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이 하시는 일 1 요16:7-11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기 전에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동안 여러 말씀도 하셨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세상을 이기고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본문에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이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아니면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에게도 같은 이유로 신앙에 기초가 되며 생명의 말씀입니다. 처녀가 시집가서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시집생활을 하게 되면 시어머니 보시기에 하는 일이 무엇을 하든지 어설프고 잘 하는 며느리라 할지라도 언제나 시어머니 눈에는 잘 못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시집살이가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는 며느리는 재미가 있지만 배우는데 관심이 없는 며느리는 재미도 없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로 고부간에 갈등을 부츠기고 자녀들과 할머니 사이를 때어 놓는 어리석은 일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며느님이 시어머니가 되면 자신은 시집와서부터 잘하고 있는 것 같이 며느리를 열심히 가르치고 같은 길을 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고부간에 갈등이 대를 이어 갑니다. 또 열심히 배우는 며느리는 같은 이유로 열심히 즐거움으로 시댁과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 나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의 학문이나 사회적 배경과 지위를 내세워 고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갈등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이나 일은 사람입니다. 기본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같은 이유로 신앙도 즐거움으로 잘 배우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사역을 옆에서 지켜본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너무 세상적인 것을 너무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점령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되면 모두가 한자리씩 찾지 할 것으로 생각하며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신들이 갈리리의 어부로서 살아갈 두 아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닌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말씀을 보면 무엇인가 한자리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물론 충성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도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한 것 같은데 성경은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이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망하는 경우입니다. (렘 17: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여러분들이 총리와 장관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사회의 한 면입니다. 탈세 위장전입
어떻게 보면 온전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2월 25일 전직 국회의원 65세 이상에게 월 120만원의 연금을 준다는 연급 법을 국회표결에서는 재적의원 191명 가운데 187명이 찬성해 여야가 밥그릇 챙기기에 연합했다는 비판입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노동당이나 민주당 한나라당의원들의 통합투표는 역시 정치는 정치쇼란 것을 보여줍니다. 반대 이용경(창조한국당). 조승수(진보신당) 기권 정해걸 최영희 의원입니다.
국민이 맡겨준 권리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정의를 외치고 자신들이 국회의원을 하면 더 잘 할 것 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밥그릇에서는 본심을 나타내는 것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에도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다가 보면 내가 원하는 신앙으로 발전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일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신앙의 기반이 되어 세상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말씀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약속과 함께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그동안 알았던 말씀보다 더 큰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더 큰 깨달은 은혜가 있으시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 믿음입니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음이 있습니까? 믿는다고 하면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면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만약에 여러분이 고의적으로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된 믿음이라고(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말합니다.
2)산 믿음과 죽은 믿음입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어떤 것일까요? 그 해답은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산 믿음은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는 제사 즉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제물과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우리가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열납 된 예배는 기쁨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의로운 증거가 있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부자와 나사로에서 나사로의 믿음입니다. 육체는 비록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끝까지 시키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산 믿음은 하나님의 지시에 즉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우리가 잘 아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열심 있고 건강한 청년 대표자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보고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으로 갈라졌습니다. 가나안 백성과 그들의 철병거와 군사력에 믿음을 저버린 10지파의 대표 그러나 유다지파의 갈렙과 에브라임지파 대표 여호수아는 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산 믿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죽은 믿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은 믿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산 믿음을 가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생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삽니다. 이처럼 산 믿음은 생명입니다. 성경은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 모두가 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 부부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살렘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성도가 많아지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구제도 하고 교회도 넓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제정 적으로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들 부부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아 감사해서 자신들이 재산을 처분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져다 받치려하는 순간에 세상을 바라봅니다. 정리한 재산의 일부를 숨깁니다. 죽은 믿음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이 그들은 베드로 앞에 재산의 일부를 드리고도 죽었습니다. 여기서 산 믿음을 잃은 결과입니다.
또 죽은 믿은 제사에 실패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저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저자신이 바른 예비를 인도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고 자꾸 교회를 헐 뜻고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 성도끼리 화합하지 못 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그 일에 대하여 (창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예배 실패자의 모습니다. 제사를 드렸으면 감사하고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안색이 변화고 분하는 모습니다. 예배의 실패가 결국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과거나 현제나 미래에도 똑 같은 사건이 일어 날 것입니다. 왜 예배는 형식이 아닌 생명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다스리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배 실패는 어떤 결과를 가져 옵니까?
