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여리고성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이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지 400여년 만의 일입니다.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출애굽 한지 40년 만에 소망하던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 우리 소유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앞에는 여리고 성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성 뒤에는 또 가나안 칠 부족들의 여러 성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 현실은 마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 같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모든 문제가 다 끝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 예전에는 문제도 되지 않았던 것들도 문제로 부각됩니다. 옛날에는 거짓말해도 무슨 양심에 거리낌이 있었나요?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나니까 거짓말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더 무거운 신앙적 문제가 됩니다. 주일날에도 마음대로 쉴 수 없습니다. 술이나 즐기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단순합니다. 더 어려운 것은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전에는 기분 내키는 대로 미워하고 담을 쌓고 살아도 됐는데 이제는 화목하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에 부담이 됩니다. 전에는 원수도 미워하고 보복하면 되는데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에 이제는 이것이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그저 원망도 하고, 팔자려니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을 가지게 되니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실까?’ 하며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이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내 속에서 꼭꼭 감추어두었던 상처나 은밀한 죄악, 좋지 못한 성격이나 성품들을 건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를 건드릴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노출시키지 않고 은밀히 감추고 싶은 것들입니다. 사실 은밀히 감추고 싶기는 하지만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 상처나 죄악 때문에 우리는 자주 좌절에 빠지고 무기력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대부분 자살이나 자살충동을 느꼈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늘 무력하게 만드는 부정적이 자아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지 않은 성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본능적으로 가시 같은 말이 튀어나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니오’라고 거절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리십니다. 내어 놓으라 명하시고, 내가 그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악의 여리고, 상처의 여리고, 악한 습관의 여리고, 문제의 여리고를 돌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리고를 우회할 수도 있습니다. 여리고와 타협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가나안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이 마음의 주인은 오랜 동안 세상이었습니다. 이 우리 마음이라는 가나안 땅에 주님께서는 천국을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생명은 성장해야하고 풍요로워야 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풍성한 생명이 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전쟁

 

그런데 이 큰 싸움에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 것은 이 싸움이 하나님의 싸움, 곧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입니다. 신학자들은 여리고성 전투와 같은 싸움을 ‘여호와의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한 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리의 소식을 받습니다. 2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적들을 네 손에 붙였다. 바로 이 표현이 여호와의 전쟁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적들을 너희 손에 붙였다고 선언했으니 우리는 이미 승리를 보장받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거꾸로 해석해야 합니다. 미래의 승리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설계도가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설계도대로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생이 기초 공사를 하는 것같이 여기저기 다 파놓았고, 언제 건물이 서려나 답답해 하지만 참고 인내하면 어느새 멋진 건물이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늘 읽은 20절에서 승리의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실상 오늘 여리고 성의 작전 계획을 세우셨던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3절에서 5절입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앞에 일곱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불며 그 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릅니다. 첫날에는 한 바퀴를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돕니다. 도합 13바퀴를 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를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할 것이라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좀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성을 빙빙 돌리기만 하면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니요? 정말 황당한 계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러 이런 황당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왜요? 이 싸움은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바로 내가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도대체 여리고 싸움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성을 빙빙 돈 것뿐입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와 유사한 전쟁은 기드온과 300 용사가 수행한 전쟁입니다. 사사기 7장 이하에 보면 미디안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싸우러 나가려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가 너무 많다고 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하나님은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법을 가르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를 신뢰하면 염려와 두려움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한 백성들의 수를 줄이기 시작합니다. 두려운 자는 돌아가라 명하니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남은 자가 1만 명입니다. 하나님은 이도 많다고 하시며 그들을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물을 마시는 폼이 일부는 개처럼 엎드려 물을 핥아먹습니다. 다른 일부는 무릎을 꿇고 손으로 훔쳐 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 무릎을 꿇고 훔쳐 먹는 자를 택하여 그들로 전쟁에 임하게 하라 명령하십니다. 이들이 뭐 물을 우아하게 먹어서가 아닙니다. 무릎 꿇고 먹는 군인의 숫자가 300명으로 가장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수만의 미디안 군대와 싸워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리고성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성 전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의 첫 번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오랫동안 지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승전보가 없는 인생은 패배주의에 잡히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첫 번 전투에서 싸움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모든 싸움에 내가 함게 함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을 돌라는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인간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23)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합니다.”(고전1:25)

 

여리고성을 돌라

 

