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8장
두 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너무나도 귀한 말씀 <두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함께 나누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보신즉’ 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제나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냐? 또 내가 보기에 어떠냐? 우리아이들, 우리나라, 우리교회가 보기에 어떠냐? -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이 강포가 가득하고 패괴함이 온 땅에 덮여있었다. 하는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두 개의홍수’ -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더러워진 땅을 물청소를 하시는 것입니다. 물청소!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홍수라면 사실은 그에 앞서 이미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죄악의 홍수, 강포의 홍수가 일어났었습니다. 패괴함에 다 썩어 문드러짐의 홍수가 온 땅에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 패괴함과 이 죄악의 홍수를 하나님이 물 홍수로 다 청소를 하시는 그런 대목이 이제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두 개의 방주’ - 방주하면 노아가 잣나무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만들어 놓은 그 방주를 우리가 흔히 생각합니다마는 이미 노아의 마음 자체가 방주가 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악의 홍수 가운데서 노아의 마음이 방주로 떠 있었던 그 모습을 그대로 바꾼 것이 바로 심판의 홍수 가운데 노아의 방주가 떠있는 모양입니다. 노아의 마음이 방주로서 세상에 살았던 그 때의 모습을 다시 옮기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 위에 떠 있는 진짜 방주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두 홍수, 두 방주’를 함께 나누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노아를 향하여 당대의 온전한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정말 어떻게 보면 노아는 화려한 싱글이었다고 할 수가 있어요. 온 세상 전 인류가 다 이 강포에 덮여서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썩어가고 있던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의 물 심판이 모든 걸 다 멸망시켜도 노아와 그 가정만은 남겨 둘 정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단한 거지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강남 일대에서 모든 부모들이 달려가고 있는 교육의 방향과 교육의 방법과 교육열, 거기에서 혼자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나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거, 쉽겠어요? 쉽지 않아요. 그런데 온 인류가 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데 노아 가정 홀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홍수 - ‘하마스’- 이게 강포가 덮여있었던 그 상태의 홍수에서 강포라는 히브리말 입니다. 하마스라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해치다. 빼앗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해치는 일과 빼앗는 일이 사방팔방에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에요. 해치다, 빼앗다 하니까 우리는 흔히 강도질, 도둑질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지금 현재 우리의 세상에는 하마스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강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해치고 빼앗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나는 해치지 않았는데, 나는 빼앗지 않았는데, 나는 남의 물건을 빼앗고 해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을 상해 한 적이 없는 데..’ 그렇다고 하마스, 강포를 행하지 않은 것일 까요? 성경에서 ‘해하다’ ‘ 빼앗다’ 라고 하는 이 말의 더 깊은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해치느냐에 따라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강포의 내용을 분명이 파악할 수가 있어요. 돈을 빼앗고 경제력을 해치는 것이라면 나는 안한 걸 수도 있어요. 강포를 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사람에게 복 된 삶을 허락 하시려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계획이 다 사람마다 있습니다. 타고난 저마다의 하나님의 복 된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싫든 좋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향력을 발휘할 때 내 마음이 오늘 노아에게 말한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 하지 않는다면 필유곡절 어쩔 수 없이 옆에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복 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 가야 될 삶을 우리가 해치고 망가뜨릴 수밖에 없는 일이 본의 아니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나 스스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중에 말하고 행동하고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강포를 행하고 해치고 그리고 빼앗고 그들을 상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나 봅니다.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니라.” 사랑한다고 합니다. 생각하고 위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 해치는 겁니다. 다 빼앗는 것이고 그들이 걸어가야 될 하나님의 복된 길을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 하면서 밀어버리고 궤도에서 일탈하게 만들어버리고 하루 걸릴 걸 이틀 걸리게 만들고 삼일 걸릴 걸 이주일 걸리게 만들면서 그들의 삶에 끊임없이 우리가 불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면서 그 장사하는 아줌마와 대화하는 가운데조차도 내가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서 그 아줌마가 내 얼굴만 봐도 하늘의 빛이 비치고 은혜가 될 수 있는 그런 상태로 하는 것과 비교해서 내 마음에 내 뜻과 계획이 가득차서 하늘과는 단절된 상태에서 그에게 영향력을 미칠 때 벌써 그것이 해치는 것이라는 겁니다. 미약한 관계에서는 그 영향력도 미약합니다만 가족같이 두터운 관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둔감함으로 인해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말하고, 행동하며 영향력을 미칠 때마다 우리가 그들을 해치고, 그들의 복된 길을 빼앗고, 그들의 복된 하늘의 분깃을 망쳐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그것이 강포에요. 꼭 폭력을 휘두르고 강도질을 하고 이런 것만이 강도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만이 강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아마 지금도 하나님이 구름가운데 무지개를 두면서 내가 다시는 그렇게는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면 홍수를 통해서 다 쓸어버려도 마땅할 그런 강포가 범람하는 홍수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포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제 그런 강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빼앗고 내가 상하고 그를 향한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내가 방해한 그 자리가 상처가 되고 곪아서 패괴해집니다. 썩어 냄새가 나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인생이 곪아 터지는 거 아닙니까? 자식이 집을 나가고 자식이 못된 애들과 놀러 다니고 그러면서 타락해 가고 내 마음이 썩고 자식의 마음이 썩고 모든 면에서 패괴함이 가득한 세상을 하나님이 물로 쓸어버리실 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이야기 합니다.
