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 5:1-12 ·
사람의 사람됨은 그 소유에 의해 서 평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고 못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천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의 지식에 의해서 평가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많이 안다고 그 사람이 높은 인격의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흔히 불학무식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람대로 높은 격의 사람임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지위에 의해서도 평가할 수 가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평가하게되는 평가 기준은 극 단적으로 둘이 있다고 늘 생각됩니다. 하나는 그가 무엇을 즐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쁨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게 첫째 고 둘째는 어떠한 성격의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사람은 평가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욕 구 충족에 불과하는 그런 생리학적 기쁨을 추구하는 그런 정도의 인간 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동물성을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은 아닙니다. 동물적 욕구 충 족 그것만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그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울이는 그러한 인간을 흔히 저질 인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게 생리학적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실현의 세계에서 기쁨을 얻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 기쁨입니다. 공부하는 기쁨, 깨닫는 기쁨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며 그 합리적 인 진리 속에서 기쁨을 얻는 이러한 철학적 인간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신학적 기쁨을 즐기는 그러한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적어 도 그의 생각과 뜻과 이상과 꿈은 항상 하나님의 세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하나님의 뜻 그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며 그 속에 있는 나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된 정 체를 기뻐하는 겁니다. 계속 하나 님의 역사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나 된 것을 계속 깨달아 가면서 기뻐하는 이런 신학적 기쁨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어차피 고난을 당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필수입니다. 필연입니다. 문제는 그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흔히 페러독스, 역설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건 역설 적인 겁니다. 핍박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복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어째서 핍박 없는 세계가 복 이 있는 것이지 핍박당하는 자가 복 이 있다는 얘깁니까? 이것이 성경 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운명이요 그리스도인 의 행복입니다.
핍박이라는 말은 원문대로 자세 히 살펴보십시다. 이것은 천재가 아닙니다. 인재(人災)를 말하는 겁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 그걸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진이 났다 전쟁이 났다 그거 핍박 아닙니다. 핍박은 어디까지나 인재요 또 하나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을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잘못 없이 참으로 100%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 이것이 핍박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 핍박은 과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점점 죄어드는 고통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만이 아니 라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겁니다. 심령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다. 이러한 고통, 계속되는 고통, 이걸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복되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가 복되다. 왜 요? 여기서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한 번 분석하면은 베드로전서 2장 18절 이하 에 분명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다.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우리라, 다른 말로 은혜롭다 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이 뭡니까? 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는 부당한 고난입니다. 내 잘못도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 을 당한 결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고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가령 옆집사람이 불조심하지 하지 않아서 내 집이 불타버리는 거예요. 그 애매한 거죠. 나는 잘못이 없는 데 저 집에서 잘못하므로 내 집까지 타 버릴 때 이거 애매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운전하시다가 가끔 애매한 일 당하죠. 나는 정당하게 운전했는데 이 정신 빠진 사람 때문에 내 차가 찌그러지잖아요. 아 이거 속상합니다. 더구나 새 차면 더 마 음이 아픕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 야 하나? 이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물어 보겠습니까. 도대체 이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차 찌그러진 다음에 무슨 복을 줄렵니까? 말 됩 니까? 이게 애매한 고난이라는 거 예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면 은혜가 됩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내가 잘 못해서 내가 당하는 고난, 어쩌면 모든 고난이 대부분 이런 것이지요. 아니라고 변명하지만은 깊이 생각해 보면 원인은 내게 있었습니다. 내 잘못으로 내가 고난 당합니다. 내 가 잘못해서 내가 병듭니다. 내가 잘못해서 사업이 잘못됐습니다. 원 인은 분명 내게 있습니다. 자 이럴 때 이거야말로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깊이 생각할 문젭니다. 이런 따위의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꼭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자원적이요 자발적이요 선택 적이란 겁니다. 피해가다가 도망가다가 어떻게 하든간 면해보려고 요 리저리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이 당하는 거 그건 아니요. 약해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몰라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어서 당하는 게 아닙니다. 일부러 스스로 자취하는 그러한 고난의 성격을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 아무래도 이것을 위해서는 가장 대표적인 예 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뭐 모든 고난이 다 그러했습니다만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사건 하나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건 뭐냐하면 십 자가의 고난은 불가피 한 게 아니라 는 거죠. 그것은 억지로 당한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든지 아니 당 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원 해서 스스로 자취해서 당했다는 것 을 성경은 강하게 강하게 거듭거듭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 자기를 죽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 알고 계십니다. 유월절 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만 않았더라 도 십자가를 면할 수 있구요, 또 하 나,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했습니다. 늘 출입하는 성전 그 더러워 진 거 늘 보았습니다만은 오늘 따라 와서 그것을 정면적으로 충돌하면서 성전을 깨끗이 합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굴을 만드느냐? 이렇게 대결했는데요 이 사건만 없었더라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 있을 겁니다. 또요, 빌라 도 재판 앞에서 지금 재판을 받으시는데 보세요. 빌라도는 어쨌든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또 특별히 능력이 있고 인기도 높은 분이 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무죄 석방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거짓말도 아니요 사실, 진실된 말 한 마디만 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를 안 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제사장과 바리새교인 저 사람들이 나를 질투해서 여기에 끌고 온 겁니다. 거 사실이 그래요. 이 한 마디만 하셨더라도 예수는 십자가를 안 지실 수 있었는데 침묵합니다. 입을 딱 다 물고 그대로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합니다. 빌라도는 이해할 수가 없어 서 마침내
"이 사람을 보라."
그 유명한 말 아닙니까?
