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출 15장

스네어 2014. 3. 21. 17:32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출 15:

그냥 그만 천국 가고 싶네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노래를 부르고 또 춤을 추고싶어 질 때가 있습니다. 소위 우리 인생이 잘 나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때, 성공이 우리를 부르고 손짓 할 때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의 노래가 지속되지 못하는 내 인생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갑자기 한순간 우리의 노래를 그치게 만들고 춤을 추든 우리의 동작이 손을 들어 가슴을 치게 만드는 가슴 아픈 고통이 한순간 기대하지 않게 우리의 삶의 장에 엄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경험이였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있는 출애굽기15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151절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노래로 시작하죠? , 노래로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이 출애굽기15장이 시작합니다.

 

한번 20절을 보세요. 출애굽기1520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아 지금 노래하고 춤추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이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출애굽기 1524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뭐 한다고 그랬어요? 원망하며, 한순간 노래를 그치고 그 속에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고통이 찾아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22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구절에 보시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얼마를 행하였다고요?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더라, 홍해바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간 후에 꼭 사흘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지 사흘만에 상황이 지금 역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얻지 못했어요. 광야에서 사막에서 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타는 갈증이 그들을 지금 괴롭히고 있습니다.

 

, 그들이 마라라는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지나서 하루에 20킬로를 행군했다면 사흘을 지났으니까 약 60킬로를 걸었겠죠? 지금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들은 KAL기를 타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내려서 이제 스에즈 운하를 버스로 건너갑니다. 스에즈 운하를 지나가면 30분쯤 정도 버스 타고 가면 마라 라는 장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지금 물을 얻지 못한 것이에요. 지금도 거기 모세의 우물 아이윤 무세라고 불리는 모세의 우물이라는 장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가면. ,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목 타는 갈증 때문에 물을 마셨지만 쓴 물 이여서 그들은 그 물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조금 전까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기뻐했든 이 백성들이 불과 사흘만에 지금 탄식하고 고통하고 신음하면서 원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생의 그림이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노래를 빼앗아 가는 이런 신음과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의 춤동작을 멈추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이런 고통이 우리의 삶에 다가올 때,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당했을 때 고통 그 자체보다도 우리를 더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하는 줄을 몰라요.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은 훨씬 더 깊이 우리를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내가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 속에서 견딜 것입니다. 버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이것처럼 우리가 고통이 우리의 삶의 장에 찾아올 때 중요한 과제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개인도 공동체도 더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내야할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 고통의 레슨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직도 레슨을 깨닫지 못한 우리들에게 한동안 더 이 고통의 행군을 계속하도록 허용하실 지 모릅니다. 아니, 우리 앞에 또 다른 마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3.1절을 기념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치하에서 당한 수모, 이것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고통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3.1절은 이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우리민족의 일어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민족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레슨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고통의 레슨을 제대로 배웠다면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별로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고통의 의미, 무엇일까요?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고통이 다가올까요? 이 고통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본문은 가르치기를 이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가르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다

 

아니, 하나님의 시험이라니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이런 반문을 하실 분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내가 보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시험을 말하십니까? 이것은 성경 조금 알아야 이런 질문 할 수가 있겠지요?

 

야고보서 1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사람들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영어성경으로 그 단어를 읽어보면 Tempt라는 단어가 쓰여져요. 명사로 Temptation , Tempt. 유혹한다 이런 낱말로 번역될 수도 있지마는 본래 이것은 파괴적 의미의 시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괴적 의도를 가지고는 우리를 결코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의도로 우리를 시험할 수가 있어요. 교육적인 의도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시험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시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Temptation, 파괴적 의도의 시험은 아니지만 이것은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내어주는 과제와 꼭 같습니다. 여러분, 공부하든 시절에, 아직 여러분 가운데는 공부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과거에 공부하든 시절에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어쩐지 나는 가슴이 설레고 시험이 기다려진다. 내 인생에서 시험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이렇게 느끼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보세요. , 그런 분 없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시험이란 필요 없다 시험 없애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네 아무도 시험을 엔조이 할 수는 없지마는 시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학생은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객관적인 내 실력을 평가하고 점검을 받습니다. 거기서 나는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할 때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비슷한 의도로 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험을 허용하신다고 생각해요. 본문의 시험은 그런 의미의 시험입니다.

