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3:1-18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베드로후서 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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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소망의 종교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늘 기쁘고 성도들은 한 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위의 소망입니다. 하늘의 소망인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기뻐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께 국민일보 12주년 창립을 맞이해서 부족한 종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일보를 창설하고 12년 동안 여기까지 이끌어 오는데 수고하신 우리 조용기 목사님과 순복음교회가 엄청난 재정을 부담하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한국교회 대변지로서 이렇게 봉사를 많이 해 오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 국민일보를 많이 사랑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많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셨습니다. 저는 그 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문이란 영어로 News paper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있는 소식을, 땅에 있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정보와 그리고 땅에 있는 어떤 사건들을 국민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신문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일보는 거기에다 하나를 더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고 우리 성도들이 읽고 사랑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국민일보보다 더 훌륭한 신문이 있지만 다른 신문과 다른 것은 그러한 땅에 있는 정보 위에 하늘의 소식을 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복음을 담아 가지고 전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기독교는 기쁜 소식, 하늘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뉴스들이 너무 많아서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홍수가 범람하듯이 엄청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사건이 들어오고 있지만 우리는 그로 인하여 소망을 가질 수가 없고 어떤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울하고 답답하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수 십 년 신문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에서 어떤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위의 소식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소식은 소식인데, 뉴스는 뉴스인데 무슨 뉴스입니까? 복음이란 말을 영어로 Good News라고 합니다. 정말 Good News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땅의 뉴스가 아닌 위의 뉴스, 그냥 뉴스가 아닌 사실을 보도하는, 땅의 사실이 아닌 하늘의 사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위에 2천 년 전에 보내어 주신 확실한 이 하늘의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여서 우리에게 기쁨과 생명과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제일 기쁜 소식을 베들레헴에 있는 양치는 목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내가 참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천사가 일러주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양치는 목자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우리의 구주,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를 보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땅 위에 태어나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려고, 우리를 기쁘시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 위하여, 누구든지 멸망 받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위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을 얻고 그 안에서 살 때 우리가 참 자유와 풍성한 은혜를,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그와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십 여 년 전에 알래스카에 가서 낚시를 한 일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나가서 낚시를 하는데 마침 큰 홍어를 낚았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한 오십 미터, 육십 미터 아래에서 홍어를 낚아 올렸는데 그냥 올라오는 게 아니에요. 안 올라오려고 몸부림을 치니까 줄을 감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요. 고기라 할지라도 사람 만한 줄 알았어요. 정말 큰 가오리가 걸렸어요. 그런데 올려서 그 분이 낚시를 빼더니 낙심하는 마음으로 바다에 그냥 던져버리는 거예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그냥 바다에 던지는 거예요.
아이, 왜 그러시냐고, 회 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왜 그러시냐고, 그러니까 이런 것 잡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고기도 아니라는 거예요. 버리는 거예요. 조금 있다가 또 낚아 올렸어요. 은어를 낚았어요. 또 버리는 거예요. 큰 은어를 그냥 버리는 거예요. 그럼 뭘 낚느냐? 그러니까 광어 하나만 낚는 대요. 이게 고기냐 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광어를 낚는데 저는 몇 마리만 낚았는데 내 옆에 잘 낚는 분은 20Kg 짜리도 낚고 12, 15Kg 짜리를 낚고 광어 키가 사람의 반정도 됩니다. 얼마나 큰 지요 번들번들한 광어가 살찐 돼지 비계 같은 것이, 얼마나 고기들이 많은 지요 바다에 고기가 쫙 깔렸어요.
오늘 예수 믿으면 은혜의 바다에, 주안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지 그는 이런 것들을 우리 인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에 "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부요함을 누리는 나라가 많고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는 민족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안에 있습니다.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위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땅에서뿐만 아닙니다.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땅에는 영원히 사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지요. 하나는, 생명의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살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영원한 성도의 삶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땅에 것만 사랑하고 땅에 것만 의지하고 땅을 바라보고 살다가 땅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땅의 권세를 가진 마귀와 함께 살다가 이 땅을 떠날 때 마귀에게 이끌려 마귀가 가는 지옥에 가서 마귀와 함께 영원히 사는 지옥의 삶이 있습니다. 거기도 영원히 살지만 마귀와 함께 삽니다. 저주아래 삽니다. 멸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사느냐? 하늘 나라에 가서 사는데 누구와 함께 사느냐?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땅에서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떠나서도 주님과 함께...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때는 언제나 소망을 가지고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살고 주님이 언제라도 부르시면 갈 수 있다고 하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떠날때도 절망이나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스데반과 같이, 천사와 같이 우리의 얼굴이 빛난 모습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이 땅을 떠날 때 사람을 묶습니다. 아예 손, 발은 따로 꽁꽁 묶고 그 다음에는 발목을 묶고 그 다음 수의를 입힌 다음에 일곱 곳을 강하게 잡아 당겨서 단단하게 묶습니다. 끈으로, 큰 광목이라든지 철저하게 묶어 가지고 못을 탕탕 칩니다. 왜 그러는지 아세요? 지옥으로 가기 때문에 가다가 떨어뜨리지 말고 귀신이 끝까지 지옥까지 잘 데려가라는 마음으로 귀신이 데려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묶어주는 겁니다. 잘 들고 가라, 운반을 잘해 달라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왜 우리 상복은 검은 옷을 입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신이 와서 데려갈 때 귀신이 못 보는 것은 검은 것이니까 혹시 문상 갔다가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 귀신을 속이려고 검은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려고 입는 거예요. 귀신이 죽은 분만 데려가야 되는데 옆에 있는 분도 들키면 그냥 데려가니까 그래서 안 들키려고 까만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신이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와서 우리를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좌우에 천군천사 들러리서고 앞뒤에 천만성도 호위하도다♪ 주님이 우리를 영접합니다. 하늘 문을 열어 놓고 우리 하나님 보좌에서 주님은 일어서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도록, 기름과 등을 준비하였다가 천국 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에서도 소망이요 이 땅을 떠나서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기쁨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두려움 없이 자유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는 것이고 저기서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기쁜 일이요 거기서도 기쁜 일 인 것입니다. 항상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현실의 오늘 교인들도 너무 땅이 좋고 교회가 좋고 우리 가정이 좋고 세상이 너무 좋아서 하늘 나라를 안 가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죽어도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주여, 믿습니다 그래도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여기를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하고 '주님 오시면 이 시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멘.' '오늘 이 땅을 떠나도 좋습니까?' '아멘'. 그래서 목사님이 실험을 했어요.