"Behold this man"
이 사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서른세살에 왜 죽으려고 하느냐, 능력도 많고 인기도 많고, 아 이런데 서른세살 젊은이가 왜 억울하게 죽으려고 하느냐는 거죠.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 난입니다. 남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만이 아시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바로 이런 고난이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고난 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난 당한다 당하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격이 문제 요, 그 의미의 문제요,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슨 목적으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복된 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받은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복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에게 왜 복이 있다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악으로부터 핍박당함으로써 내가 의롭다 는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잘살면 그 사람 옳은 사람 아닙니다. 악인으로부터 칭찬 받으면 그 사람 결코 선한 사람 아닙니다. 이같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서 손해 안 볼 수 없어요. 의롭게 살면서 핍박 없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핍박은 당연한 것이에요. 어쩌면 핍박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옳고 내가 바르게 살고 개가 진실함을 증명하게 되는 것에요. 악한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으려고 해선 안됩니다. 가끔 우리의 마음을 좀 섭섭하게 하 는 일이 있습니다. 요새 이 현대에 와서 너무 여론에 치우쳐요. 여론 이 어떻고 몇 %가 어떻고 몇 %가 어떻고…… 언제부터 여론 듣고 합니까? 지도자란 여론에 끌리는 것 이 아니에요. 유명한 지도자 처칠 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백성으로부터의 칭찬은 2년 후에 받도록 하 라"
지금 당장 백성들에게
"자 이럴 까요? 저럴까요?"
물어가면서 할 것입니까? 여러분 아시는대로 한때 군사 독재자라고 그렇게 성토를 하 고 온 백성이 욕을 하더니 이제는 일등 대통령이라며 그 분이 잘한 것이지요.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오늘 와서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있잖아요. 지도자란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당 석에서 지지받고 아우성 치고 만세 불렀다고 그런 소리나 듣기를 원해 서는 안되는 거예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되요. 당연히. 어쩌면 핍박을 받아야 영웅이에요. 뿐 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 유명한 예술가 유명한 철학가들 보세요. 당대에 지지받은 사람이 없어요. 제 가 실례가 되서 어느 철학가라고 말 은 안합니다만은 저 60년대의 그 철학가가 온 세상의 많은 학생들이 열 심히 읽는 책이었어요. 그런데 내 가 어느 책을 보다보니까 그분이요, 당대에는요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었 대요.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었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책이 불후의 명작 이 되더라구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에요. 당대의 여론에 끌려서 뭐 칭찬들으려고 눈치보는 이거는 아니 에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내가 의로움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8절 이하에 보 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요.
"세상 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함인 줄을 알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욕을 당할 때 나보다 먼저 예수님이 욕당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런고로 예수의 제자 는 당연히 핍박을 받고 손해를 받아 야 되요. 그런 거예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이걸 당연하게 받아 들 여야 되요. 이상할 거 하나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요절이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안에 경건하게 살고 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 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자고 하면 핍박을 받아요. 가정에서도 핍박받아요 내외간에도 핍박을 받아요. 친구에게도 핍박을 받아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바로 그 사람 이 복된 사람이요. 슬퍼할 것도 탄식할 것도 나약해 질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긍지가 있고 자랑이 있는 것이올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핍박을 받으면 서 우리는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 고 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거 이상한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점점 더 의로워지고 의가 강해지는 겁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핍박받는 자에게는 유혹이 없습니다. 시험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 리 순교사에 보면 어떤 사람이 순교하게 되는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 재판관이 저놈을 화평에 처하라고 소리를 지르니깐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화형 에 처하면 순교자가 된다고 좋아합니다"
"아 그래, 그러면 매질을 좀 해라"
그러니까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는다고 더 좋아합니다"
"아 그럼 정배보내라"
"정배보내면 조용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시간 얻었다고 더 좋아합니다"
"그럼 어떻하면 좋으냐?"
"정말로 저 사람을 핍박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돈을 많이 주고 예쁜 여자들을 줘 가지고 타락시키시오. 저 사람들은 타락되는 거 외에는 무서워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요. 그리스도인들 초대교회에 더욱 그랬어요. 핍박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해지고 더 순수해졌어요. 그 당연한 것이에요. 강해집니다. 좀 미안 한 말씀입니다만은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얘깁니다. 이 공산당들이 들어 와 가지고 저희 마을을 전부 이제 공산화 해 나갈려고 할 때에 이 중학생들 뭘 안다고 이걸 꼭 주일날만 되면 소집을 합니다. 그런 데 갔다 온 아이들 얘기 들어보니까 마당 한번 쓴 것 밖에 없데요 그냥 마당에서 놀다 왔대요. 그래도 저희 마을이 한 60%가 교인이거든요. 좌우간 5일장을 서도 주일날이면 장이 서질 않아요. 이 정도로 교인이 많으니까 이걸 교회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주일날은 학교 오라 이겁니다. 그래 부릅니다. 소집을 해요. 난 안 갔지요. 안 가고 나면 월요 일날 가서 계속 벌섭니다. 때로는 매도 맞습니다. 욕도 당합니다. 또 어떤 때는 파출소 그 뭐예요 구치소에다가 집어넣기도 하고 뭐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매 월요일마다 그 고생을 합니다. 그 주일날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놉니다. 자 그런데 내가 얼마간 나가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이게 내가 신앙적으로 하는건가 재미로 하는 건가? 그 말을 생각하니깐 그거 내 딴에는 거 어리지만은 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요 만큼 핍박을 받는다 하는 게 말이에 요 굉장히 신바람 나는 일이더라구 요 이게. 그래서 아 이거 나는 주일날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월 요일날 가서 기합 받고 했더니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더라구요. 내가 꼭 그걸 신앙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들이 자꾸 핍박하니까 나는 점점 강해지는 거예요. 마지막엔 '죽일 테면 죽여라' 거기까지 나가는 거예요. 아 그래서 이게 참 묘한 거다 그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철없는 얘기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또 한 가지는 핍박을 당하게 되면 내가 믿는 바가 확실해 집니다. 이것을 신학화라고 합니다. 복음을 변증하면서 내가 믿는바가 점점 더 분명해 집니다. 핍박이 없으면 믿기는 믿어도 내가 뭘 믿는지 안 믿는지 믿는지 희미합니다. 핍 박 속에서 내 믿는 바가 확실해 지 고 체계화되고요. 또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지요. 더 큰 것은 핍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듣습니다. 긴 기도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라고만 불러도 벌써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이 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핍박 속에 있을 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교회에서 찬송 한 절만 불러 도 하나님이 가까이가까이 말씀하시는 것을 체험 할 수가 있어요. 이게 핍박받는 자들의 복이요. 또 뿐만 아니라 성경도 핍박 중에 읽게 되면은 그 성경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보세요 건강 할 때 읽는 성경과 병들었을 때에 읽는 성경이 달라요. 평안할 때에 읽는 성 경과 핍박 중에서 환난 중에서 성경 을 읽을 때에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을 통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것을 내 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그래 빌립보 감옥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됐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찬송을 부르며 이렇게 하나님의 무궁 무진한 깊은 뜻을 거기서 깨닫게 되 고 감사하게 된 것이에요. 자 이것 이 핍박을 통한 핍박자의 복이요.