 

, 본문의25절을 한번 다시 읽어보시면 25절 우리 다시 한번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십니다. 무슨 의도여요? 너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 붙들고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 내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의도로 시험을 하셨다 는 말입니다. 여기 시험하실새, 그 단어가 바로 오늘 이 본문의 이 단어가 영어성경에 보시면 그 단어가 테스트라는 단어로 되어있어요. 혹은 어떤 번역에 보면은 Proof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Proof, 이렇게 증명한다 점검한다 테스트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교육적 의미의 그런 시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을까요? , 오늘 출애굽기 151절이 어떻게 시작했어요? 무엇으로 시작했습니까? 노래로, 춤으로, 왜 노래로 시작했습니까? 15장전에 몇 장이 있습니까? ? 대답이 어렵습니까 14장이죠. 14장에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 홍해바다가 갈라졌어요. , 홍해바다 앞에서 죽을 줄 알았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갈라주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갔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춤추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고 원수들이 물 속에 장사 지내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든 이 백성들이 지금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후에 하나님은 상황을 바꾸십니다. , 목이 타는 갈증 속에서 가까스로 물을 마셨지만 토해낼 수밖에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을 허용하셨을까요? 저는 거기에 하나님의 이런 의도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너 사흘 전에 너희들 내 기적을 보고 찬양했지? 그리고 감사했지? 그런데 내가 시험하고 싶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너 찬양 할 수 있니? 너는 내가 너희들에게 베푼 축복 때문에 찬양했고 감사했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지? 그러나 이 축복이 계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적이 계속되지 않는 이 어두움과 메마름의 상황 속에서도 너는 아직도 여전히 나를 찬양하고 나에게 감사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니?

 

유명한 중세기 신학자 가운데 타마스 아카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렇게 공부하셨죠? 토마스 아퀴나스, 그런 신학자가 자주하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을 가진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나에게 훨씬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니 대부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어쩌면 이런 동기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하고 싶어했든 것은 이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지 모르지만 내가 그 하나님을 경험했더니 그 하나님과 관계했더니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갔더니 그 하나님이 너무 좋은 거여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지금은 제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요. 조건 없이 사랑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 거여요. 그래서 찬양하는 겁니다.

 

, 우리가 부부로 남편과 아내가,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을 때 조건이 없을 수는 없죠? 조건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저 남자를 만나면 저 여자를 만나면 내 인생이 훨씬 더 행복해지겠다 라는 어떤 판단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을 내 배우자로 선택하고 우리는 결혼에 골인해서 부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까 거기서 조건이 없는 인격적인 사랑이 싹터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어느 한 순간에 도달하면 이럴 수가 있어요. 여보, 난 당신이 그냥 좋아, 너무너무 좋아, 밥 안 해주어도 난 좋은 거야 너무 너무 사랑해! 저는 날마다 그렇거든요?

 

이것은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이에요. 조건을 뛰어넘은 것이에요. 그 한 인격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런 사랑을 지금 시험하고있는 것이에요. 너 내 축복 때문에 사흘 전에 춤추고 노래했는데 내 기적 때문에 그렇게 찬양했는데 그 기적이 계속되지 않아도 오늘 이 메마른 광야 가운데서도 나는 너희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너 오늘도 찬양할 수 있니? 이 사막에서도 찬양할 수 있니? 이 광야에서도 찬양할 수 있니? 그리고 메마를 광야에서도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나를 향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니? 이것이 테스트여요. 이것이 테스트. 그러므로 고통이 올 때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테스트라는 것을,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아차린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여러분과 저가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은 무엇일까요?

 

둘째로 고통의 의미,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아니 아무리 고통이 소중한 어떤 레슨을 준다고 그래서 고통 그 자체가 목사님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고통 그 자체가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두 가지 이유,

 

첫째 이유는 뭐냐하면 대부분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를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성도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결코 고통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제대로 이 고통 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반응한다면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아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 본문에서 어떤 사건을 볼 수가 있죠? 자 지금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 쓴 물이 변하여 어떻게 되었어요? 단물이 되었어요. 거기 나무 가지 하나를 던졌더니 그 쓴 물이 변하여 단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 그 단물이 얼마나 대단한 맛이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단물을 계속 맛보았더라면 그 단물이 얼마큼 실감나는 단물 이였을까요? 그러나 조금 전에 쓴 물을 맛보았기 때문에 마실 수 없고 토해 냈기 때문에 그래서 맛본 그 단물은 얼마나 더 감격적인 단물이였을까요?

