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 28장

스네어 2014. 7. 1. 10:30

먼저 제자가 되라 마 28:16~28:20

 

아 한국교회!

 

최근에 발표된 2005년 인구센서스는 기독교계에는 충격이었습니다. 200511월 현재 기독교 인구는 총 861만 명으로 이는 총인구 대비 18.3% 입니다. 천만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훨씬 못 미쳤습니다. 더욱이 95년도에 비해 기독교 인구는 15만 명 정도 줄어든 결과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같은 기간 동안 천주교는 1995295만 명에서 2005년에는 514만 명으로 무려 219만 명이나 늘었다는 점입니다.

 

이번 통계는 한국기독교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늘 성장만 할 것 같은 교회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20%의 벽을 돌파하기도 전에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질적인 면에서의 위기는 누차 지적되어 왔지만 그래도 양적인 성장은 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위해 왔는데 이제는 그 양적 성장마저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사실 20% 에 가까운 숫자도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갈수록 교회의 영향력이 상실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또 다음 인구 센서스 조사에서는 이보다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더 이상 매력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도덕적 감화력에서 모범을 보이지 못합니다. 물질만 밝히고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사람들이 천주교에 매력을 느끼고 개종을 한 결과입니다.

 

내적으로는 문화화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한국의 주류 문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의 상당수의 지도층들이 기독교인 들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마치 우리의 품격을 높이는 하나의 계급처럼 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고급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복음의 능력이나 전투성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도 소리는 날로 작아지며 기도 시간은 날로 짧아지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바뀌는 감격적인 간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복음이 능력을 상실한 때를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핍박받던 시대에는 복음의 능력이 날카롭게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류 문화가 되면서 복음적 필요보다는 문화적 필요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이 중세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해, 오늘날의 교회는 은과 금은 소유했지만 나사렛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가 회개하고 고쳐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기독교의 문제는 수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맛을 잃어버렸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금이 있어도 맛을 잃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밟히고 짐 덩어리로 전락합니다. 한국교회는 다시 비록 소수일지라도 아주 짠 왕소금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왕소금들이 많을 때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

 

예수님의 관심도 이런 짠 맛을 잃지 않은 소금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최후로 전하신 말씀입니다. 19, 20절을 지상위임령, Great Commission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개의 주동사와 3개의 분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입니다. 제자 삼기 위해서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할 것이며,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역이 완료됩니다. 이 단계까지 가면 제자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서 세례 주고까지는 잘 하는데, 가르치는 단계에서는 좀 약하고, 지키게 하는 단계에서는 아주 약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도덕성 상실과 영향력 상실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동안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이 바로 제자 삼는 사역이었습니다. 주님은 무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자만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최후의 이 지상위임령을 듣고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16절 보십시오. 유다를 뺀 열한 제자이지 않습니까? 마지막 유언 같은 명령이면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기의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얼마나 멋있는 최후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무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분위기나 먹을 것에 취해 하고 몰렸다가도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이들은 쉽게 돌아서기도 잘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자들이 이들 무리들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마치고 천국에 가니까 한 천사가 물었습니다. “예수님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심고 왔다네.” “그들이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천사가 묻자 예수님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이분이 짧은 공생애에서 할 수 있었던 가장 지혜롭고 최선의 일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이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썼는데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복음서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이 오직 제자훈련에만 관심을 쏟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오늘은 성경을 많이 찾아보겠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한 저자의 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마태복음 안에 있는 말씀만 가지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태가 발견했던 예수님을 우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보면서 마가복음 보면 초점이 흐트러집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 복음서마다 자신들이 그린 예수님이 모습이 다릅니다. 성경을 오래 읽으신 분들은 이 세미한 결을 구분할 줄 아셔야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크게 다섯 묶음으로 구분해 놓고 있습니다. 다섯 개의 말씀모음집을 마태복음서 순서에 따라 배치해 놓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개의 모음집은 철저히 제자들을 향한 말씀들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5,6,7장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인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그림을 그려보세요. 예수님이 산위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무리가 배경처럼 있고, 제자들이 앞에서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무리가 되지 마십시오. 제자가 되십시오. 주님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입니다.

