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역대상 22장 1절-12절

스네어 2012. 5. 26. 13:55

역대상 22장 1절-12절

 

성경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장들을 피해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레위기는 피해서 읽어라, 마태복음 1장은 나중에 읽어라 등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방법들을 피해 읽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책입니다. 매우 적절하게 레위기가 자리잡고 있고 매우 적절하게 마태복음 1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띄엄띄엄 읽게 되면 성경의 내용전체를 알 수 없고 중단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성경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에도 영화의 줄거리를 알려면 영화의 중간에 들어가 전체의 내용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 영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설의 중간부터 읽어 가면서 소설의 전체를 알았다 생각하는 것 위험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중요한 읽기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체하듯이 읽는 것 그것 또한 위험합니다.

마치 생물을 해체하여 그것의 부분 부분을 알 수는 읽지만 나중에 그것이 조립이 되거나 살아있는 생물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체하듯이 읽는 것 매우 위험한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달 정도를 역대상을 보고 있습니다. 역대상을 보면서 한 장 한 장을 보고 있지만 벌써 한 달이 지나가니 역대상 전체에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을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대상도 처음부터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읽고 그 전체의 내용이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역대상을 이번 주면 마치게 됩니다.

오늘은 역대상의 나아가는 방향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역대기의 역사관은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와 다른 것을 성경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역대기에서 처음 족보를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가족 한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아브라함의 자손 한민족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중심의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 공동체가 추구하는 바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배공동체가 추구해야할 것 다른 것 하나 없습니다. 그저 예배드림이 기쁨이 됩니다.

예전에 이집트에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피라밋도 보고 여러 관광 상품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감명 깊게 남은 것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이집트에 콥트공동체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이들은 이집트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슬람인들은 90%가 됩니다. 이집트에 10% 정도가 되고 그들은 모여 예배하는데 변변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동굴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독재자들을 축출하고 혁명이 일어나는 가운데 쟈스민 혁명으로 인하여 콥트 크리스챤이 박해가 심합니다.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배를 드립니다. 왜요 이들은 예배 공동체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들은 포로의 생활에서 돌아와 무너진 그들의 마음에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드리는 사람들로 그들이 세워져 나가고 다윗이 그러한 공동체의 중심에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1-9장부터 족보 아담에서 사울의 정치가 보여 집니다. 그리고 사울을 말할 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왕, 예배를 중시하지 않는 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최후의 죽음의 방법을 택할 때 자살의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는데 10장 13절부터 보면 사울이 죽은 이유는 여호와께 범죄했다고 이야기 하며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사람을 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세상을 즐기는 사람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사울의 죽음의 원인을 보면 그가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 많은 것을 생각하지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삶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최선입니다.

 

이제 다윗의 시대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며 그와 함께 하십니다. 11장 9절에 하시는 말씀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해 가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강성함을 이루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

그의 시대는 훌륭한 장수라면 요압이라는 장수가 있었고 그와 함께한 세 용사를 말합니다. 첫째 세용사는 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다가 있었고 둘째 세용사는 아비새, 브나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충성스러운 용사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다윗의 고향을 바라보며 자신이 늘 먹던 우물물을 먹기를 원할 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베들레헴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원하는 우물물을 떠옵니다.

이러한 용사만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무수히 얻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만한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역대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사람이 왕을 결정하거나 평안을 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윗에 마음에 평안을 안식을 줄 수 없었습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만족을 누릴수 없습니다. 성도들도 사람을 통하여 안식을 얻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안식을 누리고 성공의 길로 나아갔다 간증하는 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다윗

다윗의 전쟁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블레셋을 치고 아람을 치고 암몬을 아람을 치고 암몬을 블레셋을 쳐서 멸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러한 승리의 중심엔 누가 자리 잡고 있나요? 승리의 수식어가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승리의 중심에는 인간 다윗은 없습니다. 인간 다윗의 배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승리를 이루신줄 믿으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장대한 사람들 손발가락을 합쳐 스물넷이 되는 괴물 야수와도 싸워 이기게 합니다.

그가 늘 승리하는 가운데 그 승리는 그이 부하들에게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는 언제부터 시작하고 있나요. 그것은 여호와의 궤에 대한 다윗의 갈망과 실행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3장에 여호와의 궤를 가져와 오벧에돔에 집에 모셨을 때 그때에 그 집에 변화가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다윗은 자신의 궁전을 짓고 그곳에 하나님의 궤가 안치될 장막을 친다고 15장 1절에 기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겨 왔을 때 다윗은 어떠한 행동을 보이나요?

