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설교
부활의 첫 열매 고전 15:20~15:24 ·
장자옥 교수님이 쓰신 「마지막 남은 생명」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그 책의 사건 하나하나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방에서 총기를 난사하다가 민간인들을 몇 사람 죽였습니다. 그 죄로 사형에 처하게 됐고, 또 한사람은 월남전 참전 때 일시적으로 흥분을 참지 못해서 자기 동료를 죽였기 때문에 역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형 집행날짜가 가까올 때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소원은 한번 고기를 실컷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먹고 싶던 것 한번 실컷 먹고 싶다고…….
그러나 누구도 그의 사정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마지막 먹고 싶던 것을 먹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사식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마침내 그는 자기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선금으로 1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먹고 싶었던 고기를 먹었습니다. 실컷 먹어보려고 했는데 3만원어치 밖에는 못 먹었습니다. 그를 마주보던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야, 그 참 맛있겠구나." 대답했습니다. "맛은 무슨 맛? 내 몸뚱아리를 팔아서 먹는 건데……."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 후에 그는 형장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욕심을 채우겠다며 사는 것이 이 사형수가 고기 먹고 싶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을 모르고는 사실 입맛도 없는 겁니다. 아직도 입맛이 있는 것처럼 뭐 소위 말하면 엔조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실 철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산다는 게 이 사형수가 먹고 싶은 고기 먹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상징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하찮은 일입니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얼마나 맹랑한 얘깁니까?
그런데 다른 한 사형수는 자기 친구가 이렇게 하는걸 보면서 '아이구 그거 먹으면 뭘 하나? 한 끼 먹으면 뭘 하고 안 먹으면 뭘 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를 다 뒤져봅니다. 15,000원이 있었어요. 어느 날 교회성가대원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복도에서 찬송을 부르는걸 보았어요. 이 사형수가 나가서 15,000원을 내놓으면서 "나는 이제 죽습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인데 당신들 좋은 일에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마침 형무소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식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그 15,000원을 가지고 강대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헌당식 날 설교하는 목사님이 이 강대상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앉아있는 한 사형수가 죽기 전에 마지막 가졌던 것을 다 내놓아서 그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발표하게 될 때 모든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어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것이 법무부에 그렇게 전해져서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바꾸어졌답니다.
요한크리스토프 아놀드(Johann Christoph Anold) 라고 하는 분은 「두려움 너머로」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죽음은 "결정적 과제"라고 "결정적 필연성"이라고……. 여러분, 요새 웰빙이니 해서 뭐 보약도 먹어보고 운동도 하고 발광을 하면서 오래 살아보겠다고 버티지만 웬만하면 이제 그만 합시다. 다 소용없으니깐. 그 조금 더 살면 어떻다는 얘깁니까? 그냥 살다 그냥 갑시다. 그리고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사후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되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죽은 다음 생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사람이 안 죽는다고 말한 적 없어요. 단,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를 예수님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서른세살에 가십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잘못 산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해주는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핵심은 죽음다음이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성경을 똑바로 봐야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잘살고 성공하고 소원성취하고 그런 지엽적인 얘기 너무 관심가지지 마세요. 그저 성경은 똑똑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나와 같이 고난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와 같이 영광을 누릴 것이다"라고. 언제나 사후의 세계, 영생의 세계를 말하고 있죠. 거기다 초점을 맞추었지 이 땅에서 뭐 어떠하고 어떻고 관심 없네요. 성경 똑바로 봅시다. 아직도 기복사상에 매이고 세상에 매이고 뭐 그거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이지 조금 나으면 어떻고 덜하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문제요? 수명이 길면 어떻고 짧으면 어때요? 그거 아니올시다. 아주 냉정하게 생각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상재 장로님께서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옥중 생활할 때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런데 어느 일본인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자신이 알기는 인도의 간디는 평소에 100세를 산다고 늘 말했고 누구도 얼마, 누구도 얼마, 누구도 얼마, 그 유명한 사람들이 오래살기도 했고 오래 산다고들 얘기했는데 "선생님은 몇 년이나 사실 생각입니까?" 이상재 선생님이 감옥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가운데 하시는 말씀 들어보실까요?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사는 거지 죽기는 왜죽어?"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의 외침이에요.