그럼 내가 고무 풍선을 하나 불 테니까 자기 있는 데에 날아오면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누구에게 갈지 성도들이 고무 풍선이 날아오는 것을 전부 기다리고 맞이할 줄 알고 고무 풍선을 훅 불었어요. 그랬더니 고무 풍선이 땅에 안 떨어지는 거예요. 왜? 자기에게 가까이 오면 불어 버리니까, 그래서 고무 풍선이 계속 하늘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땅이 너무 좋아 가지고 천국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여러분, 겨울에 이곳에 남아 있는 제비가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누가, 땅에서 영원히 있을 자가 어디 있으며 또 있다고 생각하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우리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고생도 없고 밤도 낮도 없는, 항상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야 가장 지혜 있게 사는 삶이요 슬기롭게 사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늘 이런 소식을 들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당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임종을 앞에 두고 있는 성도들이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일입니다. 너무너무 속상해 하고 내가 왜 죽느냐? 고, 내가 이 집을 두고 아내를 두고 난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절대로 못 갑니다 안갑니다 그래요. 가고 안가는 걸 자기가 결정하는 것도 아닌데 막 속상해 하는 거예요. 울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성도들은 항상 땅에 있는 날 동안은 최선을 다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주님 앞에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사도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끝까지 잘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초기 개척 당시에 요한과 베티라고 하는 부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부가 하루는 남편이 멀리 가고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있는데 밭에 가서 일을 하다가 이 베티가 뱀에 물렸어요. 뱀에 물리면 몇 시간 내에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빨리 집으로 돌아와서 '아 이거 얼마 안 남았구나' 하고 남편을 위해서 전부 준비를 하고 아이들 깨기 전에 먹을 것을 빨리 준비를 했어요. 버터로 빵을 굽고 청소하고 정리하고 열심히 빨리 움직였어요. 그런데 서서히 고통이 오는 거예요. 다리가 흔들리는 거예요. 잘 볼 수 없어요.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땀을 흘리며 이틀 일 할 것을 전부 하고 남편에게 메모를 했어요. '와서 아이들 요거 입혀주시고 이런 것 하시고', 아이들에게는 '너는 일어나서 네 동생에게는 우유를 먹여주어라 엄마는 여기 잠들 테니까 깨우지 마라' 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잤는데 이 어머니 베티가 깨어났어요. 죽지 않고 깨어났어요. 너무 땀을 많이 흘려 가지고 독사의 독이 땀으로 다 나가서 살아났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위기다, 환난이다, 절망이다, 죽음이다 어떤 문제가 왔을 때 흔들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선한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해서 오늘밖에 없다, 이것 아니면 끝났다 라고 하는 이 세상 윤리와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끝나도 시작이요 끝나도 천국이 있고 여기가 안되면 저기가 있는 것이고 이 모든 일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족한 저도 교회를 여러 곳을 옮겼지만 내일 떠나도 떠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후계자가 와서 마음껏 목회를 잘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해주고 떠나는 겁니다. 내가 떠나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우리는 좋은 이름을 남기고 좋은 발자취를 남기면서 감사하면서 거기를 떠나야지 왜 저주하고 떠나고 침 뱉고 떠나고 떠나는 곳을 왜 상처를 주며 떠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일을 이 나라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룻밤이라도 잠 잘 재워 주시면 이튿날 일어나서 이불도 잘 개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떠날 수 없습니까? 감사함으로 갈 수 없습니까?
이 세상 빈손으로 왔다가 나의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 부르실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나의 앞날을 맡기고 그걸 준비하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인데 마지막에 당황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준비가 못된 성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 우리를 부르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구는 하나의 별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수많은 별 가운데 작은 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성이나 금성이나 해왕성 명왕성에 비하면 지구는 보잘것없는 작고 작은 별입니다. 우리가 지구를 보니까 그렇게 보여서 그렇지 밖에서 지구를 보면 반짝 반짝 빛나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좋은 산소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식물도 주시고 동물도 주시고 엿새동안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름답게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여 우리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이 땅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우리 인간이, 아담 이브가 범죄 하므로 반짝 반짝이는 지구라는 불빛은 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마귀, 사탄이 들어오면서 지구의 불을 꺼버려서 지구는 저주의 별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구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가장 버림받은 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쌍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지구에 이천 년 전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불을 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원수마귀를 멸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거룩한 하늘이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너도, 나도 어디든지 불을 환하게 켜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새벽 별인 것입니다. ♪주는 저 산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위에 비길 것이 없어라♪ 주님은 새벽 별이 되십니다.