이 여호와의 전쟁에 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분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한 번만 돌고 함성을 외쳐라 그러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매일 한 바퀴씩 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두 13번을 돌게 만드십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대적과의 싸움에서 믿음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 전투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고 있습니다. 보통 전투에서는 소리도 지르며 기운을 북돋아야 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공격하는 측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처음에는 비장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믿음이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런 방식으로 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질까하는 불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매일 성을 돌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여리고성은 보통 성이 아닙니다. 여리고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입니다. 도시의 역사가 기원전 7천-8천년에 이르는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입니다. 고고학자들이 기원전 약 3천 년 경의 성을 발굴한 적이 있는데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났습니다. 성벽이 내성벽과 외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성벽의 두께가 2m가 되고 그 높이는 7m에 이릅니다. 그 외성벽 안쪽에는 높은 둔덕이 있고 그 위에 내성벽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높이가 지상에서 14m에 이르고 두께는 3m나 되었습니다.

 

매일 돌면서 이런 성읍을 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전의가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신명기 서에서는 여리고성으로 대표되는 가나안 성읍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신1:28) 더욱이 여리고 성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첫날은 그들의 마음이 녹았을는지 모르지만 다음날부터는 아마 성위에서 화살을 쏘며 욕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좀 오래된 유머인데 어느 목사님이 교회학교 아이들이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한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누가 무너뜨렸니?” 그러자 그 아이는 겁에 질린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안 무너뜨렸어요!” 이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던 목사님은 그 담당 선생님을 불러 이렇게 책망합니다. “선생님이 가르치던 아이에게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냐고 물으니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하니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 것입니까?” 그러자 선생님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애는 결코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에요.” 더욱 기가 막혔던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목사님,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든지, 교회 예산으로 물어줍시다.”

 

좀 오래된 유머지만 혹시 여러분의 형편은 아니십니까? 성경에는 이 싸움은 내 싸움이라고 수없이 말씀하시는데 여전히 인생의 문제를 내 문제라고 하며 그 앞에 좌절해 있지는 않으십니까?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단순히 하나님 말씀 따라서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삶에 기적이 없는 이유는 우리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계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우리 계산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단순히 순종하니 그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도 믿지 않고 순종할 것 같지 않으니까 성경은 세 번에 걸쳐서 이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5절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설명합니다. 6-10절에서는 이 명령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반복합니다. 10-20절은 그 말씀을 순종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말씀도 반복이고 성경도 반복입니다.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겨우 한 걸음 순종합니다.

 

제가 믿는다 순종한다고 하니까 이는 어떤 게으름이나 무능력에 대한 핑계 거리가 아니냐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히려 더 부지런히 삽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15절도 보십시오. “제 칠 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믿음의 사람은 더 부지런합니다. 더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일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는 것은 결코 게으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싸움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싸움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결과는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순종할 뿐입니다.

 

진멸하라

 

