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 24장

스네어 2014. 1. 29. 14:14

이삭의 결혼 성경본문 : 24:1-4

 

우리나라 속담에 '여자 하나 잘못 들어오면 3대가 촌스럽다' 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식구가 들어 와서, 가문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옷을 예로 들면, 며느리가 들어와서 시부모님과 어른들에게 옷을 지어 입혀드립니다. 또 자기와 남편이 입고, 자녀에게도 그 옷을 입혀줍니다. 그러니까 3대가 직접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만큼 결혼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가리켜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 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혼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때는 한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해라."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삭은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고, 아브라함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자부(子婦)를 얻으려고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엄청난 부자요,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 큰 족장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에게 외아들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가장 좋은 자부를 얻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명령을 합니다. "너는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그런데 그 귀한 아내의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2절에서 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가나안 족속의 딸은 안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도덕, 그들의 종교가 도무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퇴폐적이고, 그들의 종교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가문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된다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자기 친척과 왕래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는 그 터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같이 있는 가나안 딸은 안되겠다. 하나님을 똑바로 섬기는 여자를 얻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많은 인류학자들과 결혼전문가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할 수 있고 성공적인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이 연구합니다. 그리고 어떤 배우자가 가장 좋은 배우자인지 결론 내렸습니다. 그것은 "나와 비슷한 것이 많을수록 좋은 배우자다"라는 것입니다. 너무 다른 환경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이도, 가정환경도, 지식의 수준이나 사고의 방향도 너무 다르면 안되고, 공통점이 많을수록 가장 좋은 배우자고 내게 맞는 사람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종교가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가치관은 종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반 학문의 결론입니다.

여기서 결혼의 첫 번째 원리가 나옵니다. '상호 공통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통점이 많을수록 좋고 그 중에서도 핵심은 종교가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 땅 먼 곳까지 가서 문화가 같고 비슷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자부를 얻으려 했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여인을 자부로 맞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통성이 있어야한다고 해서 족장의 딸을 데려오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마 본문을 요즘의 언어로 바꾼다면 "한국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잘 믿는 여자야 된다." 이렇게 압축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후퇴할 수 없는 중요한 결혼조건이 됩니다.

 

요새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결혼의 조건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자의 3대 요건은 첫째가 'Beautiful'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쁘고 잘 생긴 것, 둘째는 'Rich' 돈 많고 잘 사는 것, 셋째는 'Back ground'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닌, 조건과 조건의 만남! 신분과 소유를 중심으로 해서 서로 맺어지기를 원하는 이 세대, 그래서 이 세대가 그렇게도 가정문제가 많고 화목하게 살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국제결혼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사랑! 멋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식을 낳고, 살아갈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 상호공통성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월등한 사람을 만나서 이 기회를 통하여 신분상승을 꾀하는, 소위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것은 아주 어리석은 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내게 없는 것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여 나의 약점을 보충하려고 하는 시도! 이것도 결론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비슷할수록 좋다!" 그런 얘기입니다.

 

