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삼상 9장

스네어 2014. 8. 22. 13:52

위대한 만남 삼상 9장

 

9장에 나오는 사무엘과 사울의 역사적 만남! 역사적인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셨고 성경은 그 역사적인 만남이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 만남의 과정을 자세히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확신하고 불문곡직하고 청년 사울에 대해 최선의 예우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정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처음 만난 생소한 청년에게 잘해주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런 예우를 펼친 것입니다.

 

성문 앞에서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사무엘은 사울과 사환을 산당의 객실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산당의 객실에는 손님이 약 30명 가량 있었는데 그 30명 중에서 다짜고짜 사울을 수석에 앉혔습니다.

 

30명 가량의 손님들은 특별한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기골이 장대한 젊은 청년을 사무엘이 데리고 와서 청한 자 중에서 가장 상석에 앉히니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저 청년 누구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에 대한 사무엘의 철저한 예우를 보십시오. 그렇게 한 것은 바로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앞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요리하는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부분을 가져 오라."(23) 그러자 요리하는 사람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와서 상석에 앉은 사울 앞에 두었습니다.

 

* 성경적 배경을 연구하는 법

 

여러분!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어떻게 수천년 전에 살던 사람들의 관습과 풍습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논문을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내놓은 것일까요. 아마 이 점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너무 신통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절 하나 하나에서 얻은 지식을 던져버리지 않고, 그 구절에서 얻은 하나하나의 지식을 최선을 다해 엮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구절이 바로 그러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아무 고대 자료도 보지 않고 지금부터 약 3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두가지 풍습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넓적다리 부분이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래서 가장 귀중한 손님에게는 그 고기의 넓적다리 부분을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러한 주장이 가능합니까. "3천년 전 이스라엘 풍물지"라는 책이 따로 없어도 본문의 상황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사무엘은 젊은 청년 사울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그에게 예우를 보이는 것은 그가 처음보는 젊은 청년 사울을 쟁쟁한 명사 30명을 제치고 상석에 앉힌 것을 통해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석에 앉은 그에게 따로 보관해 두었던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특별히 대접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두가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자체를 통해서 이런 식으로 성경적 배경을 연구해 나가면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

 

사무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에게 철저한 예우를 했을 뿐 아니라 가장 귀한 넓적다리까지 따로 대접하는 철저한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한 사무엘의 겸손한 자세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의 뜻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넓적다리 부분을 사울 앞에 놓았을 때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청년! 따로 보관했던 것이니 그것을 먹게! 이러한 때가 있을 것으로 알고 기다리며 따로 보관해 두었던 것이네."

 

여러분! 하나님이 쓰기로 예비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 다가오려고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기로 예비한 존재에게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본문은 두가지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를 상석에 앉히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28:13)."

 

둘째,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가장 소중한 넓적다리를 예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28:14)."

 

* 밤늦도록 벌어진 지붕의 담화

 

그날 밤, 산당에서 사무엘과 사울은 함께 밥상교제를 했습니다(24). 그리고 산당에서 내려와 성에 들어가서도 사무엘이 살던 집의 지붕에서 밤늦도록 같이 담화를 계속했습니다(25).

도대체 지붕에서 담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하필이면 왜 지붕입니까.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그 장면 안에 무슨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많은 장소 다 놔두고 왜 위험천만한 지붕에서 대화를 합니까.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지붕에서 담화를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중동 지방의 건축 양식, 혹은 지붕의 형태가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지붕의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몇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109절을 보면 베드로가 욥바에 사는 피장의 집에 있을 때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기도하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지붕입니까.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중동 지방의 지붕 형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구절 한 구절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 구절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 나가다 보면 수많은 성경적 배경상황을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구절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지방의 지붕은 대체적으로 평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지붕을 옥상처럼 만들고 옥상에 천막과 같은 것을 쳐서 원두막처럼 쉼터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도가 뜨거운 지역이므로 그 지붕의 쉼터는 무더운 낮에 낮잠자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고 밤에도 열대야 현상을 피하기 위해 잠자는 공간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6절의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라는 구절을 보면 사무엘이 열대야 현상을 피하기 위해 잠자리를 지붕에 만들었다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그 지붕에서 밤늦도록 사울과 무슨 담화를 했겠습니까. "청년! 자네와 내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네..." 그러면서 그동안 있었던 하나님의 인도에 관한 얘기를 사무엘이 했을 때 사울도 깜짝 놀라면서 반응했을 것입니다. "!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알고 보면 인간의 만남들은 어느 것 하나라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손길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만남을 소중하게 활용하기만 하면 어떤 사람은 사무엘처럼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변하기 전의 사울처럼 역사의 주인공으로 활약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만남일지라도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만남의 의미를 잘 파악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활 속에서 더욱 확실히 느끼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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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하나님"을 만나다 삼상 9:

