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9장
절뚝발이(죄인)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길 사무엘하 9:1-13
I. 서 론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왕의 말기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읍니다. 이 때 사울 왕과 그의 3 아들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다가 길보아산 전투에서 다 전사하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사울 왕가가 몰락을 하고 맙니다. 이 소식이 사울의 집안에 전해지자, 사울의 집안이 다 도망을 갔읍니다. 이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5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므비보셋이였읍니다. 이 므비보셋을 유모가 급히 안고 도망을 가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읍니다. 므비보셋은 이때 떨어질 때 양 다리를 다쳐서 두 발을 다 저는 절뚝발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울왕과 그의 3 아들이 다 죽고나자 사울의 집안은 점점 기울어졌고, 대신 이스라엘 2대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 왕의 집안은 점점 더 강성하여 갔읍니다.
나중에는 사울의 집안은 완전히 망하고 말았읍니다. 대신 다윗이 이스라엘 제 2 대 왕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온전한 왕이 된 후에 다윗 왕은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던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생각이 났읍니다. 다윗이 궁궐에서 사울 왕을 섬길 때, 사울 왕의 아들이였던 요나단은 다윗을 좋아했고, 그래서 둘은 좋은 친구지간이 되었읍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할 때, 다윗을 도와서 도망을 가게했읍니다. 만약 그 때 요나단의 도움이 없었다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자인 자기 대신 다윗보고 왕이 되라고 하였읍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이 좋은 친구 요나단이 생각이 났읍니다. 그래서 비록 사울 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의 은혜 때문에, 사울의 집안에 은혜를 베풀기로 했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켜서 사울의 집에 남아 있는 자를 찾 았읍니다.
그랬더니 사울의 집안은 다 죽고,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숨어 있는 자가 하나 있는데, 그는 양발을 다 저는 절뚝발이 므비보셋이였읍니다.
다윗 왕은 그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라고 했읍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그의 조부 사울 왕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 주었읍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들과 같이 자기 상에서 먹게 했읍니다. 이것은 자기 아들을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속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담겨져 있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이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을 살펴 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절뚝발이 므비보셋은 죄인된 우리 인간을 상징합니다.
므비보셋은 정상적인 사람이였읍니다. 그런데 그가 절뚝발이가 된 것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삼하4:4)
(대상8:34) 말씀을 보면 므비보셋의 원래의 이름은 므립바알이였읍니다.
므비보셋은 원래는 왕손이였읍니다. 그런데 떨어져서 므비보셋이 되었읍니다.
므비보셋은 "부끄러운 추방자"란 뜻입니다.
한번 떨어진 것이 므비보셋의 운명을 이렇게 바꿔 놓았읍니다. 왕손이 부끄러운 추방자가 되었읍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떨어진 것"은 (창3)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을 뜻합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이 떨어졌다는 말이나 (fell) 인간이 타락했다는 말이나(fall)다 같은 말을 사용했읍니다.
한번 떨어진 것이 므비보셋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이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읍니다. 정상적인 인간을 양발을 저는 절뚝발이 불구자로 만들어 놓았읍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는 양발 절뚝발이와 같읍니다.
양발 절뚝발이 된 인간은
1)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절뚝발이가 된 므비보셋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듯이, 탁락하여 죄인이 된 인간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읍니다. 아무리 바르게살려고 해도 이미 절뚝발이가 되었기 때문에 바르게 살 수가 없읍니다.
죄를 범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절뚝발이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성경에 여러 곳에 나와 있읍니다.
(갈5:19-21) 말씀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
이라"고 하셨읍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것이라"고 하셨읍니다.
왜 우리의 육체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 왜 우리의 육체가 이러한 일을 행할까요 ? 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러한 일을 하게 될까요 ?