여리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전사들이 아니라 마치 예배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제일 중심에 선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앞에 일곱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불며 나갑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앞뒤를 무장한 군사들이 호위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침묵을 지키며 따릅니다. 이는 한 편의 예배 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싸움의 승부는 예배에서 결정이 납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에서 하나님 임재를 경험해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선 가정 예배가 있어야 승리합니다. 직장에선 직장 예배가 있어야 승리합니다. 하루의 승리는 새벽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기에 예배를 통해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바쁜 일이 많을수록, 중요한 일이 많을수록 우리는 예배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 싸움이 예배와 같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고도 그 전리품을 취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이 전쟁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심판 전쟁입니다. 가나안 부족들의 죄악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그 탈취물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18-21절에 그 사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18절에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에서 바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훼렘’입니다. 21절에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에서 ‘멸하다’는 단어도 동일하게 ‘훼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여리고 사람들과 그 소유의 살아 있는 생물들은 다 죽이고 19절에서와 같이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는 것이 바로 훼렘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전쟁기준으로 보면 반인륜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모든 전쟁들이 이런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되 그 상황과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문명과 인간성이 발달하고 더욱이 십자가의 사랑이 드러난 신약시대와 오늘날의 시대는 이런 전쟁 이데올로기와 진멸하라는 훼렘의 정신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영적인 의미를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악의 바이러스가 조금도 침투하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던 시대로 우상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비록 우양이라고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조류 독감 사태와 마찬가지입니다. 조류독감은 닭이나 오리 등에 기생하는 병원균 바이러스 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치사율이 거의 100%에 이르고 감염율이 매우 높습니다. 이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되면 인류에게 치명적인 질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조류독감이 발생한 지역은 반경 3km 또는 10km 안에 있는 모든 조류는 살처분합니다. 수백 마리의 조류를 진멸하는 모습은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저는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죄악도 바이러스입니다. 순식간에 전파가 됩니다. 아담 한 사람 안에 있던 죄가 순식간에 온 인류에게 퍼집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형제 아벨을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행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질투심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는 질투심 때문에 형제를 살해합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살인입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죄악의 바이러스가 조금도 침범치 않도록 훼렘을 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 가나안 우상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결국 BC 586년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렇지만 어디 세상에 무균상태가 존재하나요? 우리는 세상 속에 살기 때문에 어느 새 죄가 침투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 씻어 내려야 합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닐 수는 있지만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죄도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되고 죄가 자라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죄가 자라고 나면 그 뿌리를 뽑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리고성을 앞에 둔 것 같은 힘든 싸움을 하는 이유는 이 죄악을 오랜 동안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이 죄악의 쓴 뿌리들이 고목나무뿌리처럼 깊숙이 얽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 죄악의 쓴 뿌리를 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으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쓴 뿌리가 힘들게 하지만 여러분 낙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03편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는 부슬부슬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그 약점과 강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조각가십니다. 그 손 안에 들어온 어떤 거친 돌도 그 분의 손에서 작품이 되어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있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깎고 붙이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위에 놓인 거친돌들과 같습니다. 위대한 조각가의 손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져 나올 것입니다. 비록 여리고 성처럼 강고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나갈 때 우리 안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나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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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에서 가장 먼저할 일

성경본문:수6:22-25, 히11:31 설교자: 신정환목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죽음 이 전혀 두렵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멸망을 향해 가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 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예수 이 름을 알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되는 큰 특권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사는 자 답게 우리는 세상을 충만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은혜를 입은 자 라고 이야기합니다. 은혜는 전혀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었지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큰 선물을 받음으로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말하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할 수 없고 인간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되 어 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어떤 의를 행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다' 란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어떤 노력으로 건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되어 집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양할 것입니다. 은혜로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늘 불평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믿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표로 새로운 세대를 구원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십니다. 그리 고 하나님은 큰 은혜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인간이 한 것은 없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첫 번째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여호수아서 6장을 읽으면서 성이 무너졌다는 것으로 끝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 늘 본문의 내용을 보십시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라합의 가정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가 바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으로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평안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인도되어 졌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우리 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기름진 땅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적대 국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조된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가서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만이 잘 살겠다고 하기 때문에 주위의 모든 국가를 적대 국가로 만들고 불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은 우리가 불안하게 살길 원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1절 말씀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히 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 목적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 신 목적도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도 우리로 하여금 평안히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애굽에서 살 때엔 너무나 불안했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보내신 목 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우리는 죽음과 가난과 질병에서도 이제는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는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 것이 우리가 받는 은혜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 입니다.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목적이며 성령님의 목적입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노라'고하십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알면 우리는 참 행복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도 마찬가집니다. 사도행전 1 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이 정말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왔다는 증인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40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 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그 예수님을 내가 받아들이고 믿고 구원받은 자란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진리가운데 있는 자란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 가운 데 있는 자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은혜를 받은 자임을 알고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 시대 때 세상에 죄악이 가득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죄가 가득했기 때문에 물로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두고 보아도 발전할 것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를 입은 노아의 가정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방주를 만들고 구원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방주를 만들고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고 여기 구원이 있다 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여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고 우리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교회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이곳에 들어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우리만이 누리기 위한 성전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들이 모여서 교육관을 짓고 사회 복지 시설을 지어 그들로 하여금 그곳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들이 해 야 할 일입니다.

은혜를 입은 요나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스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마리아 여인이, 은혜를 입었던 사도바울이, 많은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에 나가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가나안 모든 영역에 전파되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목적은 모든 사람을 구원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앞에서 말씀드린 데로 이미 가나안 땅에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 다 전해진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 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고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 도해 주셨을 뿐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 마실 생수를 주 셨고, 먹을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것이 가나안 땅에 다 선포되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다 선포 되어졌습니다.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도 있겠지만..