그 뿐만 아니라 핍박을 받을 때 는 세계가 나 중심에서 하나님의 세 계로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빌립보 1장 12절에 보면 내게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되고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해서 친위대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 하게 되고 조용히 조용히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깨달으 면서 그는 여기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게 핍박당하는 자의 복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를 통해 서 나의 이 적은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엄청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한가지 핍박당하는 자는 결과 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나 공부를 하나 뭘 하나 이게 잘 되는 걸까? 자 결혼 을 해도 이게 잘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장차는 어떻게 되는건가? 우리 모든 행위에 대해서 다음 스테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음 후속 결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가 없어요. 그러나 핍박당하는 바로 이 시간에는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죽습니다. 하나 님 맘대로 하십시오. 나는 여기서 핍박을 당합니다. 다음 일은 하나 님께 맡깁니다.' 내 마음은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은 누구도 모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는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마음은 깨끗합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천국이 저희 것이다. 물론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가지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말론적 종말적 축복이 있고 오늘도 순교자가 누리는 영광 을 누립니다. 오늘 현재에도 기쁨 과 자유로 충만합니다. 자기 양심 이 자기를 칭찬하고 하나님과 나만 이 아는 엄청난 행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성경 요절을 외웠습니다. 로마서8장 18절,
"생각컨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요 절을 열여섯번 외우다가 마지막 못 외우고 세상을 갔다고 합니다. 장 차 나타날 영광,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 비교할 수 없도다. 떠나는 세상이 아쉬운 게 아니라 다가올 하나 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거기에 흡수되면서 만족한 기쁨으로 사선을 넘습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의 복입니다. 여러분 내 가 지금 어떤 성격의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 할 때 그에게만 주시는 엄청난 축복 이 영광이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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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에게도 복이 있나니 마 5:5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보훈의 세 번째 말씀으로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이 팔복 중에 하나로 말씀하신 "온유함"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성격적인 유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줏대 없음에서 오는 연약함을 이야기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함은 엄청난 삶의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세상의 많은 역경과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는 덕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한 자는 온유할 수 없습니다. 강하고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강하 고 실력이 있는 사람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만한 사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실력에 사랑이 더 하여지면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실력에 사랑이 더하여지지 아니하면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실력에 사랑을 더한 완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약한 사람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허세를 부리며 강한 척 하는 사람이요 둘째는 비굴하여 온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강한 자에게 온유하나 자기 보다 약한 자에게 절대로 온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온유함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강함에서만 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함은 엄청난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얻게 된 실력과 강함에서부터 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온유함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팔복 중에 들어갈 중요한 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복을 사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함을 지니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온유함처럼 강한 것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온유함을 나약함으로 착각하지만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진정한 강함은 강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진정 한 강함은 부드러움에서 나옵니다.
모든 강하고 딱딱한 것은 죽음의 부류입니다. 나무는 살아있을 때 부드럽습니다. 휘어집니다. 그러나 죽으면 딱딱해 집니다. 장작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즉시 딱딱해 집니다. 사람도 장작같이 됩니다.
