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출 20장

스네어 2014. 3. 26. 17:10

 

출애굽기 20:8-17 율법이냐? 복음이냐?

 

세 명의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슬퍼서 울고 있었고, 두 번째 사람은 너무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분하고 억울해서 울었습니다.

겉모습을 보자면 세 명 모두 똑같이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만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의 마음은 슬픔에 잠겼고, 어떤 이는 기쁨에, 또 어떤 이는 억울한 분노를 가득차 있습니다.

겉과 속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의학자들이 그들의 눈물을 연구해 보니 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감정을 갖고 우느냐에 따라서 그 화학적 성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분해서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에 염화나트륨이 가장 많이 분출되는데, 따라서 이때 흘리는 눈물이 가장 짜다고 합니다.

겉모습은 같아 보이지만 속 성분은 각기 다르다는 얘깁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따라,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의자에 앉아, 똑같은 찬송을 부르고, 똑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개인마다 마음의 자세와 속 성분은 같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복음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계명은 절대자의 명령이니까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죄요, 죄를 지으면 매맞을 수도 있으니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에 매인 사람이요, 그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 주실까봐 십계명을 지킨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얽매이는 삶을 사는 자요, 자유가 없는 자이니 참으로 불쌍한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일을 지켜야 합니까?

분명한 사실은 구약 시대의 안식일처럼 이 날은 율법적 당위에 얽매여 지켜야 할 그러한 성격의 날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분명 복음적인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율법적인 사람과 복음적인 사람, 이 두 사람이 누리는 기쁨과 자유의 참 맛은 같을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계명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계명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시대적 배경을 알면 십계명 속에 담긴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시대적 배경입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한 뒤,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400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백성들은 자유를 박탈당했고, 인권이 유린당한 채 노예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단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짐승 또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사람도 가축도 400년 동안 신음해야만 했고, 잔인한 노동과 무서운 채찍 아래 자유를 박탈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400년의 세월이 지나서 출애굽의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시내산에 도착하였을 때, 바로 그곳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10)

'너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은 물론 네 가축들도 일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를 생각해 봅시다.

양반들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모든 노동은 노비들의 몫입니다.

양반이 지게 지고 노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양반은 365일 하루도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년 내내 휴일이었던 반면, 노비들은 일년 내내 혹사당했습니다.

노비들에게 자유나 휴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선포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제 칠일에는 네 노비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

그렇다면 이는 누구를 위한 선포입니까?

양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한 순간도 쉬지 못하는 노비들을 위한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노비였다면 이 계명이 멍에로 여겨지겠습니까? 아니면 기쁜 소식, 즉 복음으로 여겨지겠습니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농사철이 되면 가정학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모내기철이나, 추수시기에 일군이 부족하여 부모님을 도와 일하라고 학교에서 수업을 단축하거나 몇일동안 방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일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게 공부한다는 핑계로 일하지 않을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일요일이 되면 당연히 농사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물론 철이 없던 시절이니까 그랬겠지만 왜그리 일하기가 싫었던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날은 일하지 말라'고 했다면 이것이 지키기 힘던 율법입니까? 아니면 기쁜 소식, 복음입니까?

 

과거 일제 36년 동안 일본이 우리를 못살게 굴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강제 노동에 끌려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죽어 간 동포의 숫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굶어 죽었고, 매맞아 죽었고, 탈진되어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선포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7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네 노비나 가축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 그날은 모두 쉬어라" 하셨다면 이 계명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일본인들을 위한 것입니까?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노동자들을 위한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강제 노동을 하는 노동자라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이 말씀이 멍에가 될까요? 아니면 기쁜 소식이 될까요?

여러분이 노동자였다면 이 계명을 억지로 지키겠습니까? 아니면 기뻐 뛰며 지키시겠습니까?

 

일당제로 일하거나 자영업을 하시는 분이 아닌 월급제로 일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사용자측은 일요일도 일을 시키고 싶을 것이고, 노동자는 쉬고 싶을 것입니다.

이때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명이 사용자측 에는 부담이 될 것이고, 노동자 측에는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므로 십계명은 율법이 아닌 복음이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도 율법에 매인 사람입니다.

율법에 매인 안식일에 무슨 기쁨이 있겠고, 무슨 감사가 있겠으며, 무슨 감격이 있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려니 힘만 들 뿐입니다.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율법으로 여거집니까? 아닙니다. 이는 놀라운 복음입니다.