지금은 노아 홍수가 나기 전 120년 전인데 비는 흔적도 없는 그런 땅에서 방주를 만들라 하고 있고 잣나무로 만들라 하신 것을 보면 잣나무가 많이 나있는 어느 들판이나 숲속을 지명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해가 쨍쨍한 홍수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것도 바닷가도 아닌 숲속에다가 배를 짓는 데 배에 키가 하나도 없습니다. 배의 방향을 조절하는 키가 없어요. 그런 상자 같은 배를 만듭니다. 이 방주의 형식 방주의 설계도 이것이 바로 곧바로 노의 마음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물의 홍수 속에서 떠있는 방주, 어떻게 만듭니까? 크기가 다 나와 있어요. 길이가 137M-140M까지 되고 높이가 한 14~15M 그리고 넓이가 한 23M정도, 꽤 크지요? 길이가 140M 이면 축구장보다 더 긴 건데 이 정도로 큰 방주를 만드는 데 이게 전부 30규빗이라고 하면은 29규빗에 아래에서29규빗 그러니까 위에서 한규빗 그 위부분에다가 창문을 쭉 만듭니다. 옆에다가 지붕이 있으면 바로 옆에다가 만들고, 그리고 안에다가는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역청으로 다 발랐다는 겁니다.
우리마음이 이 방주의 모습대로 되어야 됩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모습이 방주로 되어있을 때 그 안에 누가 들어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들어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구원한다는 말은 말이 맞지를 않지만은 온 땅이 썩어문드러져서 거룩한 하나님께서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섭리를 계속 수행해 나가실 수 없을 때 이 노아의 마음이 죄악의 홍수가 들어오지 못하는 방주가 되어서 그 노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들어가 계셨다는 이야깁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라고 바울이 말을 하는 데 그 성전이라고 말할 때 노아 식으로 말하면 방주였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죄악이 범람해서 홍수를 이룰 때 노아가 방주가 되어서, 마음이 방주가 되어서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에요.
자, 노아의 마음이 방주라고 하는 것과 노아가 만든 방주를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방주와 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한번 살펴보면 좋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이 되어야 할까? 방주 같아야 돼요. 첫 번째,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사람의 마음이 방주 같아야 되는 데 방주는 첫 번째 배인데도 불구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키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속에 내 인생의 방향을 찾지 않고 결정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의 방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에요. 내가 이쪽으로 간다고 방향을 정해놓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한 방향으로 장애를 넘어서 내 이생을 끌고 가 주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사람은 키가 없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어야 된다는 방향에 대한 인식을 내가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이 자유롭게 나를 끌고 가실 수가 없습니다.
방주는 키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 지면에 에베레스트 산 정상까지도 다 덮어버리는 어마어마한 홍수가 난 뒤에 정확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착지하게 됩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려면 내가 이렇게 돼야 돼 저렇게 돼야 돼 라고 하는 방향키를 없애고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세요. 무 방향으로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쥐고 계시고 내 마음은 방주이기 때문에 키가 없어야 합니다.