물은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만 흐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르지만 언제나 대해를 이룹니다. 낮은 곳의 물은 대해를 이루지만 높은 곳의 물은 보잘것없는 실개천을 이룰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을 갖춘 사람은 큰 대해(大 海)같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온유함과 겸손함을 갖추지 못하고 늘 교만하여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작고 보잘것없는 실개천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중에 모세만 큼 큰 일을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선지자가 없다 고 하실 만큼 모세는 크고 능력 있는 지도자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큰 능력의 사람이 되게 된데에도 온유함이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면의 그 어떤 사람보다 승했던 그의 온유함이 그를 그처럼 크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18편 35절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18편 35절에는 "주 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를 정말 크고 강하게 하는 것이 온유함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변화시킨 힘은 예수님의 온유하심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깊은 회의와 갈망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시고 온유한 음성과 눈빛으로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서 유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온유하심이 삭개오의 온 삶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내어놓고 토색한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자진해서 말씀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입술의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삭개오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기쁘셔서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오늘날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삭개오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 중에 하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유하심이 그와 같은 개벽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웃옷을 벗긴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하고 온유한 태양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군인도 소위와 중위 그리고 대위와 같은 위관급 장교를 용장(勇將)이라고 부릅니다. 위관급 장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은 용기입니다. 그러나 소령과 중령 그리고 대령과 같은 영관급 장교를 지장(智將)이라고 부릅니다. 영관급 장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지혜입니다. 그러나 장군을 군대에서는 덕장(德將)이라고 부릅니다. 힘과 용기를 생명으로 여기는 군대에서도 힘과 용기는 최고의 힘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혜가 더 힘이 있고 지혜보다 는 덕이 더 힘이 있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최고의 힘은 강함에서 나오지 않고 온유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하숙을 할 때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상에 차려 놓은 생선을 물고 마루 밑으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마루 밑으로 도망한 고양이에게 나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매를 맞을 까봐 나오지 않는 고양이를 한 시간 이상 불렀습니다. 나중에 할 수 없이 나왔습니다. 자기 잘못을 아는 듯 기가 죽어서 겁을 먹고 나왔습니다. 그 고양이 잡아서 품에 안고 야단을 쳤습니다. 눈을 감고 꼼짝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있는 고양이를 때리지 아니하고 꼭 한번 안아준 후 말귀도 못 알아듣는 고양이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훈계(?) 한 후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날 로 저희 집 고양이가 거듭났습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변하여 강아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양이는 본시 강아지처럼 사람을 따라 다니는 동물이 아닌데 우리 고양이는 그 날부터 강아지처럼 제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는 강아지 같은 고양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 삭개오가 변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 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땅과 세상과 사람들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실력과 힘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땅과 세상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에게 땅을 기업 으로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으로 복의 근원을 삼으십니다. 그에게 복을 주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5천명 분을 혼자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라 5천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에게 땅을 기업을 맡 기십니다. 사탄의 전략은 욕심 많고 사람과 세상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땅과 세상이 화를 입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욕심 많고 사람과 세상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저들은 아주 힘이 있고 강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온유하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돈과 땅만을 사랑합니다. 저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약한 자의 것을 착취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를 더 늘리는데 에만 온 힘을 다합니다. 세상은 점점 불공평해지고 흉흉해 집니다. 땅을 차지한 사람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교만한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는 세상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많아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이 많아져야 이 세상 이 좋은 세상이 됩니다. 땅을 욕심으로 차지하지 아니하고 소명으로 받아 온유한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 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져야만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은 세상에 대하여 욕심이 없는 사람 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여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온유한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말로 이야기 하면 부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에도 두 종류의 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인간 적인 욕심을 가지고 부자가 된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님은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고 하여 무조건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무조건 부자는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도 안됩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온유하고 세상과 땅에 욕심 없는 사람이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여야만 합니다. 욕심이 아닌 소명으로 땅을 차 지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전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 욕심 버리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소명으로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것이 고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되기를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사람되기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 되는 것도 필요합니다. 높은 사람이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고지를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성실함으로 실력을 갖추고 세상의 누구보다도 강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된 후 예수님을 본 받아 교만하고 이기 적인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겸손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섬기고 사람들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땅을 기업으로 받아 그것으로 5천명을 먹이고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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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가 됩시다 마 5:9-
오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은 평화를 좋아합니다. 평화를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공산주의자일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려 오셨습니다. 그가 탄생했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라고 천사들이 찬양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주님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①승진하면 기쁘고 ②건강하면 기쁘고 ③돈 잘 벌면 기쁘고 ④합격하면 기쁩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시는 기쁨은 오래 갑니다. 평생 갑니다. 영원토록 갑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요한복음 20:19)고 축복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 할 때도 어느 집에 가든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마태복음 10:12)라고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첫째, 평화는 무엇입니까?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먼저 헬라어로 평화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이 말은 ①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②정신적인 평화를 말합니다. ③개인적인 평화 ④심리적인 평화를 말합니다.
다음 로마사람들이 말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라고 합니다. 이 팍스로마나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을 때의 승리감을 말합니다. 이때 주어지는 평화를 말합니다. 즉 정치적인 평화입니다. 인간세계는 힘이 있는 동안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고요합니다. 이러한 고요는 로마식의 평화입니다.
우리나라는 6.25사변 이후 3년 동안 전쟁 속에 있다가 휴전된 것이 1953년 7월 하순입니다. 그로부터 남북한은 판문점에서 수 백 차례 정전회담을 하면서 50년 동안 대치 속에 살아오는 가운데 남북한 정부 모두 엄청난 예산을 군비에 사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한국은 정치나 경제가 많은 성장을 했고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놓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남북한은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평화는 이루어지고 있는 편입니다. 이러한 평화를 로마식 평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힘있는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음 히브리 사람들의 평화가 있습니다. ‘샬롬(Shalom)’이라고 하는 평화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사람들을 만나면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조화로 충만한 평화입니다. 정신적이면서도 물질적이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요, 종교적이면서도 세상적입니다. 온전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죽어 넘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원수와 화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자유와 번영과 신앙이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룬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샬롬입니다.
둘째, 평화를 깨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평화를 깨고 ①세계를 불안케 하고 ②사회를 불안케 하고 ③개인을 불안케 하고 ④가정을 불안케 하고 ⑤멸망으로 몰아넣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탐욕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한마디로 ‘죄’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욕과 탐욕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①평화를 깨어버립니다. ②공포를 줍니다. ③미움을 줍니다. ④시기를 줍니다. ⑤분노를 줍니다. ⑥탐욕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더 큰 죄악을 낳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숲에 숨었습니다. 죄는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기도를 가로챈 죄 값으로 그는 도망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축복기도를 받아 큰 부자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외삼촌 집에서 20년간 머슴살이를 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거느렸습니다. 네 아내와 열 두 아들을 거느린 족장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 값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여 얻은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그에게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왜냐하면 20년 전에 형을 속인 것이 생각났고 그 형이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마중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얍복강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거기서 화평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눈물 흘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비와 형을 속였더니 그 아들들이 또한 자기를 속인 것입니다. 아들 요셉을 팔고는 죽었다고 그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화평을 심어야 나에게도 화평이 오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성군이었지만 정욕에는 약했습니다. 죄를 숨기려 하다가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나단 선지의 책망을 받고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다윗의 대단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토설이 없을 때는 화평이 없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나왔을 때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회개가 있을 때 주님의 십자가의 피는 효력이 나타납니다. 내 죄가 씻음을 받습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22장 21절에서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할 것이니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평안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갔을 때 그는 이미 평안을 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리 권세가 있고 돈이 있고 재물이 있어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참회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참회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즉 회개했을 때 그는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화평을 얻은 것입니다.