저는 잊을 수 없는 것이 미국에서 성탄절에 미국의 도시들이 어쩌면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온 나라가 반짝반짝, 반짝반짝 집집마다 트리 가 다 다르고 이 정도가 아니에요. 서민들도 집은 크니까 다 아름답게 꾸몄어요. 마당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몄는지 온 나라에 불을 환하게 켰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사망의 어두움에 불을 켜 주신 분,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불을 켜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이렇게 구속함을 받아 생명의 삶을 살게 되고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을 우리는 바라보면서 또 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 교회의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이 땅에서 33년 동안 땅에 불을 켜시고 구름 타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지금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구름 타고 오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하늘은 뜨거운 불에 떠나가고 땅은 뜨거운 체질에 다 녹아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모두가 없어질 때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영원한 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과 등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유명한 토마스 칼라일은 하루는 이런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편지를 했습니다. 선생님 인생이란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가치 있게,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문제가 고대인에게는 죽음의 문제였고, 중세인 에게는 죄가 문제였다고 합니다. 오늘 현대인에게는 삶의 의미가 문제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을,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 때 토마스칼라일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청소하고 집 문을 열어서 공기를 다 바꾸고 집안 정리를 잘 하시고 그 다음에는 열심히 일하시고 저녁에 돌아와서 목욕을 하고 온 식구와 함께 좋은 음식을 먹고 주안에서 잠을 잘 자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 있는 삶이냐고, 이 따위 삶이야 누가 못하느냐고, 무슨 인생의 가치가 여기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을 경홀히 여길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지루한 삶, 아무 의미가 없는 삶만 계속한단 말인가? 인생을 그렇게 끝낼 수 있단 말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최고로 좋은 화장품을 가져다가 화장을 하고, 향수를 쫙 뿌리고 난 다음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옷을, 크리스챤 디올로 옷을 갈아입고, 아침 열 시에 이태리제 안경을 쓰고 백화점으로 가서 가장 값진, 요사이 유행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상품이 새로 나왔는지 진열장을 한나절 주욱 살피고, 피곤하니까 커피 숍에 가서 남미 커피 한 잔을 가져다가 눈을 지그시 감고 호로록 호로록 두 시간 동안 먹고, 그 다음 점심 스테이크를 멋지게 해서 뉴욕 스테이크를 잘라서 먹고, 오후에는 골프장으로 가서 골프장에서 멋지게 스윙을 해서 날리고, 네 시간 지난 다음에 영동에 가서 사우나에 들어가서 땀을 쭈욱 빼고 그 다음 마사지를 다 마치고 나서 머리를 하고, 그 다음에 고급 차를 타고 호텔에 가서 유명한 사람 장관님, 회장님, 대학 동창들 만나서 '예쁘다야 너 좋아졌네 신랑 뭐하냐야 우리신랑은 미국 갔다야' 하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집에 들어와서 향수를 뿌리고 누워서 잠을 잔다, 그 때 남편이 와서 '하-니' ....
오늘 인생의 의미를 이런데서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순간 질병 하나만 와도, 사건 하나만 바뀌어도 절망과 어두움과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도의 삶이 어디 있습니까? 항상 깨어 기도하고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 나와서 늘 예배드리고 성전에서 봉사하고 나가서 전도하고, '이 게 무슨 사람이 따분한 그런 삶을?' 저는 어려서부터 그런 삶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내 친구 하나는 군수 님을 만나고 정부에서 높은 분 만나고 지프차 타고 고향에 내려와 가지고 아주 좋은 옷 입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아주 예쁜 미인을 사귀면서 서울에 있는 아가씨 데려오고 집에 와서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집에 가면 농민입니다. 그 순간 완전히 농민의 옷 갈아입고 아버지가 지시는 지게를 내가 대신 짊어집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한 번도 내가 무슨, 목회 하면서도 내가 서울서 내려온 척 해본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바로 거름 치고 화장실 가서 인분 치우고 밭에 나가서 그냥 서울에서 온 그 순간부터 바로 일만 합니다. 그러나 내 친구는 전혀 그런 걸 떠나서 외국 노래 부르고 뭐 좋은 이야기들, 전부 이런 사람만 사귀고 그러다가 얼마 전에 술 먹고 교통사고가 나서 그냥 노량진 역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돌아가고 나니 남은 것 하나도 없었어요 발자취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귀던 분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장사 지낼 친구도 없었습니다. 가족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오늘 삶의 의미를 거리에서 찾고, 문화에서 찾고, 이 세상 문화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끝까지 여러분을 위한 일이고 승리하는 길이고 주와 함께 사귀는 그 안에 모든 능력과 은혜와 축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경북 지사 님이 오셔서 간증하는 것 감동 많이 받으셨지요? 장로님인데 지사입니다. 얼마나 무겁기 그지없지만 한결 같이 교회가 시키는 대로 주일 지키고 늘 전도하고 교회에서 한 명 전도하라 하면 끝까지 한 명 전도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간증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금년 봄에 강원도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강릉에서부터 불이 번져 가지고 경상북도 울진 경계에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일 주일 동안 불이 계속 붙었습니다.
우리 나라 특수 부대 군인들 특수 요원들이 다 달려들고 소방서 다 달려들고 경찰 다 달려들어도 이 불을 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국무총리가 내려오시고 국방장관이 내려오시고 건설교통부장관이 내려오시고 도지사가 그 곳에 진두지휘를 해도 이 불은 바람 하나 불면 산등성이에서 산등성이로 불똥이 그대로 튀어 가지고 그냥 그대로 일 주일 동안 몇 백 킬로를 다 덮었습니다. 여러분, 나라에서 어떤 회의를 하고 무슨 장비, 무슨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이 불을 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경상북도로 넘어왔습니다. 불도 넘어가면 그 지역에 있는 기관장이 인계를 해야 한답니다. 인계를 받는 대요. 자기가 불붙인 것도 아닌데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도지사에게로 넘어간답니다.
바로 내일 아침부터는 자기가 그 지역에 진두지휘를 하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밤에 기도를 했답니다. 불을 좀 꺼 달라고, 밤에 기도하고 아침에 또 기도를 했다고 그러지요? 새벽에 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는데 여러분, 어떤 것으로도 끌 수 없는 이 불이 놀라운 것은 그 불이 번져 나가면 안 되는 것이 울진에 원자력 발전소에 이 불이 이틀 내로 번지게 되어 있어서 전 세계 CNN뉴스를 비롯해서 온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위험한 순간에 경상북도 도지사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불을 꺼달라고 기도하고 아침에 다섯 시에 창문을 여니까 밖이 조용하더래요.