두 번째, 방주 같은 마음이라야 동행을 하는 데 두 번째 요소는 뭡니까? 창문이 위에 바로 천정 바로 밑에 나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0규빗이라 그러면은 밑에서부터 29규빗 위로 창문이 나있기 때문에 옆에 시야의 눈높이에는 옆으로 통하는 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창문이라는 것이 뭐지요? 한 집이 있으면 창문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해 주는 공간입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공간입니다. 창문을 통해서 눈 내리는 것을 봅니다. 창문을 통해서 단풍이 지는 것을 봅니다. 안에 있지만 분명히 밖의 세계와 교감을 이루게 됩니다. 창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 창문을 내고 어떤 세계와 교감을 합니까?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틉니다. 텔레비전은 창문입니다. 그 창문을 통해서 세상의 있는 모든 환경과 교감을 이루며 삽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도 창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 밖의 세계, 내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밖의 세계의 이야기들을 신문이 담아서 교감으로 알려 줍니다. 교감 있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노아의 방주인 사람은 그 창문의 방향이 어디입니까? 신문을 향해서 텔레비전을 향해서 옆으로 뻗어있지를 않고 창문이 위로 뻗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외부의 세계를, 어디를 보느냐? 위를 봅니다. 내가 교감해야 되는, 내가 교통해야 되는 첫 번째 세계를 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창문이 뭡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단순한 책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보이지 않는 사차원의 천국이라고 하는 우리 외부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본문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사람의 방식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게 하늘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사는 방식이에요. 하나님과만 교통을 합니다. 왜요? 방향키를 없애기 위해서. 왜? 하나님이 방향키를 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셨다고 얘기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신즉’- 하나님은 끊임없이 세상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가야 될 방향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마치 우리는 이 세상을 가도 굽이굽이 놓여 져 있는 고속도로를 갈 때에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 그 능선을 따라서 골짜기를 따라서 갈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시듯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그러므로 우리가 교통해야 될 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옆의 세상과 교감을 이룰 것이 아니라 위에계시는 하나님과만 교감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이 방향을 결정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이웃집 앞집 뒷집 모든 집이 다 저렇게 살더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하면 이렇게 가면 됩니다. 하나님은 끝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동시대인들은 사실상 그들이 앞을 볼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행을 만들어놓고 그들이 경향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흐름을 만들어 놨는데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만 따라가면 되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문을 위에다 놓습니다.
그리고 역청을 발랐습니다. 이세상의 풍조, 세상의 유행, 세상의 의식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청을 발랐습니다. 홍수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청을 바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침마다 지금 여러분 마음에 역청을 바르고 계시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기억하는 겁니다.
말씀의 제목을 기억합니다. 오늘 말씀의제목이 뭡니까? <두 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 ‘두 개의홍수 두 개의 방주 ..뭐였지? 아! 내 마음이 방주가 돼야 돼 방주가 되려면 어떻게 돼야 하지? 응, 키가 없어야 되고 그리고 위에 창문이 나서 하나님과만 교감을 해야 돼.’ - 귀에 들리는 거 눈에 보이는 거 많이 있지만 그것들 보다 먼저, 하나님과 먼저 이야기 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 하시는 가를 들으십시오. 그렇게 하려면 날마다 성경말씀을 통해 내 마음을 발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지 않는 한 뚫고 들어옵니다. 이 세상의 풍조 세상의 신념 세상의 의식 이것들을 막아 낼 수 있는 방수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다는 것이에요. 날마다 바르지 않으면 날마다 방주로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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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 성경본문 : 창 6:1~9:20 ·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많은 세월이 흐르게 된다. 창조 당시의 수명은 평균 900살 이상이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살다보면 지혜도 생기지만 욕심도 생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오래 살게 해 주었는데 그들이 너무 많이 부패하여 하나님은 사람 지은 것을 후회 하시면서 마음으로 아파하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방법이 없기 때문에 노아를 중시조로 하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보시려고 홍수로 심판을 하시기로 결정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들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노를 모두 가지고 계신 분이시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우리들은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오복을 누려야 한다.
1. 사람은 아담의 지은 죄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은 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형제인데도 형이 동생을 시기하여 살인하는 죄를 짓는다.
가인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 기록이 창세기 4장에 있다. 가인의 후손 중에서 4장 20절의 야발은 장막에서 살며 양을 치는 목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21절의 유발은 거문고를 뜯고 퉁소를 부는 악사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절의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되었다. 이들을 종합하여 보면 돈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된다.
가인의 계보는 물질문명을 추구하고 세속의 쾌락을 탐하는 자들이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이 겁이 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피하여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워버린 채 스스로 주인이 되어 먹고 마시는 것에만 치중하는 자들이 된 것처럼 보인다.