 

10장을 보십시오. 이것은 선교론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선교여행 보내면서 어떻게 전도할 지를 가르쳐주신 말씀들입니다. 5절 한 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111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여기서의 관심도 제자입니다. 13장 보십시오. 13장은 7개의 천국비유 말씀을 모아놓았습니다. 1절에 보면 무리를 향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예수님은 비유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가르쳐 주십니다. 18장은 교회론이라는 제목이 붙은 말씀모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하지요?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마지막으로 24, 25장은 종말론과 관련된 말씀 모음집입니다. 마지막 때의 일과 최후 심판의 모습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들도 역시 제자입니다. 2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마태복음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이고 이 말씀은 제자가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마지막 지상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에도 그 앞에 제자들만 듣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잘 해석 못하는 부분이 16절의 산입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시 만날 것을 지시하신 갈릴리 쪽에 있는 어느 산입니다. 저는 이 산이 바로 산상수훈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그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마치 새로운 천국 백성된 제자들을 향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반포하듯 예수님께서 천국 율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실 때의 분부한 모든 것의 핵심은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제자 삼는 사역에 집중하셨는지, 또 그 제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는 단지 준 목회자처럼 구역 관리 잘하고 전도 잘해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제자상은 지난 번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마태복음을 근거로 제자상을 요약하면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과 그 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며, 원수를 사랑하며, 전혀 위선이 없으며,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5-7). 전도하는 데 열심인 사람입니다(10). 열심히 말씀공부해서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입니다(13). 교회 안에서 형제를 용서하고 작은 자를 대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18). 자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또 부지런히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람입니다(24-25). 이런 사람이 사회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입니다.

 

신자에서 제자로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의 방법대로 무리가 아니라 제자에 집중하는 것이며, 이런 제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신자에서 제자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리 속에 있으려고 하지 제자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신자와 제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를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제자이든지 아니면 제자가 아니든지의 문제만 있을 뿐이지 신자라는 엉거주춤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가는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곧 제자의 삶을 사는 자가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엉거주춤 신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지은 인생과 같습니다.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천국잔치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왕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이 화가 나서 그들을 진멸하고 사거리로 나아가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나 불러오게 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려온 사람들이 잔치 자리에 앉았습니다. 왕이 지나가다 보니 이들 중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왕은 그 사람을 쫓아내라 명령하며 그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3-14) 그 예복이 무어냐 하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시작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과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결혼식의 신랑을 맞으러 열 처녀가 등을 가지고 나갔는데 신랑이 더디옵니다. 기다리다 지쳐 모두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갑자기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얼른 등불을 켰는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미리 예비해 두었기에 신랑을 맞을 수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어 그만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언제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오실지 모르니 깨어서 그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이 무엇입니까? 그것 또한 제자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어지는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 다음의 말씀은 최후심판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심판을 하시면서 영생에 들어갈 양의 무리와 영벌에 들어갈 염소의 무리를 가릅니다. 그 기준은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느냐 입니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에 걸린 사람, 옥에 갇힌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름은 제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이렇듯 제자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너무 안일합니다. 적당히 예수 믿으며 이 땅에서 편안히 살다가 천국에 가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지금 어리석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개척교회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이상 적당히 살 수 없으니까요. 인생에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이 기회가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제자로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훈련이 없으면 제자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이나 훈련시켰는데 그 중 하나는 배신하고,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순간에는 다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3년을 합숙하며 훈련받았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도 했지만 그래도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다 예수님의 위대한 증인으로 그 삶을 마쳤습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확실하시다면 훈련을 시키실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가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신앙에 나태해졌는데도 하나님이 가만 놔두신다면 그것은 이미 포기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첫 훈련은 주일성수 훈련이었습니다. 한 번은 주일을 빼먹고 친구들하고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돌아오자마자 몸이 아팠습니다. 몇 번 그런 유사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아예 주일은 교회 가는 날로 못을 박았습니다. 시간을 바치는 훈련도 시키셨습니다. 대학시절에 교회에서 제가 맡았던 일은 토요일 오후에 을지로에 가서 주보를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청년시절에 주말은 얼마나 황금대의 시간입니까? 미팅도 해야 하고 영화도 보아야 하고. 저는 근 1년 동안 이 일 때문에 다른 약속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이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십일조 훈련도 시키셨습니다. 제가 가정을 갖고 그 첫 달 우리가 내야 될 십일조가 44만원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쉬 그렇듯이 4만원은 뒷자리니까 끊자 하고 십일조를 40만원만 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당장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하수구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뚫리지 않아 사람을 불렀습니다. 이 분이 한참 끙끙대더니 하수구를 용케 뚫었습니다. 그리고 영수증을 청구하는데 4만원이었습니다. 머리가 쭈삣 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비싸다 싶었는데 그 돈이 십일조 액수와 정확히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 않고 주었습니다. 그 후로는 정확한 십일조를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물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물질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계산이 정확한 사람, 더 나아가서는 어떤 물질에도 흔들림 없이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더 큰 물질을 다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내는 데 만족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런 물질 훈련을 통해서 다른 더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삭을 낳기 전까지 25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모세를 애굽 궁정에서 또 미디안 목자로 80년 동안 훈련시키신 것은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를 목표로 하십시오. 제자가 되기 위해 제자훈련 받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18)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훈련받되 작은 중소기업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오너로 모신 하늘 나라의 대기업에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 훈련은 소망이 있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간구할 때 충분히 공급해 주십니다. 공수표나 부도난 어음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확신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임마누엘의 확신입니다. 주님은 이제는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우리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제자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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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 마 28:18~28:20

