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자리(요13:1-17)
요즈음에는 서비스정신이 필요한 때라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경제가 불황이어 불쾌지수가 높고 장사가 어려울수록 더욱 강조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행이나 슈퍼마켙등지에서는 거치른말투보다는 친절과 미소로 바뀌었고
택시운전자들의 깨끗한 차내분위기와 스스럼없는 밝은대화가 눈에띄게 많아졌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직업적으로 섬기는 일이 그 근본이어야 하는 사람들을 생활속에서 만납니다. 그들의 친절과 미소에 흐믓해하기도 하지만 겉치레같은 섬김, 진정한 사랑이 없는 섬김 때문에 마음이 개운치 못함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안에서나 교회밖에서 사람들에게 살맛나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다운 맛을 남겨주는 진정한 섬김은 어떤것이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같이 되려는사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다시말해 예수쟁이들이라는 뜻으로 시작된 말입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섬김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논리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섬김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요 섬기로 왔노라”시던 말씀처럼 진정한 섬김의 정신과 그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셨고 오늘 본문이 그 내용을 실감있게 담고 있습니다 .
본문의 배경은 먼저 살펴보면?
1절에 보니까 날짜상으로는 유월절 전날이었고
3절에보니까 시기적으로는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때였습니다
유월절하면 어린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일이 생각납니다.(유월절설명)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때가 자신이 인류의 죄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야 할 때인줄을 아셨고, 그러기위해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을 떠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상황적으로는 2절에 보니까 사랑하는제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을 가진때였고 여기서는 기록되지않았지만 다른복음서인 눅22:24절에서보면 “다른제자들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고있었던 때였음을 볼수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배신하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유월절어린양처럼 떠나야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고 있는 한가지 일이 바로 섬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르면 오늘날에 샌들과 같은 신발을 신고다녔고 그 지역이 건조하고 메마른땅들이 많았기에 언제나 먼지나 모래로 발은 쉽게 더러워지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출후나 식사전에는 반드시 발을 씻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되어있었고
특히 식사초대를 받으면 그 집의 하인이나 종들이 발을 씻어주는 것이 관례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본문에 발씻김의 섬김의 본은 3절에보니까 “식사도중입니다” 4절에 “저녁잡수시던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의 식사자리는 여러분이 잘아시고 많이 알려진 그림중에 13명이 한자리에 앉아서 식사하시는 “최후의 만찬”이라 불리워지는때입니다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마련된 만찬장에서는 섬기려는자들은 보이지않고 제자들은 서로높아지려는 마음으로 가득하였고, 사단에게 유혹된 가롯유다는 예수를 팔려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던 상황임을 대비해본다면 예수님의 섬김은 보통의미이상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
두가지로 정리해보면 1)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으로 낮아짐을 배우자는것이고
2) 베드로를 통해서 죄에게서 용서함을 받은자라는 사실을 깨닫자라는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섬김 사랑이 포함된 섬김을 배우자는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진정한 섬김은 사랑으로 낮아지는 자리이다
지금 본문으로 보아서 예수님은 어떤자리에 있는 사람입니까?
13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주요 선생이다” 라는데 동의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섬김을 받을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원래의 신분도 빌2:6-8절을 보면 “그는 근본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장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본체의 형상”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셨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보통의 사람들은 섬기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려고 합니다 자신을 몰라주면 자존심을 상해합니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 미움의 감정을 품거나 무시의 감정을 품어 그 미움이 정죄를 불러일으킵니다.
자기가 뭔데, 버릇이 없어, 하면서 상대를 낮추며 자신이 가지는 자존심을 높이려는 행동을 취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죄성의 자존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진정한 발씻김의 자리를 경험하지못한자의 모습입니다.
사실 남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그리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잘 안되는겁니다
(살면서 남편이나 아내 혹은 친구부모발을 씻겨주신적이 있으신분 손들어 보십시요)
진정한 발씻김의 자리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자리요, 끝까지 사랑하는 자리이며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자리입니다.
사람은 원래 자기를 낮추지못합니다 이것을 죄성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낮아져서 행하는 발씻김은 권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발을 씻기고 있는 자가 종이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훨씬높임을 받아야하는자이기떄문입니다
사랑을 동반한 발씻김은 바로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형상올 보게합니다.
제가 GAG라는 영성훈련을 받을 때 발씻김을 받았는데 감정이 얼마나 이상한지 모릅니다. 어떤사람은 발을씻기운사람을 보니까 그리스도로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나를 씻기운 그 자리에 있는 그분이 얼마나 거룩해보이는지 그 손길이 얼마나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진정한 발씻김의 자리는 사랑없이는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정말 제자들은 발을 씻겨줄만한 대상들이 못되었습니다.