그 불던 태풍들이, 끊임없이 불던 바닷바람이 조용하더래요. 그래서 항상 이러냐고 물어보니까 오늘은 이상하게 바람이 안 분다고, 그래서 아침 열 시 반에 일주일 동안 불어 내려오던 태풍이 경상북도에 와서 하루도 지나가지 않고 그냥 진두지휘하는 그 순간, 열 시에 불을 다 껐다고 하는 간증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기도가 왜 시시합니까? 기도가 왜 의미가 없습니까 여러분, 굉장한 장비들, 우리 나라를 다 흔드는 분들이 불을 못 잡았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왜 예배드리는 것이 한심한 일입니까? 삶의 의미를 예배를 안 드리고 어디에 가서 찾으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호텔에서? 비행기 위에서? 어디에서 여러분은 인생을 위대하게 하는 요소가 어디에 있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제 자리를 지키시기를 바래요. 남이야 어찌든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이 지사 님은 할아버지가 믿으셨대요. 경상북도에서 제일 먼저, 백 년 전에 예수를 믿어 가지고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에게 아들도 두 형제가 신학교를 다닌다고 합니다.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것 같은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교회에 봉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런 삶을 몇 대를 봉사하고 지켜 나갔는데 하나님은 금생에, 내생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이 가정에 내려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오늘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 영적인 진리를 무시하고 위에 계신 소식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첫째,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한다라고 했어요. 만물을 누가 지었어?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짓기는 뭘 지었어 저절로 있었지. 저절로 있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요 오늘 이 나무도 가져다 놓은 사람이 있고요 다 모두 이걸 꾸민 사람이 있습니다. 저절로 있는 것은 어느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모든 만물이 지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심판도 없다고 말합니다. 심판이 왜 없습니까? 하나님은 역사에 개인과 국가와 도시를 언제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권력을 심판합니다 정치를 심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심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만물이 옛날부터 그대로 있는데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고, 아니에요 재림하십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는 위에 있는 진리를 무시하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위로 향하여 소망을 가지지 않고 땅에 있는 세속의 문화에 소망을 가지기 때문에 이렇게 죄악이 불빛처럼 번져 나가고 있고 우리 인간의 정신과 도덕은 다 사라지고 퇴폐한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위의 소식을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위의 학교입니다. 하늘의 학교 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신령한 지혜를 주는 영적인 학교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위의 기업이에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복된 위의 기업이에요. 교회는 위의 나라예요. 영원한 나라예요.
느부갓네살이 말하는 대로 이 나라는 망하지 아니하는 나라 에요. 교회는 위의 축복, 위의 생수예요. 그래서 교회에 오면 목마른 자들이 시원함을 얻는 거예요. 땅에 있는 생수가 아니에요. 위에 있는 말씀의 생수, 신령한 생수의 능력을 받으면서 우리가 새로워지고 치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위의 병원이에요. 우리 인간의 병을 병원에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면 어떤 육신의 병도 정신적인 병도 인간을 망치는 모든 병들도 교회에 오면 다 고침 받아 위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료받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와 함께 21세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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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안전 비밀 지대'로 숨는 사람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미국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언론들이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가 「안전 비밀 지대」(Secure and Undisclosed Location, SAUL)로 피신했다고 보도했는데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도 알 케다 등의 테러 단체들도 추적할 수 없는 극비의 안전 지역이 어디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체니 부통령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몇 사람을 빼놓고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래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워싱턴 디씨 근교의 어떤 벙커가 그곳인지 백악관에서 수 시간 떨어진 곳이 그곳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지시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비밀 안전 지대는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국민들은 딕 체니가 은신했던 '안전비밀 지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언론들은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철저히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주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냉소주의와 회의주의에 빠진 사람들>
베드로 후서가 쓰여지던 당시의 기독교인들 역시 '안전 비밀 지대'가 필요했습니다. 벧후서는 1세기 말 아니면 2세기 초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 때는 신앙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수없이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극도로 타락해서 윤리적으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핍박하는 반(反)기독교적인 무리들의 기세 또한 대단했습니다. 저들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종말론(eschatology)을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멀쩡하고 잘 돌아가는데 무슨 심판이 있겠냐 하면서 아예 종말 그 자체를 부인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온갖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예수 믿는 이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2장 참조). 이들은 세상 심판이 이렇게 더디어지고 있는데 정결하게 살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성도들을 방탕한 길로 유혹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금방 일어나지 않게 되자 세상 정욕으로 다시 빠져들어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벧후서의 주된 관심은 종말론에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벧후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냉소주의(cynicism)와 회의주의(skepticism)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크게 해이해지게 된 것을 경계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곧 오신다던 예수님이 근 7-80년을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종말이나 재림 같은 것은 아예 없다는 냉소주의에 빠졌습니다. 신자들 역시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에 무엇인가 이상이 생겨서 종말이나 재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주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냉소와 회의가 교회안팎을 가득 채우게 될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상이 혼탁해질 때 사람들은 대개 복지부동(伏地不動)의 방법을 택합니다. 위험이 지나고 혼란이 가실 때까지 안전한 곳에 은밀하게 숨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눈치만 살피게 된다는 것이지요. 벧후서가 쓰여졌던 교회 공동체 역시 '안전 비밀 지대'를 찾아 숨어 있으려고 했습니다. 오신다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지, 세상 사람들의 핍박은 점점 더 심해지지, 예수 잘 믿던 사람들이 실족해서 다시 방탕한 길로 빠져들지, 한 마디로 뒤죽박죽이 된 세상 속에서 '안전 비밀 지대'를 찾아 숨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이 '안전 비밀 지대'를 찾아 은신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지켜질 것임을 역설합니다. 10절에 보면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갑자기 찾아오는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안전하고 비밀스러운 요새에 숨어봤자 세상 끝날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에 녹아버리고 숨겨져 있던 것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 어떤 '안전 비밀 지대'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의 재림이 없다고 부추기는 세상 풍조나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안전 비밀 지대에 숨어 있으면서 무기력한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도들은 도덕적 무기력을 부추기는, 그런 안전 비밀 장소로부터 빠져나와서 '거룩한 행실'(holiness)과 '경건한 삶'(godliness)을 살면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열심히 기다려야만 합니다(11-12절). 하나님 나라의 '의'(righteousness)로 충만해서 살아야 합니다(13절). '티도 없고 흠도 없이'(without spot or blemish) 평강 한 가운데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서도록 해야 합니다(14절).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진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안전 비밀 지대'만 찾아 복지부동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 되기를 거부하는 소극적인 삶에서부터 빠져 나와야 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 한 가운데에서 경건의 생활을 적극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는 베드로의 교훈>
오늘 우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대강절은 초림하시는 예수님, 즉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만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장차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심판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의 초림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두 번째 강림, 즉 '재림'(PAROUSIA)을 기다리는 절기가 진짜 대강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에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교훈을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기를 잘 치는 사기꾼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인간에게 백만 년이 하나님께는 1초 밖에는 안 된다면서요?" "물론이지." "하나님, 그러면 인간의 백만 불이 하나님께는 1 달러 밖에는 안 되겠네요?" "당연하지."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께는 1 달러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저에게 1 달러만 적선(積善)해 주실래요?" "오냐, 알았다. 1 초만 기다려 줄래."