 

제자의 사전적 의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거나 또는 받은 사람'을 말하며, 달리 '도제, 문인, 문도, 문제자'라고도 합니다.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 특히 선택되어 예수님과 생활을 같이 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훈련받고 전도에 파견된 12 제자' 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분류 하면 '교인, 신자, 제자', 이렇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교 인은 교회는 다니지만 구원의 확 신이 없는 사람이며, 신자는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핍박이 오거 나 유혹이 오면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주님이 언제, 어느 때에 오시든 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며,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 와도 이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등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전 도하여 함께 천국에 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자 는 천국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 을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인은 많으나 신자는 적고, 신자는 있으나 제자는 없다."는 말 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인은 신자로, 신자는 제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가 성 장하고, 가정과 사회가 변화되며, IMF의 위기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주 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하신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 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 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28:19-20). 이 말씀의 마지막 명령에서 주된 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이고, 다른 것은 수식어로 되어 있습니다. ,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 는 목적은 모두 제자를 삼기 위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화는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모범을 보이신 일입니다. 예 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목적에 관 련해서 파악해야 할 사항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 의 구속을 성취하신 것과, 구원 의 메시지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 에게 신실히 전파할 소수의 사람 들, 즉 열두 제자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주님은 충성스러운 사람들 을 찾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도처 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교육하시고 훈련시키시는데 놀라 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둘째,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분 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말이요, 마치 종과 같이 그분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한다는 뜻도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평생동안 따라야 할 모범이 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고, 나는 그 의 영원한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10:24-25).

제자는 주님의 방식대로 따라 가야 합니다.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 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8-29)라는 말씀 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대개 앞부분인 28 절만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의 멍에를 메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평안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의 멍에를 기꺼이 메려는 자들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방식대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방식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항 상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란 음식, , , 생활 필수품 등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 순서를 뒤바꿔서 우리의 필요를 먼저 구하고 있습니다. 우 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 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 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관이 먼저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제자는 훈련과 양육이 필요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어떤 사람이든지 주께 헌신할 수는 있으나 만일 그가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금의 가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 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받는 사람만이 다른 제자를 낳고 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내적 성장은 제자양육 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 성도들을 통한 일대일 전도가 가장 최우선적인 성장방법으로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생산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능력을 키우고 확장시키는데 교회가 앞 장서야 하는데, 그 일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 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성 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영적 재생산을 할 수 있는 헌신적 성도로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 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 후 2:1-2).