"사람이 한번 났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지 죽기는 왜죽어?" 이상재 장로님의 호언장담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안 죽는다고 말하지 않아요. 성경은 이적을 많이 말하고 있어요. 나사로도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래 생각해요. 그 사람 괜히 장례식만 두 번했지 별거 아니에요. 뭐 누가 살고 누가 살고 누가 뭐 병 낫고……. 예수님이 많이 이적을 행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력을 느낍니다마는, 예수는 자신도 서른세 살에 죽었어요. 성경에는 뭐 구백세 살았다는 사람의 얘기도 있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녜요. 성경은 부활을 말하고 있어요. 부활은 곧 생명의 변화예요.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부활이라는 말과 변화라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해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하리라. 변화! 생명의 변화를 생각해야 되요. 이게 영생의 뜻입니다. 죽음이 말하는 뜻을 알고 부활이 말하는 뜻을 알면 그 사람은 바른 신앙의 사람이에요. 죽음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부활이 말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걸 알아야 사실은 오늘도 바로 살게 되고, 오늘을 살며 영생을 살게 되고, 영생으로 이어가는 오늘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는 이 말씀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귀한 복음을 주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이 계시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녜요. 만백성의 죽음, 예수를 믿는 사람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 십자가가 우리 생명의 계시인 것같이 부활이 또한 계시적 사건이에요. 한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그런 기적을 말하는 게 아녜요. 그런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지 마세요. 그런 사건이 아녜요. 이건 한 사람에게 있었던 죽음과 한 사람에게 있었던 부활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녜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로 죽으셨고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로서 첫 열매의 테이프를 끊은 거예요. 그런 귀중한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에요. 이것을 계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부활을 무슨 낭만적인 얘기로 생각하지마세요.
여러분, 생명이란 네 단계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식물입니다. 요새 여기저기 벚꽃이 많이 피었어요. 벚꽃은 참 신기해요. 왜냐하면 꽃잎이 어디서 나왔는지, 피어나는데 아직도 나뭇잎도 없잖아요. 이게 특징입니다. 파란 나뭇잎은 전혀 없는데 꽃만 활짝 피니까 그 벚꽃이 참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워요. 일부러 벚꽃 있는 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내려서 한번 쳐다보면 너무너무 신비로워요. 고목나무처럼 다 말라빠져서 '에라, 이제는 아무데도 못쓰겠다' 싶은 그런 나무에 어디서 준비됐다가 그렇게 꽃잎이 나옵니까? 너무 신기하잖아요? 식물의 생명은 신기합니다. 정말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적 생명입니다. 그 다음에 한 단계 높은 생명이 있죠. 동물적 생명. 이 또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동물이 태어나는 것, 암수가 그 멀리서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고 또 그 생명을 키우는 것 보세요. 여러분, 다 보셨겠지만 나도 들여야 보고서야 감탄을 한일이 있어요. 개가 강아지를 낳았거든요. 이게 아직 눈도 못 떴어요. 눈도 뜨지 못한 이 몸뚱어리가 벌벌 기어들어가서 그 어미 젖꼭지를 물고 빨잖아요. 가만히 보자하니 사람보다 낫대요. 사람은 갖다 물려도 못 빠는데, 이건 어떻게 눈도 못 뜬 게 찾아 들어가서 딱 빠는데, 그것도 자기 번호가 있어요. 고놈은 고것만 빨아요. 세상에 참 신기해요. 이걸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이걸 물리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설명하겠어요? 신비한 거예요.