힘있는 자들에 눌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고, 자유하고 싶어도 자유를 빼앗겨 버린 사람들, 사람이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계명 안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살펴보면 심지어 가축에게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가축들도 400년 동안 혹사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축에게도 자유와 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결정체로 이루어진 '복음'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은 정말로 큰 복음입니다.

이 계명은 약자가 빼앗겨 버린 인권을 회복시켜 주신 계명이요, 약자가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누리는 날이요, 인권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요, 구원의 은혜를 감격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지켜야 하는 멍에의 날이 아니요, 자원함과 기쁨으로 지키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곧 나를 향한 사랑과 은총의 결정체요, 복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시각을 바꾸어 보면 복음이 보입니다.

14절을 보면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면 죄야, 이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거야' 이런 생각 때문에 간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명령이니까 지키고 있습니까?

 

시선을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이떤 나쁜 놈이 사랑하는 내 딸이나 아내를 겁탈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그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었다가는 다 끝나는 것입니다.

내 딸의 인생도 파멸이요, 가정의 행복도 파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한을 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네 이놈,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그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아주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누구를 위한 말씀입니까? 내 딸과 내 아내를 위한 말씀이요, 내 가정의 행복을 보호해 주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이 모든 계명이 전부 나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영생을 얻을 수 없으니,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셨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시므로 타인으로 하여금 내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곧 내 생명을 보호해 주신 계명입니다.

"도덕질 하지 말라"는 계명도 그렇습니다.

이 계명을 주시므로 도둑으로부터 나의 사유재산이 보호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곧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도 이 날을 통해 자유와 쉼과 복음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27절에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자유를 주시고, 쉼을 주시고, 건강과 복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오늘 부터는 주일이 되면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되지 맙시다.

안식일 속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억지로 주일 성수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주일을 성수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주일성수는 내게 부여하신 특권을 누리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예배에 참석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진정한 안식일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으면 안식일을 잘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일날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다함께 9절 말씀을 큰 소리로 봉독하시겠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엿새 동안은 힘써서 네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엿새 동안 자기가 할 일을 힘써서 행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너무 열심인 나머지 가정 생활이 엉망입니다.

또 어떤 이는 윤리와 도덕이 엉망인데 교회 일에는 아주 적극적입니다.

어떤 학생은 공부는 하지 않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어떤 사업가는 직원들 봉급도 주지 않으면서 십의 2조를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들 기본적인 도리조차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은 거룩히 지키는 것은, 엿새 동안 자기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제7일에 정성껏 예배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곧 6일 동안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시한부 종말론을 다루는 TV 프로를 접하게 됩니다.

남편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버립니다.

재산을 탕진하는 것은 물론 부모님마저 버립니다.

종말이 코 앞에 닥쳤으니 세상 일은 아무짝에 쓸모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전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지킨 안식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50년 동안 주일 예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6일 동안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인답게 살았습니까?

혹시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마저 외면한 채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진정한 안식일은 곧 삶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7일에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일 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날은 그저 막연하게 두 다리 뻗고 잠을 자면서, TV나 보면서, 산과 바다로 놀러 가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날은 거룩히 지켜져야 하고,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배모범 제1장에 보면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패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으로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11절 후반을 보면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자손 천대까지 이르러 은혜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육체가 쉼을 얻으니 건강의 복을 누리게 되고, 마음이 쉼을 얻으니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영적인 자유가 있으니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안식일을 비롯한 모든 계명을 율법으로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명령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은 곧 나를 향한 사랑의 결정체요, 무한한 자비가 담겨 있는 것이며, 나를 위하여 주신 계명이라는 것을 가슴에 철필로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통하여 다음 주일에는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교회에 나오는 자세가 아니라, 안식일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모습으로 나오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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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내산 언약을 아십니까? 출애굽기 20:18-21

 

