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8장
새로운 비전을 보라 ·창 28장
미국의 유명한 지도자들과 사회적인 큰 인물들을 많이 탄생시킨 지역이 바로 뉴잉글랜드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독특한 구호가 있는데 그것은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큰 뜻을 품으시오)" 그래서 청소년들이 그것을 혹시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해도 충고하는 용어가 "boys be ambitious"라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비전을 주는 구호 때문에 뉴잉글랜드의 지역에서 미국을 큰 나라로 만드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21세기를 맞이해서 세계적으로 제일 많이 쓰여지는 용어가 비전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미 잠언서에서 이 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비전을 주는 종교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니엘 등 많은 예언자들이 우리에게 비전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비전을 가지고 살아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형의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 또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위장을 하고 들어가서 받았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장자에서는 몹시 분노해서 동생 야곱을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안 야곱은 도망을 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브엘세바를 지나서 하란을 거쳐 루스라는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해는 서산으로 졌습니다. 익숙할 것이 없는 허허벌판인 광야입니다. 야곱은 돌을 하나 취해서 베개로 하고 누워서 고독하게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때에 야곱은 놀라운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지도자나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큰일도 할 수가 없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은 "지성보다 중요한 것은 꿈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요즘과 같이 어려운 시대에는 벽에 부딪치고 어디 빠져나갈 길이 암담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우리는 야곱처럼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서 보아야만 우리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려지게 된다는 교훈을 본문의 말씀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1. 한밤중에 새로운 비전을 보라
한밤중에 광야에서 새로운 비전을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방법 지혜를 다 동원해서 장자의 기업을 누리게 되었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형과 같이 지낼 수 없으니까 집에서 도망쳐 나와서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를 지나 하란을 거쳐 루스라는 땅에 와서 그는 한 밤중에 유숙할 곳이 없으니까 광야에서 돌을 하나 취해서 누웠습니다. 그는 주위가 한밤중이며 광야이고, 마음 속까지 깜깜한 밤중이지만 허허벌판 광야에서 방랑의 생활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죄책감과 고독과, 공포심으로 소망을 잃어버린 체 광야를 헤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렸을 것이다.' 라며 불안해하는 야곱에게 뜻밖에 비전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기록된 대로 사다리가 땅에서 위로 뻗어졌습니다. 바로 보니 사다리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이상한 비전을 야곱이 보았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 때때로 인간이 극한상황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전을 보여 주시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일곱 번이 나옵니다. 비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극적으로 하나님과 조우하는 것 중 이것이 첫 번입니다. 루스라는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는 밤중에 사다리를 보는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왕이 죽을 때에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캄캄한 밤중과 같은 절망에 쌓였을 때에 이사야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스랍들 사이에 가리워진 하나님을 보고 이사야는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소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욥도 그가 시련의 고통 중에 겪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큰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같은 사람도 이방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가 시련과 고통 속에 있게 될 때에 큰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고독하게 유배를 당해 있을 때 하나님의 환상을 수없이 보면서 하나님께서 위로의 하나님이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돌보시고 놀라운 위로의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당한 처지는 어쩌면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과 같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이젠 벽에 부딪치고, 외국의 압력을 받으면서,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좌절에 있습니다. 도망치고 있는 우리들에게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비전을 보는 영적인 각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다리가 올려 뻗쳤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치고 있는 야곱에게 다시 한번 사다리를 내려서 사다리를 통해서 새로운 교통과 관계성을 맺게 하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기업의 어려움이라든지 정부의 어려움의 문제는 단 하나, 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3년 후를 미리 바라보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지도자들이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라는 공통적인 해석입니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가질 때에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합니다.
야곱은 아주 간사하고 지혜가 있었고, 어떻게 보면 사기성이 있어 보이지만 야곱은 인내하면서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그가 목표하였던 비전을 성취한 것입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이 기회를 포착할 줄 알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절망과 좌절 가운데 어떻게 빠져나갈 길을 찾아보는 상황에 있을 때 수평선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위로 뻗어진 사다리를 바라보는 위를 바라보는 새로운 비전을 가질 때 우리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은총의 길이 열려질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경제적인 위기에 닥쳤을 때 경제관련 강의를 유심히 들어보면, 기본적인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재정구조나 재무구조 등 기업의 기본적인 질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 나라와 땅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구조가 잘못되면 이런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구조를 개혁하고 기본적으로 돌아가서, 기본적인 것을 되 찾으라.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찾아 나가라하는 교훈이 캄캄한 밤중에 광야에서 야곱이 비전을 본 것입니다.