(창 4:6-8)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결국 살인까지 이어집니다. 신앙은 그냥 내 기분에 맟추어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에 대하여((롬 12:1-5)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예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도 하고 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믿음으로 변질되는 것은 불순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말렉과 전투에서 모든 것을 멸망하라고 했지만 그들의 눈에 좋고 튼튼한 짐승을 사렸습니다. 그 이유를((삼상 15: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크든 작든 불순종은 하나님과 관계를 단절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게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은 과거나 현제나 미래에도 같은 이유로 사울왕의 전철을 밟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보다 예수 그리스도 보다, 성령님보다 더 나은 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면 돈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보다.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이 됩니다. 불신앙은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대표들의 명단을 보면((민 13:4-15) (4) 그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르우벤 지파에서는 삭굴의 아들 삼무아요 (5) 시므온 지파에서는 호리의 아들 사밧이요(6)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7) 잇사갈 지파에서는 요셉의 아들 이갈이요(8)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요(9) 베냐민 지파에서는 라부의 아들 발디요(10) 스불론 지파에서는 소디의 아들 갓디엘이요(11) 요셉 지파 곧 므낫세 지파에서는 수시의 아들 갓디요(12) 단 지파에서는 그말리의 아들 암미엘이요(13) 아셀 지파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둘이요(14) 납달리 지파에서는 웝시의 아들 나비요(15) 갓 지파에서는 마기의 아들 그우엘이니) 그 영향은 많은 사람들을 불신앙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10사람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희망을 꺽고 하는 말입니다.(민 14:1-3)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3) 선택권은 아담에게 주셨던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 선택의 결과는 과거나 지금이나 남에 지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확고한 믿음 보다는 선지자나 왕에 의하여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그들이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지적하는데 죄에 대하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자신의 믿음의 경력 성령의 체험 또한 기도의 응답 기타 여러 가지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이 있으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죄를 멀리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동합니다. 그리고 적은 일이든 큰일이든 기도하며 맡깁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합니다.
죄에 대하여 즉 불순종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골 3:1-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천국에까지 성령께서 동행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믿음을 주님은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해결 받습니다. 목적을 해결 받으나 구원은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습니다.(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눅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홉 사람은 한센 병을 해결 받았으나 구원은 확정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치료됨을 알고 돌아와 감사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우리들의 삶에 구원의 감사요 생활에 감사요 그래서 감사를 잘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세가지를 말씀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감사입니다. ((살전 5:16-18)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가 부족하게 생각하는 것은 감사에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아홉 명의 한센병 환자가 되지 마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늘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예수님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믿음을 따라 행하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믿음 없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믿음 있는 성도들이 다 되어 여러분의 생애가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감사가 넘치는 성도의 삶이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 2-3회 요16:7-11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께서 사역하는 세가지에 책망하신다. 는 단어 엘렝코 성령은 책망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드러내고 폭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책망의 원문의 내용과 사용한 것을 보면
ejlevgcw 드러내다, 폭로하다.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조롱하다, 비웃다, 모욕을 주다',(b) '창피주다',(c) '비난하다',(d)'폭로하다, 저항하다',(e) '해석하다, 상술하다',(f) '조사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엘렝코는 용법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람 대격과 함께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 권면을 말합니다.(마 18: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회중적으로든(딤전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권고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성령이 이 일을 하며(요 16:8 책망하시리라) 왜 책망합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계 3: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리고 재림 때에(유 1:15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ejxelevgcw(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일을 하신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 대하여 책잡을 수 없다(우리는 믿어야 할 따름입니다. 요 8:46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세례요한의 책망을 받은 헤롯(눅 3:19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교훈(히 12: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율법과 바름 삶입니다.(약 2:9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에 직면할 때, 이러한 폭로를 경험한다. 페리(~을 인하여)는 잘못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며(눅 3:19), 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호티(o{ti 3754)도 더불어 사용되기도 한다(요 16:9 이하). 폭로나 정죄 뿐만 아니라 교정이나 징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엘렝코로 나타내어진 죄에 대한 투쟁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기초한다. 레 19: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jk'y:( 은 징계(책선)를 요구합니다. 랍비들에게 있어 질책은 사랑의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잠 3: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욥 5:17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등은 하나님을 징계로 교육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망하다는 단어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단어 인과 동시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 인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님의 하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심문하신다. 