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9:1~7

스네어 2013. 1. 31. 16:0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 9장 1절로 7절의 말씀을 가지고 “실로암 못의 축제”란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의 핵심은 ‘축제’입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축제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 가나의 혼인자치 이야기(요2:1~11)는 요한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공생애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처음 표적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의 핵심은 축제의 회복입니다.

 

2) 요한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의 핵심도 예수님입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요1:17)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초대받은 자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혼인 잔치의 중심에 서십니다.(요2:1~11)

 

3) 도마는 예수님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요14:5)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묻는 도마에게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께 길을 묻기보다 길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축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4) 예수님은 초막절 끝자락에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셨습니다. (요9:7) 이는 축제로의 초대입니다. 초막절의 축제는 남녀노소 노인들도 춤을 추는 축제입니다. 일 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이 함께 즐기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두가 참석하는 축제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우입니다. 율법은 시각장애우를 부정한 자로 여겨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왕따요 소외요 버림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시각장애우의 눈을 고쳐 주사 축제의 대열에 합류하게 하셨습니다.

 

 

2. 실로암 못은 초막절의 축제를 완성하는 축제의 연못입니다.

 

초막절에는 다섯 가지 축제를 벌였습니다. 소리의 축제, 빛의 축제, 춤의 축제, 풀의 축제, 물의 축제 입니다. 실로암 못은 물의 축제를 완성하는 연못입니다.

 

(1) 소리의 축제 - 초막절에는 '호쉬아 나' 지금 구원하옵소서! 라는 소리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호산나라는 소리의 축제는 시편 118편 25절의 기도문을 소리 높여 부르는 축제입니다.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번제단에 초막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서 번제단을 돌며 소리를 높여 기도문을 찬양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번제단에는 모짜에서 꺽어온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 놓고, 사람들은 '아르바 미님'이라는 네 종류의 나무 가지를 들고 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구합니다. 지금 구원하옵소서!

 

(2) 빛의 축제 - 초막절에는 여인의 뜰 네 모퉁이에 있는 촛대에 불을 붙여 예루살렘을 밝힙니다. 횃불 행렬도 합니다. 초막절의 빛의 축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고난 받는 자신들의 안내자였음을 확인합니다.

 

(3) 춤의 축제 - 여인의 뜰에서 밤샘 축제를 벌이는데, 아이들은 물론이고 노인들까지 다 춤을 춥니다. 이 날 만큼은 나이를 잊고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춤을 추면서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찬양하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젊은 날에 지은 죄를 용서하사 우리로 행복한 노년을 맞게 하셨으니 찬양하라!

 

(4) 풀의 축제 -초막절에는 풀로 장막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광야의 고난을 회상합니다. 초막은 광야의 장막생활을 재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집은 영원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2) 물의 축제 - 초막절에는 물의 축제를 벌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길어온 물을 번제 단에 부으며 다음 해 농사를 위하여 이른 비를 내려 달라고 관제의식을 거행합니다. 제사장들은 은 나팔을 불며 실로암 연못에서 길어 온 물이 수문을 통하여 번제 단에 도착하도록 돕습니다. 광야의 고난 중 으뜸은 기갈입니다.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을 지나 엘림에 이르게 하셨던 것, 반석에서 물을 내셨던 것을 기억하며 물을 번제 단에 붓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농사를 위하여 이른 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3. 초막절의 축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축제로 이어집니다.

 

(1) 소리의 축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막1:1) '호쉬아 나' 지금 구원하옵소서! 초막절은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바로 이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요12:13)

 

(2) 빛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은 참 빛입니다. (요1:4~9)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 빛입니다. (요8:12) 여인의 뜰 네 모퉁이에 붙여진 불빛은 예수님의 빛을 예표합니다.