2. 언약으로 축복하신 은총의 비전을 보라
야곱은 하늘의 비전을 볼뿐만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미 기왕에 얻은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동서남북에 자손이 편만하고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반복해서 계속해서 들은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룰 떠나지 아니하라라 하신지라(창28: 15)" 야곱은 거짓말을 하고 부도덕하고 하나님 앞에 소외당하고 하나님께서 제껴 놓은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룰 뿐 아니라 야곱에게 약속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회복시키시며 약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 하신다며 야곱을 위로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전혀 예기치 못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며 등을 돌리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은혜를 도망치는 야곱에게 주신 것입니다.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야곱은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기독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31장부터 33장까지는 약속대로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무도 야곱을 해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총인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이 동남아시아에 제일 만족스럽게 사는 족속들이 있다고 해서 알아보니까 발리섬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발리섬을 방문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지낸다는 발리섬 주민들에게 일주일간을 머물면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떻게 만족하면 지내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다섯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첫째로는 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요즘 조급한 것은 우리가 너무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어려움입니다. 단순화 될 때 마음에 불안이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들은 단순하게 산다고 답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과거보다 너무나 많이 복잡해 졌기 때문에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웃끼리 서로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네번째로는 더운 지대이기에 먹을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는 아름다운 섬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발리섬의 주민들은 환경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기뻐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생각 속에서 큰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도 새해에 여러분이 서원기도제목 쓴 것을 기도실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모두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를 지켜 주시고 남편의 직장과 기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어떤 사람은 첫머리에 금년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시도다' 그렇게 쓴 사람들이 많은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첫머리부터 우리가정에 평강을 주시고 우리의 자녀를 지켜주시고, 기업을 지켜 주시기를 서원하며 하나님 인도와 보호, 위로를 바랍니다. 오늘 누가 인도하십니까? 정부가 책임질 것입니까? 공장과 기업이 여러분을 책임질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성경의 말씀대로 어디를 가든지, 지켜주시고 회복시키신다는 위로의 말씀이 바로 여러분의 말씀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어린이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나오냐고 물어보니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근처 압구정동에 살고 있는데 무서워서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 다음 계속해서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무서워서 전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나와서 교회학교에서 하나님 말씀 들어보고 하나님께서 너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고 배우자고 했더니, 그 어린이가 "나는 교회 못나가요. 아버지가 교회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책은 많은데 아버지는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내 마음에 평화를 주지 못해요."라고 두려워하며 교회에 못나올 것 같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그 어린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책이 많다고 합니다. 종교에 대한 책도 많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못나가게 한다
고 합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 우리의 질고, 불안을 누가 위로하고 인도하며 누가
지켜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캐나다에 갔을 때 목사님이 벤쿠버 병원에 우리 집사님이 한 분이 암으로 입원해 있다고 했습니다. 이민 온지 오래되신 분인데 제가 가서 안수기도 해주시면 좋겠다고 해서 쾌히 승낙을 하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을 위해서 기름을 바르며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니까, 그분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 연락이 오기를 그분이 병이 다 나아서 퇴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치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궁극적인 인도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데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이 우리의 삶을 지키시는 은총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앞에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우리에게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은총가운데서 승리해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비전을 보고 새롭게 결단하라
야곱은 사다리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내가 너를 지키고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결단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은 결단이 늦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단의 사람입니다. 벌써 우리가 2년 전에 결단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결단이 늦었기 때문에 외부의 세력에 인해 결단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듣고 결단을 했습니다.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1-22)"
하나님 믿는 신앙의 결단, 예배의 결단, 헌신의 결단을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기본적인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가 있습니다. 야곱의 놀라운 결단을 배우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은 실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에 대해서 우리는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비전을 보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나라는 야곱의 이스라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중에 갔다가 둥지에서 알을 하나 주워서 왔습니다. 그 알을 닭장에 넣었더니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처럼 돌보았더니 다른 알에서 태어난 이상한 새가 다른 병아리와 같이 행동합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병아리도 아니고 기러기도 아닌, 독수리였습니다. 독수리가 병아리 사이에서 어미 닭을 따라다니며 모이를 주워 먹고 병아리처럼 행세합니다. 부리가 무섭게 생기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긴 독수리임에도 병아리처럼 행동합니다. 한 번은 조류학자가 와서 보니 독수리가 매우 컸는데도 닭처럼 모이를 주워 먹고 있었습니다. 조류학자가 얘기하기를 양해를 구했습니다. 독수리이기 때문에 닭장에서 이렇게 키울게 아니라 자신에게 이 독수리를 양보해 주면 독수리가 독수리답게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를 가지고 조류학자는 깊은 산중 절벽으로 갔습니다. 절벽중턱에 가서 독수리를 놓았습니다. 독수리가 아침태양을 바라보고 무엇인가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독수리가 긴 날개를 펼치며 절벽 아래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가 독수리다워 진 것입니다. 이 독수리가 닭처럼 어미 닭을 따라다니며 날지 못하는 짐승이 되었지만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될 때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게 될 때에 이 독수리는 하늘높이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비전을 본 사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비전을 보십시다. 새로운 은총을 체험합시다. 새롭게 헌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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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돌베개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가?