말씀 중에 두 번째 말씀으로 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말씀을 상고하면서 성령님의 깨달은 은혜가 있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죄라는 단어 하말티아의 넓은 의미는 잘못이나 실수로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며 처음부터 비유적으로 사용된 죄는 사람의 행동의 성격을 잘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윤리적으로 법률적으로 모두 사용되는 단어로 단한번의 잘못에서부터 중죄까지 모든 그릇된 행위를 다 나타낼 수 있는 단어입니다. 고대 헬라시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적의와 같은 죄의 개념이 없었고 단지 부족함(결함)과 법 죄 , 또는 실수나 범죄로 인하여 표적을 놓친다는 개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리스토텔레스는 하마르티아를 연약, 사고, 불한전한 지식 때문에 미덕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 했습니다. 그러나 하마르티아는 옳은 감정에 위배됨 이라는 비교적 불명확한 의미를 지닌 집합적인 용어가 되었고 이것은 우둔한 것으로부터 법을 어기는 것 즉 올바름, 공정, 정의를 어기는 것 그리고 지배적인 윤리와 사회질서 및 도시국가에 대한 존경의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삼대 사역 안에서 가장 우리가 민감하게 받아드리고 행해야 할 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배의 실패한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을 죽인 인간사에 첫 살인자요 살인 과정이 너무나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창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동생 아벨에게 고하니라고 하는 단어 rm'a: 말하다의 뜻인데 어떤 말을 하였을까? 성경에 그에 대하여((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악한(ponhrov"(병든, 악한 ,사악한, 나쁜 상태에 있는)자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평소에 삶 자체가 정직하지 못하고 사악한 나쁜 일을 저지르며 살았기에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중요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둘이 함께 있을 때 형은 동생에게 좋은 말을 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과격 적이고 비꼬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동생 아벨은 형님 이제는 악한 생각이나 행동을 버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합시다. 그러면서 형님의 잘못을 하나씩 하나씩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화가 나서 악감을 품게 되고 결국 살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악한 행동과 삶이 예배의 실패를 가져오고 살인자가 되어 그의 생애가 정말 죄책감에 사로잡혀 습니다.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여기서 가인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뒤 돌아봅시다. 그리고 죄에 민감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죄에 대하여 우리들에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이 드린 예배가 형식이 되지 않고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우리 속에 악감이 생기고 가정 안에서 부부가 서로의 약점을 가지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웃과 관계에서도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들의 삶속에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용서하며 삽니다.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여 나를 지배하소서. 내속에 미운 감정을 다스려 주옵소서. 미운 감정을 지속시키는 나쁜 생각들아 예수님 이름을 명하노니 내 마음속에서 기억장치에서 사라질 지어다. 반복 그래서 우리들의 삶속에 악함을 없애고 모두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성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지적하는 죄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래서 바울에게는 죄란 그 뿌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그 값이 사망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또한 죄는 전 인류와 운명을 연결시킵니다. 아담의 행위와 사망과 죄의 일반적인 상태는 상호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으로 인하여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그 특성을 잘 드러나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 있지 못하면 늘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육체적 생명을 박탈당하고, 종교적인 영광을 박탈당한다고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이러한 여러 가지 박탈을 당하는 것도 믿음이 있으면 기쁨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여 쫓겨나고. 생명을 그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예라는 명목아래 사람들 죽였습니다. 또한 종교적 모든 행위 자체를 박탈당했지만 그들이 빼앗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기쁨으로 하늘나라에 갖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말세의 징조의 한 예로 지난 9월 4일 새벽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진도 7.4의 강진이 나서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세를 이야기 하지만 말세의 대한 준비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교회는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갖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한 준비를 하라 하십니다. 평소에 믿음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준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성도가 1천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며 많은 시간을 지냈지만 육체를 따라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삽니다. 그래서 옳고 그릇 됨의 분별력이 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며 하나님의 예(하나님의 뜻)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는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합니다.
소돔과고모라 성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킬 때 롯과 그 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행동에 옮깁니다. 반면에 딸과 사귀고 있는 사위 될 사람은 경고에 대하여 (창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여기서 농담이란 qj'x;(웃다. 비웃다)농담으로 생각하며 아마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비웃던 말이 현실로 다가왔는데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비가 비 오듯이 쏟아졌을 때 그 때는 후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해바다는 그 때오는 유황비비로 땅들이 타 들어가 평지에서 -400m 낮아져 오들어오는 물은 수용하지만 나가는 물이 없어 그 염도를 조절하지 못해 사람들이 사해 바다에 들어가면 무조건 뜨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물에 염도가 강해 눈에 들어가면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듭니다. 사해 바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3500년에 역사하신 증언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들의 심령 속에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주님이 오셨을 때 있는 그 자리에서 맞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의 민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집시다. 같은 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도 믿음을 가진 자녀와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녀의 차이는 그 생애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야곱과 에서가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남자답고 용맹스런 에서를 사랑하고 자신의 상속자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에서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서보다 믿음 있는 야곱의 축복은 대를 이어 연결되었습니다. 야곱의 간사함과 방법론에 있어서는 문제를 제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야곱의 축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처럼 대를 이어지는 축복입니다.