요즘 결혼을 약속해놓고 혼수 때문에 깨지는 집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째서 혼수 때문에 결혼이 깨질 수가 있나?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여러분? 결혼이라는 거룩한 행사를 통하여 한몫 챙기려하고 또한 자기 가문 과시하려고 하는 잘못된 사고 방식 때문에 나타나는 아름답지 못한 현상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 사이도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살 수 있느냐하면, 조건과 조건을 다 떼어버린 인간과 인간의 만남, 남편과 아내의 만남,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밖에서 사장이 집에서도 사장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 사장 의식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밖에 나와서 교수라고 해서 집안에서 교수인가요? 부하를 많이 거느린 장군이라 해도 집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일 뿐입니다. 사회적 계급장 다 떼고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야 거기서 친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성장해서 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그러한 진정한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서로를 정죄하는 가운데에서는 인간관계는 결코 발전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조건과 신분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어야 되고,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되는고 하니, '신앙의 사람! 예수 잘 믿는 사람!'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바로 서고 하나가 되면 다른 모든 차이를 넉넉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다시 물어야 합니다. "결혼의 제일 조건은 무엇인가? 신앙과 인간성인가?" '그렇다'고 말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내가 잘해서 예수 믿게 하지요. !"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 은혜 속에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장담할 수 없는 신령한 영역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 중에 믿는다고 해도, 예수 바로 믿고 신앙인으로 견고하게 서서 복음적 삶을 살려면 십 년, 이십 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많은 갈등들을 만만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남편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려고, 인생 다 보내고 그러다가 지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원리가 있는데 말입니다. "이 세상 끝까지 가서 전도도 하는데 그건 너무 보수적 아닙니까?" 그렇게 질문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목회학적으로는 '배우자를 최소한 결혼 전에 세례는 받게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지금 한창 좋아서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할 때, 끌고 와서도 신앙고백을 안 하는 판에 결혼하고 나서 내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는 얘기지요. 그러므로 미리 세례까지는 받게 해야만 가능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우습게 알고 자기 좋아서 훌쩍 결정한 다음에 두고두고 후회 많이 합니다. 혹시 이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이 뭔가 내 마음속에 확증을 주셨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도 못한 가운데서 성급한 결론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원하는 신앙 있는 여자란 어떤 여자일까요? 본문에 나옵니다. "가나안으로 오는 여자!"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던 고향의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결단하는 여자!"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서 이곳으로 온다고 하는 자체가 신앙적입니다. 뭘 믿고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약속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분의 그 약속을 바라보고 떠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다 내려놓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요구한 것은 그 가문이 걸어왔던 길을 똑같이 걷는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하나님만 보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걸어온 가정입니다. 그러니 자부될 사람도 하나님을 믿고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향하여 결단하고 들어오는 여자이어야 되고, 과거는 잊어버리고 약속만 믿고 달려오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 집에서 내 인생을 끝내리라'고 하는 귀한 결심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여자! 오직 믿음 안에서 결심하고, 순간보다 영원을 기대하고, 약속을 바라보며, 아브라함 가문의 신앙의 정통성을 이어줄 여자! 이런 여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종이 듣고 나니 참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반문했습니다. 5절입니다.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 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그런 여자 있을까요? 있다고 해도 안 온다면 어떡하지요? 그러면 도련님을 모시고, 그곳으로 갈까요?"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절대로 안 된다!" 6절과 8절에 두 번 걸쳐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 의미가 뭐겠습니까? 이런 여자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호합니다.

 

대개 상담해보면 나이가 어릴 때는 조건이 분명합니다. 신앙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그 견고함이 흔들리고 아무나 막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빨리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잘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혼이 30%에 육박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좀더 신중하게 기도하고 조심해서 결정해야 된다고 하는 사인이 이렇게 객관적 지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한평생 사랑하고 인도해 주셨는데, 내 사랑하는 자식을 사랑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지 않으랴? 그에게 맞는 배필이 없겠느냐? 반드시 있다. 이러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이렇게 후퇴할 수 없는 하나의 조건, '살아있는 신앙인, 결단의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종은 그 명령을 받아 가지고 먼 길을 출발했습니다. 내가 종이라고 해도 참 막막했겠습니다. '도대체 어디 가서 이런 여자를 만나며 어떻게 설득하고 어떻게 데리고 올 수 있을까?' 그래서 종은 한 이십일 걸리는 여정인데 그 동안에 나름대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한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자기 힘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총을 구합니다.

 

여기서 결혼의 두 번째 원리가 나오게 됩니다. '기도의 원리'입니다.

 

종은 기도 속에서 "이러한 여자라면 하나님이 지정하신 여자인줄로 알겠습니다" 라고 조건을 하나 내세웠습니다. 그 조건이 13절과 14절인데 함께 봉독합니다.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내가 목마르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나그네의 목마른 것을 알아서 즉시로, 기쁨으로 시원한 물을 떠 주는 그런 여자,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짐승을 보고, '너희들도 목마르겠다'해서 짐승에게 물주는 여자라면 좋겠습니다" 하고 하나의 조건을 보탰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 신앙이 반듯한 여자! 종은 여기다가 하나 더 조건을 붙였는데, 이 종이 붙인 두 번째 조건의 의미가 뭐냐 하는 겁니다.