우리가 그런일을 하고 싶어서 그럴까요 ?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천국에 들어가는 삶을 살고 싶지만, 죄악으로 인하여 절뚝발이가 되어서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지옥에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비극을 사도 바울은 (롬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읍니다. 죄를 범하여 절뚝발이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가려고 해도 가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7:15-25)에서 이렇게 탄식을 했읍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 왜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될까요 ? 그것은 우리가 죄를 범하여 영적인 불구자가 되었기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그 원죄의 피가 우리 속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악으로 떨어져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인격이 저는 불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원죄의 피가 흐르는 우리 인간은, 왕손인 므비보셋이 "그의 유모가 그를 떨어 뜨린 것 때문에" 양발을 저는 불구자가 되어 불행한 인간이 된 것과 같이, 아담이 우리를 죄악의 수렁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영적인 절뚝발이 불구자가 되었읍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불행한 자가 되었읍니다.
콜로라드 주립대학(Colorado State University)의 교수이자 작가인 제럴드 캘러한(Gerald Callahan)이 쓴 책 중에 "오디세이의 강"(River Odyssey)이 있읍니다. 캘러한은 이 책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한탄섞인 고백을 했읍니다.
"나는 술을 지나치게 마신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지나치게 먹는다. 그리고 매일 아침이면 과음과 과식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한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 대학 교수까지 된 사람이 분명히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하면서도 똑 같은 일을 하게 될까요 ? 그것은 우린 인간은 우리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악으로 우리를 떨어뜨려서 우리 모두가 죄인인 절뚝발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발이 다 절뚝발이인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읍니다.
절뚝발이가 된 인간은
2) 자기의 재산을 다 빼앗겼읍니다.
므비보셋은 왕손입니다. 그러므로 왕이였던 그의 할아버지 사울 왕의 소유를 다 물려 받을 수가 있읍니다. 그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있읍니다.
그의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의 권리이지 의무입니다.
그런데 양발을 저는 절뚝발이가 되자 그 재산을 하나도 차지할 수 없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그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그는 절뚝발이기 때문에 그 재산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읍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들 절뚝발이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영적인 절뚝발이가 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읍니다. 우리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하셨읍니다. 그 모든 것을 즐기게 하셨읍니다.
그러나 죄인이 되어 절뚝발이가 되자,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읍니다. 마귀 사단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행복과 기쁨과 평화와 풍부함들을 다 마귀 사단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우리들이 가난하게 되었읍니다. 불행하게 되었읍니다.
사실은 빼앗긴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범하여 영적인 절뚝발이가 되자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소용이 없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버리고 말았읍니다.
우리는 행복도 버렸읍니다. 기쁨도 버렸읍니다. 평화도 버렸읍니다.
풍부함도 버렸읍니다.
이렇게 죄를 범하여 영혼의 절뚝발이가 되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복을 다 빼앗기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절뚝발이가 된 인간은
3) 죽어야하고, 왕을 만나는 것이 두렵게 되었읍니다.
예로 부터 권좌에 앉았다 물러나면, 그 집안을 다 죽이게 되어있읍니다.
권세를 잡은 자들은 후한을 없애기 위하여 전 왕족을 다 죽입니다.
그러므로 므비보셋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다윗 왕을 만나기를 두려워 했읍니다. 비록 그의 아버지 요나단과 다윗 왕은 절친한 친구였으며, 자기 아버지가 다위 왕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윗 왕을 만나기를 두려워 했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만날 때 굉장히 두려워 떨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므비보셋보고 두려워 떨지 말라고 했읍니다.
죄를 범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읍니다. 하나님은 (창3:3)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롬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하셨읍니다. 죄를 범한 자들은 죽을 수 밖에 없읍니다.
그래서 아담과 아와는 죄를 범한 후에 그 사랑스런 하나님 얼굴 뵙기가 두려웠읍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죄을 범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뵙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여 죄악으로 영적인 절뚝발이가 된 우리들은 죽어야만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 사랑스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여 숨는 불행한 인생이 되었읍니다.
절뚝발이가 된 인간은
4) 로드발에서 살게 되었읍니다.