황새 한 마리가 늪에 빠졌는데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쓸수록 더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황새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늪에서 속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한 참 생각하는 중에, ‘그래, 내게는 긴 목과 부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황새가 부리를 땅에 깊이 박고 힘을 주었더니 다리가 쑤욱 위로 올라왔습니다. ‘아, 이제 됐구나!’하고 날개를 확 펼쳤는데 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리를 너무 깊이 박아서 다리 대신 부리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목을 쭉 뺐더니 부리가 쑤욱 빠져나왔습니다. ‘옳지, 이제는 되겠지’하고 양쪽 날개에 힘껏 힘을 주었지만 역시 날 수가 없었습니다. 부리는 건졌는데 다리가 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부리를 땅에 깊이 박았더니 다리가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날개를 팍팍 쳤는데 역시 나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엔 다시 부리가 깊이 박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목을 쭉 뺐더니 또 다시 다리가 박혀버렸고, 그래서 또 다시 부리에 힘을 주고 다리를 빼고, .... 끝이 없는 이야기인데 분명한 것은 결국 그 황새는 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잘 살려고 애쓰다 보면 건강이 나빠지고. 또 건강에 치우치다 보면 생활에 어려움이 오고, 고생 고생해서 겨우 살만 해지면 그때는 또 다른 고생거리가 생기고, 그거 해결할 만해 지면 다른 문제가 따라오고... 결국 그러한 문제들이 우리를 영원히 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에 빠진 사람들이나 이런 답답함에 걸려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인간의 방법,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난주에는 현실과 신앙사이에서 현실을 택하고 실패한 에서를 만났지만 오늘은 역시 실패는 했지만 신앙의 계보, 축복의 계보를 붙들었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사닥다리와 광야와 돌베개를 예비하시고 안내하는 내용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는 사닥다리가 하나 등장하는데 처량한 신세, 처량한 환경 속에 떨어진 야곱, 그가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홀로 먼 길을 나서서, 광야 어느 구석에서 돌을 베개 삼고 외롭게 잠이 들었을 때, 그가 밤에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눈에 확 띄는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이은 사닥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시려고 놓으신 사닥다리였습니다. 정말 진퇴양난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경에 빠진 야곱의 삶 속에 들어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놓으신 하나님의 사닥다리였습니다. 다리를 빼내면 부리가 들어가고, 부리를 빼내면 다리가 들어가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의 인생, 야곱을 돕기 위해, 그 수렁에서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놓으신 하나님의 사닥다리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가요? 선택받았다,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닥다리가 자신의 삶 속에 뿌리 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식을 못해도 하나님께선 내 삶 속에 사닥다리를 내리시고, 당신의 사자들, 천사들을 통해 나의 처지와 형편을 보고 받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그 사닥다리를 통해 내려주십니다. 그러기에 그 사닥다리는 때로는 기도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내가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마주 앉을 때 사닥다리를 통해 하나님과 나는 교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웅얼거리는 것, 천사를 통해 다 보고 받으시고, 내 마음에 간절함 다 파악하시고,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는 바로 이런 영적 교류,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통해 나의 삶이 하나님께 올려지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내게 내려오는 시간입니다. 이 사닥다리가 분명한 사람, 더 이상 진흙탕 속에서 빠져들지 않습니다. 결코 현실에 빠져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현실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계속 빠져들어 가는 현실이지만, 하늘로 내려온 사닥다리로 인해 그는 더 이상 현실 속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이 하나님의 보좌에 닿은 하나님의 사닥다리만큼은 여러분에게 분명하기를 바랍니다. 그 사닥다리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얻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린 외아들을 둔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외아들이 아빠와의 약속을 어기자 아빠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다시 또 약속을 어기면 그때는 추운 다락방으로 보낼 테니 그리 알거라." 그러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약속대로 다락방에 보내졌습니다. 추운 겨울밤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 마음은 아프겠지만 지금 그 아이를 다락방에서 데려오면 그 아이는 앞으로 당신 말을 듣지 않게 될 거예요."