 

종은 지금까지 아브라함 가정에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인가를 잘 압니다. 이 가정의 가풍을 알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여자란 어떤 여자이냐? 아브라함의 가정은 다른 사람을 돕고 베푸는 후덕한 가정이요, 사랑이 많은 가정인데 새롭게 오는 여자도 바로 그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살려면, 또 베푸는 가정의 가풍을 이어가려면,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할 뿐 아니라 짐승의 목마름도 배려하는 센스 있는 여자이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낙타 한 마리가 먹는 물의 양은 수십 명이 먹는 물의 양입니다. 이 열 마리 약대에 다 물을 먹이려면 몇 시간 물을 퍼야 합니다. 아마 웬만한 여자 같으면 다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해서 짐승의 목마름을 보고, 안타까이 여겨서 물을 뜨는 그 배려하는 마음, 그 베푸는 마음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한 일주일간 야외 훈련을 나갔다가 우리 부대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날 우리 부대 장교 한 분이 부부 싸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싸웠냐하면 한 주일 내내 산에서 있다보니까 지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대에 오자마자 바로 목욕탕에 가면서 병사를 시켜 "수건 좀 보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갔다 와서 싸운 이유가 뭐냐하면 "왜 수건만 보냈냐?" 이게 싸움의 이유였습니다. "수건 보내라." 했습니다. 그럼 뭘 보내야 되겠습니까? 수건하고, 또 비누하고 칫솔, 치약하고, 또 며칠 동안 옷 못 갈아입었으니까 속옷 보내주고, 또 수염이 덥수룩하니까 면도기 보내주고, 따가울 테니까 로션 보내주고, 이래야지요! 그런데 달랑 수건만 보낸 것입니다. "왜 수건만 보냈냐?" 그러니까 "수건만 보내라고 그랬잖아요"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자가 답답하니까 "! 나하고 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차원이 뭐야?" 따지고 싸우더라구요. '참 답답하겠다' 생각했습니다. 바늘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바늘만 주면 되겠어요? 실도 줘야지요. , 가위도 줘야 끊지요! 이게 자동으로 돌아가는 센스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말입니다.

 

나그네가 목말라서 헐떡거리고 있으면 기쁨으로 물을 주어야 되고, 짐 실어온 짐승은 목이 마르지 않을까? 당연히 목이 마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드세요! 너희들도 목마르지?" 생각하고 힘이 들긴 하지만 열심히 물을 길어다가 짐승을 다독거리며 물 먹이는 마음! 이런 여자면 최고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판단의 근거입니다. 그 당시가 유목사회 아닙니까? 그럼 자기 집에 짐승이 많을 텐데, 짐승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면 얼마나 집안 살림을 알뜰하게 부지런하게 잘하겠습니까?

 

요즘 많은 여성들이 전문가로서의 길을 걸어갑니다. 자기 능력을 극대화해서 살아갑니다만 그래도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섬기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접대하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 잘 받았다 할 때, 그 교육 잘 받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수학문제 많이 풀고 영어 잘하는 것입니까?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공주처럼 컸다는 뜻입니까? 미안합니다만 아닙니다! "어른을 잘 모시고, 이웃 잘 베풀고 섬기고 대접할 줄 아는 부지런함!" 이것이 교육 잘 받았다는 진정한 내용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이런 남자주세요. 키는 얼마고, 몸무게는 얼마고, 피부 색깔은 어떻고, 귀는 어떻게 생기고, 코는 어떻게 생기고' 그림 그리듯이 조건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 이런 여자, 이런 남자 주세요.'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근거로 잡는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게 맞는 것 같습니까, 틀린 것 같습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조건을 거는 것은 나름대로 분명하고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이런 여자라면 이 가문에 충분한 여주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초가 되기 때문에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 제시하는 근거는 자기 욕심입니다. 좀 키가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습니까? 얼굴이 동그라면 어떻고, 길쭉하면 어떻습니까? 원래 미()라고 하는 것은 다 주관적인 것인데, 자기 보기에 좋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갖다가 하나하나 그림을 그려서 제안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제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결코 바른 신앙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이 종의 근본적인 마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여자를 내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가문에 이런 여자가 꼭 필요해서, 이유가 있어서 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이제 종은 이런 좋은 여자를 어디서 만났습니까? 11절 함께 봉독합시다.

 

"그 약대를 성 밖 우물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여자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겠습니까? 여자들이 저녁때 물 길러 나올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물가로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다는 것입니다. 또 여자로 말하자면, 언제 새로운 분을 만나고 귀한 분을 만나는가 하면 자기 일을 열심히 정성을 다해 하고 있을 때입니다. 지금 이 젊은 여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물긷는 것입니다! 이 물긷는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을 때,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옆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결혼의 세 번째 원리가 나옵니다. '활동의 원리' 입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안하고 좋은 사람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원리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잘 감당하고 성심껏 사랑으로 하고 있을 때, 그 때에 은혜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신랑감 되고, 좋은 신부감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만남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도 마찬가집니다. 오래된 남편의 버릇, 아내의 버릇은 안 고쳐집니다. 그것 가지고 계속 싸우는 사람은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좋은 아내만 되십시오. 좋은 남편만 되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사이가 좋았다가 결혼을 임박하게 앞두고 싸우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왜 싸우나?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것이지요. 그럼 이런걸 방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종은 아브라함에게 다른 조건을 지시 받지 않았습니다. 한평생 살다보니 아브라함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아브라함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을 고를 수밖에 없이 되어있었다는 말입니다.