죽음을 피하여 도망을 간 므비보셋은 숨어서 살아야만 했읍니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의 부하들은 자기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다윗 왕에게 보여서, 인정을 받기 위하여 사울 왕의 집안의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읍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아들들 중에 하나 남은 이스보셋을 그의 군장이였던 바아나와 레갑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칼로 쳐죽였읍니다.
이렇게 사울 왕가가 몰락했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죽였읍니다.
그래서 절뚝발이가 된 이 므비보셋을 로드발에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다 숨겼읍니다.
"로드발"은 외딴 곳입니다. 초원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로드발이란 말은 "초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떨어져서 절뚝발이가 된 므비보셋은 왕손이지만 오지 초원이 없는 로드발에서 숨어 살게 되었읍니다.
이것은 절뚝발이가 된 므비보셋의 삶의 형편을 뜻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영혼의 절뚝발이, 즉 죄인이 된 우리 인간의 삶을 의미합니다.
죄를 범하여 영혼의 절뚝발이가 되면 우리들의 삶은 로드발에서 사는 불행한 삶이 되고 맙니다. 푸른 초장이 아니라, 초장이 없는 사막과 같은 곳에서 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푸른 초장 맑은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살아야 할 자가,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
에 거하게 되었읍니다.(렘17:6)
이것이 바로 떨어져서 절뚝발이가 된 므비보셋의 불행이며,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여 죄인이 된 우리 인간의 불행입니다.
2. 다윗 왕은 므비보셋을 불렀읍니다.
다윗 왕은 왕의 자리가 든든해 지자, 사울 왕의 집에 남아 있는 자를 찾았읍니다. 이것은 우리를 찾으시는 우리 주님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떨어져서 두발을 저는 절뚝발이 된 므비보셋과 같이 죄에 떨어져서 영적인 절뚝발이가 되어서 불행하게 된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하셨읍니다. 우리 예수님은 수고하고 죄악의 무거운 짐진자들을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읍니다. 예수님은 사막 간조한 곳에 거하여 목마르고, 푸른 초장이 없는 사막에 거하여 목마른 자들을 보고 오라고 부르셨읍니다.
그럼 다윗 왕은 왜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라고 했을까요 ? 왜 우리 예수님은 우리보고 오라고 하실까요 ?
그를 찾아내서 그를 죽여서 후환을 없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우리를 심판하기 위하여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
1) 하나님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데리고 오라고 했읍니다.(v.3)
다윗 왕은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라고 했읍니다. 다윗 왕은 자기도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므비보셋에게 나눠주기 위하여 오라고 했읍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받을 자격이 없는 없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 앞에 온 므비보셋은 다윗 왕에게 "이 종이 무엇인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하고 감격을 했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을 주기 위하여 므비보셋을 불렀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롬5:6-8)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읍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요, 경건치 못한 자요,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요, 하나님께 불순종한 불순종의 자식인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2)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록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서 부르셨읍니다.(v.6)
다윗 왕은 므비보셋이 나아와서 엎드려 절을 하자, "므비보셋이여"하고 이름을 불렀읍니다.
이렇게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주 친한 친구사이를 뜻합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first-name basis라고 합니다. 친한 사이 중에 가장 친한 사이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이 므비보셋이여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왕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친한 친구 사이로 생각한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도, 주님과 종의 관계로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친한 친구 사이가 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요10:3)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과로 비유하시면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셨읍니다. 이것은 양과 목자의 비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친구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이렇게 예수님과 친한 친구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눅12:4)에서 예수님은 우리보고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라"고 하셨읍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요15:14-15)에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읍니다. 이미 우리를 친한 친구로 삼아서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읍니다. 이런 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3) 두려움을 떨져 버리게 하기 위하여 불렀읍니다.(v.7)
므비보셋은 왕손이 절뚝발이가 되는 불행한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할아버지가 실각을 했기 때문에 다윗이 권좌에 앉아 있는한 불안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언제든지 자기 자신이 발각되기만 하면 그는 죽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니 그의 하루가 하루가 얼마나 가슴졸이는 삶이겠읍니까 ?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부른 것은 바로 이 불안을 몰아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도 우리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범하여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 언제 죽을 지 모르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두려움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읍니다.
