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 16장

스네어 2014. 6. 1. 08:29

주님이 세우신 부활의 교회 마 16:18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구름기둥과 불 기둥으로 저들을 광야의 길로 인도 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오늘 우리의 교회시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출애굽 ---- 광 야 ---- 가나안

하나님은 바로의 쇠사슬에서 건 짐 받은 이스라엘을 사람의 힘으로 는 살 수 없는 가장 어려운 광야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을 교회로 인도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20:1, 8:30, 14: 13, 21:5).

 

2.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서 구원하심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교회 탄생 영원한 천국, 가나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함을 받았 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교회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교회의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는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왜 교회에 나와야 하는가?' 를 배우고자 합니다.

 

광야(교회)의 권위

 

1. 광야는 하나님이 선민을 불러내 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나 타내기 위하여 준비된 신약의 교회 와 같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모 인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삼위 하나 님은 이 모인 무리 중에 항상 함께 하여 신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10:20-22, 2:43-47).

 

2. 광야교회는 애굽의 옛사람을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곳입니다. 애굽의 더러운 우상, 죄의 종, 온갖 불의와 정욕을 좇 아가던 육적이고 세상적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과 사귀고 하 나님을 가까이하는 영광스러운 새사람으로 들어올리고 변화시키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3. 애굽 바로의 그늘 아래 죄와 마귀에게 속한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망의 쇠사슬에 매인 자는 살았다 고 할 수 없습니다(:보신탕집에 묶인 개). 생명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 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생명입니 다(8:2, 10:10, 11:25, 20:31, 요일 3:14)

 

4. 광야교회는 양이 죽어서 양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교회이지만, 오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셔서 그 피로 세운 집입니다. 교회는 그의 피가 흐르는 곳이요, 모두가 주님의 몸이요, 주님이 머리가 되셔서 모든 질서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20:28, 12:7, 1:23).

 

5. 애굽에서의 구원 --- 광야교회 - -- 가나안의 축복, 이것은 선민이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요, 하나님의 거 룩한 섭리의 코스입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시작이요, 광야는 과정이요, 가나안은 열매요 결론입니다. 하늘의 열매, 땅의 열매, 성령의 열매, 이 모든 복된 열매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맺어지게 하십 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는 교회를 통하여 또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가까이 나아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처소는 오직 광야교회 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의 삶에 필요한 좋은 것을 공급하시는 거룩한 집이요, 인간의 가치와 능력 을 들어올려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인간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으로 옷 입히는 곳이요, 저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는 집입니다.

어찌 교회를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23:6, 134:3, 74:17)

 

23:6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1.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고, 영적으로 어린아이같이 약하고 어린 저 들을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 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일에는 너무나 똑 똑하고 실력 있고 지식이 많으나, 영 적으로 어린 우리들이 장성한 사람 이 되고, 힘있고 능력 있는 자녀가 되도록 날마다 커야 되겠습니다(벧 후 3:18, 3:18, 고전 1:18-19, 3:10).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 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아 어린 선민이 블레셋을 보면 두려 워하기에 광야로 인도하여 저들을 길러서 블레셋 가나안과 싸우게 하 셨습니다(13:17).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 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 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2.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땅 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를 가르쳐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하여 광야교회로 인도하십니다(17:19, 31:12, 12:16, 9:13, 딤후 3:14).

 

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 를 지켜 행할 것이라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 운 것을 알며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 다.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닫고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 누구도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 다.

 

교회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우리를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교회의 비밀의 문을 말씀으로 열어봅시다.

 

1.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딤전3:15)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계십니다(2:20)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 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 할 지니라

 

2.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생각과 언행이 성전 중심이 되고, 가정과 직 장이 성전과 바른 위치에 서야 합니 다(고전 10:32, 딤후4:14, 16:1-2)

 

3. 이 곳은 하나님의 백성, 구속함 을 받은 성도를 축복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한없이 많은 은혜를 샘처럼, 강같이 흐르게 하십니다(47:1, 3:20-21).

 

4.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교회 와 주님은 한 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신부처럼 사랑하십니다(5:25).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그의 신부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고 가까이하고 섬기는 것은 주님 사랑이요, 아내 사랑과 같습니다.

 

5. 교회는 가나안 정복, 가나안 축 복, 온 세계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하 여 준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미래를 위해 있습니다. 금생과 내생에 부 어주실 은혜와 축복을 준비하는 곳 입니다. 21세기를 준비하는 곳입니 다.

교회 생활을 잘함으로 받을 축복 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딤 전 4:8, 14:8, 12:1-3)

 

6. 교회는 이 세상에서 마귀와 죄의 종이 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이 오 시는 날까지 계속 건져내고, 구원하고, 출애굽시키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일시적이었으나, 오늘의 출애굽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고, 길 잃은 양, 집을 떠난 자식, 죄에 매인 자를 항상 건져내야 합니다(15:4-7, 18-24, 13:16, 1:8).

 

하나님의 기쁨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구원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7. 교회는 높이 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바라보며, 멀리 있는 가나안을 얻기 위하여 하늘의 소식, 말씀을 들으 며 걸어가는 장거리 경주자의 삶입니다.

애굽에서 가졌던 경솔하고 조급 한 마음, 가볍게 흔들리는 삶은 버려 야 합니다. 불평 불만을 즉시 나타내 고,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면 큰 일도 할 수 없고 하나 님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한탕주의, 물량주의, 빨리 은혜받고, 빨리 성공하고, 빨리 돈벌고, 빨리 사랑하고, 빨리 행복하려고 하는 것, 이것 은 다 마귀가 주는 것이요, 육적이요 애굽의 삶입니다(미국에 사는 베트남 사람과 한국인 비교 ; 딤후 3:4, 딤전 3:6, 13:20-21, 16:1-3, 17:3).

모세(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 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 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조급한 백성(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이 사 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 라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택한 백성을 기르시기 위하여 친히, 철저히 훈련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 순종(15:37-40, 8:2)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 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 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2.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굳센 믿음(14:11-12, 22-24)

 

14:11-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3.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그의 도움 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17:11, 11:2)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 기더니

 

이러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하 나님은 기적과 능력과 권능을 보이시고, 시내산 아래서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8:3-6). 때로는 고난과 위기, 환난과 전쟁을 통하여 그 백성 을 철저히 순종하는 백성으로, 유일 신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도록 몰아 가셨습니다.

철저한 교육(미국, 독일 등 선진국은 교육이 철저)

하나님은 철저하십니다. 그의 자 녀를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전적인 믿음으로 늘 기도하게 하십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모르고 애 굽을 떠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모르고 친구 따라 누가 권해서 흥미 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 성령 의 거듭남 없이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사람, 교회의 비밀을 모르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시험이 먼저 오고, 회중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나는 선민입니까, 섞인 무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잡족입니까?(12:38)

중다한 잡족(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 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 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교회는 은혜와 축복이 강같이 흐르지만, 진펄과 개펄같은 신자는 복 을 받을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 다(47:11).