2.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번창한 다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아벨 대신에 새로운 후손은 ‘셋’이다. ‘셋’이 다시 아들을 낳은데 그 이름이 ‘에노스’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5~26).”
창세기 5장의 기록은 단순하다. 나이를 기록한 것은 아담과 노아의 관계를 연결하기 위함이다. 아담과 노아의 아버지 라멕과 56년 동행하고, 노아와 아브라함이 58년 동안 동행한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역사가 모세에게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이 비록 아담과 하와에게 원죄의 대가로 벌을 내렸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약속의 씨를 아벨과 셋을 통해 주신다.
궁극적으로는 그 씨를 통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오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셋 족보에는 죄악의 기록은 없고 두 가지 특징이 기록되어 있다. 인간에게 죄의 삯은 사망임을 보여주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 에녹이 365세에 승천하였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제공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혼인으로 말미암아 죄를 많이 짓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두 명이 있다. 처음은 삼손이고 나중은 솔로몬이다.
삼손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실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구별하여 태어나게 하신다. 그런데 기생 들릴라에게 푹 빠져서 인생을 망쳐버린다. 결국은 자기 두 눈이 뽑힌 상태에서 연자맷돌을 돌린다. 그리고 재주를 부리는 주인공이 된다. 믿음이 없는 기생 들릴라 잘못 만나서 인생이 비참하게 마무리 된다.
솔로몬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무역을 하기 위하여 외국의 공주들과 혼인을 하는데 그들이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고 시집을 올 때 자기들이 친정에서 섬기는 우상단지를 들고 온다. 솔로몬은 여인들의 치마폭에 의하여 한 때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솔로몬은 죽기 5년 전에 다시 회개하고 전도서를 집필한다. 전도서를 읽어본다. 전도서 1장 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장 1절에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젊어서 하나님 잘 믿어야 한다. 늙으면 후회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부자가 되면 죄도 덩달아 번성한다. 6장 1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고 한다. 사람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홍수 심판은 잘못된 결혼에서 시작된다. 6장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기서 사람을 아들들이란 셋의 후손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의 후손을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오직 돈밖에 모르는 물질주의자들의 후손들과 혼인을 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셋의 후손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영으로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6장 3절에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그런데 앞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굳은 결심이시다.
4. 하나님의 결단은 무섭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죄악이 많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등진 데서 죄악이 발생한다. 호세아 선지자도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들과 혼인하여 살다보니까 순간적으로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어 간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결혼은 주 안에서 하라고 말씀하신다. 고린도전서 7장 39절에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6장 5절이 당시의 사람들의 행위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렇게 되어 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결단이 나오신다. 6-7절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6장 12절도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5. 하나님은 홍수심판의 감독으로 노아를 선택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중심으로 일을 하신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다. 모세를 선택하여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만드신다. 다윗을 선택하여 이스라엘 왕조를 세우신다. 열두 제자들과 바울 등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파하신다.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여 홍수 심판의 감독으로 삼으신다. 성경은 노아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6장 8-9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7장 1절도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에게 하나님이 지시하신다. 6장 13절에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지시하시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다.
노아의 가족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노아 때문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는 것 같다. 6장 18절에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그 다음절을 읽어보면 노아의 방주에 모든 짐승들이 한 쌍씩 들어가는데 방주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공룡 같은 대형 동물을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6. 부패한 인간 때문에 홍수심판이 시작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기간은 약 100년이나 된다. 왜냐하면 노아의 나이가 500살 되었을 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 받았고 홍수가 시작이 되는 나이는 600살이다(7,6).
노아 방주의 크기는 길이가 135m, 넓이가 22.5m, 높이가 13.5m이다. 넓이는 축구장의 약 절반 정도 되는 높이는 빌딩 약 4층 정도의 크기이다.
심판이 시작되는 날은 7장 11절에 노아 600살 2월 17일이다. 마치는 날은 601살 2월 27일이다. 이것은 유대력이기 때문에 양력으로 계산하면 약 365일이다. 에녹이 365살을 살고 승천한 숫자와 같다.
7. 홍수심판의 부산물은 화석이다.
일 년 만에 모든 동물과 식물이 일시에 물에 잠기게 된다. 이 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화석이 만들어 진다.