"당신 말이 옳아. 그렇지만 그 아이가 지금 얼마나 춥고 무서울까." 남편은 조용히 방을 나가서 추운 다락방의 딱딱한 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아들 옆에 말없이 조용히 누워 팔베개를 해주고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아빠 품에 안긴 아들은 그 사랑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외롭거나 지치고 힘들 때 엄마나 아빠의 팔베개를 베고 그 품에서 왠지 모를 따스함에 잠 든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외로움이라 할지라도, 걱정이나 두려움이라 할지라도 그 팔베개 안에서는 다 사라지게 되는 푸근함과 편안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잊고 그 따스한 팔베개에 파묻혀 깊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다면 우리 삶이 이토록 고달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는 캄캄한 밤중, 그것도 이름 없는 광야에서 잠자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형 에서가 죽이고자 쫓아오는 위협을 피해 황급히 집을 떠나 1500 리나 떨어져 있는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하루에 250 리나 되는 길을 달려 왔습니다. 어느 광야에 이르러서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는데 팔베개가 필요한 때와 장소에서 그는 오히려 차가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돌베개에 담긴 깊은 사연
그런데 그가 베고 잔 돌베개에는 보다 더 깊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형의 추적으로부터 도망쳐온 두려움의 베개였고, 죄의식이 가득한 베개였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의 베개였으며 고독의 베개였습니다. 죄의식 속에서 누워 자고 일어나도 그리고 걸어가도 마음의 평안을 깨뜨리는 불편한 속삭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불투명한 미래를 불안해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떠나온 곳은 분명한데 언제 어디에 내 인생이 머물 것인지......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외롭지는 않습니까? 가족이 있어도, 나를 지켜주고 세워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함께 할 수 없는 외로움이나 이질감 같은 것은 없습니까? 원치 않는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운 것과 같은 일들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믿으면 있던 문제와 고통도 사라져야 하는데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무대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현장에 야곱이라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야곱의 인격과 성품, 인생의 여정들을 조명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진짜 우리의 원래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또한 야곱을 인도해 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야곱과 같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의 의미와 가치
하나님은 야곱에게 광야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인생을 광야로 내 모셨습니다. 자신의 역사무대에서 쓰기를 원하시는 야곱을 왜 광야의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셨을까요?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원하셨을까요? 아니 오늘 광야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원하실까요?
광야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을 수 있고, 또 그의 계획을 잘 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음과 우리의 죄악으로 생명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복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볼 수 있는 곳을 예비해주셨는데 그곳이 바로 광야라는 것입니다.
10-11절 말씀에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언제입니까?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중간입니다. 그리고 한 곳은 후에 벧엘이라고 불리어지는 광야였습니다. 고달픈 야곱의 여정을 위하여 따뜻한 집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사랑과 격려가 있는 장소로 이끄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고독하고 외로운 광야였습니다. 그곳에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돌멩이 밖에는 없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야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곳은 이슬하나 피할 곳 없고, 추위하나 감쌀 것 없는 광야인 것입니다. 왜 광야를 준비하셨을까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배려가 아닙니까? 하나님은 왜 축복대신 광야를 준비하셔서 그로 하여금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입니까?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도 멋진 인생, 행복한 인생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잘되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행했습니다. 그는 장자권도 자신의 행복에 따라 어떻게 해서든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해서 추구했던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고, 고독과 아픔 그리고 이별과 다툼을 일으켜 행복을 위해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했을 뿐 아니라 가족관계를 파괴하고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야로 쫓겨 온 신세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간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광야가 아니면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한 광야에서 복은 누가 만드는가, 누가 주시는가, 인생의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벧엘 광야 이후에도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닫고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음성을 듣지 않고 육신과 죄악 된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하나님은 또 다시 인생의 광야로 몰아가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고 쓰시기 위한 준비 장소였던 것입니다.
광야는 전통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훈련시키는 장소였습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다가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확인하는 책인데, 8장 2절에 그들로 하여금 40년간의 고달픈 광야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시기 전에 인생의 광야를 이용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모세도 광야라는 학교를 거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아니면 집중할 수 없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자신의 뜻과 섭리가 가장 잘 전달되고 소중히 여겨질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해가십니다.