 

47: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 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잡족, 섞인 무리, 진펄과 개펄은 누구입니까?

1. 회개하지 않고, 죄를 계속 짓고 즐기며 죄에 빠진 사람, 사기성, 위 선, 거짓이 가득한 사람

2. 돈을 사랑하고, 육의 소욕을 너 무나 탐내고, 교회와 교인, 주의 종 을 이용하여 덕을 보려는 사람()

3. 불평불만이 많고, 구속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하고 낙심하는 사람

4. 당을 짓고, 끼리끼리 잘 사귀고 좋아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끼리끼리 맞는 말을 하고, 교회 밖에서 사람을 만나고, 교회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밖으로 도는 사람

5. 우상숭배, 음욕에 매여 있고, 거짓에 매여 있는 사람

6. 명예욕, 권세욕, 인기위주, 앞장서려는 욕심으로 목회자를 이용하고, 직분을 탐내고, 교만하여 자신이 제 일인줄 아는 사람

 

사단이 넘어뜨릴 수 없는 교회 (16:18)

바로가 제아무리 힘있고 능력있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민을 학대하고 괴롭혔으나, 하나님은 선민 을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출 애굽하여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신약의 교회시대에도 바로와 같은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달려들어 넘어뜨리려고 시험했고(4:5),

베드로에게도 끊임없이 역사하여 밀 까불듯이 까불고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22:31).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사단 바로 는 뒤를 따라오고, 광야생활에도 늘 시험하여 저들을 넘어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6:13)라 고 늘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민은 바로에게서 해방됨으로 사단에게서 벗어났으나, 오늘 의 선민은 애굽에 그대로 살면서 예 수를 믿기에, 마귀는 우리 삶의 주변 어디서든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수 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24:24).

 

24:24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의 제자일 지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26:33-34, 13:2).

 

26:33-34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 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사단은 가정, 집안에도 역사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불화하게 하고, 가 장 가까운 식구를 통해서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누구를 통 해서든 틈만 있으면 역사하여 믿음 을 파괴하고 신앙을 넘어뜨립니다 (4:26-27, 5:3) 가까운 친구, 이 세상의 온갖 유혹과 죄악, 불의함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함은 말할 것 도 없습니다.

사단의 집중적인 공략은 나를 통 하여 나를 넘어뜨립니다. 구약의 애 굽과 바로는 내 안에 있습니다(15:11-18).

사단은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에 나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바로처럼 싫어합니다. 사단은 교회가 잘되 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을 허는 여우처럼(2:15), 사단은 에덴동산을 파괴 하듯 마음의 에덴동산, 가정의 에덴 동산, 교회의 에덴동산을 파괴하려고 합니다(3:1-2).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모세를 대 적하고 원망하고 당을 짓고, 누나와 형님도 모세를 넘어뜨리려고 하듯이, 오늘의 교회에서도 사단은 주의 종 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안팎으로 수 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더욱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가까이하고, 교회에 뿌리를 든든히 내 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회복하며, 교회를 통하여 미래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 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 다

2. 내 주의 교회는 천성과 같아 서 눈동자 같이 아끼사 늘 보호하시 네

3.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 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 다

4.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생활과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좋아합니다

5. 하늘의 영광과 베푸신 축복이 진리와 함께 영원히 시온에 넘치네

(찬송가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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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열쇠의 비밀 마 16:13~16:20

 

기독교 서적분야에서 한때 베스트 셀러였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있습 니다. 그 책이름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가지 이유' 그런 책입니다. 교회 안 다니 던 사람이던 다니던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이유, 일흔 일곱가지 있답니다. 이 책은 사십대 이후에 예 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 만재 선생께서 신세대들 젊은이들에 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 놓은 책입니다. 일흔 일곱가지 이유를 상세하게 다 말씀드릴 것은 없고요 분류해서 보면, 간추려 볼 때 다섯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우선 인상이 시끄럽고 유난스럽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꼭 거리에서 노방 전도를 한다고 북을 치고 말이지요. 또 뭘 이렇게 교회 에 나오기만 하면 그대로 붙들고

"어디에 사느냐? 이름이 뭐냐? 직업이 뭐냐? 식구는 몇이냐? 결혼은 몇 번이나 했냐?"

별것 다 갖고 물어보는데 아주 질색이에요. 아주 너무 유난스럽게 이렇게 나오 기 때문에 '에이 겁이 나서 교회 못 나가겠다.' 그런 얘기고요.

두 번째는 교회생활 한다는 사람 들이 집안 살림을 전혀 신경 쓰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또 문제예요. 그래서 교회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이 더 가정생활이 좋아야 하겠는데 소망교회는 빼고…… 그렇게 좀 문제가 있어요. 이게 문제가 많아요. 열심히 믿는 사람일수록 집 안에 대해서 충실치 못하다. 아이 들은 문제아가 되고 남편들은 밖으로 나돌고 그리고 부부싸움이 잦고 뭐 소리가 나거든요. '도대체 이렇게 교회에 나가면서 가정과 자기생활에 불충실하다. 내 이 꼴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겠다.' 이런 것들이 교회 걸림돌이 되고.

또 하나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이요. 교회 오자마자 아직 믿음이 생기기 전에

"여전도회 나와라. 구역예배 나와라. 남선교회 나와라. 봉사하러 가자."

그러면 이 사람이 지쳐 가지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이 자라는 것과 이것이 병행을 해야 하 는데 그만 이런 외적 일에 대해서 너무 강요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다 는 거예요.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 하는 얘 기고요. 또 한번만 빠져도 당장 찾아와서

"왜 안 나왔느냐?"고 그럴 수도 있지. 그것을 따지면 참 힘들 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배타적이고 고리타분 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잘 났다고 그러고 착한 사람인양하고 이렇게 된다는 거요. 그리고 먼저 믿었다고 해서 무슨 큰 벼슬이나 하 는 것처럼 뒤에 온 사람 무시하고 말이에요.

"그것도 모르냐?". 여러분 그것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믿었다고 성경구절도 좀 알고 찬송 가도 좀 잘 부른다고 해서 처음 와 서 어리둥절한 사람을 이렇게 해서 는 안되죠. 그래서 제가 성경 읽을 때도 꼭

"신약 몇 페이지 찾으세요."

왜요? 그냥 호세아 몇 장하 면 알 수가 있나? 호세아 몇 장이 어디에 들었는지 그러나 믿는 사람 은 잘 아나 오래 믿은 사람은 처음 믿는 사람은 모르는데 이럴 때는

"구약성경 몇 면을 보십시오."