화석이 만들어 지는 곳은 화석은 지층이 만들어질 때 함께 만들어진다. 화석은 거의 강바닥이나 바다 밑에서 퇴적작용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화석은 퇴적암에서 발견되며, 흔히 보는 화석은 강이나 바다에서 산 생물이 많다.
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죽은 생물체가 강바닥이나 바다 밑에 쌓이고 그 위에 퇴적물이 쌓여 지층을 만들면 화석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렇게 된 지층이 힘을 받아 물위로 솟아오르게 되어 돌, 바람 등에 지층이 깎이어 화석이 드러난다.
화석이 되는 부분은 죽은 생물체가 지층 속에 묻혀서 썩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면 화석이 된다. 물고기 뼈나 조개껍데기, 나뭇잎 잎맥 등이 화석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화석이 되기 위한 조건은 생물체가 공기 중에서 썩지 않도록 빨리 묻히고 잘 보존되어야 한다. 이것이 노아 홍수기간 1년이다.
생물체에 뼈나 껍데기, 껍질, 잎맥 등 단단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암석으로 굳어지거나 단단한 성분으로 바뀌는 '화석화 작용'을 거쳐야 한다. 생물의 개체수가 많아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이 뭍일 때만 가능하다.
8. 홍수심판 후에 노아가 먼저 한 일은 번제이다.
노아는 성실한 신앙인이다. 일 년 뒤에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피 흘려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위하여 가죽 옷을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양의 피를 흘린 것과 아벨의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는 것인데 이것의 원 기록은 레위기이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일먼저 한 것이 제단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그것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창세기 2장 3절에 약속하신 것이다.
9. 하나님은 홍수심판 후에 노아와 계약을 갱신하신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사람들에게 항상 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여 주신다. 그리고 처음 아담에게는 채소와 과일만 먹게 했는데 아직 채소와 과일이 없기 때문에 비상식량으로 고기를 먹게 하신다. 사람의 치아는 송곳니가 4개이니까 육식이 8분의 1이고, 소와 염소는 송곳니가 없기 때문에 100% 풀을 먹는 것이고, 맹수는 송곳니이기 때문에 100% 육식이다.
9장 1-3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7절에 다시 확인하여 주신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허락하시지만 생명이 되는 피는 먹지 말라고 금하신다. 이것도 레위기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다.
레위기 7장 26-27절에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시 물로 심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할 것으로 아시고 약속의 증표로 무지개를 만들어 주신다.
9장 11-17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사람은 죄인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문제는 연이어 연결이 된다.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번창한 다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인이 아니고 아벨이다. 아벨이 죽은 다음에 다른 아들인 셋을 주어 하나님의 계획을 차질 없이 이어가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제공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서로 잘못 연결이 되면 이것이 죄의 시초가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혼인을 심사숙고 하여 결정하고 일단 한 다음에는 한 눈을 팔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결단은 무섭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이 부패하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심판을 하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홍수심판의 감독으로 노아를 선택하신다. 하나님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동원하여 역사하신다. 우리들도 노아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패한 인간 때문에 홍수심판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으시다.
홍수심판의 부산물은 화석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에 대한 증거가 화석이다.
홍수심판 후에 노아가 먼저 한 일은 번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예배드리는 자를 좋아하신다. 아브라함도 먼저 한 것이 제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홍수심판 후에 노아와 계약을 갱신하신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시다. 처음에 사람을 만들어 주시고 하신 약속을 파기 하지 않으시고 변함없이 지켜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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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강문호 · 성경본문 : 창 6:0~0:0
<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해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 지라>(창 6:9-12)
노아와 아담은 동격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때 아담만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때 노아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노아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담은 깨끗한 세상에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악인들의 시체가 즐비한 세상에 혼자였습니다.
노아만이 죄 많은 세상에서 혼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자가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노아와 같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함을 받습니다.
도대체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 의인
의인이 무엇입니까? 의롭게 사는 이가 의인이 아니라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이가 의인입니다. 사실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 하는 자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그러나 노아는 의롭게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시면 축복하십니다. 의인이라는 말인 원어 차디크는 올바르게 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는 무감각증에 빠져 있던 때에 노아만은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쓰는 이였습니다.
미드라쉬 기록을 보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런 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 진실은 말하지 말아라
2. 만일 종노릇하거든 주인의 물건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훔쳐라.