왕이지만 그는 너무도 기뻐 주안에서 뛰어노는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경악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모습은 감동이라고 말합니다. 경악했던 자들의 모습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미갈은 자신의 남편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은 축복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지면 실패합니다.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를 지켜보거나 찬양함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 행동과 삶을 바꾸어 축복에 동참하시길 원합니다.

다윗은 주 앞에서 뛰어놀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참된 자유를 경험합니다. 주 앞에서의 자유함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입니다.

 

다윗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얻은 왕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여인들, 수많은 장수 들, 자녀들, 물질,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위치가 더욱 견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견고하게 하심을 다윗은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는 어떤 것으로 종결집니까?

21장의 인구 조사로 다윗의 범죄는 종결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 곳 사무엘하에서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우리야의 아내 밧새바를 범한 간음죄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인구조사는 그의 인생은 최대의 위기를 맡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인생이 되나요?

무언가 과시하고 싶은 다윗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인가 나! 다윗라고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절대적인 주권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주제가 무엇인가요?

사사기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씀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어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그들의 범죄였습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왕이 없는 시대를 종결하는 왕으로 세워진 사람이 누구인가요? 사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을 세울 때 그를 대리인으로 세운 것이지 그를 통해 마음대로 하는 왕을 삼은 것이 아닙니다.

사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지만 왕이 왕으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잘못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사무엘을 보내어 말씀하는 것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원 다윗의 소원은 사울의 전차를 밟지 않기를 다윗은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인구 조사를 할 때 요압의 경고를 듣습니다. 자신에게 목숨을 줄 수 있는 사람의 충고도 거절하고 요압을 재촉하여 나라의 왕이 자신임을 과시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동으로 정죄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이루어집니다.

삼년의 기근, 삼개월의 패배, 여호와의 칼 온역을 놓고 고민하다 그에게 온역의 심판이 임합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좌절하면 하나님을 떠날 계획을 잡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염병 이후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나의 실패의 원인을 발견합니다.

아담은 실패하여 온 인류에 죄의 유전을 남깁니다. 이 유전이 다윗에게도 실패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 가운데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성공입니다.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며 자신의 아내에게 조롱을 받는 왕이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그는 승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구를 계수하고 사람들의 말 “당신의 군사가 110만 명이나!! 또 유다자손 중 47만이나!!하고 사람 앞에서 칭송을 받고 싶어하지만 그에겐 철저한 패배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깨닫고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번제를 드리고 그곳에 여호와의 전을 삼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오늘 본문에서 어디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성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다윗의 마음을 본받을 것인가?

그의 최후의 선택은 성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많은 것들이 우리 삶에서 보입니다. 즐거움들이 보입니다. 더 가져라 소유해라 자랑해라.(어른들은 모이면 자식 자랑합니다. 언제 상황이 종결이 되나요. 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아들이야기를 할 때 모든 사람의 기를 죽이고 나면 상황이 종결 됩니다. 연고대, 서울대, 미국유학, 하버드. 아파트도 평수로 종결됩니다. 60평, 120평, 120평 두 개를 뚫어서 산대. 종결 됩니다. 그리고 즐거워합니다.)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윗도 더 가지고 더 소유합니다. 군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일생을 비춰주는 등불이 되지 못함을 이제야 다윗은 깨닫습니다.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갈 것들을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준비합니다. 다윗의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의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오늘 말씀에 5절에 많이 준비했다고 합니다. 준비할 때 행복을 상상해 보십시오. 행복이 넘칩니다.

 

솔로몬 아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전을 건축하는 것을 생각만 해도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좋거든....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다윗의 일생을 통해서 역대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참된 안식과 행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더 많이 준비하리라, 내가 저질렀던 잘못을 솔로몬이 겪게 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이 성전에서 주의 말씀이 흘러넘치게 하리라 열정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완성한 성전 과연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만한 성전이 완성되고 그곳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려는 은혜는 회복과 기쁨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완성의 단계는 아니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계속 회복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광산교회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눈으로 보이는 성전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길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나아가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 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내킬 때 가는 곳을 하나님의 전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마음에 내킬 때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을 삼아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힘써 거하시길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성전삼고 사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 삼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많은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들은 모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일점이라도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의 손에 우리의 손을 포개어 주님과 못 박히고 주님의 부활하실 때 부활의 감격을 누리고 주님과 동거 동락하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다윗은 주의 전에 청지기의 삶이 왕궁의 삶보다 낫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의 향락을 즐거워함이 아닌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길 원합니다.

사람들은 왕궁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왕궁이 참된 즐거움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할 때 참다운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윗이 지어가는 성전! 22장부터는 다윗은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전을 우리의 몸에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길 원합니다.

 

참된 평안과 안식은 하나님과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동거함이 우리의 평안과 안식을 누릴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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