그러나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만 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선포되어졌지만 가나안 땅에서, 여리고 성에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바로 라합의 가정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 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예수님 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구 원을 받았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 어떤 분이 전 도를 굉장히 많이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전도를 하 지 않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사람들이 전도를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면 기를 죽인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면서 남편과 아들도 전도를 못하냐면서 기를 죽인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구원되어지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져 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 있더라도 영적갈급이 없다면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면 당신의 자녀는 교회에 나오는지 묻고, 신분을 묻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신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라합의 가정에 든든한 가장이 있었다면 쉽게 하나님을 받아 들일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온전한 가정보다 어려운 가정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외롭고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많 은 사람이 있었지만 라합 가정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라합은 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 들입니다. 그 결과 구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 마리아 지역이 더럽다고 아무도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편견의 벽을 무너뜨리십니다.

누가 가장 먼저 구원을 받습니까?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을 만나 그를 구원하십니다. 사마리아의 지도자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물가에서 만난 상처난 여인이 예수님을 영 접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라합은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 시킨 그 도구가 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신분에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에는 다만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 말 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산 범물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지산 범물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름진 땅으로 만들어 주시고 사방에 산으로 둘러 쌓인 아름다운 지역을 만드시고 저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뿐 아니라 우 리 모두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파트 분양 받을 때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운 이 좋아서 당첨되셨습니까? 모든 경쟁을 물리치시고 나를 이 지역으로 보내 주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이 지역에 제가 오기 위해 땅 한 평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조건이 갖추어진 가운데 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왔습니다. 그리고 10년간 저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고 입을 옷을 주 시며 은혜를 베푸심을 체험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이 지역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불리어 졌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은혜를 받은 우 리들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입니다.

첫 번째는 이 지역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지역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이 지역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바라보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소문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소문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며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해 소문을 내야 합니다. 가나안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라합은 상천하지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당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구원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이 야기합니다. 우리는 좋으신 분의 은혜를 입고 그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지도자에 대해, 교회에 대해 악평하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 되 이 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아름다움을 주고 받는 자는 금색의 안경을 쓴 사람입니다. 성령에 의해 눈이 떠진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소문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가게의 구멍가게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옆의 교회 목사님을 자랑합니다. '그 교회 목사님 설교 정말 잘하십니다.' 한번은 그 가게의 한 손님이 그 주인을 보고 '지난 주 목사님 설교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설교를 잘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 교회에 한번도 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이 오신 후 사람들이 외상값을 다 값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면 구원받는 자들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납니다.

경로대학 입학식날 한 노인분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제가 누구인지 아세요 ?', '안면은 있는 것 같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 예, 그러실 겁니다. 제가 딸기밭에서...' 2년전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산기슭에 밭에다 딸기를 심어 두고 돌보고 계셨습니다. 내려오면서 가까이 갔습니다. 할머님의 말동무가 되려고 했습니다. 할머님의 무공해 딸기고 실컷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교회에 대해 자랑을 했습니다. 경로대학도 소개했습니다. 그분은 교회 문 앞에도 오신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2년후에 이 분이 자기 걸음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다른 분들도 데리고 오셨습니다. 저는 경로대학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알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은 준비된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구 원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지역에도 다녀보면 영적으로 갈급한 심령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교회에 나오십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심령에서 초점을 두십시오. 떨어질 수도 있고 시험에 들어 넘어질 수도 있지만 다른 교회를 통해 신앙생 활을 하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자들은 영적인 과도기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복음을 전하면 쉽게 열매가 맺혀집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적으로 갈급한 라합의` 가정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마리아에 들어가신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제쳐두고 무엇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나 안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못 누리고 살면 불행해 질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은혜를 입은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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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행하니라

(수6:1-14)

 

저는 이시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고자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당 마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미국 교회 아이들의 성경지식이 어느 정도 되는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학생들 중 한 아이에게 "애야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니?"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긴장을 하면서 "저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어요"하고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친구가 당황하고 있는 친구를 변호 해주었습니다. "이 친구는 착한 아이 이기 때문에 절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꼭 알고 싶으시면 저기 우리 집사님이 계신데, 저 분에게 물어보시면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는지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다시 집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하시는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도 저 아이는 절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저 아이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으면 제가 제직회에 말씀을 드려서 변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는 것이 보통 상식입니다.