신비한 생명력이 여기 있어요. 동물 세계의 생명의 위대함 이예요. 그러나 그 위에 한 차원 높은 게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동물적이면서도 또 동시에 영적입니다. 이성이 있고 영이 있고 영의 지배를 받는 이성, 이성의 지배를 받는 육체, 그 본능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고귀한 생명 이예요. 고귀한 존재 인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식물의 생명 동물적 생명 인간의 생명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한 단계 높은 생명이 있어요. 바로 그게 그리스도적 생명 이예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 그 무얼 말하는 거냐?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이 변화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 줄 알았지? 봐라. 이렇게 부활했느니라.' 그리스도적 생명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라고 '너희도 나와 같이 될 것을 내가 보여주노라.' 여기에 부활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첫 열매 다음엔 우리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이 부활절에 가서 큰 실수를 많이 해요. 뭐냐 하면 소위 '영혼불멸설' 같은 겁니다. 이걸 부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녜요. 어떤 사람은 '도덕적 부활'을 말해요.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그거 아녜요. 낭만적으로 윤회적으로 생각하는 것, 곤충이 다시 회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다 아니올시다. 식물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도 아니올시다. 자, 조그마한 표적이 될 수는 있으나 아니올시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만 부활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소설이 있죠? 아, 이게 기독교적인 뭔 줄 알고 열심히 읽어보고 아무리 읽어봐도 이거 부활이 없네요. 그건 사랑의 부활을 말할 뿐이지 기독교적 생명의 부활을 말하는 게 아녜요. 부활이란 단어의 개념을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는 것을 분명히 확실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만 부활입니다. 이것은 이론도 추상도 철학도 감상도 아녜요. 사건이에요. 이걸 보여준 것이 예수부활 사건이에요. 예수부활, 이건 사건이에요. 역사적 사건이에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했다. 너도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첫 열매라고 합니다. 이것이 샘플 이예요. 이것이 모본이요 이것이 표본 이예요. 이것이 예언이요 계시란 말입니다. 확증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이 은혜에 사는 사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어요.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넘어가니까……. 그 순간에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아요.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내게만 아니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앞서가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니라." 첫 열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담의 후예가 되는 것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하는 것은 인격적이고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은 자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에게 생명적으로 접하여 연결되어서 생명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사람,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사람, 이제 마지막 나팔과 함께 다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다.
여러분,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뒤에 우리가 있습니다. 곧 따를 것입니다. 그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볼 때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게 아녜요. 이건 우주적인 것이고 바로 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이 은총 안에 오늘을 내가 살아야 합니다. 부활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오늘을 삽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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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19-26
<서론> 평화를 갈구하는 인류의 노력은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수없는 전쟁이 지구상에서 일어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왔습니다만, 처음부터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없습니다.
인류는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여 평화를 잃어버린 이래 끝없이 평화를 찾아 헤매어 왔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 57:20-21,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로 가득 찬 인류에게 평강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 예일대학에서 역사와 문명을 가르치는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교수가 쓴 on the Origin of War"(전쟁의 기원) 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깊은 역사 연구 속에서 전쟁의 동기, 전쟁이 왜 있어 왔느냐 하는 것을 총괄적으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두렵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이 넉넉하면, 요새 말로 초강대적 여유가 있으면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힘이 평화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심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두번째는 이익을 추구하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와 혹은 자국에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때문에 생기는 전쟁, 이것은 실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세번째는 명예를 추구하는 명분적 전쟁 동기론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차대전 때, 독일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사람이 최고라는 어줍잖은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영국사람들은 앵글로 색슨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승리자의 명예, 승리자의 영광 같은 것들을 자랑하면서 소위 명분적 전쟁동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쟁의 동기가 뚜렷한데, 이를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특히 20세기 들어와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이 범세계적으로 일어났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막기 어려운 것이 또한 이것입니다.
1912년경에 세계 여러 나라들의 대표가 모인 제네바회의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전쟁 영구 종식 선언>을 가결했습니다. 다시는 훌륭한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수십억 달러의 돈을 파괴의 구렁텅이로 집어던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서로가 차이가 있다면 마치 신사적인 기독교인들처럼 평화롭게 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지옥이 무너지듯 1914년에 일어난 세계전쟁은 1918년까지 세계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수백만의 인민이 살상 되었고 수십억 불의 돈이 전쟁터에 뿌려졌습니다.
이 전쟁이 끝난 후에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 되었습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우리는 교훈을 배웠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의 문명은 멸망되고 말 것이다. <국제연맹>을 창설하여 평화로운 국가 스위스에 그 본부를 두자. 지금 이후로부터 모든 문제들은 이곳에서 해결 될 것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평화를 회복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에 불과했으며 실현이 불가능했습니다.
1939년에 또 다른 불씨가 터져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은 전반적인 면에서 1차 세계대전의 戰費와 공포와 고통들을 무색케 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국제연합> 곧 UN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가득합니다. 전쟁은 종식시킬 수 없으며 인간의 방법 가지고 세계적인 평화를 성취하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오히려 거짓 평화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살전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 땅의 평화는 오직 평강의 주님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본래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인간들에게 주신 그 평화입니다.
평화, 평강이라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습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해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로마 식민백성인 히브리 민족의 것으로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받았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서현의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 샬롬의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원천이십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이라고 불렀습니다(사 9:6).