하면 페이지를 찾으면 되잖아요. 어쨌든 간에 '먼저 믿었다고 되게 잰다'는 거예요. 이게 참 힘들다고. 뒤에 나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뒤에 나오는 분들이 '교회 가 기 싫더라. 잘난척하는 사람들 보 기 싫어서' 그런 얘기고 자기들만 다 의인이고 세상사람은 다 죄인인 것처럼 다 몰아 치는데 이런 것들이 거슬린다고 합니다.

다섯 번 째는

"교회와 세상이 별다를 뜻이 없더라."

하는 얘기입 니다.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 지더라. 왜냐하면 교회에서도 보니 까 학력, 신분 따라 대우하고, 경쟁 심 많고, 공명심 많고, 자기 이름 내 려고 하고, 시기, 질투가 많고, 돈으 로 사람을 평가하더라. 그래서 저 희가 결혼식을 한다든가 할 때 절대 돈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똑같이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화분 딱 두개 놓고 그 대로 할 것이지.

"우리는 돈이 많 으니까 화려하게 하고 싶습니다."

안돼요. 이 교회에는 그런 것 없어 요. 교회에 들어선 이상에는 있고 없고, 가난하고 부하고, 세상에서 높 고 낮고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여 기는 똑같아야 되는데 이렇지 못하 고 이걸 세상의 신분대로 또 돈 있 는 대로 특별하게 대해주고 이런다 고 하면 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거슬리더라'합니 다. 그래서 '예수는 좋으나 교회 가기 싫다.'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 왜 나왔다고 생각 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은 예수님께서 귀한 교훈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쭉 가르쳐 나가다가 그 교훈의 클라이 맥스에 도달합니다. 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주시는 아주 소중한 말씀 입니다.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말이 나 오는데 지금도 이 도시가 있는데요.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 이 중동지구를 지배하는 군사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번영 지입니다. 거기에 로마 사람들의 군사령부가 있어요. 지금도 그때의 지어 놓았던 건물들이 있습니다. 이 로마의 그 어느 부분을 옮겨놓은 것 같은 그럼 시설들이 원형극장도 있고 다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 군 인들이 여기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 어요. 그 로마 군사기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한번 가 볼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제자 들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 들이 이 길로 지나가며 이 로마 사 람들의 그 군사기지를 보고 그 군인 들이 훈련하는 모습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 이런 걸 볼 때 약소 국가에 사는 사람들, 피지배국가에 사는 이 소수민족으로 볼 때에는 참 부러워죽겠거든요. '우리는 언제나 나라가 독립하나? 언제나 우리는 이렇게 큰 소리를 치며 살 수 있을 까?'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 유대 나라는 불쌍해요. 빼앗기고 짓눌리 고 약탈당하는 거요. 그리고 남의 나라 군사들이 와서 제멋대로 자기 나라처럼 이렇게 휘젓고 돌아가는데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침 을 흘린 것 같아요. 부러워하는 마 음으로 ', 참 좋다. 어떻게 우리 고 저럴 수 없을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자유함을 얻고 정권을 회복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러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 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묻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열 세 사람뿐입니다. 열 두 제자를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 물 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 을 할 때 고백하는 순간 여기서 결정적인 역사가 창조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창립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여기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초라하게 보입니다. 적은 무리요 하찮 은 사람들같이 보이지만 거기서 역 사가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의 역 사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기원이 시 작이 됩니다.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그런고로

"주는 그리스도시 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이 말 한마디, 이 고백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건립이 되고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 오늘 본문 을 자세히 읽으면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고 교회와 하 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베드로와 천 국열쇠"

이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들이 모여서 오늘의 복음 을 이루고 있습니다.

, 이제 핵심은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주제는 천국열쇠입니다. 오늘 이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국열쇠 이거 무슨 뜻입니까? 천국열쇠라고 하는 말의 개념은 먼저 는 이 천국문제가 결코 심리학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무슨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고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인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때 좀 편안하게 일도 잘 되고 누가 다 좀 안정이 되면은 '여기가 천국이 다.' 그래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따위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 떤 분은 그런 얘기도 합디다마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저 시골에 계 신 분이 한번 우리교회 와서 큰 예 배당에서 많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오늘 같이 이렇게 좋은 성가를 듣고 하는 말이

"여기가 천국이구먼."

그럽디다만은 여러분은 그걸 못 느끼죠? 정말이에요. 우 리는 때때로 이렇게 너무 감격하고 은혜로울 때 여기가 천국이다, 가정 이 천국이다, 내 마음이 천국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마는 오늘 성경말씀은 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천국은 종말적이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 천 국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이요 원리요 중심이요 획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천국이 열쇠다'하는 말은 결코 천국 을 건설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혹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천국을 건설하라. 천국을 만들어라."

뭐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께 서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천국은 들어가는 것이지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천국 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요. 이걸 잊지 말아 야해요. 그런고로 천국은 전파되는 것이지 내가 천국을 건설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절대로 그런 일이 아니에요. 이루신 천국을 전파하는 것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들어간다는 것 거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요.

또 하나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 문제 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 천국 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도덕이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그의 의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좋은 일 많이 해야 하고, 적선을 해야 하고, 고행도 많이 하고, 명상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 고 그래야 어느 수준에 도달한 다음 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듯이 말이죠. 그렇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마는 예 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에요. 천국열쇠는 열쇠 가진 사람만 들어간 다 그 말이요. 천국열쇠는 딱 하나 뿐이요. 이걸 가지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14층 아파트 꼭대기 에 사는데 어느 날 밖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차에서 내려 가지고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엘리베이터 가 마침 고장수리! '아이구 큰일났 구나!' 무릎이 아프지만 어떻게 하 겠어요. 걸어서 헐떡헐떡 걸어서 14층을 간신히 올라갔습니다. 올라 가서 문을 열려고 열쇠를 찾는데 열쇠가 없어요. 차에다 두고 왔어요. '이런 낭패가 있나?' 이거 분명히 내 집이지만 열쇠 없다고 들어오지 말래. 안 그렇습니까? 열쇠 없으 면 그만이예요. 그래서 답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두들긴다고 되겠 습니까? 부신다고 되겠습니까? 호령을 한다고 되겠습니까? 오로지 열쇠만 필요한 거예요. 그것도 자 물쇠에 맞는 열쇠, 그거 하나만 필 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걸어서 내 려왔습니다. 내려와 자동차에 가보 니까 자동차에도 열쇠가 없어요. 이게 어디로 갔나 보니까 주머니에 그대로 있어요. 여기 웃는 사람들 다 경험했어요 보니까. 그러나 중 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내 집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맞는 열쇠가 없으 면 못 들어간다 그거예요. 그러나 열쇠 가진 사람이면 도둑놈이라도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 니다. 그런고로 주님 앞에 갈 때는 바로 이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는 거 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가 운데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그런 말 씀이 있습니다. 어떤 때 왕의 아들 잔치가 있었다. 왕은 기뻐서 사방 의 사람들에게

", 내가 아들의 잔치를 하게 되니, 내 아들 잔치가 있 으니 백물을 갖추어 놓았으니 와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했더니 저마다 오지 않았대요. 나는 내가 할 일이 많고 밭을 샀고, 소를 샀고, 나도 장가를 갔고, 나 안 간다고 거 절을 하더라. 왕이 섭섭해서 그 다 음에

"산으로 다니면서 모조리, 누 구든지 병신이든 뭐든 상관없다. 다 불러 오라. 그래서 내 집을 채 워라."