하나님과 인간의 계산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유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궁무진한 양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도저히 건널래야 건널 수 없는 양적-질적인 차이를 무시하면서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속단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게 되자 "아, 이제 재림 같은 것은 없는 것이구나" 하면서 인간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베드로 사도는 8절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는 시 90: 4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계산과 하나님의 계산은 틀립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길고 더딘 것같이 생각되어도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림이 겨우 7-80년 늦어졌다고 해도 사람 편에서는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불과 1 초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달하거나 냉소를 보이거나 재림 자체를 의심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해서 구원받게 하시려고 일부러 재림을 늦추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지연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재림이 늦어질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참으심에 더욱 더 감사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재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바울도 딤전 2: 4에서 분명히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재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구원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② 주님의 날은 약속 그대로 도적과 같이 찾아옵니다.
인간의 판단과 달리 '주님의 날'(암 5: 18-20; 욜 2: 28-32; 고전 1: 8; 고후 1: 14; 빌 1: 6 참조), 즉 재림의 때는 분명히 찾아 올 것입니다. 10절에 보니까 그것도 도적과 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도적과 같이 찾아온다는 말은 재림이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부지불식중(不知不識中)에 긴박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도적이 도둑질하는 시간을 미리 일러주고 도둑질하지 않듯이 예수님의 재림도 전혀 예기치 않은 시간에 돌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깨어서 주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단 종파 사람들처럼 재림 시간을 우리 멋대로 계산해서 억측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그 어떠한 종류의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멀리해야 합니다(딤후 2: 23 참조). 늘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면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주의 날의 도래,' 즉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평강을 맺으면서 주님의 날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여러분, 언젠가 우리가 전혀 미리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자세로 오늘을 살아야 할까요?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주님의 재림이 분명히 일어날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 혹은 분위기는 '평강 가운데'라는 말로 잘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평강을 맺고 이웃과 평강을 맺는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이와 같은 평강을 맺으며 사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네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1절과 12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우리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행실'(lives of holiness)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 멋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구별된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경건'을 'godliness'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처럼 산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육신도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말과 행실에 있어서 하나님을 늘 닮아 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13절을 보세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기서 '의의 거하는 바'--where righteousness is at home--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의 '의'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세상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의'를 말합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마땅히 이와 같이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불의할 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워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4절에서 베드로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without spot or blemish) 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베드로는 인간이 죄가 전혀 없는 도덕적 완전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의복을 입을 때 묻게되는 흠을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예복을 깨끗이 입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더러운 풍조의 먼지나 때가 우리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순결한 자세로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적과 같이 임하게 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성결(holiness)한 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성결한 생활은 네 가지 요소, 즉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의로운 생활'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생활'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위로 하나님과 평강을 맺을 수 있고, 아래로 우리 이웃과 평강을 맺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재림하실 때 떳떳하게 평강 가운데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닫는 말: '안전 비밀 지대'를 벗어나라>
영국 포틀랜드의 공작(the Duke of Portland)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해서 늘 안전 비밀 지대로 숨으려고 했던 기인(奇人)으로 유명합니다. 이 사람이 대인 기피증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재미있는데 자기 이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명이 'William John Cavendish Bentinck-Scott'으로서 좀 길지 않습니까? 이 공작은 사람들을 만나서 자기 이름을 물을 때마다 제법 긴 자기 이름을 되풀이해서 대답하기가 귀찮아서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평생 노총각으로 지냈는데 'Welbeck Abbey'라는 자기집 저택의 아주 작은 방에 몸을 숨기고 살았는데 하인들조차도 만나기 싫어서 자기 침실 문의 작은 틈(slot)에 쪽지를 넣어서 의사전달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하인들이 이 공작을 발견이라도 하는 날에는 일체 말을 붙이거나 아는 척을 해서는 안되고 마치 나무를 지나치듯이 모른 척 하고 지나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음식은 침실로 난 작은 철도 위 기차에 실어서 공급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서 자기 집 밑에 거미줄 같은 터널과 지하실을 지어놓았는데, 가령 큰 도서관과 경마학교, 그리고 한번도 이용한 적은 없지만 약 이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무도장(ballroom)까지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런던으로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자기 마차 깊숙이 파묻혀서 기차역까지 뚫려있는 1 마일 정도의 터널을 통과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포틀랜드의 공작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안전 비밀 지대 같은 곳을 찾아서 숨어서는 안됩니다. 무기력한 대인 기피증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이 늦어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안전 비밀 지대'로 숨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과 세상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떳떳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안전 비밀 지대'로부터 벗어나 당당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성결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숨어서 복지부동 하는 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때로 성도의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은 위험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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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베드로후서 3:8-13
걸리버 여행기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걸리버가 작은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인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인 나라에도 역시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소인 나라 학자가 열심히 거인인 이 걸리버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인국의 임금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연구 조사한 것을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전하, 아마도 이 거인은 좀 특별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 거인은 주머니 속에 이상한 것 하나를 가지고 다니는데 제가 자세히 보았더니 괴물입디다. 근데 이 괴물의 얼굴에는 두 팔이 달려있었습니다. 이 거인이 자꾸만 시시때때로 이 괴물을 끄집어 내어서 괴물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 보니 틀림없이 그 괴물은 거인의 하나님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소인국 학자가 말하던 괴물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십니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시계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다 이 시계의 지배를 받습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아무도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일어나야 합니다. 출근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시간을 잘 맞추어서 하나님의 예배에 잘 오셨습니다. 온통 이 시간이 우리를 명령하고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 시간은 폭군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고 싶은데 더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기 싫은데 그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이 시간이 우리를 강요합니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걱정입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 때로는 시간이 너무 천천히 가서 걱정입니다.
여러분, 예배하는 이 한 시간이 1분처럼 지나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은 너무 시간이 지루하여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순간에 서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참으로 낙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괴물같은 시계가 두 팔을 열심히 돌려서 벌써 9월 첫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9월 첫주일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유수같은 이 시간의 흐름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압력과 위협에서부터 자유로와지는 길은 없을까요? 짧고 허무한 시간의 흐름도 천년처럼 아주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또 천년처럼 너무도 지루하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도 단 하루처럼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비결은 없을까요?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 여러분도 손에 다 시계를 차고 계신데 이 시간은 시계를 보지 마시고 또다른 시계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헬라어로는 네오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헬라어 하나님의 첫 글자인 이렇게 생긴 이 글자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시계입니다.