당신은 출애굽기를 바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출애굽기를 많이 오해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책이름에 국한된 부분적인 이해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센을 빠져 나오는 것이 출애굽기의 전부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신학 공부를 마친 후에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일반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영역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출애굽기에 기록된 계시는 출애굽 사건보다도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서 되어진 일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시내산에서 되어진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내산 하면 십계명이 떠오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뿌리요, 근원된 모법(母法)입니다. 그것을 준행하기 위해서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시행 세칙인 여러 가지 율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간 두 차례 팔십일을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의 계시는 놀라운 것입니다. 십계명과 여러 가지 율례들, 그리고 그것을 지킬 절기와 그것에 수종들 제사장, 그리고 그 언약을 보관할 성막과 그 성막을 세울 봉사자들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막에 속한 것이요, 그 중심은 십계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이후에 새롭게 건설된 생활양식이 성막문화였습니다. 하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을 덮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출애굽기 20-24장까지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전반부에서 십계명이 나오고, 그 이후에는 십계명에 준한 여러 율례가 나옵니다. 이것을 크게 몇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의 규례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는 인권 문제이며, 소유권 침해에 대한 보상 문제이며, 인간관계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생활 문제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언약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먼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용납하지 않은 것처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0:22-26).

 

그러면 예배에 대한 율례가 어떠한가?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애굽기 20:23) 하나님만 섬기게 했습니다. 천지에 충만한 영이신 하나님을 나 자신의 보호자로만 생각하여 어떤 신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공에 제한 받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할 처소는 언약의 성소입니다.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애굽기 20:24) 우리가 어디서나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으나 하나님이 정한 시간에 모이는 예배는 언약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소라야 합니다. 예배드릴 단은 이러합니다.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출애굽기 20:25)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성전의 주인된 주님을 모르고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자랑할 때 그것이 무너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음은 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태도는 이러합니다.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출애굽기 20:26) 그래서 성소에 수종 드는 제사장들은 속옷과 겉옷인 예복을 입어 경건하게 참여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좋은 경종의 말씀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지상 최고의 가치입니다. 예배에는 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경건한 요소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서 드림으로 하늘로서 내려오는 계시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목사의 메시지만 들으려고 하는데 우리의 드리는 봉헌적인 삶이 없이 만족한 만나가 내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로 상호적입니다.그러므로 당신이 예배 속에서 말씀만 듣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얻으려고만 무례한 어린아이의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생명에 대한 인권의 언약은 이러합니다.

 

십계명 둘째 돌판은 인간에 대한 계명인데 그 첫 부분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살인하지 말라는 생명에 대한 인권의 문제입니다(출애굽기 21:1-36)

 

먼저 인권에 대한 종의 율례는 이러합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종이 되는 경우는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빚을 갚기 위하여 팔려 가는 경우와 도적질 하다가 잡혀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와 가난하여 스스로 종이 되길 원할 때입니다. 종이 자유함을 얻는 때는 언제인가? 종으로 팔린지 칠년이 되는 안식년이 되면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희년이 오면 자연히 자유의 몸이 됩니다. 평생 종은 이러합니다. 종이 자유 하기를 포기하고 평생 주인을 섬기려고 할 때 제사장에게 말씀을 드리고 그를 문이나 문설주로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귀에 구멍을 뚫어 자발적으로 상전을 섬기게 합니다. 사실 오늘날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차고 다니는 귀걸이는 남편의 종으로서 평생을 섬길 징표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귀한 규례는 이러합니다. 생명을 해 한자는 반드시 죽습니다(출애굽기 21:12). 자신의 생명이든 혈육의 생명이든 이웃이든 누구라도 생명을 해하는 자는 반드시 죽였습니다. 그러나 부지중에 행한 사실에 대하여는 피할 곳을 두었습니다. 상해를 입혔을 때는 보상을 해야 합니다(출애굽기 21:19). 서로 싸우다가 죽지는 않고 상해를 입혔으면 완치되기까지 손해배상를 해야 합니다. 가축에게 해를 받았으면 생명의 속죄금을 드려야 합니다(출애굽기 21:30). 그 가축은 반드시 죽이고, 주인이 속전을 내어야 하나, 소가 받는 버릇이 있어 여러 차례 경고를 받고도 이행치 않아 일어난 것은 그 임자도 죽여야 합니다. 만약 구덩이나 웅덩이에 빠져 죽으면 돈으로 보상을 해주고 죽은 것은 자신이 차지합니다(출애굽기 21:34). 이것도 역시 단속을 하지 않아서 된 것이면 죽은 것은 자신이 차지하고, 소는 소로 갚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존귀한 것입니다. 지상의 어떠한 피조물도 생명을 함부로 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 행위입니다.

 

셋째: 재물에 대한 소유권의 언약은 이러합니다.