3. 될 수 있는 대로 방탕을 즐겨라. 인생의 낙이 그런 것이다.
4. 주인을 미워할 기회가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즉시 미워하라.
5. 서로 사랑하라. 죄를 짓기 위하여 동료끼리 뭉치라.
이런 악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우면 음란하였고 앉으면 술을 마시고 서면 춤을 추는 온갖 경우에 범죄하였습니다.
그래서 미드라쉬를 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 비는 지옥을 통과하여 내린 비라 너무나 뜨거웠었다고 합니다. 물론 전설이니까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런 뜨거운 비가 내렸을 가요?
이유가 분명합니다 육적으로 음란하게 사느라고 뜨거웠으니 하나님께서 <뜨거운 맛좀 보아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죄를 짓기에 뜨거웠으니 뜨거운 고통을 당하라고 뜨거운 물이 내려서 뜨거움을 통하여 고통을 준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들도 견디지 못 하니까 부모들은 이왕 죽을 바에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자는 마음을 가지고 펄펄 끓는 물에 자녀를 던져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물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릴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산 노아만을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히 알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유황불이 떨어져서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롯의 가정만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롯이 의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아브라함이 기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뒤에서 누가 뒷바침 기도를 한다는 것은 생명과 연결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음란한 도시는 망합니다. 죄 많은 사람은 멸망됩니다.
폼페이가 그렇게 음란하더니 화산 속으로 들어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지난 번 필리핀에 화산이 폭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폭발한 화산재가 바람에 불려 그 주변에서 가장 음란한 곳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지붕까지 덮였습니다. 모두가 피난하였습니다. 폐허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곳은 폐허가 되어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2. 완전한 자
노아는 완전한 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미드라쉬 보면 노아는 498세에 결혼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늦게 결혼한 이가 노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노총각은 노아였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결혼하였을 가요?
죄악 세상 죄에 물들지 않으려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노아는 결혼을 498세에 하여 50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 5:32)
얼마나 완전하게 살려고 애를 썼는지 이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런던에 살고 있는 4살 된 아기가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는데도 웃고 있습니다. 오히려 손목을 어머니에게 보이면서
<엄마! 나 팔 부러졌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픈 줄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치료하느라고 수술을 하여도 주사기를 찔러도 도무지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 14살이 되었습니다. 놀다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도 또 아픔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처를 보이고 자랑하면서도 아픔을 도저히 느끼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에 완전히 무감각하였습니다. 내과의사들이 아프면 아픔을 느끼도록 이 병을 고쳐보려고 하였지만 결국은 고치지 못 하였습니다. 오늘 날 이 병을 갱글리뉴로파디(ganglineuropathy)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아파도 아픔을 모르고 고통스러워도 고통을 모르는 병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이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무감각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딤전4:2)라고 말했습니다.
중학교 여자아이가 교실에서 양수가 터졌습니다. 병원으로 가다가 차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님도 부모도 친구들도 10달 동안 아무도 그 아이가 임신한 것을 몰랐습니다. 작년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자신은 임신인 줄을 알았으나 어떻게 할 지 모르다가 10개월을 지내 온 것이랍니다.
이 사건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디까지 와 있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이런 사회 속에서도 완전하였습니다. 완전하다고 하는 히브리어는 <타밈>이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흠도 티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완전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잠28:18)
인간은 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되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노아가 완전하다는 의미는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하게 살려고 애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한 자
노아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완전하였기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성령 충만하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과 함께 살았고 성령을 위하여 살았고 성령과 더불어 말했고 성령과 더불어 걸어갔습니다.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그를 늘 도와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니까 하나님이 여러 가지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증거를 몇 가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미드라쉬는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주고 있습니다. 참고만 하십시오.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죄가 도를 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서서히 그의 자비의 날개를 접기 시작하셨습니다. 참을 수 있는 도가 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노아를 그들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경고를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20년 동안 노아는 그들 사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면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홍수가 올 것이니 죄에서 돌아 오라!>
그러나 믿는 이가 없었습니다. 비웃는 이만 수두룩하였습니다. 노아가 산 위에 배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말했습니다
<왜 엉뚱한 곳에 배를 만드냐?>
노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들은 듣기는커녕 빈둥거렸습니다.