여러분, 두 팔을 가진 괴물에서 자유로와지기 위해서는 오늘 바로 이 글자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세히 보시면 우리 하나님께서 시계를 지배하고 시간을 지배하는 지혜롭고도 위대한 존재로 우리를 바꾸어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같이 읽었습니다. 한번 3장 8절 말씀을 새로이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으니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아멘. 여러분,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처럼 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계의 하루는 우리 시계의 천년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기다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죄인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 그것은 바로 하루가 천년같은 마음입니다. 탕자의 비유 속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마음, 그것은 바로 일각이여삼추, 하루가 천년같은 그런 마음으로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그러합니다. 나아가서는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하루를 천년같은 시간으로 바라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시간의 양 보다는 그 질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시간 개념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순종하고 범죄한 이 가인, 가인이 아무리 많이 살아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은 의미없는 시간입니다. 별 볼일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독자 이삭을 바칠 때 믿음으로 바치고 순종함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한 순간은 하나님 앞에서 천년보다 더 귀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시간으로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주님의 기억속에는 그 아름다운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오는 시간을 절대로 잊지 않으실 것이며, 천년보다 귀하게 생각하시게 될 것입니다. 어떤 종족은 무슨 중요한 일이 이루어지면 움직이는 시계를 멈추게 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고하니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의 의미가 천년보다 값진 그런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에게도 오늘이 참 중요해요. 오늘이 무슨 날인고 하니 3년전에 제가 여러분을 처음 만난 날이 아닙니까? 이 날을 저는 좀 붙들어두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간 개념으로 볼 때 하루가 천년일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또한 이 말씀은 하루에도 천년동안 이룰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이룰 수 있는 주님인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 6시간 동안은 수천년 진행되어 왔던 우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6시간이 아니에요. 6천년보다 더 귀한 시간입니다. 주님은 또한 천년을 하루처럼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같이 해 보십시다. '천년을 하루처럼'. 우리 주님의 사랑이 바로 천년같은 긴 시간도 하루처럼 기다리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탕한 아내, 고멜을 오랜 세월 찾아다닌 이 호세아처럼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천년을 마치 하루처럼 기다리게 했습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를 향한 인내를 그렇게 이 말씀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천년동안 진행된 모든 것도 하루만에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매 모세를 통하여 하루 아침에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이 되지를 않습니까? 천년도 주님의 평가에 따라서는 하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벨탑이 오랜 기간동안 쌓여졌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한 천년은 천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하는 말씀을 주님은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주님의 모든 시간을 바라 본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시간을 바라보고 우리의 삶을 바라보십시다.
먼저,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가십시다. 따라하십시다. '하루를 천년처럼'. 우리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그렇게 보통 이야기합니다. 오늘 여기 70세 이상되는 어르신들은 그저 용서하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사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그런데 이 70년을 그저 하루에다가 한번 대입을 시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10살이 난 사람은 이제 막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등교를 준비하는 9시 15일 것입니다. 20세는 힘겨운 오후를 준비해야 할 아침 11시 30분에 해당할 것입니다. 30세는 이제 뜨거운 햇볕과 싸워야 할 오후 1시 반에 해당할 것입니다. 40세는 이제 벌써 저물어갑니다. 저물어가지만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후 4시에 해당할 것입니다. 50세는 이제는 후회없는 석양을 맞도록 준비해야하는 오후 6시 반이 될 것입니다. 50세 지나서 이제 60세는 어느 시간을 도착하고 있는 것입니까? 해가 지고 하루를 정리하고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야 할 밤 8시 30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시간에 해당되십니까? 저도 계산을 해보니 오후 4시가 벌써 넘었군요. '이거 좀 빨리 가야 되겠다. 열심히 뛰어야겠다.' 는 생각이 제 마음 속에 듭니다. 여러분은 어느 시간에 해당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남아있는 시간의 양을 질로 바꾸신다면 하루를 천년처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하루는 천년보다 귀합니다. 순종하고 사는 하루는 천년보다 가치있습니다. 용서하고 사는 하루는 천년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랑하고 사는 하루는 미워하고 사는 천년보다 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보낸 하루는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보낸 천년보다도 귀하고 아름다운 하루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시편 84편 10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이 하루가 죄짓고 사는 천 날 보다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낭비할 시간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가십시다. 어떤 사형수가 자기 형무소의 시계가 잘 맞지 않는 걸 보았습니다. 소장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소장님, 시계를 맞추어 주십시오. 국제 표준시간에 맞추어서 시계를 고쳐주십시오.' 소장이 확인을 해 보니까 몇 분 좀 일찍 가는 그런 시계였습니다. 국제 표준시계에 맞추어서 고쳐 주었습니다. 이 사형수에게는 마지막 남아있는 1초가 귀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남아있는 1분, 1초가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살기 위한 몇가지를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우선 순위를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하시기를 바랍니다. 꼭 해야할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그 일부터 순서를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 저것을 하면서 시간을 죽여서는 곤란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는 작은 시간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짜투리 시간일망정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될 것입니다. 시시한 영화나 작품을 소개할 때 킬링타임용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대수롭지 않은 작품, 시간이나 적당히 때워 넘길 수 있는 그런 작품이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쓸데없는 것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을 버리는 것은 바로 시간을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또한 한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에 집중을 하셨습니다. 그의 일생은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목표가 십자가요, 그의 최대의 성공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 선교에 집중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전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고 있는 일이 꼭 해야 될 일이라면 그 일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만 잘 바쳐지면 우리는 천년보다 더 귀한 일생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넉넉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십시다.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도록 복음을 전하십시다.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내일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형제를 용서하십시다.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귀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하루를 천년처럼 우리는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죽으면서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한 순간의 시간을 위해 내 모든 것을' 위대한 말입니다. 그는 마지막 죽으면서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나 귀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시간을 내가 좀 더 잘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그는 후회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일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하루를, 이 순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살아가십시다. 우리의 모든 정성과 힘과 사랑을 다하여 이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천년을 하루처럼 살아가십시다. 같이 하십시다. '천년을 하루처럼'. 이제 오늘 본문 말씀 9절을 읽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먼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데 있어서 천년같은 긴 시간도 하루처럼 생각하며 기다리라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몇 년을 기다렸습니까? 무려 25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25년을 하루처럼 기다렸습니다. 노아에게 물로 심판하게 된다는 말씀을 들은 귀한 노아는 120년을 하루처럼 생각하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120년으로 생각이 되었으면 아무도 못할 일이죠. 그러나 그것을 하루처럼 생각한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천년처럼 느껴지고 있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 이 순간, 성도들의 기억 속에, 성도들의 삶 속에 마치 천년처럼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건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들이 여러분 주변에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지체되어 답답하십니까? 해결되지 않아서 괴로운 일들은 없습니까?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무엇은 없습니까?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하루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릴 수 있는 지혜를 이 시간에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질병으로 고통 당하던 시절,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이런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오늘 밤만 자고 나면 내일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저의 믿음이요, 소망이었습니다. 고통의 시간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하루처럼 받아들이며 믿음으로 걸어갔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그 일들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천년이든지 간에 천년을 하루처럼 생각하면서 인내함으로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일본과 한국이 축구시합을 했습니다. 1대 0으로 앞서 가다가 1대 1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종료 2, 3분을 남겨두고 드디어 최용수 선수가 한 골을 집어넣었습니다. 