 

십계명 중 인륜에 대한 두번째 말씀이 간음하지 말 것과 도적질하지 말 것 입니다. 남의 정조를 도둑질하지 말 것이며, 남의 소유물을 취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출애굽기 22:1-31).

 

남의 소유권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소유권 침해에 대한 보상 원리는 배상입니다. 남의 양이나 소를 도둑질 하다가 발각되었을 때, 남의 밭에 채소를 소가 먹어서 손해를 입혔으면 자기 밭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 것, 남의 소유를 불태웠을 때, 남의 물건을 맡아 있다가 봉적 당했을 때, 남의 것을 빌려서 쓰다가 주인이 없을 때 잃거나 죽었을 때는 반드시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이 참작될 수 있습니다. 정조를 유린하는 간음 행위는 이러합니다. 정혼하지 않은 처녀를 취하였으면 빙폐를 주고 아내를 삼아야 하며,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며, 영적인 정조를 유린하는 무당이나 다른 신에게 우상 숭배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소유권자가 특별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고아나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출애굽기 22:20-27).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채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존권에 침해가 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가난한 약한 자들은 재판장이나 유사들을 욕해서는 안됩니다(출애굽기 22:28). 기독교는 부지런히 수고하는 노동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 이전에 여세 동안에 힘써 일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게으름으로 가난해진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셋째: 삶에 있어서 증인의 언약은 이러합니다.

 

십계명 제일 마지막 부분의 가르침이 바로 이러합니다. 거짓된 증거를 하지 말며, 거짓되게 속여서 남의 취하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피조물 중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서로 교통하기를 원했습니다. 언어란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요, 은총입니다. 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을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23:1-9).

 

성도의 경건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허망한 풍설을 전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복된 성도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됩니다(시편 1:1).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해서는 안됩니다. 다수를 따라 편안한 것을 취할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결단하여 평안을 소유해야 합니다. 편벽(偏僻)된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동정에 치우쳐서도 안되고, 부유한 자가 뇌물을 준다고 해서 눈이 어두어져서는 안됩니다(출애굽기 23:3, 8).

 

언어적 기능은 피조물 중에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교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언제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바벨탑을 쌓을 때 혼란의 경지에 빠졌습니다. 인간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적을 상실할 때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언어가 언제 통일되었는가?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했을 때입니다. 각 나라 방언으로 혼란된 언어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것입니다. 인간이 왜 무질서와 혼란과 어두움에 빠지는가? 자기 생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을 때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언 18:20-21)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5-6)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뿌리이며, 근원된 모법입니다. 이 법에 준하는 여러 율례는 우리의 삶속에서 지킬 성도의 실천윤리입니다. 예배에 대한 기본 원리가 이러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므로 존귀한 것입니다. 남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안토록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고하게 하십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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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십계명의 비밀을 아십니까? 출애굽기20:1-17

 

성경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고 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여러 책들 중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출애굽기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출애굽기는 참으로 소중한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통하여 나 자신을 실상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중심은 시내산입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의 고센에서 출발하여 시내산에 도착하여 언약의 말씀을 받아 성막을 세우는 일까지의 기록입니다. 출애굽기는 20장 십계명을 전후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애굽을 빠져나오는 출애굽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시내산 언약으로 주어지는 성막문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십계명에 대한 총론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계명의 각론적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십계명이 주어질 때 시내산에 일어났던 일과 십계명 서두에 주신 말씀의 의미와 십계명 전체의 중심사상과 오늘날 십계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십계명이 주어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출애굽기 19:3)고 했습니다. 먼저 모세를 불러서 시내산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Orientation)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3일간 옷을 빨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며, 성결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9:10-11, 15). 백성을 위해서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여 이를 범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으며, 오르는 자는 반드시 죽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9:12). 모세가 등정할 때 70장로들과 아론을 적당한 거리에 두었으며, 여호수아는 조금 더 동행케 했으며, 자신은 정상으로 나아갔습니다(출애굽기 24:13-14).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옹기점 연기같은 구름이 온 산을 뒤 덮었으며, 번개가 뻔쩍이며, 우뢰소리와 같은 나팔소리에 산이 진동했습니다(출애굽기 19:16-19) 온 산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출애굽기 24:16-18). 그 모습이 얼마나 장엄했던지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출애굽기 20:18-19). 성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천군천사가 동원되었고(누가복음 2:14), 구원사역을 완성하실 때도 갈보리의 지축이 흔들렸으며(마태복음 27:51-52), 후일에 재림하실 때도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오실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4:16). 성령 보혜사가 마가 다락방에 강림하실 때에도 홀연히 일어난 급한 바람으로 대진동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2:1-4).