 

여러분 인생의 그 쓰디씀의 요소가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그 진정한 달콤함을 우리는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슬픔이 없이 기쁨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요? 고통이 없이 환희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요? 이별의 그 쓰라림이 없이 우리는 만남과 해후의 그 감격을 알 수가 있을까요? 상실의 고통 잃어버리는 고통이 없이 소유하고 있는 행복을 우리가 알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얘기인데요 불란서의 그 루불 박물관에 그 유명한 모나리자 상이 일시적으로 도난 맞은 때가 있었다고 그랬지요? 그때 어떤 사건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가장 많은 숫자의 관광객이 루불 박물관을 찾았다는 거여요. 왜 그랬을까요? 그 도난 맞은 그 자리를 구경하려고 왔어요. 없어진 그 자리 구경하려고, 우리는 없어지고 나서 우리는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고통 때문에 이 고난 때문에 우리에게 축복은 비로소 축복으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 그래서 고통은 또 다른 축복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인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고통, 나는 알아 이 고통은 축복이야!

 

이 고통이 축복일 수가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제가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했죠? 고통 저 건너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자리까지는 결코 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을 넘어서면 그리고 고통을 견디고 나가면 축복은 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교훈입니다.

 

,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나는 줄 아십니까? 마지막 구절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527절입니다.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 마라라는 장소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1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여요. 그러니까 뭐 금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요. 11km정도, , 아주 가까운 거리죠. , 마라에서 조금 지나가서 이 엘림에 도달했더니 엘림에 뭐가 있어요? 우선 뭐가 있다고요?

 

물샘이 열두 개, 여러분 사막에서 단 하나의 샘물도 소중한데 그 샘물이 무려 열두 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가 몇 개가 있어요? 7그루가,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오아시스일까요? 얼마나 풍성한 오아시스여요? , 이 마라 바로 저 건너편에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엘림, 이 풍성한 오아시스, 그런데 지금 마라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고 있습니까? 왜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해요 엘림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요. 엘림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존재합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요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끝없는 고통이 그대로 인생을 자폭해 버릴 것 같은 이 끝없는 고통의 터널이 오늘 나를 붙잡고 나를 괴롭힙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엘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존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비젼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엘림을 준비하셨어요. 할렐루야! 엘림을 준비하셨어요.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얼굴 쳐다보시면서 특별히 인상 쓰는, 옆에 사람 쳐다보시면서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한번 해 보세요.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그래도 계속 인상 쓰는 사람은 인생의 희망이 없습니다. ,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고통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고통 앞에 제대로 반응하면 심지어 오늘 민족이 당하고있는 우리 민족적인 고통의 경험도 이것이 우리민족이 경험할 수 있는 위대한 엘림의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만하면 잘 통과할 수 있다는, 저는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또 우리역사가 이 고단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엘림의 비전과 계획을 붙잡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고통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계시다그게 무슨 뜻일까요 고통이 하나님의 계시라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고통이라는 장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스스로를 보여주신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편에서는 내가 고통의 장에서 그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요. 고통의 장보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삶의 장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6절의 말씀이 그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26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고있어요?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들에게 내리지 않겠다. 그 앞에 전제가 있어요. 만약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살면, 너희들이 질병을 넘어선다 극복한다 치유될 것이다. 또 오늘의 고통도 치유될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지막에 자신을 어떤 말씀으로 계시하셨습니까? 내가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따라서 하세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이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부릅니까? 여호와 라파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여호와 라파다른 말로 야훼 라파, 그 말의 뜻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Healing God ,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질병의 자리입니까? 질병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질병 때문에 그 아픔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고치셨다 나는 새롭게 경험하는 거여요. 어떤 하나님을? ! 하나님은 분명해, 사람들이 들려준, 목사가 말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내가 경험해 보니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야! 저는 여러분이 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치유의 하나님은 우리의 병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환경도 치료하십니다.

 

, 마라의 쓴 물, 그 쓴 물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더니 하나님이 간섭하셨더니 그 마라의 쓴 물이 바뀌어서 무슨 물이 되었다고요? 단물이 되었어요. 환경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우리의 병든 가정, 오늘 고통 당하고있는 가정, 오늘 갈등 속에 딜레마 속에 빠져있는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고단한 역사, 우리의 민족도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남북의 갈라져 있는 이 고통도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고통은 그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의 계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욥기를 많이 읽죠? 욥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욥기를 대하고있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 욥이 지독한 고난을, 고통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버티고 견디었더니, 마지막 장에 보니까 욥기 제일 마지막 장에 보니까 마침내 욥이 축복을 갑절로 더불로 받았다 재산도 더블로 늘어나고 자식들도 갑절로 늘어나고 마누라도 더블이 되었다 그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나와 함께 삶을 그렇게 정겹게 나누었든 내 마누라가 죽고 그리고 다른 마누라 얻어서 더블로 축복 받았다 그게 축복일까요? 일찍 가신 마누라는 얼마나 가슴을 칠 일입니까?