죽은 후에 심판대 앞에 서서 주님의 얼굴을 뵐 것을 생각하고 두려움 속에 사는 우리들의 두려움을 몰아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리라"(요3:16)고 하시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 주셨읍니다. 그리고는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
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고 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서서 받아야 할 심판이 이미 지나갔음을 말씀하시면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 주셨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4)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v.7)
다윗 왕은 므비보셋을 부른 후에 그의 할아버지 사울 왕의 소유였으나, 그의 후손이 다 죽고 므비보셋은 절뚝발이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차지한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불렀읍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므비보셋을 보자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과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것을 다 네게 도로 주겠다"(vs.7,9)고 하였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도,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시고,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아버지의 아들의 명분을 회복하고, 그 아버지의 부자집을 다시 회복하게 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명분과 이 우주의 모든 아버지 하나님의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읍니다.
3. 믿음과 순종의 결과
다윗 왕이 므비보셋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려고 하니 궁궐로 오라고 할 때 그 말이 믿어지겠읍니까 ? 누가 그 말을 믿겠읍니까 ? 사람들은 다 그를 찾아서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그런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므비보셋보고 피하여 숨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자기 아버지 요나단과 절친한 친구였던 다윗 왕을 믿었읍니다. 그래서 그 말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순종하여 왕 앞에 나아갔읍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갔읍니다.
그랬더니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았읍니다. 다윗 왕이 약속한 대로 되었읍니다. 그 약속 보다 더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진 것이하나도 없었읍니다.
잃어버린 재산을 다시 찾았읍니다. 왕의 식탁에서 먹게 되었읍니다. 왕자들의 지위에 올랐읍니다. 왕자들과 같이 식탁에서 먹게 되었읍니다. 이것은 왕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로데발 즉 초장이 없는 사막과 같은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에서, 푸른초장 맑은 시냇물가에서 살게 되었읍니다. 그는 계속 양발을 절는 절뚝발이였읍니다. 그러나 왕의 식탁에 앉은 후로는 그의 그 부끄러운 절뚝발이 발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그의 모든 부끄러움이 다 가려졌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순종하면 성경에 약속된 모든 복을 다 받게 됩니다.
바벧론에 끌려간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바벧론에서도 높은 지위에 앉게 되었읍니다. 3명의 총리가 되었읍니다. 그런데 3명의 총리 중에도 가장 뛰어나서 다리오 왕은 그를 제 1 의 총리로 삼으려고 했읍니다. 그러자 다른 총리들이 시기질투하여 다니엘을 제거하고자 말도 되지 않는 한시법을 만들었읍니다. 앞으로 30일 동안은 왕이 만든 신상 외에 다른 것에게 구하는 자들 즉 기도하는 자들은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했읍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을 믿고 매일 하루 3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읍니다. 다니엘은 발각되어 사자굴에 던져 넣어졌읍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사자들이 다니엘을 해하지 않았읍니다. 아침이 되어 다리오 왕이 사자굴에 다려가서 다니엘을 부르자 다니엘이 대답을 했읍니다. 다니엘은 구조되었고, 그 후에 모든 정적이 다 사라지고 바벧론의 유일한 2인자가 되었읍니다.
예수님 당시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젊은이가 있었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와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읍니다. 이 사람은 지난날 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마리도 잡지를 못했읍니다. 그래서 피고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졌읍니다. 그랬더니 두배에 가득차는 고기를 잡았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한 모든 복을 다 받게 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님이 약속한 모든 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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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 삼하 9: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나타내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고대시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되면 이전의 왕족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항상 쌓이게 됩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전국에 있는 왕씨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이전의 왕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모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새로운 왕조는 이전 왕족의 씨를 거의 말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새로운 왕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전 사울 왕가의 남은 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므비보셋입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아들로서 전쟁터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유모가 다섯 살 때 그를 급히 안고 도망가다 떨어뜨려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삼하 4:4).