손님이 없으면 이것 잔치는 낭패거든요. 내 집을 채워라 그래 서 채웠답니다. 주인이 마지막에 나와서 그거 다 보고 기뻐하게 되는 데 보니까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옷들이 다 좋지 않았거든요. 2000년 전 에 옷이 오죽했겠어요? 그러니까 잔치를 할 때 만일에 그냥 손님들 오게 하십시오 하게 되면 분위기가 영 엉망이 되니까 그래서 이 손님을 청하는 주인집에서 예복을 보냈어 요. 보내서 이것을 입고 오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예복 을 입고 왔는데 오직 한 사람은 예 복을 안 입었더랍니다. 왜 안 입었 을 것 같습니까? 내 옷이 더 좋으 니까…… '주인이 보낸 저 옷보다 내 옷이 더 좋다.' 그런 생각을 해 요. 옷 자랑하느라고 안 입고 요새 말로 개성있게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아주 엄 하게 책망합니다.

"바깥 어둠에 내 어 쫓으라. 지옥으로 떨어뜨려라.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렇게 말 씀하십니다. 전 그런 생각을 합니 다. '아니 잔치에 와서 먹으라고 초 청을 할 때는 언제고 옷 좀 안 입었 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벌을 해야 하 나?' 여기에 신학적 의미가 있는 거 예요. 자기 의를 가지고 나오는 건 안돼요. 주인이 보낸 의의 옷을 의 롭다하는 그 의의 옷을 입고 나와야 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열쇠입 니다.

그런데 오늘 분명히 생각해야 됩 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 이것이 열쇠요. 이 고백과 함께 교 회가 설립이 되고 천국의 열쇠가 주 어집니다. 이 믿음이 아주 중요합 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를 아시죠? 창세기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합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영 적으로는 이미 다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방주를 만들고 이 모든 사람 들을 다 진멸할 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 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의로우냐, 선하냐, 선한 일을 많이 했느냐? 그거 하나도 묻지 않아요. 오로지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 살았 어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 방주의 의미가 있습 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에 의미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신앙이 뭡니까? 나는 복잡하게 생 각 안 해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선행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하나님이 아시지 난 알 바가 아니 요. 제가 40년 목회 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회 출석 잘해야 되요. 교회 출석이 뜸해지기 시작하면 시험에 빠져요. 틀림없이…… 교회에 나 오면서 은혜 받고 교회에 나와서 깨 닫고 교회 나와서 여기서 깨닫고 사 업도 하고 여기서 깨닫고 화목도 하 고 여기서 깨닫고 결심하고 원수도 사랑하고 이렇게 되더라고요. 열심 히 교회 나와야 해요. 시간 시간 이게 방주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보면 이 교회를 등한 시 여겨요.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졸다가요. 그래서 공치는 날 도 있죠. 그래도 나와서 졸아야 되 요. 졸아도 나와서 졸아야지. '오 늘은 어떠니까 분위기가 어떠니까 안 나온다.' 그러기 시작하면 시험에 빠져요. 이것은 사회학적 통계가 나와 있어요. 넉 달만 안 나오면 완전히 Non Christian이 되어 버려 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이걸 깨 닫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하루도 안 나가면 안 된다. 한 시 간도 빠지면 나는 내 영혼은 죽는 다. 이것이 교인이요. 방주에 들어 가야 구원받는 거지요. 내가 의로 워서 내가 어째서 구원받는 것은 아 니지요. 이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자세히 보면 도대체 이 천국열쇠 천국에 들 어가는 이 열쇠가 아주 신비로운 의 미를 가졌어요. 이건 뭐 책에 얼마 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는. 그러나 그 신비로운 말씀을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요점만 몇 가지 말씀합니다. 문제만 제시 합니다.

첫째는 이 열쇠는 축복이라는 거예요. 오늘 이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입니다."하니까 주님 말씀이

"네가 복되다."그럽니다. 복입니다. 복이 뭡니까? 하나님께로 주어지는 은사를 말합니다. 내 노력으로 얻 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건 복입니 다. 예수 믿는 것 큰 복입니다. 꼭 믿어야 할 사람인데도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못 믿어요. 제가 목회 하면서 임종하는 사람들 을 많이 만나잖아요. 만나면 그저 안 믿는 사람 마지막이라도 붙들고 전도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간절 히 기도하면서 부탁을 합니다.

"예 수 믿고 구원받으십시다."

그러면은 좀 가만히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안 믿어."

그러고 죽어요. 참 이거 어 떻게 하면 좋아요 이거. 그럴 때는 며칠 동안 어떻게 기분이 나쁜지 몰 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거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또 그 런가 하면 어떤 분은 그렇게 시원케 믿은 것 같지 않았는데 임종하는 순 간에 하늘을 바라보며 환한 얼굴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저기 하얀 가마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고 죽잖아요. 이게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게 복이지 이게 자기 노력으로 되 는 겁니까 이게?

그런고로 말씀이에요. 천국열쇠 요? 이건 축복입니다. 내가 복이 있다. 여러분은 복된 사람인 걸 알 아야 되요.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이유가 있어요. 교회 안 나온 사람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 끝 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믿는 사람 은 믿어요. 믿어지어야 믿지 안 믿 어지는데 어떻게 할거요? 무슨 수 로 믿게 할 수 있어요? 그걸 알아 야 합니다. 이건 큰 축복이라는 것 을 알아야 되고요.

또 성령으로 말미암았어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혈육이 알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알게 한 것이다. 즉 성령이 너를 감동해서 내가 그리 스도임을 알게 했고 믿게 했다. 성 령의 역사지 네 지식도 아니고 네 경험도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여기에 신비가 있고요.