 

길거리에서 십원을 줍다

 

지금이야 별볼일 없는 돈이지만, 어린시절엔 10원이면 눈깔사탕 몇 개가 왔다갔다하는 거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엔 그리 큰 욕심없이 지내던터라(?) 그정도의 금액이면 하루가 즐거울 수 있는 그런 거액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거나 구슬치기를 하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십원짜리 동전을 주운 기억. 그러면 그날은 정말 운수대통한 날이었습니다. 친구녀석들에게 자랑스럽게 10원짜리를 들어보이고선, 앞장서서 가게로 뛰어들어가 눈깔사탕 몇 개를 사다가 친구녀석들에게 인심을 쓰고 우쭐거리곤 했었지요.

 

여러분은 뜻밖의 횡재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른이 되어가면서부터 기대치가 높아져서인지는 몰라도, "뜻밖의 횡재"를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운수대통을 자주 만나시는 분이 계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여간에, 길거리에서 뜻밖의 10원을 줍는 것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쁨을 어린시절에 가져다 주었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기쁨은 사뭇 남다르고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인도받는 사울

 

우린 사울이 뜻밖의 사람을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미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집을 나와 길바닥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이 지방 저지방을 전전하면서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려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고 시간만 허비한채 집으로 돌아가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사울은 사무엘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은 집을 나올 때와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무슨말 이냐면, "어디로 가야 사무엘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사무엘이 있는 지방에는 들어왔지만, 사무엘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다가(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다가), 더군다나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자신이 쉽게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그런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하튼,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출발했던 것을 종결짓고, 이젠 "사무엘"을 찾으러 출발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의 앞부분인 14절까지에는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기까지 중간중간에 인도자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사환은 '물길러 나온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도를 받아 사무엘을 만나러 올라가게 됩니다. 물론 사무엘이 있던 성읍이 워낙 작은 성읍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사울은 집을 나온 뒤 처음으로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를 인도받은 것입니다. 도움받은 것입니다. 사울은 여지껏 자신이 찾으려고 기를 쓰고 찾아다니던 "암나귀"를 찾는데는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전혀 뜻밖의 새로운 목표인 "사무엘"을 찾는데는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으로 희한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도와주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돈을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어버린 다음에 돈과 건강을 되찾고가 고군분투할 때는 별로 도움의 손길을 안주시는 것 같다가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자 목표를 수정하면 곧장 도움과 인도의 손길을 뻗쳐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울과 사환은 사무엘에게 나아가게 되고 급기야 사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원래의 목표물인 암나귀는 찾지 못했지만, 두 번째 목표였던 사무엘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듣게 되다!

 

그리고 우린 아주 기가막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건 다름아니라, 사울이 인생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놀라운 "발견"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바와 마찬가지로, 사울과 사환은 그저 "암나귀"가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고 사무엘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됩니다.

 

"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울은 여지껏 암나귀를 찾아 헤매고 다녔는데, 그런데 바로 그 사울을 향해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이 여지껏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그렇게 엄청난 선포를 합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다시 되찾고 싶어했지만, 그런 사울을 향해 사무엘은 "넌 도대체 네가 누구인줄은 알고 있느냐? 넌 도대체 네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넌 도대체

네가 무엇 때문에 태어나 누굴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하면 네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잇느냐?"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넌 네가 누구인줄 알고 있느냐? 넌 하나님께서 네게 맡겨주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직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의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을 던지셨듯이, 하나님께선 오늘날도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느냐? 내가 너희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을 아느냐? 돈만 찾아다니는 너희를 내가 애타게 찾고 있음을 아느냐?"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린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린 도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까? 우린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사울은 바로 지금 그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넌 누구다!!!"