2대 1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심판의 휘슬소리밖에는 없습니다. 어서 경기가 마쳐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관중석에서 함성이 나옵니다. 우∼ 어느덧 경기장의 시계는 멎었습니다. 빨리 경기가 마쳐야 우리가 이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관중석의 시계는 멈추었는데 심판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계속해서 자기의 시계를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의 시계입니다. 얼마후에 드디어 심판이 휙하고 휘슬을 불었습니다. 한국이 이겼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시계를 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시계를 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계를 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계, 하나님의 시간에 모든 일은 아름답게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를 바라보십시다. 주의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의 귀한 뜻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조금도 염려하거나 지루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 시간을 보고 답답해 하지 마십시다. 세상의 시간을 보고 답답해 하지 마십시다. 주님의 시계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휘슬을 부시고 우리에게 아름답게 귀한 승리와 귀한 열매들을 우리에게 안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시편 102편 1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한이 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사건들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답답한 것들을 주님께서 시원하게 해 주신다고 하는 이런 귀한 하나님의 시간의 원리를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믿음과 소망 가운데 천년을 하루처럼 주님의 약속을 인내하고 기다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나아가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데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까지 재림을 연기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벌써 오셔야했을 주님이 왜 연기하십니까? 바로 그 이유가 있습니다. 택한 자들이 모두 주님을 믿고 주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기를 우리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면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도 천년을 하루처럼 기도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일생의 오만번 이상이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죠지 뮬러, 그에게 다섯명의 불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1년 6개월만에 첫번째 친구가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계속 기도했습니다. 5년만에 두번째 친구가 돌아왔습니다. 또 역시 계속 기도합니다. 이제는 6년만에 세번째 친구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네번째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야말로 천년을 하루처럼 기도합니다. 그가 죽기 얼마전에 네번째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다섯번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몇개월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사람을 위하여 죠지 뮬러는 무려 52년을 주님 앞에 쉴새없이 인내를 가지고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52년을 하루같이 기도하고 기다린 믿음, 그 믿음이 바로 친구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실망해버린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까? 전도하다가 포기해버린 사람들은 없습니까? '저 사람은 안돼, 희망이 없어. 다른 사람이나 내가 전도해야지.' 이렇게 포기하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서 다시 천년을 하루처럼 바라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십시다. 다시 찾아가십시오. 다시 도전하십시오. 이 가을에 그들을 위하여 다시 새로운 사랑의 초청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때에 아름다운 가을 곡식처럼 결실 맺어 주님 앞에 바쳐지는 날이 속히 오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땅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2천년 이상 연기되었던 주님의 재림의 날,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년을 하루처럼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내일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십시오. 준비하며 살아가십시다. 이 놀라운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답답함에서 자유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길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짧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역시 시간에 구속되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긴 고통의 시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루처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절망의 시간들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룻밤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영원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소망으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고통도 잠깐이요, 기쁨도 잠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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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
베드로후서 3장 8절 ∼ 13절
훈련소에서 6주 동안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6주 동안의 훈련이 육신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아픔이 무엇인가 하면, 식사를 할 때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짐승이 아니고 사람인데 이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식사시간을 5분도 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그릇을 들고 뛰어가면서 밥을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잠자기 전이되면, 점호를 하게 되는 데 반드시 트집을 잡습니다. 트집을 잡히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잠자기 전에 항상 기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평탄하게 어린 시절을 지냈기 때문에 그 군 생활의 6주 동안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부러웠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훈련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훈련소를 떠나는 선배들을 볼 때 부러웠습니다. '아! 나는 언제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보나' 그래서 저 뿐만 아니라 모든 훈련병들은 이등병 계급장을 다는 것이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6주의 훈련이 끝나고 희망이었던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계급장을 달고 부대로 들어갔는데, 부대로 들어가 보니까 훈련소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여기는 상하가 있어서 더 어렵고 힘듭니다. 저는 소총소대에 까지 내려갔거든요. 훈련받는 것도 힘들었고, 특별히 계급 높은 사람들의 말을 순종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또 제 희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언제 저 병장 계급장을 달아보나!' 그런 희망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일 불행하고 어떤 사람이 제일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가?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제일 불행합니다.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희망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제가 이등병 계급장이 희망이었던 것처럼, 이등병 계급장을 성취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성취되어도 참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더 좋고, 더 높고, 더 많아지는 희망을 다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희망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성취해봐도 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한 아이가 인형을 사달라고 조를때에 그 인형을 사주었더니 얼마간은 그 인형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더니,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 인형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희망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세상의 것이 희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은 항상 우리에게 참 만족과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희망으로 가져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 가운데로 승천하실 때에 흰 옷입은 두 사람, 천사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이 세상으로 오신 예수님, 33년 동안 육신의 삶을 살았던 주님,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3일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40일 동안 부활하신 몸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 40일이 지나고 승천하신 예수님, 이 약속은 이미 우리 앞에 남김없이 역사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역사의 마지막에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과 소망과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면, 완성될 천국-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고통과 염려와 근심이 없는 곳입니다. 상처도 없는 곳입니다.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바로 그 곳에는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이루어지는 참 만족과 기쁨이 있는 천국, 이 천국이 분명히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우리 개인 개인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이 바로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고, 이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하면서 영원한 천국이 소망이 아니고 보이는 물질이 소망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희망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희망하고 소망하고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 현재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1992년 10월 31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거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지금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직장도 버렸습니다. 사업도 그만 두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정도 버렸습니다. 모든 물질을 다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1992년 10월 31일 오신다고 그들은 마중하러 나갔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오늘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현재와 지금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 오늘 준비해야 될 것이 많습니다. 오늘 해야 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미래에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제대로 된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지요. 