주님은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평화의 약속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있을 지라도, 믿고 그에게 나오기만 하면 이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A. 우리가 두려움에 잡혀 있을 때에도 우리는 주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1. 본문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 이날이 어떤 날입니까? 제자들은 어찌하여 숨어 있는 것입니까?
본문의 문맥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잠시 살펴봅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가나 마가의 기록과는 달리 당시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던 사건들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 베드로 이야기 등) 은 생략하고 자신이 친히 경험한 사건만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의 시간을 ‘저녁’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이미 어두워진 시간, 즉 오후 8시경을 가리킵니다. 장소는 제자들이 자주 모임 장소로 사용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정됩니다.
·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했던 사건, 즉 젊은 선지자로 추앙받던 나사렛 청년 예수라는 인물이 며칠 전 당국자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십자가 형을 받아 죽어 무덤에 묻힌 지 사흘 되던 날입니다.
· 이날 새벽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 의해 ‘예수께서 다시 사셨고 친히 나타나셨다’ 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새 무덤은 이제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 졌습니다.
· 천사들이 무덤을 막고 있던 돌문을 굴려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사들이 두려워 벌벌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될 정도로 천사들의 모습은 광채가 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승리의 날이요 할렐루야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잡혀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습니다.
3. 이처럼 제자들이 무서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쳐올까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모두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 크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닫혀진 문들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석가 Matthew Henry가 말한 것처럼, ‘어떤 문이라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3년 동안이나 주님께서 함께 침식을 같이 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누었던 사이입니다. 많은 이적을 목격했고, 자기들 스스로도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이적을 행사했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을 때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비겁한 자들이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대사를 논할 만한 그릇이 안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 주님은 조건없이 사랑하셨고, 부활하신 후에 저들을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 6,25사변 때 대구 중앙교회에 서모 목사님이 시무했습니다. 인민군이 대구 근교까지 접근해 왔을 때 그 교회 우모 장로님이 함께 피난가기 위해서 목사님을 찾으니, 목사님은 강단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피난 갑시다.” 대답이 없어서 다시 말 했더니 목사님이 일어나 묻습니다. “장로님 불안합니까?” "예” 했더니 목사님이 “나는 조금도 겁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품안에 안고 계십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왔으나 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은 언제나 기쁠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본문 19절 하반절, “예수께서 오사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주님은 두려움에 잡힌 자들에게 먼저 평강을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에이레네)이란 말은 사실 고대 이스라엘에서부터 예수님 당시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인사말로서, ‘샬롬’의 번역어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평범한 인사말의 의미의 수준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역과 관련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십자가 와 부활 사건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일 뿐아니라 세 번이나 반복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과 병행 단락인 눅 24:36-49에는 이 단어가 한번 나오지만, 요한이 3번씩이나 이 단어(‘평강’)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요한이 특별히 기독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심 단어 가운데 하나인 ‘평강’을 강조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에이레네’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먼저 본서 전체에서 봅시다. 요 14:26,27 에 의하면 ‘평안’은 예수님 승천 이후에 오실 보혜사 성령님과 관련되어지는 것으로서, 세상의 평안과는 다른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평안입니다.
또한 16:33에서 평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과 관련되며,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을 이기는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위 두 구절을 종합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이후 이어지는 승천 사건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로 보아도 여기에는 異見이 없습니다. 먼저 ‘평안’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관련되어,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성도에게 주시는 선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평강이 성령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갈 5:22에는 ‘에이레네’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 하나인 ‘화평’으로 나타나 있고, 엡 4:3에서는 성령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시는 분으로 제시됩니다. 롬 15:13에서 평강은 기쁨과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도 19.21절에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뒤에 22절에서 ‘성령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성령님께서 평강을 주시는 사역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 “예수께서 오사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사랑의 주님은 무서움에 사로잡혀 골방에 꽁꽁 숨은 제자들에게 직접 오셔서 평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은그때의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향하여 평강을 말씀하시며, 실제로 그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으면 모든 두려움은 물러가게 되고 주님 주시는 평강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복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우리가 앞날을 염려할 수밖에 없을 때도 주님의 평화는 우리의 것입니다.
1. 본문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주님이 보이신 손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손이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못자욱이 선명하였습니다.