 

저는 그것이 축복이 아니고 저는 욥기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 있다면, 교훈이 있다면 욥기 마지막 장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욥기 425절에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이 고통 후에 회개하고 엎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무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었사옵더니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저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귓결에 들었어요.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더라, 제가 하나님을 귀로 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지금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눈으로 뵙고 있어요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고통 속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고통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그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 거여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 속에서 만난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더라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만 확인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아무리 나를 짓누르고 아무리 고통이 와도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 우리는 다시 일어 설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그 모세가 이 쓴 물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나무 가지를 하나 탁 던졌어요. 그랬더니 물이 변했습니다. 좀 지나친 감도 있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든 알프핑크 라는 성서주해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나무 가지에서 십자가를 본다.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나무를 본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방법중의 하나,

 

우리 베드로전서 224절에 보시면 십자가라고 그러지 않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인류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뭔 줄 아세요?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고통의 의미를 물어도 사실은 제가 설교하지만 속 시원하게 그 의미를 다 해결하거나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면 한가지 분명한 대답을 얻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아!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같이 고통 하신다. 고통 속에 있는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오신 하나님, 그 십자가에서 그분도 애매하게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그 고통 그 아픔을 당하신 그 주님, 그리고 내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씀하시며 내게 다가오시는 그 주님, 그분을 믿었더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 이 고통 속에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 삶의 현장에 찾아오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게 찾아오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는 줄을 저가 믿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일어나요 다시 일어날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따뜻함을 안겨다 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 책 가운데 세계적으로 치킨 스프 스토리 (Chicken soup for the soul)가 있죠? 그 중에 한 이런 아름다운 얘기를 제가 기억합니다.

 

미국의 중부 시골마을에 마샤 에븐스라는 틴에이저 소녀 하나가 살았습니다. 12살에서 13살이 되면서 틴에이저로 들어서면서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입 근처에 신경조직이 잘못되어서 수술을 받는데 수술도중에 그 신경하나를 건드려서 이 마샤 라는 어린 소녀의 입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틴에이저 소녀가 입이 삐뚤어지니까 보통 그것이 자화상의 상처를 받는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친구 만나기 싫어하고, 학교 가기 싫어하고, 가기는 가도 말도 하지 않고, 친구들을 떠나게 되고, 집에 와서도 말하지 않고 엄마하고도 심지어는 대화를 끊었습니다. 우울한 소녀가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13, 그 해가 끝나 갈 무렵 자기의 생일날, 뜻밖의 그 생일날 이 소녀 앞에 그 선물소포하나가 배달이 되었는데 꽃이었어요. 치자 꽃 한 송이, 아주 아름다운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치자 꽃이 뭔 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꽃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있죠? 전 모르지만 있데요 하여튼 치자 꽃, 굉장히 아름다운, 하여튼 나는 무슨 꽃인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치자 꽃 하나가 배달이 되었답니다, 한 송이가. 그런데 누가 보냈는지 몰라요. 익명으로 배달이 되었어요. 단지 한마디 마샤! I love you so much”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치자 꽃을 보고 가만히 마샤가 있다가 처음으로 몇 달만에 엄마하고 대화를 열었습니다.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엄마 이게 누가 보냈을까 도대체 이게 누굴까? 글쎄 말이야 누굴까? 아마 너를 좋아하는 남학생이겠지. 에이 누가 나를 좋아해 나 같은 사람을, 그래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럼 이름 쓰지. 수줍어서 아마 남자들도 뜻밖에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얘, 아마 그런 사람이 보냈겠지. 그럴까?.

 

, 아무것도 아닌 치자 한 송이 꽃 때문에 마샤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도 생일날 어김없이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이 됩니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샤는 밝아졌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때까지도 계속 배달이 되었어요. 궁금했던 것이 결혼 후에도 이 꽃이 배달될까? 그런데 자기가 시집가고 결혼하자말자 결혼 직후에 불행하게도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치자 한 송이는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샤는 알았습니다. 누가 그 꽃을 보냈는지, 꽃이 마샤의 인생을 바꾼 것이 아니죠. 엄마의 사랑이 바꾼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고백가운데 많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일까요? 십자가라는 나무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 고통 속에 있지만 고통의 의미를 풀지 못하지만 그러나 이 고통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한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나를 창조하신 나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그 하나님 만나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 그 하나님 한번 붙들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의 세월을 극복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라에서 벌떡 일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또다시 찬양을 부르며 춤추며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하나님의 고통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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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림으로 가는 길 김흥규 목사 출 15:

 

1. 두 세계: 병든 세계 '마라'와 건강한 세계 '엘림'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엘림으로 이동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쓴물을 얻자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지도자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림으로 갔는데 그곳은 낙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엘림이라는 말은 '나무숲이 있는 곳'(Place of Trees)이라는 뜻으로서 사막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처와 같은 낙원이었습니다.