다음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은 사단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 이하입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지상의 전쟁은 공중에 있는 전쟁의 영향을 받습니다. 모든 천사들과 사단의 사자들이 공중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미가엘 천군 천사의 힘에 사단과 그 사자들은 지상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루시퍼입니다. 그러면 지상에는 처참한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마는 그 자체가 ①싸움이요 ②분쟁이요 ③참소자입니다.
말세가 되면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인류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싸움을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은 이간질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족과 가족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게 충동질을 합니다. 민족과 민족 사이에, 국가와 국가사이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사단의 목적은 인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인간을 통하여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가룟유다 속에 사단이 들어가니 예수를 잡아 줄 계교를 꾸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불화를 만들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악령과 성령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단의 역사를 정치나 경제나 과학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셋째, 누가 평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①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②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③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따라 내려가지 않고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죄악투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거기 속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이겨야 합니다.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사단의 계교를 물리쳐야 합니다. 탐욕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의 미혹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평화가 주어집니다.
또한 사랑할 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용서할 때 평화가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막혀 있는 곳은 없으십니까? 불안한 곳은 없습니까? 부부사이는? 부모 자식사이는? 형제간은? 이웃간은? 직장동료간에는 어떠하십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진 우리가 먼저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승리하는 삶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평안을 이웃에게 주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독일이 통일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용서를 빌 줄 알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1969년 10월 서독 총리 빌리브란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고 2차 대전 때의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약 700억 달러를 지원하여 그들의 죄 값의 일부라도 치루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 값을 치룬 독일은 이미 통일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여 얻어진 복입니다.
영국 황제 루이스가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평복을 입고 나가서 여러 곳을 다녔지만 평안하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치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어떤 산골짜기 물방앗간 옆에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물방앗간 앞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그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또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우리 주님 십자가 사랑 생각하면은
나도 몰래 웃음이 저절로 나네
쉬지 않고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루이스 황제는 여기에 참 평화와 행복이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보시오!”하고 그 노래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온 사람은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습니다. 루이스 황제는 “할머니, 그 노래 2절은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글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몰라요”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라고 하며 루이스 황제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황제 루이스가 부러워하네
우리 주님 십자가 사랑 생각하면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저절로 나네
우리의 믿음이 많은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화평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는 화목의 상징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화평을 창조하십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 화평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평화를 창조하는 성도의 모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은혜와 복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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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 5:1-12
옛날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에 일이니깐, 꽤나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먼 여행을 떠나서 낯선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해는 저물었고 인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는 낙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칠흙처럼 어두운 밤이 되어서 더 이상 어찌 할 수가 없어 서 더듬어 비를 피할 곳을 찾았는데, 마침 동굴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 들어가서 한 밤을 지내고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먼길을 오면서 몹시도 피곤했기 때문에 젖은 몸을 가눌 길도 없이 거저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한 잠 자고 나서 너무 목이 말라서 두리번거리며 더듬어서 물을 찾았는데 마침 그릇에 물이 있어서 그것을 마셨습니다. 아주 꿀맛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동녘이 밝았을 때 아침이 되면서 저들은 정신을 차려 보니까 자기들이 머물렀던 곳은 동굴이 아니라 무덤이었습니다. 자기가 마신 물은 해골에 고여있는 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또 생각하는 순간, 그대로 구역질이 나서 마셨던 것, 먹었던 것 다 토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중요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어제 저녁에는 꿀맛같이 마셨던 시원한 물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것을 아는 순간 견딜 수가 없어서 마셨던 것까지 다 토해버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인생사 오로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한 평생의 운명이 여기서 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 꿀맛 같은 생수가 한 삽시간에 썩은 물로 바뀌기도 합니다. 썩은 물이 꿀맛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사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Being Happy 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분이 있습니다. 몇 주일 전에 제가 소개한 바 있습니다. 앤드류 매 튜스(Andrew Matthews)라고 하는 분인데요. 이 사람은 호주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래 법학을 전공했습니다만은 25세에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갑니다. 그리고 만화 예술가가 되었다가 여러분 아시는 대로 1988년에 Being Happy 라고 하는 유명한 작은 책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4개 대륙에서 오백여 TV,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됩니다. 참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다시 그는 Follow Your Heart 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말로 번역 할 때에
"마음가는 대로 하라"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역시 50여개국어로 출간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앤드류 매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만이 저 멀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도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시켜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참으로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겁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처지에 못 마땅하게 여깁니다. 주변 환경이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 전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심지어는 천지개벽이라도 해서 세상이 화끈하게 변해지기를 기대해보고 또 그렇게 소원합니다만은 이 분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 되어야하고 내가 먼저 달라 져야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며 또 우선적이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청결이 뭡니까? 여러분 어느 정도 청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음의 청결함의 수준만큼, 마음의 청결의 수준만큼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건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번민이 있고, 고민이 있고, 문제가 많고, 또 나약해지고 병드는 일까지도 알고 보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누가 청결한 사람입니까? 성경에 보면 노아라고 하는 사람은 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만은 말년에 그는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만은 그 믿음이 미흡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때때로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실수했고, 때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때도 있었습니다. 고난을 이긴 대표자 욥 같은 사람도 이긴 듯 하게 보이지만은 사실은 그가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그는 온전한 청결함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도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니다만은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에 쫓겨가고 쫓겨가다가 마침 내는 죽기를 소원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만하면 족합니다. 더 살고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몸부림칩니다. 역시 그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대사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것도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사도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호소합니다.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로 기울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개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청결한 사람은 아닙니다.