 

자식들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 밑에서 자라고 거기서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 가치관에 기초해서 사람을 고르는 것입니다. 선택이란 한 순간의 일이 아닙니다. 쌓여진 가치관의 결론이 선택으로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데리고 있는 동안에 잘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너에게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가르쳐 보십시오. 그 다음에는 "네 마음에 드는 사람 데리고 와라!" 그러면 저절로 내 마음에 척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가르치고 엉뚱한 것 가르치고 있다가 스물 다섯, 서른 살이 되어 일이 닥치고 나서 되니 안되니 하고 싸우면 그 꼴이 뭐가 됩니까? 여러분! 미리 미리 이 원리를 따라서 잘 가르쳐가야 가정에 참된 평화가 유지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섬세하게 간섭하시고 복 주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저는 가족이 서로 떨어지게 될 때 - 자녀를 유학을 보낸다거나 - 그래서 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 이 본문을 놓고 권면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고서 보냅니다. 무엇을 믿었는가? 하나님이 나를 한평생 사랑해 주셨음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내 자식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실 것을그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얼마만큼 믿었는고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네 앞서서 이미 거기 가 계실 거라'고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가는 사람은 막막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갑니까? 아브라함으로부터 때마다 일마다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갑니다. 이렇게 나갈 때마다 거기서 아름다운 만남의 역사, 형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외국에 보낸다거나 가족을 보낼 때 여러분, 담대하셔야 합니다. 잠 못 자며 걱정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내 자녀도 인도해 주실 거라고 스스로 믿고 굳게 고백하고, 자녀에게도 알려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얘야! 하나님이 나를 한평생 사랑하셨는데, 너를 사랑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그곳에 충만한 줄로 알고 기도하며 가라!"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약속과 그 명령을 받아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자녀의 앞길이 환히 열리게 되고 근심 염려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정말로 좋은 배필을 맺어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내 자녀를 하나님께서 붙드심을 굳게 믿고 담대하셔야 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게 될 때에 여러분의 가문은 더욱 빛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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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결혼

 

창세기 24:1-9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24:1-9)

 

 

요즘 직장 가진 젊은 청춘 남녀들이 '꼭 결혼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합니다. 이것은 여자 뿐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하면 동거하고, 아이 낳고 싶으면 낳아서 여자들도 자기 호적에 올리면 되고 그래서 여권운동가들은 호주제(戶主制)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21세기에 가장 큰 타격이 올 곳이 가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해마다 이혼율이 얼마나 되는가 통계 내는 것을 폐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의 숫자가 최근에 70%를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혼율이 50%쯤 될 경우에는 통계가 나왔지만 오히려 이혼하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인가를 세는 것이 더 간단해졌기 때문에 통계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가 맞이했습니다. 혼자 살면서도 별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식당에서 아침 식사가 배달될지도 모릅니다. 빨래는 집어넣으면 다림질까지 해서 나오는 기계가 생길 것이고 밥은 프로그램에 입력만 시켜 놓으면 제 때 다 될 것이고 설겆이도 기계 속에 집어넣으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성생활 마저도 사이버에서 해결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 시연(試演)까지 거의 끝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혼에 특별한 의미가 없어지는 21세기를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이같은 문제 앞에 어떻게 서야 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다음, 그렇게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에 인간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 만드신 축복의 통로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으신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풍조가 어떻든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붙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 그 결혼에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됩니다.