 

넷째, 제자에게는 핍박도 있고 상급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본받아 서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다소 저 항이나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성경대로 살아가고자 힘쓸 때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능히 이기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커다란 상급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제자는 자신이 가진 모 든 것을 대가로 치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16:24-25). 우리는 그동안 구원의 한면만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것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 땅에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한 제자들에게는 상급이 있음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 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자가 없느니라] (10:29-30). 또한 그러한 자 에게는 주님이 항상 함께 해 주 시고, 생명의 면류관도 예비되어 있음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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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전도하는 제자들 사 40:9~40:11, 8:12~8:13

 

국어사전에는 제자라는 말의 뜻을 두 가지로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을 말하며 비슷한 말은 도제’(徒弟)라고 합니다. 둘째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사전에 보면 기독교에서는 제자가 있지만 불교나 다른 의미는 사전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는 제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자는 일반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특히 기독교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제자훈련’, ‘제자도라는 말을 씁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칭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는 아니지만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모두 다 제자라 불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는 열두 사도에게는 제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와 사도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복음서의 기자들은 썼습니다. 마태복음 10:1에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라고 합니다. 10:2에는 이 열두 제자에게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제자나 사도라 칭하지 않고 마가복음 3:16에는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6:13에는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제자는 모름지기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의 정의,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사역한 자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셋째는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제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사도의 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1에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고 합니다. 6:2에는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처음 교회가 설립되자 열두 제자는 사도의 직을 맡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제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제자를 세우신 목적이 마가복음 3:14-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합니다. 열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과동행하고, 나가서 전도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람에게 배우는 자로서 제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사도, 이 두 가지 직책을 동시에 주셨습니다. 우리가 제자가 된 목적도 사도 즉 보내심을 받는 자입니다. 배우기는 잘 해도 실천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머리만 크고 가분수의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제자는 배운 것을 삶을 통하여 증거해야 합니다. 또 바울은 너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뭘 배우고, 뭘 받고, 뭘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거해야 하고 행해야 합니다. 행해야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제자들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현대의 살아있는 제자인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도의 주제입니다.

 

사도행전 8:12에는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이라고 합니다. 전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시대가 변해도 어떤 환경에도 변하지 않는 전도의 주제이며 전도의 핵심 내용입니다.

 

핵심가치(core value)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 다른 것들과는 대치될 수 없는 가치를 말할 때 핵심가치라고 합니다. 전도의 핵심 주제도 다른 어떤 것들로 대치될 수 없는 전도의 목적이며 가치입니다. 전도의 핵심내용인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치지 말아야 참 전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시대를 초월한 핵심 메시지(core messag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이 줄기차게 전하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21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얻습니다. 주의 이름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전도의 주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외에 더 중요한 전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외에 어떤 이름도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외에 어떤 나라도 전도의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절대 이름을 바꾸지 마세요. 다른 이름을 의지하지 마세요.

 

모창가수 너훈아가 있습니다. 너훈아 소속사 쇼 그룹이 있습니다. 소속된 사람들은 너훈아, 밤실이, 이엉자, 넘진 등입니다. 소속은 다르지만 조용팔도 있고, 이미지도 있습니다. 이 이름은 다른 이름입니다. 이름이 다르면 사람이 다릅니다. 아무리 모창을 하지만 사람이 다릅니다. 노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창가수들은 이름이 달라도 뭔가 비슷하게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은 절대도 구원의 흉내는 어림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3:6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할 사람을 예루살렘 미문에서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4:18에는 공회원들이 사도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공회원들은 예수의 이름에 겁이 잔뜩 났습니다.

 

사람은 그 이름대로 된다”(people become what you call them)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예전에 얼굴보고 이름 짖는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이름대로 된다는 것이 유대인의 성명철학입니다. 모세라고 이름을 지으면 모세와 같이 된다고 믿었고,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아브라함과 같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는 사라 혹은 리브가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되라는 바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사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 오신 인간이신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옛날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왕이며, 선지자이며,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2:9에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다른 어떤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이름으로 병이 낫습니다. 그 이름으로 힘을 얻습니다.

 

오래 전에 부르던 복음성가 1세대에 귀에 익숙한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마귀는 쫓긴다”. 마귀는 예수님의 이름을 압니다. 마귀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너무 잘 아니까 겁을 냅니다.