 

여러분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오랫동안 생각해 보아야 한다면 이것은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무너뜨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경 본문을 보시면 여리고 성의 정복을 앞에 놓고 하나님은 참 이상한 명령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내리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것은 가나안에 있는 가장 견고한 성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 명령으로서는 엉터리 같은 명령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야 내가 이 성의 왕과 모든 병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 그래서 너희 군사들은 성을 둘러 이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돌고 엿세 동안을 그렇게 하라. 그리고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나팔을 불면서 언약궤 앞에 행하고 제칠 일에는 그 성을 일곱 바퀴를 돌아라. 성을 도는 동안에는 나팔 소리 외에는 일체 소리를 내지 말고 침묵을 하며 성을 돌다가 외치라 할 때 힘껏 외치라 그러면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리라"하는 아주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방영되는 Discovery chanel라는 방송에서 고대 역사 속에 있던 사건들을 고증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여리고 성이 허물어지는 장면을 굉장히 실감 있게 보여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학자들의 주장들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지금도 여리고라는 도시가 이스라엘에 있고 팔레스타인 게릴라 해방 기구에 수도로 정해져서 지금도 사람이 거하고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그 성을 발굴했을 때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기록들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어떤 고고학자는 여리고 성이 무너진 흔적들을 발굴해서 역사적으로 고증을 한 "돌들의 소리"란 책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여리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전투였고 제일 힘겨운 전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로막고 있는 이 견고한 성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앞으로 이 가나안을 온전히 정복하느냐 못하느냐의 승패가 달려있고 백성들의 사기가 이 성을 정복하지 못했을 때 다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상한 작전 명령을 내립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시면서 '칠칠칠 작전' 이라는 설교 제목을 붙인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보면 7이라는 수가 많이 나옵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 일곱 바퀴 이런 표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작전 명령을 하달하시면서 행군 순서와 정열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1. 행군 순서 대열과 방법입니다.

 