 

첫번째 결혼 배우자를 찾는 조건 - 동질의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먼 만리 타향에 가 믿음의 생활을 새로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자신이 주도적으로 처리해야될 문제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는 세상을 떠났고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는 아들 이삭이 홀로 어머니의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과 외로움을 앓고 있을 그 때였습니다. 한편으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셔서 모든 것이 풍성하고 복스러운 때였습니다. 많은 복스러운 것들 중에 복스럽지 않은 하나가 그의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직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형성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결혼을 주선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자기의 하인 가운데 가장 충성스러운 하인을 불렀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아마 이 사람이 엘리에셀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집에 60년 이상 함께 일한 거의 70세나 80세 된 늙은 하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를 불러서 그의 손을 자신의 환도뼈 밑에 넣고 맹세를 시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네가 내 며느리를 구할 중차대한 책임을 가졌다. 그러나 기준이 있다. 이 땅의 딸들은 안된다." 그는 그 땅의 딸들의 부도덕과 나쁜 습관을 잘 알았습니다. 삼손도 그 땅의 딸들을 취했다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의 딸들과 함께 교류하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계속해서 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 땅에서 결혼 대상자를 가졌던 소돔성의 롯은 그 땅의 풍습 따라서 자신의 딸들에게 강간당하는 괴상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땅의 딸들은 안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나온 그곳으로 가라.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위하여 결혼계획을 가지셨음을 내가 믿는다. 그런고로 너는 그 땅에 가서 내 자부될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하인이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인님, 내가 혼자 가는데 찾은 여인이 만약 이삭을 데려와 한번 만나본 후에 결정하자고 말하면 어쩌지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함께 하신 그 인도로 너와 함께 하실터이고, 이 일에 개입하실텐데, 만약에 그렇게 말한다면 나와 상관 없는 여인으로 알아라. 그 대신 네 말대로 하나님의 섭리 따라 그 땅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순전하게 떠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인 줄 알라"고 말합니다. 그는 약대 열 필을 준비해서 잔뜩 짐을 싣고 자기 주인의 말을 따라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결혼에 있어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자에게 동질의 신앙이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 동질의 믿음이 있는 사람을,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그 사람을 며느리로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삭의 아내가 이런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결혼에 있어서 "어떤 배우자를 원하십니까?"는 질문을 받으면 부모이고 당사자고 마찬가지 대답을 합니다. "저는 믿음만 있으면 결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음만 있어서 결혼하는 사람을 제가 별로 못봤습니다. 결혼의 조건에 대해 영어 initial을 따서 만든 조크가 있던데 abcdef 중에 aability이고 ccash고 마지막 ffaith래요. 그러니까 다른 것 다 갖춰진 다음에 거기에 믿음이 추가로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비꼬아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라고, 무엇보다도 동질의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결혼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원리입니다. 결혼하면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살기 때문에 늘 다른 것을 확인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만난 부부는 한평생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주가 될 것인가? 아내가 주가 될 것인가? 아닙니다. 남편도 섬겨야 되고 아내도 섬겨야 됩니다. 오직 주님이 주인되시는 공통분모가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동질의 신앙을 원했습니다.

 

두번째 결혼 배우자를 찾는 조건 - 기도로 인도를 받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 사환은 먼 길을 떠나갔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말했던 그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우물가 옆에 서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12절 보니까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24:12-14) 그는 이 일에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를 구합니다. 하나님, 그냥 만나지 말게 하시고 기도의 결과로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많은 일들이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대학 갈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직장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결과로 이루어지면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다를 수 있단 말입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예수 믿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한 사람을 정해놓고 자신의 반려자인가에 대한 확인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도무지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년을 정해놓고 기도하다가 마지막 주간에 "하나님, 이 주간이 지나면 내가 잘못 기도한 것으로 알고 취소하겠습니다." 그랬는데 그 주간에 별로 가까이 오지 않던 그 남자가 처음 만나서 청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정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하는 일에 어려움도 있었고 가정의 인간관계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이깁니다. 그 자매에게 어떻게 그렇게 잘 이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만남이 그냥 우연의 만남이라면 당장 보따리 싸겠는데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결과를 그 증거로 가졌기 때문에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앞으로 사람 만나 결혼해 살 때 그냥 그냥 만나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영광스런 플랜이 있음을 확인하고 결혼해서 살고 있다면 그 가정은 보통 가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인은 이 결혼에 있어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인도 말했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서 네 앞길을 순적하게 해주실 것을 나는 믿는다." 믿음의 기도로 뒷받침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특별히 생애 가장 소중한 기도제목인 결혼의 기도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오면 온 성도가 함께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할 때 아이에게 세 가지를 축복합니다. 뭐라고 기도하는 줄 아세요? 믿음의 좋은 스승 만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뜻을 나눌 동지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셋째로 사랑을 나눌 반려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갓난쟁이를 놓고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기도를 해야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인도됨을 기도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들 기도하십시오. 우리 아이들 중에 결혼 안하려는 아이들의 숫자가 참 많아질 것입니다.