마음의 청결이라는 것이 뭡니까? 힐라어 원문대로는 카타로스라고하 는 말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먼저는 세탁된, 깨끗한 옷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것은 아닙니다. 더러워졌습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씻어서 깨끗하게 만들었을 때 그것을 청결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지켜서 그 더러워진 마음, 찌들어진 마음, 구부러진 마음, 변질된 마음이 다 씻어져서 회개하고 또, 깊이깊이 회개해서 깨끗한 마음이 될 때, 잠언에 있는 말씀대로
"무릇 지킬만한 것이 있으되 네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갈 수 있을 때 이것을 청결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쭉정이나 벼 같은 것을 다 제해버리고 알곡을 만났을 때, 이거는 농사해보면은 이게 그 쭉정이를 다 날리고 나면은 거기에 알곡이, 요렇게 반질반질한 알곡이 솟아납니다. 그 알곡, 알곡만 모아놓았어요. 그것이 청결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섞이지 않은, 혼합되지 아니한 물건을 말합니다. 그런 물질을 말하는 겁니다. 가령 우유에다 물을 탔다. 그건 깨끗지 못합니다 순수한 우유,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 그것도 잘 못된 거야. 포도주 그대로. 이런 것들이 깨끗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말할 때에는 아주 깨끗한 일편 단심의 사랑을 가진 여자. 한 사람 만 사랑하는 거, 한 여자만 사랑하는 거, 이런 마음을 정결이라고 말합니다.
한 때에 어지간히 시끄럽게 문제되었던 작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제2복음이라고 하는 책인데, 예수님의 생애를 전혀 다른 각도, 시야에서 이렇게 그려놓은 책인데, 이것을 스웨덴 노벨상을 주는 기관에서 문학작품으로 노벨상을 주겠다고 했더니, 카톨릭 교회에서 교황청에서 반대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지간히 시끄럽게 변론을 벌였는데 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주었습니다 작년에. 이제는 이 작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제가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한 장면을 제가 소개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는 가버나움에서 아예 간판을 내걸고 정식으로 영업을 하는 창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날 이 집을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 상관없이 마리아를 만나게됩니다.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만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만납니다. 마리아는 그때 예수님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가셨다가 몇 일 후에 다시 거기에 들렀는데, 예수님이 몹시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이 여자가 나를 만난 다음에도 다시 창녀 업을 계속 했는지, 안 했는지, 생활이 달라졌는지, 안 달라졌는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넌지시 물어봅니다.
"요새도 창녀 영업을 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예수님, 여자는 동시에 두 남자를 절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해오던 그 더러운 직업을 깨끗이 청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믿고 나를 존경했으니까 이제는 창녀 직업을 버려라."
했다면은 여자가 이렇게 말했을 거 같아요.
"먹고살아야지요."
그랬을 거 같아요. 예수님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그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인간적으로 대했을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아주 몸에 찌들은, 오랫동안 해오던 창녀 행위지만은 깨끗이 청산합니다. 이것이 청결입니다. 사랑이 순수해질 때 나머지 모든 것들을 다 저버리게 됩니다. 하나의 가치가 깨끗해질 때 그 외의 일들은 쉽게 다 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청결이올시다.
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랑, 믿음, 소망 알고 보면 이것도 마음의 문제입니다. 보세요. 사랑, 사랑의 행위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행위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가 있으나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음이 있어서 사랑입니다. 사랑의 행위라고 하지만은 그 속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을 때, 순결하지 않을 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분 때로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자녀를 사랑하는데도 자녀가 말을 안 들어요. 그렇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정말 청결하냐고. 한 번 회개해 볼 필요가 있어요. 진정한 사랑은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게 사랑이 아니 에요. 단순한 관심이요, 관심 다음에는 집착이요. 강한 집착일 뿐이요, 어쩌면은 자기 사랑일 뿐이요, 내 체면 나를 위해서 저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지 그거는 사랑은 아니더라구요. 참 사랑은 깨끗한 사랑은 반드시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순수성이 없어요. 여러 가지 행위가 있는 것 같고 뭘 하고 뭘 하고 밥 주고 돈주고 뭐 하는 것 다 같아도 사랑이 없어요. 그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지난주간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두 아이가, 고등학생이 자기 학교에 들어가서 좌우간 총을 난사해 가지고 열일곱 명이 죽고 스물 다섯 명이 다쳤는데, 아주 싱글싱글 웃으면서 전부 쏘고 자기도 죽었어요. 그 부모, 아주 잘 사는 집이에요. 흔히 말하는 BMW를 굴리고, 아주 잘 사는 집이에요. 그 부모가 참 답답하대요. 애가 왜 그런 줄 모르겠대요. 모를 밖에.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여러 분 이것이 문제예요. 밥도 먹여 주었어요, 용돈도 주었어요, 그것이 사랑은 아니더라구요. 순수함, 깨끗한 사랑이 거기에 없어요.
또 여러분 믿음을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 믿는 마음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도 하고 구제하기도 하고 선행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보면 구제하기는 하는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도 하는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큰 소리로 기도한다.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이게 넌센스 아닙니까? 이게 청결하지 못한 믿음이요. 또 하나님만 을 기쁘시게 해야겠는데 보상받고 자하는 마음이 앞서 있어요. 하나님 앞에 투자하는 마음이에요. 요새는 그랬어요. 선금 십일조까지 있어요. 내가 만원을 벌려고 할 때는 천원을 미리 헌금을 한다는 거죠. 그리고 장사를 하는 거예요. 이런 마음이 이게 깨끗한 마음이 아니거든요. 깨끗한 믿음이 아니에요. 자 그래서 청결한 믿음.