 

(3) 춤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요8:1~11) 어른들은 밤 새 불렀던 사죄의 은총에 대한 노래가 생각나서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4) 풀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거처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4:3)

 

(5) 물의 축제입니다. 성령의 생수입니다.(요4:10) 물은 성령입니다. (요7:39)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오던 관제의식의 핵심은 이듬 해 농사를 위한 이른 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더 놀라운 생명의 물 성령의 생수를 약속하셨습니다.(요4:10) 그 생수는 그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입니다.(요7:37~39)

 

 

 

4.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눈을 밝게 하사 축제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1) 초막절의 축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벌이는 최고의 축제였지만 불완전했습니다. 바로 율법의 한계 때문입니다. 소외 자가 나오기 때문이요, 부정한 자를 만들기 때문이요, 구원의 잔치에 빠지는 자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명도 부정한 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시각장애우를 초막절 축제에 초대했습니다. 초막절의 깊은 의미인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한 것입니다. 삶의 위기와 고난에 직면하여 ?기고 있는 대중들, 서민들, 민중들, 천민들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3)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우리 몸을 예루살렘 도시라고 하십시다. 그러면 오른 쪽 어깨쯤 되는 예루살렘 동북쪽에 기혼 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의 왼쪽 다리쯤 되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실로암 연못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샘과 못이고 둘 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습니다.

 

4) 그런데 주전 720년에서 주전 701년경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수 많은 난민들이 발생합니다. 이 때 남 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정치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경쟁하고 싸우던 관계였지만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동족이니 난민들을 돕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서쪽에 난민들을 받아들였는데 이 때 예루살렘 인구가 10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5) 바로 그런 역사적인 상황, 난민들이 몰려드는 상황, 광야의 위기와 고난처럼 삶의 절박한 현장에서 쫓겨 오는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난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베풉니다. 물입니다. 난민들을 위하여 물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듭니다. 예루살렘 성 밖 동북쪽에 있던 기혼 샘과 실로암 못을 연결하는 수로를 예루살렘 성 밑으로 뚫습니다. 일종의 지하수로입니다. 그리고 앗시리아 군대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기혼 샘의 입구를 막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난민들을 살립니다. 실로암 못은 바로 그렇게 난민들을 살려준 연못이었습니다.

 

<대하 32: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

 

6) 실로암 연못은 원래는 빗물을 받아두던 웅덩이였습니다. 우기에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건기에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모자랐고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 수로를 통하여 기혼 샘에 연결됨으로 실로암 연못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실로암 연못의 물이 초막절 축제에 사용하던 관제의식의 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생수가 차고 넘쳐야 합니다. 기혼샘물을 끌어오던 히시기야 수로처럼, 예수님께 성령의 수로를 연결해야 합니다.

 

 

 

5. 자 이제 예수님과 함께 축제를 회복하십시오!

 

1) 예수님은 초막절에 시각장애우를 치료하시고 축제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요9:7) 예수님은 시각장애우를 실로암 연못에 보내셨습니다. 실로암은 원래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우를 샘물이 마르지 않는 실로암 연못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는 목마르지 ?는 샘물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교회로 보내십니다. (요7:37) 교회는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실로암 연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고(요9:37) 예수님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요9:38) 그런데 그 배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시니 예수님의 배 예수님의 몸통은 교회 바로 그 자체입니다. 교회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2) 우리는 교회에서 성령의 생수로 씻어 고침을 받고 눈을 떠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각장애우 치료 기사에서 핵심 단어는 '보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시각장애우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했습니다.(막10:51)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생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이며, 교회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성소이며, 교회는 인생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믿음의 스타디움입니다. 교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십시오! 교회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빗물을 받아두는 웅덩이였지만 기혼 샘에 연결되니 물이 마르지를 않았습니다. 교회는 모순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성령의 생수가 마르지 않습니다.

 

3) 마태복음의 두 시각 장애우는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마9:27~30) 그리고 눈이 밝아진 후에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렸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사물도 사람도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압니다. 두 시각 장애우는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이 밝아져야 예수님이 보이십니다. 축제를 누립니다.

 

4) 마지막으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을 벗겨 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벗겨주셨습니다.(행9:18) 그 때부터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비늘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주님이 치료해주시사 예수님을 바로 보게 하셨습니다. (행9:17~19)

 

 

저는 실로암 못의 물로 초막절의 축제를 완성하던 그 사랑의 축복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여기서 다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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