선교사 짐 엘리옷은 그의 일기에 ‘나는 사탄이 세 가지 요소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소음과 성급함과 군중이다. 사탄은 침묵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정확하게 들을 수 있으셨습니까? 외롭고 고독하고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노력하고 애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그곳이 아닙니까? 내 인생의 화려했던 성공정체감,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복된 인생, 쾌락과 나의 경험과 인생철학 등의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서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성공하고 지식이 있고 나름대로 세상에서 말하는 지위나 물질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으로 듣거나 나름대로 판단해서 듣는다면 바로 야곱과 같은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소음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성급한 판단 때문에 나아가서 우리를 생각하게 하지 못하는 거센 많은 사람들의 흐름 때문에 진지하게 듣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 말씀이 주는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게 막는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광야에는 자신의 살아온 삶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야곱도 그 광야에서 정말 행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살아온 것이 정말 행복을 위한 것인데 잘 살아온 것인가? 정말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 진지하게 자기를 돌아보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고, 더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그 광야에서는 단순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진지하고 귀중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이 광야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정말 하시고 싶은 말씀, 보여 주고 싶은 섭리와 뜻을 나타내어주는 중요한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내 최선의 결과가 오히려 아픔이 되어 이겨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돌베개를 베고 잘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광야는 고독한 곳입니다. 광야는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고 나가야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이정표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곳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도 없습니다. 광야는 걸을수록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광야에는 격려도 없습니다. 넓은 세상에 혼자 서 있는 곳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부서진 곳입니다. 나를 지키고 주장할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한 격리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끊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맺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나의 교만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나의 살아왔던 삶의 방향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 땅을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게 만듭니다. 교만과 욕심으로 믿음 없이 살아왔던 나의 허구의 모습이 깨어지기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하나님과의 사랑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찬양하게 만듭니다. 나를 향한 그 신실하신 사랑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만듭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하고 또렷하게 들리게 됩니다. 주님의 깊고 세미한 음성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내 성공과 나를 향한 찬사와 환호 그리고 박수에 들리지 않았던 그 음성이 광야에서는 들립니다. 내 주위에 너무나 많고 다양했던 즐거움의 소리로 가득 찼던 그곳에서 듣지 못한 생명의 음성을 바로 이 광야에서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광야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누릴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 주님께 소망을 두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주님과 함께 걷는 것에 참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소중히 와 닿던가요? 잘 살고 여유가 있었던 때입니까? 평안하고 모든 것이 잘 될 때였습니까? 인생의 광야에서 들었던 그 말씀 때문에 오늘 영암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선택받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대로 살면 파멸과 죽음의 결론밖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한곳 즉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고 분명히 듣고 그의 뜻을 알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준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광야에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가장 존귀하고 복되게 살아갈 생명과 소망의 음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내는 여러분 ! 이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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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64장의 추억
내 고생하는 것 예 야곱이
돌 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어렸을 적 교회를 다니며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입니다. 아마도 어른들이 이 찬송을 가장 많이 불렀기 때문에 어렸던 우리들도 따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이 찬송을 그 때처럼 많이 듣거나 부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이 찬송이 특히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70년대에 유독 이 찬송이 많이 불렸던 이유는 아마도 사회적 상황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신앙 하나로 견디며 소망을 갖고 살아가던 시절, 살아가는 것도 힘들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힘들던 때 그래서 예배당에 가면 그저 눈물이 주르르 흐르던 그 어려운 시절에 눈총을 받으며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던 어른들은 이 찬송을 부르며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도망가는 야곱의 심정과 같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돌 베개는 육, 칠십 년 대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부모님들의 돌 베개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첫 번째 돌기둥
이처럼 야곱의 돌 베개는 핍박 받고 설움 받던 신앙생활의 표징이었고, 그 돌 베개를 세워 돌기둥을 만드는 야곱의 이야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제일로 하는 믿음의 생생한 증거였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이 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처음 경험합니다. 그가 이 전에 들었던 하나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야곱에게 전해 들었던 그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이삭에게도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을 야곱이 처음 만나고 처음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된 증거가 바로 야곱의 돌기둥입니다.