 

엘림에는 물샘 12개가 있어서 12지파가 물 때문에 다툴 일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70 장로들(24:9 참조)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70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늑한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사막 여행길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엘림은 오아시스요 낙원이었던 것입니다!

 

엘림의 샘물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엘림의 종려나무들은 축복을 상징합니다. 엘림은 건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엘림으로 가는 길은 구원으로 가는 길이며 축복에 이르는 길이며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엘림으로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엘림으로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마라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를 지나서 엘림에 이르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영적인 마라의 세계를 잘 통과할 때 영적인 엘림의 세계에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라를 통과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치료하시고 인간의 상한 육신과 심령을 건강하게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 26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 말씀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라의 기적은 이 말씀 하나에 그 의미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병든 마라의 세계에서 건강한 엘림의 세계로 옮겨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2. 마라에서 엘림으로 가기 위한 세 가지 단계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모든 영적 교훈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집중할 경우 우리는 치료가 일어나기 위한 세 가지 단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단계는 마라에서 엘림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다름 아닙니다.

 

1) 증상(SYMPTOMS):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증상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라의 세계는 병든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먼저 자연세계인 물이 병들어서 썼던 것입니다. 물은 마실 수 있는 단물이 될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이 썼다는 것은 물이 병들어서 물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라에는 물만 병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병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이 병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하다가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출 15:1-21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한 뒤 승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홍해를 건넌지 겨우 사흘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영광의 찬양을 드렸던 입술로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있습니다. 3: 10의 말씀처럼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갑자기 불평하게 된 것은 물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그들은 사흘 동안 수르 광야를 방황했지만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불볕 더위가 내려 쬐는 중동의 사막 지대에서 물은 엄청나게 귀합니다. 사흘을 걸었는데도 물을 얻지 못했으니 얼마나 갈증이 났겠습니까?

그러다가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물이 썼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쓴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쓴물을 얻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원망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불과 사흘 전에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을 잊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홍해 바다를 갈라 놓으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출애굽 후 첫 번째 터뜨린 불평이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주어질 경우 얼마든지 사사건건 불평하고 원망할 것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불과 사흘 전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안중에 없습니다. 영혼이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병이 들면 증세가 나타납니다. 특히 자각 증세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 자신이 느낄 수 있습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든지 병든 부위가 콕콕 쑤시는 증세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병에도 증세가 있습니다. 자꾸 화가 난다든지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이 나온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서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쓴물 앞에 불평을 털어놓는 것은 영혼이 병들어 있음을 알리는 징후임을 잊지 마십시오!

 

2) 진단(DIAGNOSIS):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진단을 정확하게 내려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병세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훌륭한 의사와 그렇지 못한 의사의 차이는 병의 원인을 가려내는 데 있습니다. 때로 오진(誤診)을 해서 얼마나 많은 의료사고들이 일어납니까? 마찬가지로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그 병의 영적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영혼에 병이 들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라의 쓴물 앞에서 원망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굉장히 가까운 거리입니다. 직선 거리로 걸어서 들어갈 경우 겨우 일주일 정도면 족합니다. 빙빙 돌아서 우회해 들어간다고 해도 한 달 정도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하게 만드셨습니다.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불안정한 곳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와 같이 위험하고 불안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 방황하게 만드셨습니까?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안전한 피난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연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턱없이 부족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믿음 하나를 온전히 가르치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라의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믿음이 전혀 없는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까? 불신앙 때문에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옳습니다. 왜 우리의 입술에서 불평과 불만족이 쏟아져 나옵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병드는 제일 첫 번째 원인이 불신앙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3) 처방전(PRESCRIPTIONS):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처방전이 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해서 원인을 알아냈으면 처방전을 내립니다. 약을 먹든지 수술을 해야 한다든지 해서 처방을 줍니다. 영적인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세를 알고 나서 올바른 진단을 했으면 이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의 쓴물 앞에서 영적인 병의 증세를 보였습니다. 원망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 병의 원인이 불신앙에 있음을 진단하시고 이제 구체적인 처방을 주십니다.