이 명령의 특징을 보면은 첫째는 행군 순서, 대열 그리고 방법입니다. 여러분 13절에 행군 순서를 보시면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가운데 하나님의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있고 그 제사장의 앞에는 나팔을 부는 일곱 명의 제사장이 있고 그 앞에는 다시 무장한 병사들이 있고 그리고 법궤 뒤에도 무장한 병사들이 있습니다. 법궤를 가운데 모시고 성을 도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향해서 곧장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여리고 성을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그들은 하루 일과의 제일 처음 시간을 여리고 성을 한바퀴 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둘째 날도 일어나서 돌았습니다. 하루의 제일 처음을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도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아주 고도의 심리전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이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지금 성에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 올것에 잔득 긴장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가운데 모시고 행군 대열을 해서 성을 한바퀴 돌고 아무 소리도 안내고 나팔만 그냥 불면서 그 성을 돌 때 여리고 성 사람들의 심정은 초조하고 조마조마하고 때로는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저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어떤 일이 지금 전개될지 모르겠다. 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인간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들의 모든 삶, 우리 신앙들의 모든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중심으로 전개돼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 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배제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우리 인간들의 생각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까 하나님이 설자리를 인간들이 비집고 서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인간의 뜻을 이루는데 집착하는 실수를 우리 자신들이 범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앙에 모시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항상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여섯째 날도, 제칠 일 일곱째 날도 그들은 이러한 행군 대열로 여리고 성을 돌았다는 것입니다. 첫날에서 끝날 까지 시작에서 마칠 때까지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행군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에서 우리 인생의 그 끝나는 순간까지 하나님 중심의 신앙 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실수를 범하는 것이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내 삶에 개입 시켜서 이용하다가 좀 곤란한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을 밀쳐 내 버리고 내 뜻대로 모든 일을 다 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하려는 그런 잘못된 신앙 의식들이 한국 기독교인들 속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면서 내가 과연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내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물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 3,4절 행군 방법을 가만히 보시면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라고 했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 여섯째 날 동안은 성을 한바퀴씩만 돌았습니다. 그리고 진에 돌아와서는 그냥 머물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4절을 보시면 "그 제이 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 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 같이 행하니라" 어쩌면 참 미련한 것 같습니다. 첫째 날도 아무 일이 없었고, 둘째 날도 아무 일이 없었고, 셋째 날에도 없었는데도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이라는 제칠 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1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절에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일찍 일어나서 성을 한바퀴 돌고 말았는데 제칠, 일곱 번째 마지막 날에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일곱 바퀴를 계속 돌았습니다. 제가 생각 할 때는 여리고 성이 그리 큰 성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옛날로는 여리고 성이 크고 견고한 성이었지만 요즘으로 보면은 큰 성이 아닌 인구가 불가 몇 만명 밖에 안 되는 아마 작은 성이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하루에 일곱 바퀴를 돌 수 있는 거리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행 속도로 보통 1시간에 4킬로미터씩 걷는다면 해가 떠서 질때까지 우리가 일곱바퀴씩 돌 수 있다면 그 크기는 우리가 대충 짐작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어나서 여기서 출발해서 KBS를 돌아서 갑천변을 따라서 저 샘머리 아파트를 돌아서 동양 타임월드 쪽을 돌아서 이렇게 오면은 아마 여리고성쯤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지역이 더 넓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한번만 돌고 말았는데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학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첫째 날과 여섯째 날과 제칠일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성경학자 레빈스 같은 사람은 일곱째날은 안식일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 아니면 첫째 날과 여섯째 날 사이에 분명히 안식일이 있어야 되는데 그 안식일이라는 뚜렷한 기록이 없고 또 그들이 안식을 했다는, 쉬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한바퀴 돌고 자기들 생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여섯째 날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제칠 일 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붙이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 번째라는 것은 완전한 수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표현할 때 제칠 일을 안식일로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제칠 일 이 날이 바로 안식일 것이고 이날은 다른 여섯 날과 구별한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날은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 위해서 그 성을 일곱 바퀴를 돌리셨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꼬박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성을 일곱바퀴 돌리고 계신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시간을 드릴 때, 평일에 하나님께 우리가 영적으로 드릴 때가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우리의 시간들을 다 보냅니다. 그러나 제칠 안식일 날, 이 주일날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하루를 지키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도는 이 방법도 이와같은 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학자들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구별된 일곱째 날은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고 이렇게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하루종일 일곱 바퀴를 힘들게 그 성을 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절대 침묵하라는 주의 사항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이 명령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 같이 10절 말씀을 소리내서 읽읍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기에서 첫째는 외치지 말라, 고함을 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소리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라 수근 수근해서 옆 사람에게 말소리가 들리도록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입도 때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침묵에 대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리하다가 외치라 할 때 외치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살아가면서 말을 해야 될 때가 있고 침묵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말을 해야 될 때에 말을 하지 않는 것, 이것도 문제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말을 하지 말고 침묵을 지켜야 될 때 쓸대없는 말을 늘어 놓는 것, 이것도 합당하지가 못합니다.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면 참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여러분 때때로 이런 경험을 해 보셨죠? 막 속에서 끓어 오르고 내가 이거 한마디 해야만이 속이 그냥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데 이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알다가 돌아와서는 가슴속에 화가 치밀어서 밤잠을 못자고 씩씩거리면서 하루를 보낸 그런 경험을 해 보셨죠? 때로는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 될 자리에서 괜히 이 입이 방정맞게 한 마디 내 뱉었다가 이것이 칭칭 얽히고 곪혀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또 내가 상처를 받고 하는 그런 말을 하고 난 뒤에 후회하고, 후회를 하고 난 뒤에 엄청난 손해를 보는 그러한 경험들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해야 될 때와 하지 말아야 될 때를 잘 구분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은쟁반의 금사과와 같다. 잠언에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지 못할 바에야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우리가 다 일어나서 갑천변을 따라서 죽 그냥 둔산을 한 바퀴 돌아서 하루를 보내고 내일도 또 한바퀴 돌아서, 모레도 ...... 그렇게 일주일을 돌게하신 다면 우리가 돌면서 절대로 말하면 안된다고 약속을 한다할지라도 그 약속을 지켜지기가 참 쉽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날은 그런대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보여주신다고 하시니까 이거 무엇인가 보여주시겠지 하고 아무 말도 않고 참고, 참고, 참고, 참습니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은 참고, 참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출발을 했을 때나 행군을 다 마치고 돌아왔을 때나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갑니다. 둘째날도 그렇게 참고 참고해서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셋째날도 오늘은 무언가 일어나겠지, 삼 세 번이라고 오늘은 분명히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다. 셋째날 돌았는데도 아무일도 없습니다. 넷째날 돌 때는 나는 배 아프다고 빠질까? 나는 머리 아프다고 빠질까? 아마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충분히 아마 있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14절을 보시면은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련하지요? 우리만큼 세련되고 똑똑하고 약삭빠르지 못하니까 시키면 시키는데로 우둔하게 엿새날까지 이대로 이같이 행했다. 첫째날 했던 것처럼 둘째날도, 셋째날도, 넷째날도, 다섯, 여섯째날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성위에서 내다보고 지켜보고 있는 여리고성 사람들의 심정을 어떻겠습니까? 더 초조했을 것입니다. 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행하든지, 사다리를 가지고 와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든지, 돌격대를 동원해서 돌격해 오든지 해야 할텐데 성만 한바퀴 매일 돌고 가버리고 또 돌고 가 버리고 도대체 저들이 무엇을 할려고 저러는지 오히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참지 못할 만큼 그런 답답한 심정에 빠졌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둔함과 미련함을 우리는 배워와 될줄 믿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방법과 맞지 않을 때 너무 많은 말을 합니다. A.W. 토어져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 훈련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대로 너무 말을 많이 해 버리면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을 때 입이 간질 간질하는데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참고 기다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를 여는 기회가 우리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 인간 관계 속에서도 내가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참음으로 말미암아 '아하 내가 그때 입을 열어서 말을 했더라면 얼마나 큰 실수를 했을까?'하는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그 때 내가 침묵했던 것이 바로 약이었구나