또 성경은 이새의 아들 8명의 아들 중에서 믿음 있는 다윗을 선택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을 삼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다윗의 신앙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면 (시 20: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시 23: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7: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9:1)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시 143: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히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이처럼 믿음은 흥하게도 하며 왕이 되게 하시기도 하고 또 인생에 행로를 바꾸기도 합니다. 또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길을 삶을 두려움 없이 보냅니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을 통하여 전이되기도 합니다. 모세를 몸종처럼 시중들었던 여호수아는 모세 이후에 후계자로서 믿음을 전수 받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적극적인 추천이나 지명이 없이 모세는 자신의 의사보다 하나님께 의탁하여 자신의 후임을 부탁 할 때 하나님은 모세의 신임을 받았는지 아니면 받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여호수아를 지명하여 모세에 후임에 선출하십니다.
(민 27:15-20)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할 때 필요한 직임을 맡겨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은사를 통하여 믿음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속에 성령께서는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십니다. 어떻게 성경 말씀을 읽을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나 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시급할 때는 직접 꿈이나 계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계시나 책망이나 꾸지람에 민감하여 자신의 잘못된 삶을 양심을 통하여 책망하시면 즉 회개하고 고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8장을 통하여 믿음의 기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외로운 힘없고 돈 없는 혼자 사는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불의한 재판관에 직접 호소하여 도저히 해결 할 수없는 문제를 계속 찾아가서 호소했더니 그 문제를 해결 해주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림 하실 때 누가복음 18 : 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래서 위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인자가 다시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가진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어 책망 받지 않도록 매사에 믿음으로 행하여 믿음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 마음을 지키는 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가 믿지 않는 죄에 빠지지 않으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여기서 마음은 ble( 마음 정신 의지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마음이 부패해 지기 시작하면 결국 있는 믿음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마음은 나쁜 생각이고 나쁜 생각은 나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죄입니다. 나쁜 생각을 먼저 우리들의 마음에서 제거해야 죄를 멀리 할 수 있습니다.
2. 마음을 지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보는 것을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잠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lyKic]m'(마스킬묵상 명상)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그뜻은 바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좋은 것 즉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잠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러나 나쁜 친구를 가깝게하면 함께 망하게 됩니다.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그러므로 함께 살기 위하여 전도를 위한 만남은 좋지만 다른 것으로는 함께 행동하면 안 됩니다.
3. 좋은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좋은 말은 좋은 환경을 만듭니다. (전 5: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잠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또한 (마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들의 말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축복의 언어를 사용해야 복 받은 성도요 믿음을 지키어 죄에 처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의 책망이나 가책이나 감동에 민감하고 믿음을 지키기 이하여 먼저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축복의 언어 사랑의 언어 성결의 언어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키켜 여러분의 생애가 복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4 요16:7-11
성령이 하신 일에 대한 두 번째 의에 대하여 입니다.(10절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안는 것이 왜 의가 되는가?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이 왜 의가 되는가 이 일이 옳은 일인가를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깨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문을 살펴 보면 dikaiosuvnh(명사 의, 의로움이란 뜻임, 이 의의 파생어는 divkaio"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 낼때 사용되었습니다.)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성령님의 깊은 은혜가 아니면 잘 알 수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어도 성령의 조명이 아니면 이해가 되지도 않고 그냥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의에 대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의는 창조 때부터 시작된 의입니다. 바로 옳은 일입니다. 구약 성경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언제나 복수를 사용합니다. !yhiOla>(하나님, 신들) 천지 창조에 참여하신 예수님의 옳은 일은 우리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며 지키며 살기 위하여 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시고 복을 주셨습니다.((창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첫 창조의 피조물인 아담과 화와에게 첫 번째 주시는 법이 있는데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여기서 죽는 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져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노력하여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교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더 무서운 것은 육체의 한계에 삶을 살며 결국 흙에서 취하여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간단하게 쉽게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창 3:1-7) (1)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타락의 장면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불순종하는 장면을 보면 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과 같이 좋게 될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유혹이 다 그렇습니다. 나쁜 일에는 항상 달콤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이듭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노력 없이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건실하게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도시에 가서 결혼하여 살면서 사업에 실패하고 생활이 어렵게 살다보니 사채에 손을 대고 자신사체놀이를 하며 거짓말 말하여 사기 치는데 애들 손에 과자 빼앗아 먹는 것 보다 쉽다.