 

먼저 25절에 보면 모세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병들어서 쓴물을 단물로 고치시기 위하여 나무를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참믿음의 본을 보이기 위하여 아무 말 없이 나무를 물에 던졌습니다.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자연세계인 물이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리는 곳마다 쓴물이 단물, 즉 생명의 물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벧전 2: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모세가 나무를 던져 쓴물이 단물 되도록 만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미치는 곳마다 모든 영혼의 쓴물이 생명의 단물로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요 4:1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옳습니다. 모세가 나무를 던져 쓴물을 고쳐 단물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눈앞에 보이는 물을 기적적으로 치료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병을 고치기 위한 처방전까지 내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다함께 26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혼의 병을 이길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지도록 여러 가지 삶의 원리들, 즉 법도(STATUE)와 율례(ORDINANCE)를 정해놓으셨는데 그것을 따라 살기만 하면 모든 영혼의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마라에서 엘림으로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마라의 세계는 병든 세계입니다. 치유가 필요한 불신앙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고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의 병을 고치시려고 했습니다. 그리해서 모세에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모범을 보이게 하셨습니다. 나뭇가지를 지시하셨을 때 모세는 아무 말 없이 쓴물에 던졌습니다. 진정한 신앙이 순종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먼저 물에서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물의 치료가 일어난 다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치료하시는 하나님, 'YAHWEH ROPECHA'이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쓴물을 단물로 치료하실 뿐 아니라 인간의 병든 영혼도 치유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에 들어간 것을 주목하십시오. 영혼의 병마로부터 놓임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는 낙원이 엘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불신앙의 세계 마라로부터 신앙의 세계 엘림으로 나아가십시오! 병든 세계인 마라로부터 건강한 세계 엘림으로 건너가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살면 엘림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 마라에서 엘림으로 건너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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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를 건너며

본문 : 15:1~18

19991226일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러분은 20c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그리고 이땅에 출생하여 오늘 까지 살아온 내 나이 만큼의 세월을 지켜오신 주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릴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여러분 이 찬송의 가사를 여려분의 신앙으로 고백하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우리의 가정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우리의 교회가 있을 수 있을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참 감사를 합시다.

이제 우리는 (나는) 막연하기만 했던 인생의 홍해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 광야 세월이 어떠할지는 지금 알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릴 살리시느라고 이 홍해를 건너게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죽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요 '살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1900년대를 몇 년에 걸쳐 살아오셨는지는 각자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우리는 똑같이 2000년대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떤 사람은 이미 1900년대를 많이 살았기 때문에 2000년대는 지금까지 만큼의 세월을 못 살아보고 하나님 품으로 갈 분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제 겨우 시작이기 때문에 2000년대가 인생의 본격적인 막이 열리는 시기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저들이 "출애굽"할 때 그백성 중에는 홍해를 건너서 광야세월을 다 보낼 이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겨우 홍해만 건너고 곧 이 세상을 떠날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홍해를 건너는 마음만큼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 감격 하나님이 베푸신 이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데 대한 감격이 저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이 다 다릅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생활형편이 다르고, 가정환경이 다르고 지금의 마음자세까지도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물질의 유무와 관계없이, 건강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다 새세기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 할지라도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은 이 특별한 시기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출애굽 당시의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모세 앞에는 지도자가 없었습니까? 성경의 흐름을 따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저들이 정말 위대한 인물들 이였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출애굽 홍해바다가 갈라져 그 길을 건너는 체험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음도 큰 감사의 요건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홍해도하작전"을 마치고 나서 저들의 시선은 앞에 놓인 광야 길 보다는 '지금 막 건너온 이 붉은 바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20c21C라는 세월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자꾸만 지나온 20C를 추억해 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예년 같으면 지난해의 10대 뉴스가 관심거리였는데 요즘은 지난 100년간에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10대 사건. 가장 위대한 인물. 가장 악한인물을 정리해 보느라고 메스컴이 분주합니다. 우리도 개인적으로 10대 뉴스와 교회적으로 10대 뉴스를 한번생각해 보는게 어떨까 합니다.