그후 약 15년이 지나 다윗의 나라가 비교적 안정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은 옛날에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한 언약을 기억했습니다(삼상 20장).
그 언약은 서로의 집을 보호해 주기로 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의 집안에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고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사울의
손자)을 불러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 왕 앞에 섰을 때 고대의 관행상 얼마나 두려워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을 안심시킨 후 그를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첫째, 사람에게는 의리와 정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다윗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요나단의 우정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나단과 했던 언약도 잊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집을 살펴주기로 했던 언약을 잊지 않는 것을 볼 때 다윗은 의리가 있었고 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리가 있고 정이 있다는 말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한 일을 잊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한 일에 대해서 언젠가는 꼭 보답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정말 부족한 점이 많은 목사입니다.
그러나 의리가 있고 정이 있으려고 노력하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정성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갚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이기에 장담하지 못하지만 갚을 처지가 되면 갚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항상 기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의리와 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이익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끝까지 살피기를 바랍니다.
사람관계를 이익관계로 보면 이익은 있어도 행복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장사를 잘할 필요가 있어도, 교회 내에서는 절대 이익관계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고대의 관행상 이전 왕족이 새 왕의 앞에 선다는 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므비보셋도 다윗 앞에 섰을 때 그런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므비보셋이 다윗의 은총을 입게 된 이유는 그 자신이 능력이 있고 똑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가지, 요나단과 했던 다윗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 이유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합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교회를 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담대하고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항상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해주실 것입니다.
3.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의 구원(영생)과 생활의 구원(축복)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불러 그를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식탁에서 같이 앉아 진수성찬을 들게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생긴 것도 초라했고, 가진 것도 없었고, 한 일도 없었고,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요나단으로 인해서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에 가면 믿음의 선진들과 한 상에 앉아 하나님의 축복을 만끽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아직 진수성찬이 없다고 너무 조급해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일단 "나는 진수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기본적인 자각만 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은혜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에게 조만간 하나님의 생활 구원의 역사가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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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삼하 9:
하나님의 법정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소자 아이에게 물 한 그릇을 준 그대에게 상급을 주노라! 병든 이를 찾아보고 위로한 그대에게 상급을 주노라! 외로운 이에게 말동무가 되어준 그대에게 상급을 주노라! 우리가 행한 작은 행위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상받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다행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엄한 벌을 받을 사람도 많습니다. 양심 불량, 약속 불이행, 폭언과 폭력, 무지, 무관심, 냉담, 책임 소홀, 변명 등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과연 누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는 한 사람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같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 한 사람보고 거짓말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남을 해롭게 한 사람보고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는 죄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마지막에는 죽을 일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과분한 대접이나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받을 것보다 훨씬 후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심판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고, 은혜의 길을 열겠습니까? 누가 대신 돈도 갚아 주고, 벌도 받고,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겠습니까?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남을 위해 대신 죽을 만큼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의 은혜가 큽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합니다. 불구덩이에도 들어갑니다. 자식 아픈 것도 대신하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어머니는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자식 출산하는데 소극적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도 있다고 합니다. 내 자식을 은혜로 품는 것이 힘들다면, 나와 상관없는 남을 위해 죽기할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타락하여 심판을 받아야 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심판 대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3절).” 므비보셋이 누구입니까? 사울의 손자이고,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혜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6절).” 재산을 회복하고,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아들처럼 대우해서 궁궐의 식탁에서 함께 먹게 하였습니다. 조상의 밭을 돌려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슨 큰 공로를 세우면 재산과 신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공로도 없는 죽을죄만 지은 사람에게 재산과 신분을 회복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재산과 신분을 회복한 것이 은혜입니다. 