또 소망도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위탁하는 마음인데, 하나님만 바라 고 하나님만 소망해야 되는데 우리가 어느 사이에 물질세상, 자녀, 명예세상 다 이렇게 이지러지고 다 어지러워졌어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희미하게 되었어요. 순수하지 못해요. 그런고로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 깨끗한 가운데 사랑하고 믿고 또, 소망하고. 여러분 그리할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올시다. 동기가 순수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청결하다는 말은 온전히 비운다고 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만을 사모하고, 하나만을 사랑해서 그것이 순수하다는 뜻이지 다시 말하면 단순하다는 말이지 텅 비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말이 아니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단순성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좀 전에 말씀한 앤드류 메튜스의
"마음가는 대로 하라"는 책에서 그는 열 가지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일곱 번째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이것이 일곱 번째의 실천사항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하는데 그 사랑의 내용 은 무언가 하면 마음을 비우라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하는 거다. 이런 데 저런데 찢겨 가지고 노예 생활하면 자기 사랑하는 게 못된다. 자기 사랑을 자기를 깨끗하게 보존해요. 마음을 깨끗하게,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운동선수의 운동하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내용을 보면 너무도 재미있어요. 운동선수 는 언제나 마음을 비워야한다. 그러면서하는 말입니다.
첫째는 집념하고 운동점수에 대하여 마음을 두 지 말라. 한 점, 한 점 뭐 올라가고 내려가는 거 그거 신경 쓰면 전념할 수 없어요. 운동만에 전념할 것이고 점수에 마음이 끌리면 그 마음이 깨끗지 못한 거예요. 또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라. 욕심을 내고 무리 한 것은 좋지 않아요. 마음을 비우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 또 여유를 가지고 화를 내지 마라. 그 E.Q. 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야지 이러한 저러한 일로 인해서 화를 내 면 운동선수가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고. 또 상대되는 사람을 증오하던가 시기 질투하지 마라. 누굴 이겨보려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면 벌써 운동이 곤두박질한다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기 할 일을 할 뿐이지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뭐 잘한다고 하던, 못한다고 하던. 잘한다고 했다고 해서 뭐 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못한다고 했다고 해서 다 틀린 것처럼, 남이야 뭐라고 하던 말던 자기행동에 자기 책임을 지라. 그 뿐만 아니라 성과 는 자기헌신으로부터 온다는 걸 잊지 마라 그래요. 농구황제인 마이클 조던이라든가 혹은 골프의 신동이라 는 타이거 우즈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도 가만히 보라. 물론 재능도 있었지만은 그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또 하나 있어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사람들은 다 운동 을 즐겼어요. 운동으로 인해서 상을 받고 못 받고 일등을 하고 못하고 그게 아니에요. 문제는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그 자기가 하고 있는 운동을 즐겼느냐 그것이 문제라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를 즐겨야 되요. 일하는 사람은 일을 즐겨야 되요. 그것이 바로 마음을 비우는 일이요, 그것이 마음을 청결케 하는 일이요, 그것이 가장 생산적인 일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우리 신앙생활, 우리 사회생활에 도 잘 적용되는 얘기예요. 우린 너무 여러 곳에 신경을 써요. 마음이 어지러워 졌어요. 깨끗지 못해요. 무엇을 해도 순수하질 못해요. 오직 한 마음으로 거기에 정성과 마음과 노력을 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니 역사 하십니다. 물질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이 물질 사랑하는 마음을 제거합니다. 명예를 사랑합니까? 명예를 버릴 수 있도록 역사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울 때 하나님께서 그거 다 제거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도록 청결케 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 우리가 당하는 많은 사건들이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오로지 주님만, 깨끗하게 사랑하도록. 순결하게 사랑하도록 하나님이 친히 그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의 커리큘럼에 의해서 우 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아주 귀중한 말씀이예요. 이것 은 은총적 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순결케 하고 또 순결한 다 음에 어느 순결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욕심이 많았어요. 물질에 대한 욕심, 자녀에 대한 욕심. 좌우간 욕심 많은 사람 대표자요. 그런데 얍복강변에 섰을 때 이걸 다 포기하게 됩니다. 자녀를 건네 보내고, 재산을 건네 보내고, 홀로 남아서, 오직 홀로 남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쓸데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제 마음이 어지간히 깨 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이제 그가 형님을 만날 때에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게 될 때 너무 감격해서 그때 유명한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형님의 낯을 보니 하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본 거예요. 여러분 참으로 마음을 비우고 순수하고, 청결해 질 때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력하다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내가 무능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청결케 하고 정결함에 도달하도록 하나님 친히 역사를 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성 결에 이르렀을 때에 주께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예수님 팔복 가운데 첫째 말씀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 이 있나니 하시고 오늘은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다 마음이 문제요.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이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주 신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또 우리에게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 이 새어 새벽 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샛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를 그 때까지 마음을 청결케, 청결케 해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 을 보는, 주의 얼굴을 본 사람의 평화, 본 사람의 능력, 본 사람의 지혜가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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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사람 마 5:1-12
이창호라고 하는 유명한 바둑 기사가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기사라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는 기사인데 보통 100수 정도를 내다보고 바둑을 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겨우 몇 수 정도를 내다보고 바둑을 두는데 그것도 별로 정확하지 않는데 그는 100 수 정도를 정확히 읽고 바둑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둑뿐만 아니라 모든 경기나 게임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활과 삶에 있어서 승리와 성공을 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확한 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 멀리 그리고 남보다 더 정확히 앞을 내다 볼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업을 하여 돈을 버는 것도 따지고 보면 수 싸움입니다. 누가 경제의 수를 정확히 읽느냐에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경제의 수와 흐름을 정확히 읽고 내다 볼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되는 것은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억대 연봉을 받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들의 공통점은 남보다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안목만 있다면 꼭 사업을 하지 않아도 월급만 받고 살아도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게임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이나 사업에서 승리하고 성공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승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라고 하는 승부입니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업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중요한 것은 인생이라고 하는 게임과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인생에서 진정한 승리를 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실패한 삶을 산 사람이 될 것이요, 혹 세상과 사업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과 승리를 하였다면 그는 결국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승리하고 성공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도 앞을 내다보는 정확한 안목입니다. 성경에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 남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선견자(先見者) 또는 선지자(先知者)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先見과 先知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먼저 보고 먼저 안다는 뜻이 아닙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見과 知는 바른 見과 바른 知을 의미합니다. 