저 개인적인 인생의 10대 뉴스 중 가장 큰일은 주님을 만난 일이었고 그 다음이 '주의 종'이 된 일이었고 그 다음이 "수성교회"를 만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건너고 나서도 '이젠됐다. 겨우 살았다' 하지 않고 "은혜",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절대 빠질 수 없는 "두기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두 기둥. 그것은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었습니다. 불기둥은 밤에 필요했고 구름기둥은 낮에 필요했습니다. 즉 밤낮없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13:21-22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10대 뉴스. 우리교회의 10대 뉴스. 우리 가정의 10대 뉴스를 정리해 보면서 무슨 결론에 도달하게 되셨습니까? 밤낮없이 앞길 인도하여 여기 199912월 마지막 주까지 이끌어 오신 여호와 하나님. 사네 못사네 했어도 결국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십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이란 그저 낮에 잘 보이도록 구름기둥, 밤에 환하라고 불기둥인 것만은 아니라 낮에는 뜨거운 햇살을 가려줄 그늘도 필요했고, 밤에는 추위를 녹여 줄 불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시절부터 입에 다 "죽겠다"를 달고 살아온 민족이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죽겠다' '앞에는 홍해 바다 뒤에는 애굽군대 무서워 죽겠다' 그리고 나서도 '마실것이 없으면 목말라 죽겠다' '먹을 것 없으면 배고파 죽겠다' 심지어는 '맨날 만나만 먹고 살려니 질려 죽겠다 고기 좀 먹게 해 달라' 얼마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길이였는지 모른다.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살아도 "그때마다" 나아갈 길, 살길을 열어 주셨던 하나님이셨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과거에 '죽겠다' 하고 살았던 지 앞으로도 '죽겠다'하고 살게 될 것이든지 지금 홍해를 건넌 이 순간만큼은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세월 우리가 겪은 일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정말 죽겠다' 하면서 우리가 199912월 마지막 주일까지 도착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그래도 살 수 있을 만큼 환경을 조성하시며 이끌어 오신 주님'을 찬양해야 할 때입니다.

새천년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난 또 다시 '죽겠다'를 시작하게 될 지언정 지금은 주님이 친히 간섭하시며 이끌어 주심을 인하여 감사 찬양을 올릴 때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모두는 "홍해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은 홍해 바다 뒷편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세월은 홍해 바다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지난 과거의 아쉬움을 떠올리기만 할 때가 아니라 그저 지금 이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할 뿐입니다. 지금은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미래를 염려하기만 할 때가 아니라 그저 지금 1900년대 라는 홍해바다 이 편에서 2000년대라는 홍해바다 저편으로 건너게 하시는 주님을 향한 감사 감격의 노래만이 충만할 뿐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며 깊은 감회에 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막 지나온 홍해바다 저쪽 애굽쪽에서 도데체 어떤 경험을 했었는가 생각해 봅시다. 그들 앞에 놓인 이 붉은바다는 곧 '절망이요 좌절이요 인생의 한계점이요 불가능이요 사망이었던 것이다' 도저히 지금 상황에서는 '살길은 없다. 이젠 소망이 없다'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십시오. 지난 한해 아니 지나온 한 평생 갑자기 앞길을 콱 가로막는 담벼락을 만난적이 있었습니까? 생각지도(예상치도) 못했던 순간 그래서 더 당황되고 막연하고 답답하기 그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무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 던지가 도무지 생각나질 않아서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만 짓고 있었던 때는 있었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때 당시 생각대로 그렇게 모든게 다 끝나버렸습니까? 어떻게 그때 끝나질 않고 여기 도착해 있는 것입니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안되는 자리까지 몰아가신 주님' 그 주님의 깊은 뜻을 만나고, 기필코 꿈깥은 역사를 두눈으로 목격하고 나서 지금 이 홍해 바다 사이 맨땅을 발로 밟으며 나아가고 있질 않습니까.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온 이스라엘 백서들은 특별한 감회에 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저들은 하나님이 열어주신 바닷길 만을 건너고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과거를 건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쪽 바닷가에 저들은 실패의 과거 절망과 상처뿐인 과거를 두고 건너고 있는 것이 였습니다.

애굽쪽 바닷가에 저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불신앙'의 부끄러운 '과거'를 두고 이 바다를 건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 바다를 건너가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역사상 특별히 선택된 우리를 이 역사의 바다를 건너는 주인공으로 삼으셨습니다. 얼마나 수 많은 좌절과 낙심을 경험하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우리의 맡은 신앙을 절감했습니까? '이젠 정말 방범이 없다.'는 말도 얼마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며 여기까지 나왔습니까?

과연 누가 이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질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어떤 의미로든 정리해 보고픈 것이 인생의 본능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정리하려거든 찬송가사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입니다"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무엇을 노래하였는가 하면 "주님의 손, 주님의 오른 손"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섬세하게 봍들어 인도하신 주님의 오른 손이 지금 이 역사적 전환기에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인생도 이끄실 줄 믿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만하든, 부끄러운 것 투성이든 "주님의 붙들어 주신 손" 그 손의 간섭이 있었음을 부인치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홍해바다를 건너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렀던 찬양이 지금 이 20C에서 21C로 넘어가는 우리 믿는 이들의 찬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은 "주님의 오른손이 붙드심으로 우리가 절대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음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그저 내 버려 두셨으면 도저히 내 힘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도 없는 약하디 약한 나를 그 능력의 팔로 붙드셔서 지금 홍해를 건너고 있습니다. 하나님! 참 고맙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찬양입니다.