왜 은혜라고 합니까? 공의로 판단하면 불합리한 일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죽으려한 사울의 손자입니다. 원수의 손자를 찾아서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반대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세상의 관습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윗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사울왕의 후손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어야 합니다. 전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회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므비보셋이 무슨 비상한 재주나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절뚝발이입니다. 어려서 급히 피난 가다가 유모가 그를 떨어뜨려서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양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과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이 처세술이 뛰어나서 먼저 다윗을 찾아서 용서를 구하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은혜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면 다윗을 먼저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먼저 므비보셋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금방 한 약속도 어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배신하는 것이 허다합니다. 변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20년 전에 요나단과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은혜을 증명합니다. 무조건적으로, 주권적으로, 선택적으로, 언약에 근거하여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므비보셋은 누구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까?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라. 누가 살고 죽든지 우리는 생사 간에 운명을 같이 한다.” 두 사람은 언약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고, 요나단은 죽었습니다. 서로의 언약대로 왕이 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돌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므비보셋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언약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그 혜택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 사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원수되게 합니다. 파멸의 죽음의 근본 원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한 것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의 사실은 인정되지만 정죄되지 않습니다. 죄의 형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신 형벌 받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됩니다.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고, 가진 것이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전에는 사단의 종이고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방영된 후에 우리 사회에 신데릴라 열풍이 불었답니다. 진정한 신데릴라는 재벌의 2세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되고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은혜가 무엇입니까? 신분과 재산의 혜택을 누립니다. 법적으로 하나님의 호적에 등재되었습니다. 누구도 법적인 신분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실제적인 혜택도 누립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생명 시냇가로 인도하십니다.
육신의 필요만 아니라 영적 필요도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합니다. 기도 응답이 풍성합니다. 찬양이 풍성합니다. 입을 열면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눈을 감으면 선교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고, 아름다운 모양도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 간에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서 살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심판을 이기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내 행위의 온전함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백번 노력해도 백번 실패합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했습니다. 율법과 행위로는 은혜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자랑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내 힘과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내게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울 수 있는 시간과 물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도울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 양심, 내 의지인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치매가 무서운 병입니다. 그분들이 무슨 죄가 많아서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치매가 걸리지 않은 것도 은혜입니다. 느브갓네살왕이 교만할 때 하나님이 그를 낮추셨습니다. 정신병자가 되어서 들에서 짐승과 함께 이슬과 풀을 먹고 지내게 하셨습니다. 정신이 온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절).”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라고 합니다. 개가 천하지만 죽은 개는 가장 무가치하고 천한 것을 말합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왕께서 생각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 므비보셋의 마음과 얼굴의 표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감격과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눈에서 나오는 눈물도 있고,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냥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데 어떻게 감정적인 반응이 없겠습니까? 회개의 눈물과 다른 눈물이 있습니다. 은혜의 눈물, 감격의 눈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찬송을 부르면 자주 눈물이 납니다. 내가 잘나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구나!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시는구나! 내 힘으로 살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셨구나! 깨달을수록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들어갈 때 집안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취직을 해야 하는데, 목사가 힘들다는데, 장로로 봉사해도 된다는데...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라틴어와 헬라어를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 있기 어려운 심정이었습니다. 막상 입학시험을 치고 합격자 발표가 있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내 길을 가게 되었구나! 저는 늘 부르는 찬송 중에 460장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나를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면 힘들고 금방 주저앉습니다. 