또 한가지는 교회와의 관계입니 다. 이제 교회를 세우리라. 오늘의 역사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네가 구원받는데 머물지 않고 이제 계속해서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될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의 신비. 이것이 천국열쇠요. 또 베드로 그 는 증인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 뿐만 아니라 그는 중요한 의미를 가 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증인 그에 게 천국열쇠가 있는 것이에요. 복 음을 들어야 구원을 받으니까. 너 는 이 천국열쇠를 가지고 전하는 엄 청난 권세와 책임을 맡은 거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더욱 신비한 것은 하늘과 땅의 역사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 늘에서도 맬 것이요. 참 중요한 말 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평생 목 회 하면서 당회를 통해서 누구를 책 벌하는 일을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하려고 합니다. 왜요? 땅에서 매 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니까요. 교 회의 권세가 천국열쇠와 같은 의미 를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 요. 교회에서 풀면 풀리고 교회에 서 매면 맨다는 것이에요. 땅과 하 늘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깊 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나온 목적이 뭡니까? 교회를 무엇으로 알고 나오셨습니 까? 친절을 원하십니까? 친절하 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떻습니까? 그 악수해 주는 것을 원하십니까? 저 악수를 다 못합니다마는 그러나 그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끔 어 떤 때에 우리 여집사님들이 저를 만 났어요. 저 교회 앞에 만나 가지고

"목사님, 제가 누군지 모르시죠?"

 

"저는 모릅니다."

"저 소망교회 집사인데 모르세요?"

 

"모릅니다."

제가 한마디합니다.

"자고로 나는 여자 얼굴을 똑똑히 안 봅니다."

그러나 한마디합니다.

"내가 알고 모 르고가 뭐 그렇게 중요하오? 그리스도가 알면 되고 하나님이 아시면 되고 이게 중요한 거지."

곽목사가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때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여러분 이 교회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예요. 천국열쇠를 내가 네게 준다. 이제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 오늘을 사는 거예요. 언젠가라도 이 열쇠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갈 것이에요. 천국에 가는 티켓을 받아 가지고 오늘을 사는 거예요. 이것 이 그리스도인이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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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누구라 하느냐? 16:13~16:20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첫 번째로 너희들은 왜 나를 따라오느냐?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찾기 위해서 나를 쫒아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첫 질문 이후 3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3년간 함께했던 제자들에게 막바지 질문을 하고 계신 겁니다. “제자들아, 3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구나.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지?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행동하는 것을 너희가 보았지? 이렇게 나와 함께한 세월이 3년이나 되었는데, 그럼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너희들은 알고 있느냐? 너희들은 왜 나와 함께 있고, 나의 뒤를 따라왔느냐? 너희는 나와 계속 함께할 용의가 있느냐?” 예수님은 자신의 생이 죽음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 때에 제자들에게 무언가 확인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은 떠나고 제자들만 홀로 남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없이 남겨진 그들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근심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만을 보면서 뒤따랐습니다.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귀신이 말 한 마디로 쫓겨났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치유의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이런 기적의 일만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로 사람들을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이야,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참 자랑스럽구나. 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건,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이야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보고 따라온 제자들이, 과연 고난 받는 그 길에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난의 길에서도 담대해 질 수 있을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일관성 있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들을 사명의 사람들로 세울 수 있을지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이 땅에, 이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믿는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험악했습니다. 당시 세상은 종교적 기득권자이고 정치 권력자인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아해야 할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별 볼일 없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들에게 맡겨놓고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인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베드로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넘치도록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7)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잘했다 칭찬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의 고백을 들으니 내 마음이 참 기쁘구나. 그러나 이것은 이성과 지성의 생각으로 나온 고백이 아니다. 이 고백은 이 땅의 누구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생각은 하늘의 생각이고, 하늘의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네 마음 속에 깨우쳐 주신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시적인 고백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지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성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씨름하다 보면 이성적 지식을 뛰어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잘 모릅니다. 나중에 되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어떻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하는 감격스러운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아주 명백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1618절의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요나의 아들인데 베드로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시며,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음부의 권세란 하데스의 문들의 권세’, 다시 말하면 지옥의 문들의 권세입니다. , “죽음의 문들의 권세가 교회의 생명을 막을 수 없고, 교회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가 생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신앙 공동체가 생긴다는 사실을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마지막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교회를 만드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인간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온 천하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 위험했을까요? 당시 기득권자들의 방해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권력자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은밀히 물으셨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어디에서 하셨을까요?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3)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하는 지방이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인 헐몬산 옆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당시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왕은 분봉왕 헤롯 빌립이었습니다. 그는 이 도시를 화려하게 재건하려는 꿈을 품고, 로마 황제였던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곳을 가이사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빌립과 합하여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칭했습니다. 전형적인 권력자의 모습입니다. 더 큰 권력자와 합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황제와 함께 있으며, 그 권력과 친분이 있음을 나타내면서 더 큰 권력을 붙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정치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주님 앞에 나의 전부를 내려놓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황제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냐?”라고 물으시며 제자들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과 지혜, 능력을 그 속에 다 걸기 때문에 쉽지 않고 굉장히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사실을 알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금단의 열매를 예수님께서 슬슬 흔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안식일 법, 정결 예법을 어기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법, 생명을 회복하는 법, 사람을 세워주는 법,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위하여 때로는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정결 예법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나름의 힘은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힘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면서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권력은 그와는 다른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권력 앞에서 결단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독재 국가들은 신앙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독재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하늘에 전지전능한 통치자가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배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권력자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력자들과 독재자들은 신앙을 두려워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왜 그렇게 핍박합니까?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고, 동시에 어렵고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예수님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근심이 있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강하고 바르게 세우지 않으면 남겨진 이들이 굳게 서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많은 근심과 많은 문제들을 좁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지혜를 배워야 됩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질문을 다 멈추고 이 궁극적인 질문 앞에 서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실타래처럼 꼬이고 엉켜있는 많은 문제들, 고민하고 고뇌해도 해답이 잘 안 보이는 인간관계, 내 직업과 내 미래의 불확실성이 나를 곤고하게 만들 때 다시 궁극적인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실존을 걸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모든 근심의 문제들을 내려놓고 이 자리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세상의 다른 문제들을 이겨 나갈 수가 있고, 때로는 그 모든 근심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첫 번째는, 3인칭의 객관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들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 이와 같은 질문에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14절의 말씀입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태복음 16:14)

 