 

세번째 결혼 배우자를 찾는 조건 - 착한 성품을 확인하십시오.

세 번째입니다. 만남 사람이 리브가였습니다. 이 리브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물론 성경에 "처녀가 아리따웠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정작 더 아름다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씨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달라고 하는 이 나그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손 없어? 여기 물이 있고 두레박이 있는데." 또는 불쾌하다고 그 외국 사람의 말을 본척만척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물을 떠주긴 합니다. 그러나 기분 나쁜 태도로 '왜 내게 물 달라고 그래?'하는 귀찮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물을 달라고 하는데 이 사람 앞에 물을 떠줄 뿐 아니라 약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나그네의 필요에 동정의 눈길, 사랑의 눈길, 친절의 태도를 보이는 그 착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아무도 안보는데서 그 마음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마 나그네에게 물을 떠주면 상을 준다고, '양심 냉장고'라도 준다고 하면 아마 동네 여자들이 모두 뛰어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대가 목이 마른 상태에서 물을 마시면 한 10분쯤 물을 먹는답니다. 그러니까 열 마리 약대에게 물을 주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렸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그네의 피곤함과 가련함과 그 약대의 불쌍함을 그는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표시하고 착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구할 때 가장 소중하게 구할 것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대개 "어떤 사람 반려자를 구합니까?" 물으면 "믿음만 좋으면 됩니다"라고 합니다. 입에 발린 거짓말입니다. 남자들이 대개 선택하는 기준을 보면 예쁜 것 좋아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돈 잘 버는 것입니다. 어제 제가 TV에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프로를 보았는데 70세 된 할머니에게 결혼하겠느냐고 물으니까 영감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어떤 분을 원합니까?" 물으니 자기가 30대에 과부가 되어서 오늘까지 왔는데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까 사랑해줄 영감님 한 분 있었으면 좋겠다며 하는 말이 "돈 많은 놈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등 긁어주고 피곤할 때 어깨 주물러 줄 사람이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여러분, 예쁜 것 사흘 보면 질립니다. 예쁜 것 좋아하고 예쁜 것 잘 만드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세계적으로 알아줍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의 신 숭배하듯이 그 아름다움에 취해있는 것 있습니다. 우리 나라 조선 도자기 중에 막자기입니다. 막사발, 그냥 개밥그릇이나 해도 될만한 그릇입니다. 왜 그런 줄 압니까? 예쁜 것, 사흘 보면 질립니다. 도자기도 예쁜 도자기들, 집에 갔다놓고 이틀만 보세요. 보기 싫어집니다. 적당하게 생기신 분들 하나님 앞에 감사하세요. 정말 그렇습니다. 개성이 있어야지요. 그리고 그냥 태어나서 예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인생 살아가면서 선()이 그 얼굴에서 나오는 빛나는 얼굴, 이것이 복스럽습니다. 예수 잘 믿는 할머니 처럼 예쁜 얼굴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그 마음이 밖으로 나온 아름다움, 지금 이 하인이 바로 그런 여자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는 그냥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도 물 길러와서 귀찮습니다. 귀찮은 그 때, 자기 귀찮은 것을 그만두고 목이 말라 있는 그 나그네의 목을 축여줄 뿐 아니라 짐승들의 곤고함까지도 채워줄 줄 아는 그 자비로운 마음, 그 아름다운 마음씨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돈많은 한국 재벌 가정들, 부부가 같은 방 쓰는 집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애정을 요구하면 "그래, 얼마 필요해?"라고 반문한다고 합니다. 남편의 애정을 구하는데 얼마 필요하냐구요? 그래서 한국 재벌들 부인들이 모두 뭐하는지 아세요? 처음에는 라스포사 같은 의상실에 다니고, 호피 무늬 밍크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써봐야 몇 백만원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석 콜렉션 합니다. 백만불 주면 다이아몬드로 뒤집어쓴 좋은 목걸이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재미가 없단 말이예요. 그래서 어디로 도망가는가 하면 미술품으로 도망갑니다. 그것은 천만 달러, 이천만 달러 합니다. 고호의 어떤 그림은 팔천만 불까지 합니다. 애정을 받지 못하는 여인들이 애정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돈으로 해결합니다. 부잣집에 자녀 문제 생기면 "돈 얼마 들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으로 미술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로 우리 학교에도 미술관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그림이 새로 갈아 끼워져 있습니다. 그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돈을 투자하니까 엄청난 돈을 주고도 바보 같은 그림만 삽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 마음입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 남편의 넉넉한 품과 아내의 사랑스러운 마음이 만나야됩니다. 겉모습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킹카'라고 하는 이상한 동물이 생겼더라구요. 저는 캥거루밖에 모르는데. 다 겉모습을 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고로 앞으로도 엄청난 가정의 비극이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람은 속 사람의 됨됨이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그런 리브가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네번째 결혼 배우자를 찾는 조건

- 가능하면 부모의 동의와 축복받는 결혼을 소원하십시오.