자기스승의 죽음이 목전에 와 있는데도 서로 잘났다고 싸움질이나 합니다 자기스승을 팔 궁리나 합니다 더더군다나 그 자리는 인간적으로보아도 종이나 노예들이 하는 굴욕의 자리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자리입니다. 자손심에 손상이 가는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발씻김의 자리는 다른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어떤 간호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환자들을 다정스럽고 성의껏돌봐주는 것을 자기의 큰 책임으로 느끼고 열심히 환자들을 섬깁니다. 그런데 최근에 자기가 남을 섬기고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직원이 역이용하고 있다는것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일, 더 힘든일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사실 본인자신도 많은 환자들로부터 관심과 끊임없는 배려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암암리에 받기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압박감을 계속밀려오고 있었던터였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동료들까지 압박을 주었던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하나...
끝이 보이지않을것같았습니다.
환자와 함께 일하면서 동료사이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게된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진정한 섬김의 자리에 동참하지못한 자신을 발견한겁니다.
15절에 “내가 행한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함이라” 그리 쉬운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시험도 있고 고통도 있고 문제도 생깁니다.
그럼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귀한 모범을 유언처럼 남기셨습니다
오늘본문을 통해 우리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발씻김 받는자리를 경험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어떠하든지 사랑으로 발을씻기는 우리가 되어야하겠습니다
두 번쨰 의미는 베드로의 행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섬김의 자리는 은혜로 죄를 용서받아보지 않은사람은 안되는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가까운사람부터 씻겨오던 예수님이 베드로앞에 이르자 베드로가 “주여 주께서 내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의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대답하시고 발을씻기려하자 베드로가 극구부인하며 “절대로 씻기지못한다”고 거절합니다. 이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이처럼 완강히 저항했을까?
2) 또 예수님께서는 발을씻기지않으면 나와상관없다고 하셨을까?
1) 완강히 저항하는 베드로,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진자였습니다.
급하고 욱하는 성격으로 바다위로 뛰어들었던 베드로, 예수님의 발씻는 행위를 보면서 자신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던 베드로, 오히려 자신의 발을 예수님이 씻기시기 보다는 자신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려야한다고 생각했을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그냥 성격으로 넘기기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죄성의 자존심입니다.
죄성의 자존심은 종종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이들에게는 용납하지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반대로 남을 위하여 의롭게 살려는 의협심으로 나타나기도합니다.
베드로의 태도에서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면서 예수님과 동떨어진세계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도 주님과 관계를 가지며 살고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작은일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필요함을 느껴야합니다.
예수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죄성의 자존심입니다.
2) 그런점에서 부패하고 더러운 우리가 예수님께 씻기울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내가 더러운죄인이기에 죽어마땅한 죄인이기에 아니 죄와허물로 죽었기에 십자가의 보혈을 가지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씻어주실수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관계성입니다.
그가 유월절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는 시간에 굳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필요를 가지셨던 이유도 제자들과의 관계성을 요구하신겁니다.
죄성의 자존심으로 뭉쳐있는 그들의 발을 씻기실때에 “내가 너를 씻기지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있으려면 예수님이 씻어주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씻김을 받아야할 죄인임을 고백하라는겁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욕한자는 발밖에 씻을필요가 없다시며 발을씻기시던 예수님!
이 말씀을 통해서 볼때에 원래 관습상 식사초대를 받는자는 이미 목욕을 하고 가기떄문이기도 하지만, 목욕은 주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삶이요, 발은 죄에대한 부분적인 회개를 말씀하고 있는겁니다. 진정한 발씻음의 자리는 바로 영적으로 거듭난자들 이미 예수님과함께 관계성을 가진자들의 일임을 말씀하고 계신겁니다.
아무나 발씻김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죄성의 자존심을 깨뜨리고 정결케된자들만이 발씻김을 받는자리에 들어갈 수 있고 다른이들의 발을 씻기는자리에도 들어갈수있는겁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용서받아본사람만이 다른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수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난해본사람은 진정 없는사람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연단받아본사람은 다른사람의 연단받음을 같이 아파할수있는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않고서는 다른이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것이요. 자신이 죄인됨으로 낮아지지않고서는 다른이들을 섬길수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낮아지지않고서는 발씻기는자리에 설수가 없고
죄인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주님이 씻기시는 그 자리에 동참할수없는것입니다.
진정한 서비스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를 포기하는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이없는 섬김은 자신의 유익을 구할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섬김과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다른것입니다.
세상의 서비스는 한계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서비스는 한계가 없는것입니다.
세상의 서비스는 대가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서비스는 대가가 없는것입니다.
세상의 서비스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서비스는 자신을 감추는것입니다.
발씻기는 자리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낮아지며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리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발씻김을 받은자로서 날마다 발씻기는 자리에 나아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