 

저희 집 막네가 중하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담임 선생님 한분이 다 가르치셨는데 중학교에 가니까 시간마다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는데 여러분이 들어오시니까 마음에 드는 선생님도 계시고 마음에 안드는 선생님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와서 어느 선생님은 너무 좋고 어느 선생님은 싫고, 수업시간에 무섭고 또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더 기다려보면은 그 무서운 선생님, 너 마음에 안드는 선생님이 훨씬 더 좋은 선생님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짧은 시간도안에 무엇을 보고, 어떤 현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우리는 성급하게 말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지나고 보면은 나에게 성급한 표현, 성급한 한 마디가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내 자신에게도 참 민망스러운 그런 낭패감을 가질 때가 때때로 있습니다. 경건 훈련은 바로 침묵 훈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외치지도 말고, 음성도 들리게 하지 말고, 아무 말도 내지 말고, 침묵하면서 오직 나팔소리만 울리고, 나팔 소리만 들으면서, 소리가 난다면 발자국 소리 정도만 들으면서 날마다 여리고성을 한바퀴 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내 뜻을 너무 소리내서 주장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내 자신이 짓밟아 버리고 묵살 시킬수가 있습니다. 지나보면 후회스럽고, 지나보면 그것이 엄청난 영적인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놓고 나의 입을 다물 수 있는 기회를 이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됩니다. 한바퀴 돌고, 두바퀴 돌고, 옆에 있는 친구가 쿡쿡 찌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보고 왜 미련한 일을 하게 하실까? 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말도 안되잖아? 그러면 참던 사람이 참다가 맞아 말도 안돼 말도 안돼는 일이야 우리 저 여호수아를 몰아 내 버릴까? 우리 그냥 반란을 일으키고 말아 버릴까? 얼마든지 부정적인 분위기로 돌변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련하게, 미련하게, 미련하게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말아야 될 때 말을 하지 않고 참는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말해 버리면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을 짓밟아 버리고 하나님의 작정 계획을 흩트려버리고 실패로 몰아가야 됩니다. 그러나 하고 실은 말을 참고 속으로, 속으로 침묵함으로 견디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그 견고한 성 여리고가 허물어뜨려 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해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점에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침묵 훈련이 안돼 있습니다. 기도할 때 입으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든지 통성으로 하면 무언가 와 닿는 것 같고 뜨거운 것 같고, 내가 믿음이 좀 있는 것 같다가 가만히 기도하면 온갖 잡념이 머리속을 다 지배를 합니다. 그런 훈련이 전혀 안되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기도는 있는데 묵상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내 자신을 세워 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묵상의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주장만 기도를 통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내어 놓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뻔뻔스러운 예수쟁이가 되든지 아니면 굉장히 이기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예수쟁이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내어놓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음성을 통해서 내 자신이 깨달을 때 우리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1시간 하나님 앞에 입술로 기도하면 1시간 말씀 앞에 내 자신을 세워 놓고 하나님 음성을 듣는 묵상의 시간, 침묵의 시간을 우리는 반드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의 신앙에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3.이같이 행하니라.