 

지난 주간의 신문에는 옥스퍼드대학교 미국 출판부에서 선정한 올해의 단어로 ‘unfriend’를 정하였다고 합니다. unfriend친구삭제라는 뜻으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촌 끊기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온라인상 친구 끊기 행동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친구목록 삭제로 쓰이는 신조어입니다. 친구를 끊는다는 말이 올해의 단어랍니다. 요즘에 친구는 친구가 아닌 경쟁자라고 합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풍조에 친구가 없는 시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는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하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친구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 덕분에, 예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온통 예수님의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높이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집사 빌립은 하나님의 나라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8:12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빌립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빌립을 교회에 세운 목적이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가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고 하여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였으므로 빌립을 비롯한 스데반,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와 함께 구제를 위하여 세웠습니다.

 

빌립이 교회 안에서의 일은 구제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일은 전도입니다. 사도들도 교회 밖에서의 일은 전도였습니다. 교회의 일꾼은 누구나 전도자입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교회 밖에서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란 말은 유앙겔리스테스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라톤의 유래를 아시지요? 옛날 헬라의 도시국가들 끼리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가 달려가서 자기 왕에게 승리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이란 말의 어원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들을 때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전도자는 좋은 소식만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복음에는 나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단어들을 보세요. 예수, 구원, 사랑, 평안, 소망, 행복, 이 모두가 나쁜 뜻을 가지 단어가 아닙니다. 복음에는 나쁜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뉴스를 보세요. 항상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교차합니다. 지난 주간에 김연아가 그랑프리 7차 대회에서 우승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부산에서는 어느 사격연습장에 화재가 나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죽었습니다. 김연아가 그랑프리대회에서 연속으로 일곱 차례 우승했습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프리스케이팅에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나쁜 소식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일본에게는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절대선이란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선입니다. 복음은 절대선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절대선입니다. 성경은 주의 완전하심”(18:25), “아버지의 온전하심”(5:48)등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온전하십니다. 완전과 온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온전히 선하고, 온전한 기쁨입니다. 이 좋은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 천사들이 전한 탄생의 소식을 보세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21:8에는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니라고 합니다. 빌립은 집사였고 전도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기쁜 소식 전하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누구나 복음 전도자입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전도자는 특정한 자가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전도자이고,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마태복음 28:18의 대위임령을 멀고 가까운 모든 곳, 그 곳으로 가서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생명의 길로 훈련시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가장 효과 있는 전도자직의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전도는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이것이 전도의 방법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십시오.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에는 삶이 우선이고 말이 차선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사회, 안보 모두가 어렵고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낙관하기 힘이 듭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들을 고쳐주소서”. 어떻게 하면 정치, 경제가 바르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해답입니다. 사도행전 1:6-8을 보세요. 성령이 충만하여 증인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이 이 나라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전도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아테네에 갔을 때에 아레오바고에 서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내가 보니 너희들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하면서 사도행전 17:23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전설에 의하면 옛날 아테네에 역병이 돌았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신을 달래서 역병이 물러가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떤 현자가 와서 양을 언덕에 풀어 멈추는 곳에 이름 모르는 신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양을 제물로 드리면 역병이 멈출 것이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 모를 신을 위한 신전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도는 알지 못하는 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아무 것이나 섬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도는 오직 하나님, 오직 복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한 내용을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전도의 본질을 말합니다.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전도의 핵심내용을 전할 때에 전도가 힘이 있고 전도가 가능합니다.

 

결론

 

존 웨슬리는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세상을 떠나게 하면 한 결 같이 좋은 데 가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승화장에 가보면 가는 길 편하게 노잣돈이라도 놓으시지요러고 합니다. 그런데 놓으면 자기들이 가지데요? 편한 길이 옳은 길입니다. 많은 종교가 이리로 가야 천국이라고 합니다. 이 길이 참 길이라고 합니다. 또 극락왕생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이 아닙니다. 단지 그 길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길의 인도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가졌든지 교회 밖 세상에서 우리는 전도자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우리의 사명은 전도자의 직분입니다. 구제만 할 게 아니라 전도자의 사명을 다 합시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 직업인입니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까? 회사원입니까? 가정주부입니까? 여러분의 직업은 그렇다고 해도 직책은 전도자입니다. 디모데후서 4:5에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십시오. 그리고 직업을 통하여 세상에서 전도자의 일을 충실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며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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