 

조셉 스크리븐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식 하루 전날 약혼녀가 수영 하다가 죽는 비극을 당하여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완전히 자포자기된 심정이였기에 그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삐둘어진 인격으로 살아갔습니다.

 

누구든지 회피하고 곁에 있어주질 않았으나 누굴 만나든지 '시비'만을 걸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아일랜드 였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고향. 부모, 형제를 남기고 혼자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알지 못하는 곳에 가면 좀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가 캐나다에 와서 "교회"에 출석하고 은혜 받고 신앙의 깊은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스크리는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 "나는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느낄 때 그동안 나 자신을 학대하고 아무렇게나 살아온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깊은 자리에 들어간 스크리븐은 저가 본래 가졌던 문학적 재능을 살려 찬송가사들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너무나도 유명한 찬송 487"죄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구지"가 탄생되었습니다. 그 가사중 3절은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여서 참된 위로 받겠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인생의 절망의 자리 위기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참된 값어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자기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감동을 찬양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간증을 들으면 우리는 '특별한 사람''특별한 체험' 한 것 인줄만 압니다. 아닙니다. 여기 살아오면서 실패담이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 굴러 떨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기 '상처' 안 받아보고 살아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홍해를 건너면서 위기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이스라엘처럼 지금 우리 살아온 지난 날 속에 깊숙이 간섭하시고 그 많은 아픔, 좌절, 상처 속에서도 지금 2000년대를 코앞에 둔 이 시점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은 10"주님의 오른손이 일으키신 "특별한 바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1"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9"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분명히 본문은 주님의 오른손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지금 10절의 이 바람은 물을 덮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4: 21을 보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이 특별한 바람은 저절로 불어올 계절이 되어서 불어오는 바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다를 가른 것도 '이 바람' 이었고 바다를 다시 덮은 것도 '이 바람'이었습니다.

 

10절은 이 바람의 이름을 "주의 바람"이라 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바람'에 대한 잊지 못할 체험을 안고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의 바람'에 대하여 찬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 한해 마지막 주일로 이제 새 세기의 첫 주일을 맞기까지 우리의 역사에도 '주의 바람'은 분명히 불어왔습니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의 오른 손이 높이 들릴 때 위기에 봉착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기적의 바람(주의 바람)'이 또 한번 불어왔습니다. 무척 중요한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실 '주의 바람' 덕에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때 그때마다 '기적의 바람, 능력의 바람, 변화의 바람,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시면서 절망의 늪에 빠진 우릴 건져내셨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삶에 하나님의 바람은 지속적으로 불어 올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물질의 바람, 건강의 바람, 무엇보다 성령의 바람'을 불어 주셔서 '말씀과 기도로 그리고 성령으로 우릴 다시 일으키실 줄 믿으십시오'

 

 

3. 이스라엘은 "주님의 오른손이 저들을 은혜의 세계로 이끄신다" 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3"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임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삼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이제 홍해를 건너면서 이스라엘은 앞을 내다보기 시작했습니다. 홍해바다 저쪽 애굽쪽 에서부터 붙들고 오신 주님의 오른손이 앞으로 홍해바다 건너 광야길 쪽에서도 한결 같을 것을 빋고 감사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주께서 '은혜의 세계''더 밝은 미래'로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13"성결한 처소"라 표현되고 있고 17"기업의 산"이라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아가 만나게 된 2000년대라는 시간은 주님이 "주신 시간"인 줄 믿으십시오. 그곳이 우리가 나아갈 광야요 우리가 반드시 도착할 '가나안'(천국)으로 가는 길목인 줄 믿으십시오. 그저 세상 사람들이 막연하게 '잘 되겠지 잘 될거야'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희망은 지금 이 순간 예배당에 앉아 있는 우리나 세상살이에 바쁜 불신자들이나 다 똑같습니다. 새해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구동성 "우리가족 다 건강한거구요 올해 보단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워 지구요.....(새해엔 시집, 장가 가야지...아기 가져야지...내 집 장만해야지...)" 누구나 이 소린 다 합니다. 이것은 "소망"입니다.

 

우린 좀 다릅니다. '우린 잘 될 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건 희망사항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근거가 있습니다.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미래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이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시간, 그 시간은 막연할게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 주신 시간, 주님 손에 이끌려 살아갈 텐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이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홍해를 건너면서 우리가 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주님 오른 손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