당대에 위대했던 인물들을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시대를 비판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푼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아합왕 때에 바알 신을 섬기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하여 승리했던 용감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죄악을 가슴에 품고 통분히 여겨 눈물 흘렸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는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예수님은 더 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나가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고, 너희는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꾼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머니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아버지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친구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그때부터 내 신앙 속에서 역동적인 힘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묻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말고, 다른 사람의 생각 말고 네 실존 전체를 걸고 대답해 보아라. 네가 생명을 걸고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 대답해 보아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16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이것은 모든 것을 건 최고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이 메시아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 자기의 삶 전체를 걸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청중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 종교와 교리, 명예와 권력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모두 다 내려놓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이고, 예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인생의 중심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겠다라는 당찬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축복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 베드로가 이와 같은 고백을 했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소리가 좋긴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이 가슴 아프지만 여기에 초조해하거나 내 삶을 거기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분명 좋은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문, 잡지, TV, 인터넷 수많은 소문들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차단시키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우리의 인생이 단순해집니다. 그래야 인생이 굳세집니다. 우리 생의 목표가 명백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실존을 건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사랑과 정성을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소망입니다. 나의 능력이고 나의 지혜이고, 나의 구원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사이 여론조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선거의 계절이 오면서 정치인들은 여기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심을 사기하기 위해서 악한 말과 거짓말, 욕설을 여기저기 배설물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래야 자기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들쑥날쑥하는 변덕스러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기업가와 교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곳에 딱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적 고통과 혼란은 바로 일관성의 부재에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는 최후의 청중, 최고의 청중, 유일한 청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사라지시고 안 계셔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이 확인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온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왜 교회 나오느냐? 왜 예배드리느냐? 너는 예배드리면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 모든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진리이십니다. 하늘의 보화시고 하늘의 지혜이십니다. 여기에 내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동안 이것저것 염려하며 근심했던 것들을 잘라낼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내게 주신 삶을 어떻게 누려야 될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청중이고, 최고의 청중이고, 유일한 청중이신 예수님께서 내게 미소 짓고 계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 둘씩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모하는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앞에 서서 담대하게 대답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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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페트라(반석) 16:13~16:20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인생을 논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입니까? 어제 어떤 신문사에서 기자가 와서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사람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생은 무엇입니까?”이런 말을 처음으로 질문을 받으니까, 그래서 저는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두 가지로 봅니다. 한 분야는 인생을 허무하게 보고, 또 한 분야는 인생을 고통과 괴로운 인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한평생은 정말 허무한 인생이요, 괴로운 인생입니다. 찬송가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산을 오르는 것에, 광야를 헤매는 것에 인생을 비유합니다.

 

일본의 샐러리맨 한 사람이 30년 동안 자기의 삶을 정확하게 하나하나 기록을 했습니다. 30년 동안 10,950일인데, 잠자는 시간이 3,505일이었고,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불평불만을 하면서 고민하면서 살았던 것이 1,596, 담배 피우는 시간이 1,140, TV를 본 날이 775, 남의 흉 본 것이 442, 술집에 다닌 것이 266, 도박판에서 258, 밥 먹고, 그리고 여자들은 화장하고 인터넷, 파티, 관혼상제, 다 별 게 없더라는 겁니다. 상당히 성공한 사람도 그의 인생이 별것 없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허무하게 보았습니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생명의 많이 연장 되겠지만 연장되면 할 일이 무엇이냐? 무엇을 할 것이냐?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도 집에 들어가면 잠시 TV 보고, 그리고 밥 먹고 자고, 또 아침에 일어나서 빨리 빨리 준비해 가지고 나오고, 또 시간이 좀 있으면 동물의 왕국 보고, 혹시 K1이나 없나 보고, 그 외에는 별로 볼 것도 없고, 어디에 볼 것이 그렇게 많습니까? 뭐 대단한 일이 있습니까? 별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천하에 가장 지혜로운 왕이었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많이 받은 왕이었지만 그도 역시 별 것이 없었다고 그럽니다. 전도서 211절에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무도 많이 심고, 양떼와 소떼를 많이 두었고, 은금과 보화를 많이 두고, 온 세계 왕들이 찾아오니까 세계 왕들과 많은 만남도 가졌습니다. 처와 첩들을 많이 두기도 하고, 은사가 많아서 글도 많이 쓰고,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다 헛되더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겁니다.

 

제가 이번에 몽골에 가보니까 몽골에도 석유가 나고, 세계 여섯째 가는 지하자원을 보유한 나라랍니다. 전 세계 강대국들이 얼마나 몰려오는지 세계의 부자들이 기업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몇 백 년을 가난하게 지내다가 신흥 부자들이 엄청납니다. 한순간에 몇 천만 불, 몇 억불 버는 사람이 막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집들이 울란바토르가 건축 붐입니다. 건축하는 어떤 공장과 같습니다. 거기에 있는 분이 그럽니다. “목사님! 이 사람들 집에 초청을 받아서 가면 집에 수영장을 거의 다 만들었습니다.” 아파트 안에다가 수영장을 만들었답니다. 얼마나 크니까 수영장을 만들겠습니까? 집안에 바가 다 있습니다. 세계 진귀한 것 가져다가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좋은 차를 굴리고, 화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수영장을 집에 두면 얼마나 습하고, 또 수영장 막상 해 놓으면 자주하겠습니까? 몽골 같이 추운 나라에 수영장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더운 나라에서 하는 짓을 공연히, 방안에다 수영장을 하면 좋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중국 사람도 지금 경제가 성장해서 엄청난 신흥 부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길을 가는 겁니다. 대단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벌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한 끼 밥 먹는데 세계 제일 비싼 식사가 중국에서 막 나온답니다. 한 끼에 2,500만 원짜리가 나옵니다. 하룻밤 자는데 5천만 원, 6천만 원 들어가는 호텔이 생깁니다. 6천만 원 주고 자나, 2,500만 원짜리 먹으나 무엇이 다릅니다. 자고 나면 그만인데, 아무리 비싼 2,500만 원짜리도 다 먹고 나면 똥 되는 거지 그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별 것이 있겠습니까? 자기는 그게 속에 금덩어리가 들어간 줄 아는데 사람 속에 들어가면 다 별거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밖에서 돈 벌고 성공하고 모두 힘이 있으면 다 그런 일에 눈 뜨고 대단한 줄 알고 가는데, 얼마 안가서 깨닫는 것은 하나입니다. 허무함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예수 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의 눈에는 그런 것만 보이고, 그런 길만 보이지만, 가보면 결국 허무함 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서 질문하는 것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선생님을 어떤 분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아!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어떻게 믿고 따라 오느냐?” “.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나의 구주이십니다. 당신은 온 인류의 메시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해 주신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다고 약속해 주신 당신은 바로 메시야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실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야훼의 아들이십니다. 당신만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며 소유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했습니다. “시몬아!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사람이 지식이 있고, 권력이 있고, 이 세상의 부귀영광을 누려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하나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딱 하나입니다. 복이 있는 것은 이 하나의 고백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는 복이 있다. 이를 내게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너는 이 하나를 알고, 하나를 믿고, 하나를 가지고 있으므로 너는 복이 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너는 너의 이름을 페트라라고 해라.” 베드로라는 말은 페트라입니다. “베드로다. 너는 반석이다. 오늘부터 너의 이름의 반석이다.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교회는 어디에 세워져 있습니까?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반석은 무엇입니까? 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은 그 사람이 반석이요, 그의 인생이 반석이요, 그의 가정이 반석이요, 그가 가는 모든 것은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석이 모여서 만세반석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허무하며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면서, 주님만이 나의 구주가 되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는 그 순간 내가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만세반석 페트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반석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만이 반석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반석이십니다. 그의 아들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그의 반석과 함께 내가 또한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귀합니까? 교회가 왜 능력이 있습니까? 인원이 많아서입니까? 재정이 많아서입니까? 교회에 무슨 대단한 분이 있어서 정치인, 권력가가 있어서 입니까? 교회가 능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힘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이 믿음 때문에 교회가 능력이 있고, 이 세상에서 오늘날까지 2천년동안 아무리 어마어마한 어두움의 세력,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음부의 권세가 있다 할지라도 이 반석을 넘어뜨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믿음으로 우리는 허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슬픈 것도 확실합니다. 괴로운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괴로운 것도 아니요, 슬픈 것도 아닙니다. 승리자는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우리 모두 허무함과 저주 아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이 믿음 하나를 가지므로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되고 영광스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한 인간의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의 만세반석은 없습니다. 누구도 반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도 진흙이요, 나도 모래요, 나도 한줌의 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콘크리트를 만들어 봐야 콘크리트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 남산에 있는 20층 외국인 아파트 무너질 때 무슨 장치를 해서 무너뜨리니까 10초 만에 다 무너집니다. 폭삭 무너지는 겁니다. 이 세상에 무너지지 아니할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너지지 아니할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무너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아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썬더씽이라고 하는 인도의 성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히말라야에 가서 많은 수양과 고행하는 분들, 힌두교도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힌두교는 처음도 끝도 인생을 고행에서 의미를 찾지 않습니까? 그래서 올라가보니까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거꾸로 나무에 매달아 놓고 다리를 묶어놓고 사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밥 먹고, 볼일도 다 거꾸로 봅니다.