그런데 이 결혼에 있어서 또 한가지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될 것은 그 부모들의 동의입니다. 부모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을 한 것입니다. 여기 50절 보니까 그 하인이 지금까지 되어졌던 일을 리브가의 집에 찾아가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오빠 라반과 아버지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24:50-51) 부모가 쉽게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 조건이 있다. 열흘 동안 이 아이가 이별할 사람들과 잔치 끝난 다음에 데려가라." 그 때 하인이 말합니다. "나로 급히 가게 하소서." 그러니까 그 최후의 결정은 리브가가 하도록 맡깁니다. 그래서 57절에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24:57-60) 온 가정의 축복 속에 그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은 결혼하셔야 됩니다. 하시되 부모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다섯번째, 부모님들이 축복된 가정의 본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그가 결혼했습니다. 여기 67절에 이삭의 결혼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 때까지 위로를 얻지 못했던 그 외로움이 해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부모들이여, 자녀들에게 결혼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삶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자녀들 눈 앞에 한 평생 누군가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를 삶으로 보여주세요. 그래서 그 결혼을 기대하게 하세요. 결혼의 영광스러움을 아버지, 어머니의 삶에서 만나게 해주세요. 앞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무너지게 될 때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려는 최대의 이유가 먼저 앞서 사신 아빠, 엄마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결혼 생활을 기억하기 때문이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결혼을 가르칠 다른 방도가 없을 지 모릅니다. 강연으로, 이론으로 안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도 아빠, 엄마가 하나님께서 짝 찌워주신 결혼의 영광을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녀들은 결혼을 사모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언젠가 손주도 못 안아보는 노년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가능합니다. 요즘 결혼 안하려고 들더라구요. 그것 뿐만 아니라 사람이 독처하는 것 좋지 못하다고 했는데 여러분의 자녀들이 한 평생을 혼자 외롭게 살지 모릅니다. 결혼의 영광스러움을 우리 가정을 통해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내 자녀들이 아무도 눈물 흘려주는 이 없는 외로움 속에 홀로 그 생애를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가정은 소중합니다. 이 축복 누려야 됩니다. 그 축복의 풍요가 드러나야 됩니다. 말로 가르칠 수 없는 시대가 옵니다. 컴퓨터라는 괴물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했을 그 때에도 자기 눈 앞에 있는 아빠, 엄마의 결혼 생활이 가정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모습일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결혼에 있어서 동질의 믿음을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질의 믿음이어야 됩니다.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사랑하는 것이 다르고 영원을 향해서 그들이 선 자리가 다르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가하면 이 사환은 기도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그 대상은 착한 성품이어야 됩니다. 참 성질은 안고쳐지더라구요. 늙으면 늙을수록 그 성질 더 고착됩니다. 이것은 우리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 겉모습 보지 마시고 내면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십시오. 그리고 부모들과 어른들의 축복 속에 하는 결혼이 되기를 소원해야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여기 계신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결혼의 위대함을 말로 이야기하지 마시고 가정 속에 보여주심으로 앞으로 결혼이 필요 없다는 시대에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구분해 보여주는 축복된 삶의 원천으로서 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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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 (창세기 24:26-49)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에게 신실한 종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오늘은 엘리에셀을 통해 하나님의 종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1. 감사했습니다(26-32)

 