주님이 보이신 옆구리는 로마군인의 창에 찔린 창자욱이 선명한 옆구리였습니다. 주님은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요한은 특별히 옆구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옆구리의 창자욱을 다시 기록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특히 19:34에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한 것도 요한만의 독특한 내용입니다.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반박 근거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옆구리의 창자욱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분명한 육체적 부활입니다!
2. 그때까지 부활을 의심하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번에 걸쳐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셨고 약속을 주셨습니다만, 제자들은 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들에게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맡기실 계획을 가지시고, 먼저 부활의 평강을 말씀하셨습니다.
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보내어질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돈도, 조직도, 권세도, 세상적인 영향력도 미미한 저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은 참으로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주님은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지난번 영화배우 이은주양이 꽃다운 나이로 목숨을 끊었던 뉴스가 기억 납니다. 1962년 톱기사로서 온 세계에 화제가 되었던 뉴스 중 하나가 미모의 여배우 마르린 몬로의 투약 자살 사건이었습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온 세계의 팬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가하면, 한번 출연비만해도 백만 불씩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축하연에 나와 몬로와 춤을 추었을 때 감탄하기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고 까지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도 그의 젊음과 인기와 미모, 그리고 금력을 한 몸에 지녔으나 영혼의 고갈은 메울 길이 없었던지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R.F.밀러여사는 역시 온 세계의 인기를 모우고 주급 수천 불의 화려한 가수생활을 하면서도 영적 고갈을 메울 길이 없었던 차에, 빌리 그레함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넘치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오페라 가수생활을 청산하고 빌리 그레함 전도단에 함께 다니면서 직접 작사 작곡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찬양으로써 훌륭히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지은 찬송가 중 하나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102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평강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인데, 주의 평강을 받은 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C. 우리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도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1. 주님의 제자들 중 도마는 처음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갑자기 여러 제자들 중 외톨이가 되었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은 관계로 ‘의심많은 도마’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2.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
도마의 훌륭한 점은 비록 그가 의심하는 가운데 있었지만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점입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그는 틀림없이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어찌되었던 다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3. 문들이 닫혀 있었지만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평강의 선물을 의심 많은 도마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심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사랑에 감동된 도마! 그의 고백은 요한복음서의 결론을 이루고 있습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4. 어떤 외로움도, 그 어떤 고독도 주님 주시는 평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세상의 소외된 자들, 주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평강을 전달해 주십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오해나 모함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도 주님은 부활의 평강을 주십니다. 주님의 평강은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감동을 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한 증인의 삶을 살게 합니다.
** 한 성도가 그가 근무하던 직장에서 근거없는 악의적인 루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분하고 원통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사표를 던지고 싶었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만나서 싸움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가까운 기도원에 들어가 울면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억울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없는 말을 만들어 저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의 마음속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난 성도는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난 뒤에,
“그렇지, 세상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분노만 가득 찰 뿐 평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주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주 앞에 꿇어 엎드린 도마, 그는 후일 멀리 남인도에까지 복음전파를 위하여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는 믿는 자에게 부활의 평강을 아낌없이 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평강을 받으십시오.
여러분 중에 봉사와 헌신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평강을 누리십시오.
여러분 중에 외로움으로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외로와 하지 마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가슴에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실패와 낙심으로 힘들어해도 곧 일어나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테니까요.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쓸쓸하고 외로워도 그 마음의 사랑으로 곧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게 될 테니까요.
그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손해를 보고 답답할 것 같아도 그 마음의 진실로 곧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게 될 테니까요.
그 손길이 부지런한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어 보여도 그 성실함으로 곧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될 테니까요.
누구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부족한 것 같아도 그의 겸손이 곧 그를 높여 귀한 사람이 되게 할 테니까요.
늘 얼굴이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가볍게 보여도 곧 그 웃음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 그가 행복한 세상의 중심이 될 테니까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어리석게 보여도 그 마음의 작은 기쁨들로 곧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테니까요.
여러분은 지금 꿈을 품고 있습니까?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실하게 살아갑니까? 부지런합니까? 언제나 겸손하나요? 늘 밝고 기쁩니까? 조그마한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에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습니까?
“물가에 심긴 나무는 더위가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뭄에도 걱정이 없고 오히려 결실이 그치지 않습니다”(렘 17:8)
주님 안에 심긴 인생이 됩시다. 주 안에서 꿈꾸고 사랑하며 진실하고 부지런하게 늘 밝고 기쁜 모습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길 기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시며, 어려움 가운데 함께 하시는 우리의 좋은 친구이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