바른 見과 바른 知를 먼저(先) 보고(見) 먼저(先) 알 수(知)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훌륭한 삶을 사는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아름답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인생의 바른 수를 읽어 내는 안목입니다. 인생의 바른 수를 정확히 내다 볼 수 있는 안목에 욕심을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正見과 先見 그리고 正知와 先知의 축복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수를 읽는데 있어서 최고의 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수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는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수를 배우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수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만 배워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짧은 인생의 승리가 아닌 영원한 인생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구원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를 배우려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교회의 직분이 중요하다고 하 여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수와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들을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보고들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산상보훈을 통하여 정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마음이 청결하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정확한 수를 읽는데 깨끗한 마음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지 못하면 절대로 정확한 수를 읽을 수 없습니다. 바둑과 장기를 둘 때 자기 바둑과 장기보다 훈수를 둘 때 수가 더 잘 보이는 이유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내 바둑과 장기를 둘 때는 이기고 싶은 승부욕 이 생깁니다. 그 승부욕이 마음을 흐리게 하여 마땅히 볼 수 있는 수를 보지 못하고 후수를 두고 악수를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바둑을 훈수할 때는 승부욕이 없어집니다. 승부욕이 없어지니 마음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니 자신이 볼 수 있는 최고의 수를 그것도 아주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과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생 뿐만 아니라 사업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깨끗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거짓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속이면 자기가 이기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경기는 상대방을 속이면 대개 이깁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곧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남을 속이려고 하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러운 마음이고 어 두운 마음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절대로 인생의 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인생의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 같고 위험한 것 같아 보여도 정직하게 살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어 결국 세상과 인생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면 잠시는 이기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집니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정직한 사람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욕심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욕심을 갖게 되면 사람이 어리석어집니다. 마음과 생각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욕심에 눈이 먼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욕심은 눈을 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욕심처럼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어리석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욕심에는 크게 세 종류의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욕과 명예욕과 정욕입니다. 사람이 세 가지 욕심과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욕심과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그는 절대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과 싸워서 이겨야만 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과 싸워서 이기기 위하여 우리는 돈을 바르게 벌고 쓰는 법을 연습하고 훈련하여야 합니다. 억만금이 생겨도 부끄럽게 번 돈으로 인생에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특히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게 돈을 벌어야만 합니다.
옛말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말입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정승처럼 번 사람만이 정승처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는 사람이 한 둘 있다고 하여도 그것 때문에 개처럼 번 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습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 것이 물론 개처럼 벌어 개처럼 쓰는 것보다는 좀 나을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것이 최상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최상의 목표 아니 유일한 목표는 정승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는 것입니다.
적게 벌어도 좋으니 정승처럼 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처럼 벌어서 사업에 성공은 모르나 인생의 성공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정승처럼 버는 것도 중요 하지만 정승처럼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돈을 바르게 잘 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돈을 바르게 그리고 잘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훈련하여야 합니다. 훈련과 연습이 없이 돈을 잘 쓰는 사람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연습하고 특별히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치시고 연습을 시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 잘 쓰는 훈련과 연습을 하기 위하여 동안교회처럼 좋은 교회도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힘써서 정직한 십일조 헌금과 구제 헌금 그리고 선교헌금에 참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욕과 싸워서 이겨야만 합니다. 본능적인 욕심 중에 하나가 정욕입니다. 어제 '거짓말'이라고 하는 포르노와 구별이 되지 않는 영화가 공식적으로 영화관에서 상영이 시작되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니 영화관이 만원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그와 같은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고 문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고 살아보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예술 운운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음란한 본능을 자극하여 돈을 벌겠다는 욕심 때문에 그러한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큰 곤욕을 치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무사히(?) 그 문제를 벗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 탄핵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슬펐습니다. 이미 우리는 한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가 그와 같은 스캔들이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저는 매우 슬펐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 속에서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매우 염려가 되었습니다.
정욕과 싸워야만 합니다. 순결을 서약하고 그것을 지켜야만 합니다. 예술과 문화 운운하며 자신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유황불로 망하였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보고들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명예욕과 싸워 이겨야만 합니다. 물욕과 정욕 못지 않게 우리 의 마음을 더럽게 하고 어리석게 하 는 것이 바로 명예욕입니다. 자리와 자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인생의 승리를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명예와 자리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에 욕심이 지나침으로 사람들은 어리석어 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어 지다 못해 악해지고 있습니다.
명예와 자리가 중요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던져 버리고도 자신의 모든 삶을 지켜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명예와 자리가 없어지면 자신의 삶과 존재가 함께 무너진다면 그는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어느 사인가 일과 명예와 자리가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교 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과 자리 때문에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일과 자리가 없어진다면 허전해져서 건강하고도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속에 원죄처럼 자리 잡고 있는 물욕과 정욕 그리고 명예욕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 속에 비치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고 조용한 마음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수를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를 가지고 인생을 살게 되면 그는 백전 백승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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