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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

스네어 2007. 11. 23. 14:58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교회에 미치는 영향

칼빈주의, 루터주의, 개혁주의 등등의 이야기를 우리는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을 신봉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면 무슨 주의 , 부슨 주의를 만들어서 그것이 분열로 가는 것을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 파당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말에는 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위에 주의를 뺀 하나님 주의 신본주의가 우리의 주의이고 우리의 나아갈 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현대는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아니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신본주의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익숙하고 그것을 즐기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이 이미 두드러지고 있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들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특수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살고 있는 현실을 본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정의하면 ‘탈’ 현대화, 근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은 영상(성과 폭력)- 반지성, 상대주의로 나타나며

예술에서도-예)피와 정액-피를 정액에 섞어 물간으로 사용하는 등의 우리의 상식이 이해할 수 없는 비 이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십자가를 소변에 담구는 (피스 크라이스트)라는 작품도 있다. 혼합적 예술의 스타일로 페스티쉬(혼성모방), 콜라주(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혼합)

공상 과학, 유토피아 해체주의로 나타난다. 이전까지는 영화를 보면 유토피아가 보여졌으나 현제의 공상과학은 파괴와 전쟁이며 이 시대를 암울한 종말로 몰아간다. 심령영화, 드라마가 유행한다...엑스파일, 퇴마록, 자귀모, 은행나무 침대...

아무튼 이런 것들이 선진국에 미친 영향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포스트모던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을 맡고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선진국은 산업화에서 근대화로 근대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산업화는 무엇인가? 산업화는 이전 농업시대를 극복한 상태를 말하는데 농업의 잉여 생산을 기점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농업의 잉여생산을 자급자족을 극복하고 매매를 이루고 그 후 상업을 이루며 그것을 통한 자본이 공업화를 이룩한 상태이다. 이전까지의 삶의 질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을 살았으나 이제 잉여자본을 가지고 공업에 투자하는 모습이 되어 진다. 잠이 중요하던 시대에서 이젠 저녁에 운동도하고 여가를 조금 돌아보는 상태가 되어 진다.

그 후 공업화를 통하여 근대화를 이루게 된다. 근대화는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흉물을 낳게 된다. 그 결과의 산물이 포스트모던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을 살펴보면 외국의 모습과 굉장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조금 특수한 근대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을 낳고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박정희가 도입을 해서 10월 유신이라는 모습으로 근대화를 이루려 하였다. 마침 시대의 상황과 발맞추어 근대화보다는 산업화를 이루게 되었다. 평민은 자본이나 잉여생산이 없는 바탕위에 산업화를 이루고 그 결과는 독재라는 산물을 낳게 되었다. 박정희의 그러한 모습이 순수한 열정을 만나 근대화가 이루어진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본이 없는 근대화는 독재를 낳았고 웃기는 정치상황이지만 그것을 모른 체 넘어가게 되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은 이러한 근대화, 산업화, 철학의 산물이고 그것은 이미 우리 가운데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 속에 신앙 속에 합리주의로 신비주의로 남아있다. 합리주의는 정반합의 원리를 따져 정확한 결과를 바라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신비주의는 은혜시대에 말 그대로 신비한 경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삶이 그러한 것이 되어 진다. 합리주의적인 성도의 모습은 말씀연구, 분석적 믿음, 조용한 묵상기도, 가스펠송, 현대음악, 펑키 소울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인 신앙의 모습은 트로트, 뽕짝, 찬송가중에 자신이 즐겨하는 

 

 

 찬송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부르짓는 기도, 신비한 체험, 꿈속에서의 주님 만남 등을 강조한다. 이러한 수직선 극단의 형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청년의 노력, 장년의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만이 中庸이고 그것을 통한 해결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드러냄이 아니다. 그냥 예수 중심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알아도 가만이 있고 배려하는 것 이것, 조금 안다고 나타냄이 아니라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서로 배려함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