26절과 27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엘리에셀은 하란에 도착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신부가 분명하다고 판단 되어지는 리브가를 만나게 되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찬송을 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될 것을 허락 했을 때도 52절에 보면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경배(敬拜)했다는 말은 한문인데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존경하여 엎드려 절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52절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엘리에셀은 감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감사 드리는 것이 아주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섭섭해 하십니다. 이사야서 1: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하시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다윗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감사였습니다. 사무엘하서 7:18에 보면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나도 다윗과 같이 되면 평생 감사할 것이다' 그럴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평생 감사하며 살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는데 문둥병자 열명이 멀리 서서 긍휼히 여겨 달라고 소리 소리를 쳤습니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은 마을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까이 접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오면 돌에 맞아 죽게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으로 오고 싶어도 왔다가는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까봐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소리만 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문둥병자다 아니다 하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 제사장이었습니다. 문둥병이 아닌데 문둥병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받았을 때는 제사장에게 가서 다시 판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 혹시 문둥병이 나았다면 나았다는 판정도 제사장에게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신 것은 믿고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면 그 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가다가 보니까 정말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명 중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하시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아니 정말 문둥병이 고쳐졌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자기가 진급을 하게 되어서 감사를 드렸던 것이 아니었고, 자기가 돈을 벌게 되어서 감사를 드렸던 것이 아니었고, 자식이 잘 되었기 때문에 감사를 드렸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게 되었을 때 그것 때문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말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감사가 다 그런 감사였습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에 감사한다'(1:8) '너희가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으니 감사한다'(6:17-18)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하는 주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엘리에셀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얼마나 감사했는가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엘리에셀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복은 자기가 타고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자기 복을 타고 태어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에 따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도 하고 미움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그렇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태양빛을 주시고, 태양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태양빛도 필요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50:23에서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고, 기도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4;2).

 

2. 충성했습니다(33-48)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이 보낸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것을 알자 리브가의 식구들이 엘리에셀을 기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약대의 짐을 부리게 한 다음 약대들에게 먹이를 주고 엘리에셀과 그와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에게 발 씻을 물을 준 다음 그들 앞에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33절 말씀을 다시 한 목소리로 읽으시겠습니다.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 그 사람이 가로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가로되 말하소서' 자기가 그곳에 온 목적을 말하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일이 이 정도 진행되었으면 음식을 먹고 숨도 좀 돌린 다음에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엘리에셀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것을 허락받자 자기가 온 목적에 대해서 일사천리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34절부터 48절까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하나 배울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말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말만 하고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 안에 있으면 삶의 목적이 분명해 집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할 말이 많아 집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는 가만히 있습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습니까?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술에 대해서도 그렇고, 증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또 영화나 T.V. 드라마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곳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됩니다.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없으면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또 교회에 대해서 말을 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말이 있습니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똑똑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관심이 온통 거기에 있기 때문이고 아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있으면 일사천리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은 기회가 와도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엘리에셀이 하란에 온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을 빨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말이 흐르는 물같이 줄줄 흘러 나왔던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달변가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분명한 사람은 말이 질서정연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막힘이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정말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충성스러운 종이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아주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그가 한 말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함께 보내어' '여호와여 만일 나의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데'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이렇게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하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25:13에 보면 '충성된 사자(使者-심부름꾼)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했습니다. 엘리에셀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이 하란에 간 것은 대접을 받으면서 편히 쉬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의 신부될 사람을 찾는 것이 그가 하란에 간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내팽게 치고 시간과 힘을 엉뚱한데다 허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것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우선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엘리에셀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종이었지만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단호했습니다(49-).

 

엘리에셀이 34절부터 48절까지 한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셔서 이삭의 신부로 정해 놓으신 리브가를 만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49절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와 진실로 나의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고하시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게 고하여 나로 좌우간 행하게 하소서'

 

말을 다 한 다음 '이제 리브가를 보내 주실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엘리에셀은 감언이설로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말했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이삭이 이 땅으로 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락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41-).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치근덕거리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그 일을 추진했습니다.

 

결혼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삭의 신부를 찾으려고 했지 이 사람 저 사람을 비교

해 가면서 더 잘생긴 사람, 더 똑똑한 사람, 더 능력있는 사람 이렇게 고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정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말했지 미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결단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1980년 총각 때 교회에서 청년회를 지도하면서 이 창세기를 청년들에게 강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삭의 결혼에 대해 큰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결혼은 이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또 우리 양정중앙교회와의 결혼도 이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늘 떳떳합니다. 단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구질구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부딪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굴하지 않고 단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에셀은 자기 혼자 그곳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7절에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했던 '하나님께서 그 사자(使者)를 네 앞서 보내실 것이라'고 한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40절에서도 그것을 다시 한번 더 고백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단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충성을 하지도 않아 놓고, 단호하기만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 세월은 유한합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아까운 시간입니다. 아까운 시간, 젊을 때, 건강할 때, 능력이 있을 때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형편에 있으시든지 최선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