그렇게 쉽게 돈을 벌다가 이혼하고 암에 걸려서 50세도 안된 나이에 죽었습니다. 세상이 쉽게 속은 사람도 있지만 그 인생에 상처를 준 사람들의 원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모의 죄가 자녀 삼사 대까지 간다는데 과거의 잘못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시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그래도 그 죄를 물으시고 사랑을 베푸십니다.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내용을 (창 3:9-1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셔서 예수님의 의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약속이 성령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들의 이성으로 때로는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Wv(상하게 하다, 박살내다, 분쇄하다. 짓뭉개다,)슈프 라는 단어는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 어마 어마한 위력과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이루어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마 8:28-32 가다라 지방에서 군대 귀신들려 무덤사이에서 고함치며 감히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사는 청년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마 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 대)내용상으로 보면 예수님 앞에 사정하고 있음 봅니다.
그렇습니다. 뱀에게 들어가 역사한 마귀는 결국 그 결과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벌벌 떠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다중 인격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기회만 되면 믿는 사람들을 삼키려고 온갖 권모와 술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귀의 권모와 술수를 이기기 위하여 성령님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살전 5:7-10)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마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동원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 중에 가장 지식적으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 대 제사장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죄목입니다.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재목이 율법을 어겨 안식을 지키지 않는 죄였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돈 바꾸며 짐승을 파는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내어 쫓아 내는 것이 괘씸죄에 걸렸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는 자신들의 이권과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절기 때가 되면 전국 근동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삶을 회개하고 속건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제사 드리는 짐승들이 제사장들에 들어가면 제사를 드려진 짐승도 있지만 다시 시장에 나온 짐승도 있었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가 형식화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 보다 그들의 생계 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이후에 암흑시대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나 꿈으로나 말씀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다 보니 제사는 형식이 되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 짐승을 파는 사람 다 제사장들과 결탁 되어 재미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밖에 역사적인 예수님 성경에 약속을 이루어지는 과정에 자신들이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깨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 (행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은 의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에 똑같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자존심에 싸움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을 멀리서 보면 다 보이는데 자신들만 모르고 계속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편을 갈라서 나누는 것입니다. 육체에 소욕에 분명하게 당짓는 것(ejriqeiva(비열한 본성, 이기주의), 분리함(dicostasiva(불화,분열,분쟁의 뜻입니다.)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당을 짓는 것의 원 뜻은 비열한 본성이나 이기주의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분리함은 불화, 분열, 분쟁에서 분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은 이일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옳은 일은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3년에 공생애 기간 동안에 쉴 시간도 없이 강행군을 하셨습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거리가 멀면 비행기로 가면 되는데 모든 사역은 편리한 마차한번 안타시고 걸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바른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를 가르치시고 병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그 많은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권력에 복종하여 빌라도 법정에 소리 지릅니다. (막 15:12-15)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고 백성은 죄인이라고 할 때 빌라도가 하는 말에 이스라엘역사에 그 결과가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27:24-25)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자신과 자신들에 자손에 돌리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끔찍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유대인의 600만명의 학살 사건이 그들의 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게 하는 죄의 댓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20세기 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기념관은 새 예루살렘 서편 헷젤 산(Mountain Herzl)언덕 위에 회상이라는 뜻을 가진 지카론이라는 유대인 600만(제 2차 세계대전 당시1941-1944) 학살 추모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입구 들어가는 정문에 ‘망각은 추방에 이르고 추억은 영원한 번영에 이르느니라’란 표어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의를 이루고 그 죄 값을 그 후손들이 치렀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이루는데 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도 한몫을 합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제자 중에 그 일에 가담되었는지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의가 오늘 성령님을 통해서 복된 삶을 살게 하지만 또한 복 받지 못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 땅에서 이루어 놓은 의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복 받지 못한 삶이요 그 의에 감사하고 그 의를 따라 살게 하신 것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의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아 살이 터지고 찌져지며 양손과 발에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로 다 이루었다(televw(완성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 뜻대로). 그 왜침은 의를 이루는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이 의가 오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우리들에게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어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 53:4-7)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오늘 예수님은 약속대로 의를 이루어 놓으시고 우리는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님의 감동으로 의를 이루는 성도의 삶이되기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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