대학부를 지도할 때도 매주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대학생에게는 할아버지 목사의 찬송처럼 들렸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앙고백이 담긴 찬송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의 엄한 심판대로 했으면 남아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은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임할 수도 있고, 다음에 임할 수도 있고, 마지막 날에 임할 수도 있습니다. 순서의 문제는 있어도 누구나 동일한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부러워 할 것 없습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심판이 미루어진다면 더 엄하고 큰 심판이 임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좋아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가까지 온 것이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은혜 밖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습니까?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주동자입니다. 멀리 다메섹까지 믿는 자를 잡으러 간 극렬한 핍박자입니다. 자신의 말대로 죄인의 괴수입니다. 이런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까지 가서 순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말 안 듣고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이었던 바울을 죽도록 충성하는 증인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도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요나단이 아니었으면 사울왕에게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왕이 되고 나라의 기초를 세운 다윗이 요나단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아들을 찾아서 은혜를 베풀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 궁궐을 짓고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으로, 위에 형님들이 일곱이나 되는데 어떻게 막내인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다윗에게는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연하지!” 라는 말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과분하게 대접해서 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당연하다면 죽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월급 봉부 받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서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사업을 붙들고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바람부는 대로 날아갑니다. 아침에 집을 나간 식구들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식탁에 함께 앉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안 돌아오는 식구도 많습니다. 언젠가 다 흩어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내일이라도 남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훔치는 도둑이 있습니다. 교만이 도둑입니다. “내 힘으로 했다” “내가 제일이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은혜가 떠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잘 봐 주셨습니다.” 이래야 은혜가 넘칩니다. 은혜의 끝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왕국입니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순간 은혜가 끝납니다. 은혜가 끝나면 심판이 임합니다. 어느 농부가 소출이 많아서 창고를 증축했습니다. “이만 하면 몇 년 동안 잘 먹고 잘 살겠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 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를 간직하고, 어铽게 하면 이웃과 함께 은혜를 나눌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훔치는 도둑이 있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어떻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까? 죄를 더 지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집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죄가 컸지만 회개할 때 은혜가 넘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은혜로 받아서 잔치까지 베풀었습니다. 집에서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을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범생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모범생은 모범생입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사고도 치고 문제도 일으키지만 회개하면 은혜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는 분들은 대개 이런 분들입니다. 지난날 문제가 많거나 죄가 많은 분들입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더라도 회개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죄 없다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좋고, 죄가 많아도 좋고, 죄가 커도 좋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면 큰 은혜가 임합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양심에 화인 맞으면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는 큰 죄를 짓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0-11).” 은혜를 도둑맞은 분들은 은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왕노릇 하는 삶
우리가 사는 세상에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 흑암이 왕노릇 하는 곳이 있습니다. 불의와 압제가 득세합니다. 뒷골목의 강패나 조폭의 세계입니다. 공공연히 왕따가 자행됩니다. 학교만 아니라, 이웃이나 직장에서도 집단 따돌림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인정과 관습이 왕노릇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인심 좋은 동네나 고향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웃사촌입니다. 이웃을 사랑합니다. 도둑이 어디 있습니까? 죽 한그릇도 나눕니다. 미풍양속으로 법입니다. 눈빛만 보아도 서로를 알고, 어른들 그림자만 보아도 고개 숙이고 인사합니다. 도덕과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법이 왕노릇 하는 곳이 있습니다. 대개의 사회 질서는 법으로 유지합니다. 세금도 내고, 군복무도 해야 하고, 의무교육도 해야 합니다. 법을 지켜야 합니다. 고소 고발이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감옥에 죄수들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알지도 기억도 못하는 법들이 많은데, 법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은혜가 왕노릇 하는 곳입니다. “은혜로 합시다” 하면, “찬성이요” 하고 화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개인의 스타일이나 정보나 대화의 부족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시다. 내가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상대방을 은혜로 대합시다. 피차 은혜로 받으면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나 실력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 은혜로 서로를 대합시다. 율법은 죽고 은혜가 왕노릇 하도록 합시다. 나의 고집과 판단은 죽고 은혜가 왕노릇 하게 합시다. 은혜가 법이 되게 합시다. 은혜가 상식이 되게 합시다. 은혜가 체질이 되게 합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이 교회에 울려 퍼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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