"넌 누구다!!!" "넌 이스라엘을 맡을 사람이다!!!" "내가 네게 이것이것을 부탁하마!!!"

 

 

그렇습니다. 사울은 여지껏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고 찾아다니던 것들과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사울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비로서 본격적인 자기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린 도대체 어떻습니까? 우린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런 삶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방향대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뜻밖의 하나님"을 만나다!

 

여러분, 우리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합시다. 뚜렷하게 묵상합시다. 사울과 사환은 암나귀를 찾으러 나갔다가 우연히 사무엘을 찾아가게 되었지만,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들이 목적하고 추구하던 것과는 전혀 별개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치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이란 촌구석에 나타났다는 깜짝 놀랄소식을 듣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 예수가 너를 제자로 부른다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듣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문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 받고자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방법을 가장 먼저 동원했고 발이 부르트도록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하나님을 찾아나섰을 때, 그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인도받았고 또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직접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전의 자기자신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자기정체성이 뚜렷한 사람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까짓 암나귀로부터 시작된 문제와 여러 날에 걸친 고민스런 여행이 드디어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꼐서 원하신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암나귀가 문제가 생겼을 때, '준비된 문제'가 집안에 들이닥쳤을 때, 우린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말씀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걸음을 돌리고 눈과 귀를 하나님께로 향한다면, '준비됨 문제'를 풀어놓으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이제 우리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찾는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 아직까지도 암나귀만 찾아다닐뿐 "너는 누구다" 이렇게 말씀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

 

길거리에서 십원을 주워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암나귀를 놓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된다면, 암나귀는 전혀 아깝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암나귀 조차도 찾게 하실 것임을 믿습니다만, 혹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주워보십시오. 뜻밖의 하나님을 만나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 부분에 있어서 "뜻밖의 모습"으로 발견되기를 기다리시면서, 바로 우리 자신을 찾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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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예화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향기를 진하게 발산하는 진흙 한 덩어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진흙 한 덩어리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온 몸에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나그네와 진흙과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네가 그 유명한 바그다드의 진주냐?"

"아닙니다"

"그러면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아닙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한 덩이 진흙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

"그 비결은 내가 백합화를 만나 함께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냄새나는 진흙이 백합화를 만나 오래 살고 나니 향기를 발하는 바그다드의 진주같이, 인도의 사향같이 아름다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 망하기도 하고, 저 사람을 만나 흥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 살 사람이 죽기도 하고, 그 사람을 만나 죽을 사람이 살기도 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일생이 됩니다. 모세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잘 만나서 이스라엘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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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세 번 아주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부모와 형제와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만남입니다. 태어나 보니까 이미 부모나 형제들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이고 하늘이 맺어준 만남입니다.

 

두 번째는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내가 선택해서 만난 만남입니다. 내가 생각해서 고르고 내가 선택해서 만난 만남입니다. 부모와 형제와의 만남도 일생동안 함께 하는 만남이지만 배우자와의 만남도 일평생을 함께 하는 참 소중한 만남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종교적인 만남"입니다. 즉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저는 만남 중에서 이 예수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 중에서 최고의 만남은 이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내게 예수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가 참 궁금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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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Social Animal)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생 후 엄마와 아빠를 만납니다. 형과 누나를 만납니다. 성장하면서 친구를 만납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만납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배우자를 만납니다. 자식들을 만납니다. 직장에 다니게 되면 직장 동료를 만납니다. 이웃사람을 만납니다. 우리처럼 예배당에 왔을 때는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생활을 넓혀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성공도 만납니다. 실패도 만납니다. 건강도 만납니다. 질병도 만납니다. 행복도 만납니다. 불행도 만납니다. 한 마디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힘들고 어렵고 실패하고 고통을 받으며 병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자의 해를 받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확실히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간사한 자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불화를 조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항상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도 좋은 이웃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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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불가항력적인 만남과 선택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부모 형제와의 만남과 같은 운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배우자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등 선택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친구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착한 친구를 마음에 두면 향기 좋은 화초를 방 안에 둔 것 같고 나쁜 친구를 마음에 두면 썩은 생선을 방안에 둔 것 같이 냄새가 진동한다고 말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왜 감옥에 오게 되었는가? 70% 이상이 친구 잘못 사귀어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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