 

 

자 여러분 이제 제가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14절 보시면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했다" 그런데 "제칠일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일곱 번째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이 성을 우리에게 주셨느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칠 때 여리고 성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봅니다. 그 외치는 순간 하나님은 지진을 통해서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자정없이 흔들어서 땅 속으로 가라앉고 허물어지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정말 허무맹랑한 계획같은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 방법을 믿고 순종하고 따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를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이 순종하는 훈련이 참 안돼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자녀를 키우면서 "요즘 아이들은 참 버릇이 없어 우리 집 아이 뿐만 아니라 옆집 아이들도 다 버릇이 없어" 이것이 이집트의 피라미 속에 고고학자들이 들어 가 보니까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라는 글귀가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수 천년 전에 어른들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우리가 그 말을 듣고 성인이 되어서 우리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이 타령을 계속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부모들에게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마음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하는 인간의 불순종의 모습속에서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섯동안 하루에 한바퀴씩 돌고 이레째 일곱바퀴를 돌아라 수용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내가 아멘으로 받겠습니다.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때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실 때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랐습니다. 옆에서 보던 사람이 "아이고 더러워라 진흙에 어떻게 침을 뱉어서 이기느냐? 어떻게 그것을 눈에 바르느냐? 이건 모독아니냐? 소경이 소경된 것만도 서러운데 예수님까지 침을 뱉어서 그 흙을 눈에 바르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발끈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 그대로 순종하고 가서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을 때 소경이 빛을 보는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맹물을 떠서 부었을 때 그 맹물이 포도주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말해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은 요단강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목욕을 했을 때, 순종했을 때 그의 문둥병이 사라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번, 칠일동안 하루에 한바퀴 돌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 일곱바퀴를 돌고 침묵하다가 외치라 할 때 외쳤을 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순임금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신하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망태기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그대들은 집에 돌아가서 이 망태기에 자기 집에있는 우물물을 퍼서 담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명령을 임금이 신하들에게 내렸습니까? 망태기에 물이 담깁니까? 부으면 붓는대로 줄줄 다 새버리는데...... 샘물을 길러 망태기에다 담으라는 이 말은 임금이 신하들을 골탕먹이겠다는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건 누가 들어도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임금이 지금 우리를 골려주고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신하는 임금의 말을 받아서 도저히 이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렇니까 임금님께서 그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임금이 그렇게 말하니까, 명령을 내리니까 가서 하는 척이라고 하자 하기는 뭘 해 그냥 망태기만 가져다 놓고 시간을 좀 끌어보자 이런 가지 가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한 신하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웃옷을 벗어버리고 망태기를 놓고 열심히 우물물을 퍼서 담았습니다. 이것은 물이 담길 리가 없습니다. 망태기니까 그냥 물이 빠져버리지요. 물을 가져다 붓는 속도보다 빠지는 속도가 더 빠를니까 물은 고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물은 자꾸만 자꾸만 줄어들었습니다. 퍼내는 속도보다 솟아오르는 속도가 양이 작았기 때문에 열심히 우물물을 퍼내니 우물 바닥에 이거만한 금덩어리가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우물 속에 들어가서 금덩어리를 꺼내서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내가 여차 여차 망태기에 우물물을 퍼 담다가 보니까 바닥에서 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임금님의 명령에 순종하다 보니까 금덩어리가 나와서 이 금덩어리를 임금님에게 드립니다." 그때 임금님은 "내가 명령을 내린 모든 신하들의 우물 속에 금덩어리를 하나씩 다 집어 넣었다. 그러나 자네만 내 말에 순종했으므로 금덩어리를 발견한 걸세. 다른 사람은 자기 집에 우물 속에 금덩어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은 내 명령을 순종한 사람이 아니다. 자네만이다. 그래서 그 신하에게 금덩어리를 상금으로 주고 아주 중요한 국가의 요직을 맡겼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너무 인간적인 생각으로 요령을 피우고 인간적으로 계산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은 내 뜻을 포기할 때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 뜻이 살아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을 차단시켜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이루는 역사가 얼마나 크고 놀랍다는 것을 깨닫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칼빈은 "첫째도 순종이요, 둘째도 순종이요, 셋째도 순종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바른 자세이다. 순종이 없는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요 자기를 위장한 신앙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하나님이시지만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도록 순종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우리도 이런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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