 

어떤 분은 평생을 손을 들고 사는 분이 있는데, 10년 동안 손을 들어서 손이 내려오지 않는 답니다. 어떤 분은 몸에다가 나뭇가지를 뚫는 분도 있고, 저도 직접 봤습니다. 인도의 겐지스 강 유역으로 보면 수많은 사람이 바위 위에 앉아서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그곳에서 페인팅을 해서 밤낮으로, 밤에도 그대로 앉아있고, 낮에도 그대로 앉아있고, 성철스님도 똑같이 그랬지 않습니까? 고행하는 겁니다. 인생을 어디에서 찾느냐? 그런 곳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무덤에 있는 분이 있는가 하면, 또 보니 어떤 분은 굴속에 들어가 굴을 막아버리고 이만한 구멍으로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그곳에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썬더씽이 물었습니다. 굴속에 있는 분 보고 그렇게 어두운 곳에서 살면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그곳에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동굴 속에 있는 분이 말하기를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마음은 이 동굴보다도 훨씬 더 어둡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이 세상에서, 고행 속에서 의미를 찾든지 어떤 분은 성공 속에서, 물질 속에서, 인기 속에서, 쾌락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분도 너무 많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거기에 서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주제는, 똑같은 결론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다 허무함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다 무너집니다. 성철스님도 평생을 그랬지만 마지막 유언이 무엇입니까? “나는 지옥으로 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죄 안 지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렇게 고행을 했지만 결국 가는 길은 지옥을 피할 수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페트라는 없습니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반석은 없습니다. 반석과 같은 안전함, 반석과 같은 평안함, 반석과 같은 견고함, 반석과 같은 영원한 만세반석은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는 반석을 찾습니다. 우리가 숨을 곳, 피할 곳, 우리가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지만 어디에도 없습니다. 10.26때도 보면 총소리가 딱 들리니까 그 앞에 앉아 그렇게 높은 분도 어디로 숨었느냐? 화장실 밑에 가서 숨었습니다. 사람은 위기가 왔을 때, 환란이 왔을 때, 내 앞에 한순간에 닥치는 이 어려움 앞에 우리는 반석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견고한 만세반석, 페트라가 되십니다. 그를 믿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도 다 그와 함께 반석이 되어서 주님의 보호 아래 사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시편 18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리로다.” 시편 1829내가 주를 의뢰하며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내 앞에 가로 막힌 담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담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새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담을 많이 뛰어넘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담을 어떻게 넘습니까? 담을 딱 붙잡고 점프를 하면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에 서있지 않고, 담을 짚고 오히려 넘으려고 하면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짚으면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환란, 시험도 넘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 가정불화가 일어나서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여!” 하고 담을 뛰어넘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많은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가 담에 깔려 죽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담에 깔려 죽는 것은 바로 담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 없기 때문에, 페트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페트라만 있으면 넘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오늘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에서 왔습니까? 담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넘을 수 있습니다.

 

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담을 뛰어넘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8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페트라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페트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페트라 같은 권력이 있습니까? 나라가 있습니까? 지식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어느 나라에도 지상에 페트라는 없습니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편 161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교회는 피해오는 것입니다. 도피성입니다. 반석에 모두 들어오는 겁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찬송가 79) 주님이 우리의 페트라이십니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마귀 손 못대고 환란풍파 없도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편히 쉬리니 나의 반석 구주예수 나를 숨겨주소서(찬송가 439) 찬송가 어디를 불러 봐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바위가 되시고, 피할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를 품어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끊임없이 성경은, 찬송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만이 굳건한 반석이십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찬송가 539)

 

중국의 만리장성은 높이가 9미터입니다. 넓이가 5미터입니다. 길이가 4천 킬로가 넘습니다. 얼마나 견고합니까? 평지에 9미터를 쌓았으면 말도 안합니다. 어디를 거치느냐? 쌓는 곳이 다 산악을 갑니다. 설악산 같은 곳에도 9미터를 쌓았습니다. 설악산 정상 같은 곳에도 9미터로 계속 나아갑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넓이가 5미터입니다. 자동차가 두 대, 마차가 두 대 지나가도록 그 성을 쌓았으니 그 성이 얼마나 견고합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북쪽으로 밀려오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투를 막으려고 만 리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쌓은 그 민족이 오래 평안을 누렸느냐? 아닙니다. 금방 무너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이 잘못 쌓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실공사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만 리를 지키니 그 만 리를 지키는 군인 가운데는 어디에 구멍이 있습니다. 한 곳만 매수를 하니까 그쪽으로 군인들이 다 들어와 무너뜨렸습니다.