 

인간에게 특수한 사명이 주어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특수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임재하실 때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간혹 국가의 원수들이 방문할 때 야포를 쏘며 빵파레를 울리면서 환영을 합니다. 그 권위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편 128:1)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전의식의 인격자로 살아가는 자가 복된 인간입니다.

 

둘째: 십계명의 서론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십계명 서론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애굽기 1-2)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젠 바로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민의 신분과 이들의 처소가 애굽의 고센이 아닌 약속의 땅 가나안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이들이 지켜야 할 법이 바로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명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세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십계명은 종의 윤리가 아닌 아들의 윤리입니다. 종에게는 자유와 안식과 상급이 없습니다. 종의 노력은 지극히 당연한 수고입니다(누가복음 17:7-9). 그러나 아들은 자유함과 안식과 상급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5:22-23). 십계명은 애굽의 문화가 아닌 성민의 문화입니다. 애굽의 문화는 우상숭배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성민의 문화는 언약의 문화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입니다. 십계명은 저주의 규레가 아닌 축복의 법칙입니다. 당신은 바로의 명령대로 우상숭배하면서 살면 결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세의 인도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 아래서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면 영육간에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신명기 28:1-14).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의 생애에 잊을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출애굽 사건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바로의 권세를 뮬밟고 당신을 마귀권세에서 풀어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단권세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 은혜의 감사와 감격으로 남은 여생을 살면 십계명은 당신에게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셋째: 십계명의 중심사상은 이러합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진 열가지의 계명입니다. 이는 성문계시의 표본이요, 모든 율법의 근원입니다. 시내산 이전의 족장 시절에는 하나님이 때마다 필요시 신실한 족장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으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한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그 언약을 보고 지킬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언약은 계시의 첫 열매가 되어서 이후로 수 많은 계시가 선지자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계명의 중심사상은 어떠한가?

 

십계명의 중심사상을 세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심을 가르칩니다. 구약의 제사나 신약의 예배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언약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속적인 무속종교와 다른 점은 인격과 비인격의 차이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비인격적인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행위입니다. 인간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하는 것이 인생의 불행이요, 비극의 원천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은 하나님입니다. 계시의 순서는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삶의 행위에 있어서 그릇된 욕망의 절제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행위로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이 계명을 분석하면 적극적으로 지켜 준행할 것은 두가지이며, 그외 여덟가지는 모든 금지법입니다. 처음 에덴에서 주어진 창조명령은 전부를 허용하고 주권의 상징으로 하나를 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열가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어떻게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비밀한 것을 가르쳐 주어서 이 모든 계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 계명과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은 하나의 새계명을 주심으로 모든 계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계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넷째: 십계명의 오늘날 의미는 이러합니다.

 

당신은 십계명을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는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루지 못한 율법의 빚나간 부분을 바로잡아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사역은 이러합니다. 주님은 의식적인 제사를 십자가로 완성하셨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를 갈보리에서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단번에 청산하신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소나 양의 피를 가지고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구약적인 규례를 부활사건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적 안식일을 부활의 주일로 바꾸었으며, 의식적인 제사를 찬양의 예배로 바꾸었으며, 할례로 인침을 세례의 씻음으로 전환했습니다. 주님은 육체적 행위의 법을 성결한 마음의 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덕질 하지 말라는 육체적인 행위의 법을 성결한 마음의 법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마태복음 5:21-32).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윤리의식이 어떠한가? 우리는 구약적인 언약의 법도를 무시하고 신약의 은혜와 사랑만 강조하다보니 죄를 피하여 의롭게 살기보다는 범죄한 이후에 베풀어지는 용서에 너무 쉽게 길들여져서 기독교인의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보다 더 엄한 윤리의식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빛취게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이 십계명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이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넌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고귀한 법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고 구름기둥 불기둥 아래 있는 자 만이 이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 어떠한 보호를 받는가? 이 법 아래 있으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을 받습니다. 그들이 언약의 법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막문화였습니다. 성막의 중심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지성소에 보관된 언약궤에 하나님이 항상 임재해 계셨던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 계명을 지키면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