그렇게 처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자던 돌 베개를 취해 돌기둥을 세웁니다. 자신의 삶의 편리를 위해 사용되던 것이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귀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2절)
야곱의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에 다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얻으면 욕심을 부립니다. 부모의 욕심은 그들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압니다. "아브라함과 같게 해주시고 모세와 같게 해주시고 다윗 같게 해 주시고 솔로몬 같게 해주시고..." 성경의 모든 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모든 종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저는 아들 둘을 얻은 이후로 오직 한 가지 만을 기도해오고 있습니다. "주여 내 아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평생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큰 헌금을 드린다든지, 선교사가 된다든지, 순교를 한다든지 하는 대단한 일들을 하지 못하면 하늘에서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삼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물론 순교를 한다든지, 선교사로서 한 평생을 헌신해 살아간다든지, 또 많은 재물을 드려 하나님 나라를 섬긴다든지 하는 일들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은 변함 없이 예배자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배자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삼으시기 위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반대 이름은 성자(聖者)가 아니라 예배자(禮拜者)입니다.
예배자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예배자로서 부르셨음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배자로서 자녀들을 키워내야 할 책임을 고백하며 기도하는 부모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야곱의 두 번째 돌기둥
야곱은 그것을 조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계속 붙들고 살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더 많은 삶의 변화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믿은 후 오래지 않아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혹은 삶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예배자로서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예배를 소홀히 하고 예배자로서의 삶을 더 이상 감동 없이 살아가게 되면서 삶이 흔들리고 휘청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패는 대부분 예배(자로서)의 실패에서 비롯됩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보다 더 귀한 것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성공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오직 그 한 길을 갔고 성공했습니다. 현명한 처세가 있었고,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했으며, 하나님을 찾는 기도도 오직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순수한 마음으로 그 분을 찬송하고 예배합니다. 그 분에 대한 예배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그것을 위해 교회에 오고 그것을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달라집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무엇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성공입니다. 이제는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성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공을 위해 필요하다면 주일도 범합니다. 성공을 위해 헌금하고 성공을 위해 신앙은 수단이 되며 통로가 됩니다. 슬픈 일입니다.
야곱이 세운 두 번째 돌기둥은 이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야곱 이야기 속에서 야곱은 세 번 돌기둥을 세웁니다. 집을 떠나면서 한 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반의 집을 떠나면서 한 번, 그리고 벧엘로 돌아가서 한 번입니다.
야곱이 세운 첫 번째 돌기둥이 예배자로서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약속과 감동이라면, 두 번째 돌기둥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야곱의 처세를 보여주는 돌기둥입니다,
그는 살아가면서 다른 중요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야곱의 두 번째 돌기둥은 그런 야곱의 마음을 보여줍니다(31:45). 인간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던 노력이 인간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때쯤 해서는 예배의 감동은 사라집니다. 예배는 지겨운 것이 됩니다. 대신 술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에 의해 감동되던 마음이 인간에 의해 감동되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던 열정이 인간을 감동시키려는 열심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던 우리는 그저 교회라는 가면을 쓴 죽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이고, 튼튼하던 우리의 삶의 기저는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야곱의 두 번째 돌기둥은 이제 그러한 것들에 너무 붙들려 살아가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대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던 삶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돌기둥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후로 야곱은 인간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성공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의 삶이 더 견고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서와의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고 세겜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며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라반과 약속의 돌을 세운 이후, 32장과 33장은 그런 야곱의 노력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야곱의 노력은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34장의 디다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도망쳐서는 처세와 사람에 대한 감동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평안을 얻으려고 했던(28:21과 33:18을 비교해 보십시오) 야곱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 바로 창세기 34장인 것입니다.
야곱의 세 번째 돌기둥
그리고 나서 야곱이 무엇을 합니까?
야곱은 다시 벧엘로 돌아옵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곳, 자신이 베고 자던 돌 베개를 세워 돌기둥을 삼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전을 삼겠다고 고백했던 그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곱은 그 곳에서 마지막 돌기둥을 세우고 예배를 드립니다(35:14).
야곱은 깨달은 것입니다. 성공을 위한 처세가, 인간관계를 위한 노력들이 그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견고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런 성공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답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자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싶어서 한 평생 고단하게 살았고 신음하며 살았던 야곱이 정말 붙들어야 했던 그 쉬운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배자로서의 삶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성공하는 것이 삶을 성공하게 하고 견고하게 하며 가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견고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많은 돌기둥들을 세웁니다. 문제는 누구 앞에 그런 돌기둥을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의 돌기둥은 우리를 견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세우는 예배의 돌기둥만이 우리를 견고하게 합니다.
당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싶습니까?
당신의 목회를 견고하게 세우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감동하려고 애쓰기 전에 인간관계 속에서 성공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예배자로서의 당신의 삶이 하나님을 감동케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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