 

여러분! 견고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철통 같이 지켜도 적이 들어올 수 있는, 오늘 본문에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못 들어갈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망의 권세에 온갖 원수마귀는 능치 못함이 없는데, 아무리 막은들 한 손에 쥐고 한 손에 가시 잡고, 그렇게 막아도 소용이 없다라는 겁니다.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 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우탁의 탄로가) 막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지켜주시면, 주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면 침투한 마귀도 성경에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많은 혼란과 무질서 속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이 무너지고 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큰 재벌도 그렇게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큰 재벌이 한순간에 자살할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영원히 안 무너질 줄 알았지, 그러나 교인은 재벌이 아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평안과 감사와 승리의 삶이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권력을 안 가져도, 면서기 하나를 못해도 여러분은 안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야훼께서 여러분의 반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이어령 교수에 대해서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세례를 받는다고, 대단히 한국 교회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분은 한국 지성 1호였습니다. 최고의 지성이인이었지만, 기독교를 철학으로 수양하는 것으로 이해를 했지,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분에게 어려움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1992년에 갑상선 암에 걸렸고, 96년과 99년에 다시 재발했습니다. 가정에 큰 환란이 밀어닥쳤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이분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딸도 지식이 있습니다. 미국의 변호사입니다. 딸 있는데 아버지가 갔는데 이 딸이 눈이 어두워서 부엌에서 설거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릇이 어디에 있는지 눈까지 실명을 당하는 마지막 위기 앞에서 이 딸이 하나님 앞에 나간 겁니다. 그리고 이분이 고백을 했습니다. 이 딸이 낳는다면 나는 주님을 믿겠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정말 네가 주안에서 평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예수의 이름으로, 만세반석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눈도 뜨고, 암도 고침 받고, 이것은 우리 교회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분은 세상 지식으로는, 미국의 천하의 유명한 병원이 다 못 고친다고 하는 병이 교회에 나와서 고침을 받으니 이 얼마니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만세반석 위에 올라서려면 자기의 진흙 같은 인생을 포기해야 합니다. 지난날에 제 아무리 잘났다고 할지라도 진흙 위에서 서 있는 것이니까, 쓰레기 위에서 자랑했던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다 불태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출발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의 지성 1호가 아닌 세계의 지성 1호일지라도 우리 인간은 조그마한 나뭇잎 하나 흔들려도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반석이 될 때는 세상의 어떤 것도 이 반석 위에 있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는 없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세계를 통치하던 바벨론이 붙잡아온 죄수 노예 다니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사자가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불이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주님 믿는 믿음 위에만 바로 서면 이 세상에서 분명히 여러분은 승리합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너무 교인들도 현실과 타협하고, 뭐 그렇게 오래 살려고, 잘 사는데 목표를 두고, 건강에 목표를 두고, 세상의 엔조이에 목표를 두므로 여러분의 반석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반석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여러분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MBCPD수첩에 나온 겁니다. 뭐냐 하면 빨간 일기장입니다.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이 모두가 다 빨간 일기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트가 빨갛습니다. 빨간 것은 무엇이냐 하면 피, 증오심을 말합니다. 여기에다가 자기 미워하는 사람에게 화살을 쏘고, 거기에다가 글을 쓰는 겁니다. 가장 저주하는 글을 쓰는 겁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선생님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선생님 죽으라는 말을 9번 적어 놓은 겁니다. “가다가 교통사고 나가지고 피 흘리고 죽어라. 뒤져라. 죽어라.” 애들이 그것을 전부 쓰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없는, 만세반석이 없는, 예수가 없는 우리의 마음은 아이로부터 노인까지, 목사든 장로든 간에, 교인이든 누구든 간에 이 안에 빨간 일기장이 누구에게나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빨간 일기장이 우리 모두를 빨갛게 물들여 가고 있습니다. 증오심만 가지고 선동하고, 높거나, 낮거나, 별 수 없어 다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빨간 일기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아서 성령의 일기장이 되시고, 기도의 일기장이 되시고, 믿음의 일기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증오, 죄악, 저주, 온갖 음란과 불의에서 해방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능력은 반석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넘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 있는 교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시험 들고, 왜 그렇게 낙심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더위도 잘 타고, 추위도 잘 탑니까? 왜 그렇게 섭섭한 일이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석 위에 서지 않고, 오늘 현대인과 함께 교인들도 연약해 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나온 모든 성도들,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는 여러분, 페트라의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나왔습니다. 포르투갈 리스본 경기장에서 전 세계 1억 명이 6년 동안 인터넷으로 투표를 해서 7대 불가사의가 나왔습니다. 1번이 만리장성입니다. 대단한 겁니다. 두 번째는 멕시코의 치첸아차의 마야유적지. 세 번째 페루의 마추픽추. 네 번째 브라질의 예수 상. 그다음에 로마의 콜로세움, 요르단의 페트라, 인도의 타지마할. 옛날에 있던 이집트의 피라미드라든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라든지 이런 것은 이번 7대 불가사의에는 빠졌습니다.

 

여러분! 대단한 일입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콜로세움, 페트라, 피라미드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일은 아닙니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나라가 다 망했고, 이런 불가사의가 있는 나라치고 가난하지 않은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사는데 쩔쩔 매고, 거지가 득실득실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짜 영원한 불가사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민족이 가난한 민족 봤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 나라가 망한 나라를 봤습니까? 여러분의 생애가 그리스도를 잘 믿는 믿음의 만리장성 쌓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페트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신앙의 타지마할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여러분의 반석으로 삼으며 그를 높이고 그를 사랑할 때 여러분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를 사랑하면 여러분은 사랑의 바다에 헤엄치게 되어 있고, 그가 중심에 서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를 의지하면 그는 우리의 견고한 바위가 되시며, 그를 경외하면 한없는 부유함이 주어지고, 그에게 감사하면 세상은 천국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를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CF가 되면, 우리나라도 CF가 돈 법니다.

 

영화배우나 연예인들이 탤런트 하는 분들이 꼭 방송에서 돈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선전하면, 회사에서 받는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선전해 봐야 몇 억 주겠죠. 예수님을 선전해 보십시오. 이번에 미국에 골프 경기에 최경주씨가 나와 1등을 하면서 세계 수백 명의 기자 앞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그 신문 보고 정말 CF 진짜 잘한다.” 저렇게 말해야지, “나는 원래 연습벌레입니다.” 엉뚱하게 말하는 사람, “나는 어제 돼지 꿈 꿨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고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마십시오. 이것은 만세반석이 아닙니다.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도 만세반석 위에 부모님하고 같이 서야 부모님도 안 망하고 나도 안 망하지, 예수 떠나서 부부간에 서봐야 부부간도 모래위의 집입니다. 부자간, 형제간에도 모래위의 집입니다. 친구? 누구를 높인다라는 겁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높이고,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 있는 대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진짜 페트라입니다. 이 페트라의 신앙으로 살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