<홍수? 하나님이 불의 홍수를 보내 봐라! 우리는 문제없이 막을 수 있다. 하나님이 물의 홍수를 보내 봐라! 우리는 철판을 만들어 물이 넘치지 못 하게 막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공격하여도 우리는 모두 막을 자신이 있다>
노아가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내 말을 들어 보라! 홍수는 발 밑의 물이 아니다. 온 몸을 덮치는 물도 아니라. 온 산을 덮는 물이다. 준비하여라!>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설사 이 땅에 홍수가 온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의롭게 사는 므두셀라가 살아 있는 한 이 세상을 하나님은 멸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의롭게 사는 이들을 멸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안심하자. 세상에는 홍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습니다.
120년 후에 홍수가 온다는 것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120년 후에 므두셀라가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사는 므두셀라 한 명 때문에 세상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한 명의 의인이 한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파멸의 시작인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해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징조를 보여 주신 것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여 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도 깨닫지 못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죄로 심성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회개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므두셀라와 모든 의인들에 세상을떠나니 세상은 황폐화된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노아만을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홍수를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를 만드는 데는 대단한 기술과 특별한 지혜가 필요하였습니다. 노아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도 아니었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모두 넣어야 하기에 서로 싸우거나 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요구되었습니다. 다만 방주 안에는 물고기들을 위한 방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고기들은 홍수 속에서도 물 속에서 지낼 수 있는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천사 라지엘(Raziel)이 아담에게 지혜의 책 한 권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온갖 지혜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 천사가 아담을 찾아 왔습니다. 아담을 찾아 온 천사는 아담이 토라로부터 굉장한 지혜를 얻었음을 알았습니다. 천사는 그렇게 지혜로워진 아담을 보면서 시기와 질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넘어뜨리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아주 교활한 방법을 썼습니다.
아담을 하나님 같다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 앞에 경배한다며 엎드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아담은 항의하며 말했습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지 마십시오. 나는 사람이요. 나는 피조물이란 말이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십시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그 놀라운 책을 훔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담은 이 곳 저 곳으로 다니며 그 책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아담은 너무나 속상하여 통곡을 할 정도였습니다. 또 여러 날 동안 금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다시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두려워 말라. 내가 다시 찾아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바다를 담당하고 있는 천사 라합(Rahab)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바다에서 찾아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서 라합 천사가 그 책을 찾아서 다시 아담에게 도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 토라는 아담의 손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죽은 후 그 책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이 어느 날 꿈을 꾸는 데 그 책이 보였습니다. 에녹을 꿈속에서 본 곳에 가서 드디어 그 책을 찾았습니다. 에녹을 그 책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지혜를 모두 익혔습니다. 그래서 아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녹은 그 책의 내용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기에 그 책을 감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천사장 라파엘(Raphael)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노아에게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내가 이 책을 너에게 준다. 이 책의 모든 비밀과 신비가 너에게서 밝혀질 것이다. 너는 이 책을 읽으면서 거룩함과 성결함과 정중함과 겸손함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아 너는 다람쥐 나무로 방주를 만드는 방법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네 아내와 네 자녀들은 홍수 속에서도 건짐을 받으리라>
그래서 이 책은 노아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그 책을 받아서 공부하는 동안에 성령께서 노아에게 임재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위하여 무슨 재료가 필요한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동물을 모을 지도 알았습니다. 그 책은 샤파이어로 만들어졌습니다. 방주를 다 만든 후 모세는 그 책을 금으로 만든 상자에 넣어서 방주안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하게 보관하였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방주안에서 그 책은 노아에게 시간과 날짜를 알려 주었습니다. 낮인지 밤인지를 그 책은 알려 주었고 며칠이 지났는지도 그 책을 통하여 알았고 몇 시인 줄도 그 책을 통하여 알았습니다.
노아가 죽을 때 노아는 그가 가장 신임하는 셈에게 이 책을 주었습니다. 셈은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에게 주었고 그 후 책은 레위를 통하여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로부터 솔로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지혜는 바로 이 책에서 배운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기술도 이 책을 통하여 익혔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는 비결까지 이 책을 통하여 익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아담에게 특별한 책을 선물로 주셔서 그것이 노아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노아가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배를 만들었습니다. 축구장보다 큰 배였습니다. 길이가 300규빗이었습니다. 150M입니다. 나는 150M나 되는 배를 몇 대 보지 못 하였습니다. 완벽한 배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정만 구원시켜 주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 노아는 의롭게 살았습니다.
2. 노아는 완전하게 살았습니다.
3.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