그 소설의 제일 마지막 말이 무엇인가 하면, "현재가 영원이다"라는 말로 그 소설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이 영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이 신앙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지금, 오늘은 영원한 천국을 담을 수 있는 삶의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고, 그리고 바라보고 소망하고 희망하는 것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면서 그는 감옥 속에서도 마지막 권면을 그렇게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오늘이라는 시간을 구속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님의 십자가로 구속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늘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삶의 길을 걸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진정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늘을 잘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가 준비해야 될 구체적인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고장난 자동차를 계속 운전하고 다니다가는 큰 사고가 납니다. 저도 한 번 고장난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갔다가 굉장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그 자동차를 정비소에 주어서 고장을 수리한 다음에 타야 그 자동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에 병이 나면, 이 병을 고쳐야 됩니다. 고치지 않고 그 병을 안고 있으면 우리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9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오늘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어떤 이는 더디다고 왜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러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전제로 있고, 그리고 오래 참으시고 주님이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케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될 일은 영혼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영혼의 깊은 병을 치유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합 왕의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하시야 왕은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을 그대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더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아하시야는 다락방에 떨어져서 큰 병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그 병으로 오랜기간지나게 하신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너가 이 병을 보고 회개하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는 이 아하시야 왕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시야 왕은 그 회개의 기회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바알 세불이라는 우상에게 찾아가서 병을 고쳐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아하시야는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죽음으로 그 인생을 끝내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삭게오를 한번 보십시오. 삭게오는 2000년 전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참으로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삭게오는 민족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로마에 아부하여서 세금을 거두어 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혹시 포탈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삭게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영혼의 병을 치유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내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며,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 그는 전 실존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간절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 사람도 아브라함 자손이니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영혼을 보십시오. 나의 영성을 정직하게 드려다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영혼의 깊은 병에 걸려 있음에도 모르고 있는 잘못된 사람이 아닙니까? 병이 걸려있음에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우리는 영혼의 깊은 병에 걸려 있음에도 그 병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영혼의 병에 걸려 있음에도 의롭다고 자칭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혼의 깊은 병에 걸렸음에도 교회에 열심히 수고하며 나는 주께 충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혼의 깊은 병에 가두워져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급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령 앞에 서서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의 병을 고치시는 회개의 은총이 새로워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 11절, 12절을 이어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로는 영혼의 병을 고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적극적으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준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은 죄와 악에서 떠나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결국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는 구별된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나의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헌신이 우리의 수고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담대함이 우리의 용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신앙의 덕목들이 바뀌어지지 않으면,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안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엔 크리스토" 이 말을 164회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냥 말로 한 것이겠습니까? 형식적으로 말한 것이겠습니까? 습관적으로 말 한 것이겠습니까? 그는 감옥 속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겸손이 그의 낮아짐이 되었고, 주님의 헌신이 그이 수고가 되었고, 주님의 믿음이 그의 믿음이 되었고, 주님의 담대함이 자기의 용기가 되어졌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천국을 바라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경 말씀에 나오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앞장서신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따라갈 때,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영적인 준비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목회를 하는 교회에서 집사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어린 아들 둘을 둔 어머니이신데, 그 당시에 많은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중동에 가서 땀을 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역시 이 여집사님의 남편도 중동에 가서 2년 계약으로 일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면서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분이십니다. 단칸방에서 매우 가난하게 사시는 분이었는데 신앙생활을 얼마나 열심을 하는 지 몰라요. 그렇게 순수하게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잘 만나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남편이 먼나라에서 고생하면서 벌어온 돈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고 남아있는 돈은 모두 저금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열심히 궂은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해 나갔던 것입니다. 2년의 기간이 마치고 남편이 돌아왔을 때 모은 돈으로 작은 집을 마련해서 신앙으로 행복하게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역사의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모습으로 오실 줄로 믿으십니까? 그것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바라보고 있습니까? 고린도 후서 5장 1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11장 16절에 보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영원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면, 회개로 영혼의 병을 다 치유 받고 그리고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는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릇이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고 오늘을 잘 믿음으로 준비하는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주실까요? 천국을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주실 까요?
태백산맥의 줄기에 있는 대암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이 산의 산마루가 해발 1,290미터 정도가 되는 곳인데 그곳에 큰 늪이 있습니다. 그 늪의 크기가 9,200평이 되는 용늪이라는 늪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늪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4,500년의 시간을 간직한 늪이다." 이 늪은 4,500년 동안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늪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늪은 자연의 콩팥과 같은 역할을 한 대요. 오염된 물과 공기를 깨끗하게 바꾸고 가뭄을 예방합니다. 그리고 그 늪 속에 기생하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글을 쓴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루어진 지구상의 많은 늪이 있는데 그 수천 년 동안 만들어진 늪이 지구를 살리는 역할을 한다"라고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영원히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것을 준비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노예로 팔려가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늘을 준비합니다. 유혹을 받는 현장에서도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감옥의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주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 꿈,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요셉은 오늘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준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국무총리라는 능력을 주시고 7년 가뭄과 7년 대 풍년을 맡게 하시어서 이 요셉을 통하여서 동족의 생명을 살려주시고, 애굽의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줍니다. 그 주변의 열방들의 모든 육신의 생명을 살려주는 큰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요셉은 꿈꾸는 자로서 그 꿈을 오늘로 실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셉에게 능력 주시어 큰 일을 감당케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받아서 처음에는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오늘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습니다. 믿음의 길 대신에 쾌락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늘을 버린 솔로몬을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았습니까?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이 양단 되는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영혼이 권고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지 못해서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해져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공급받지 못해서 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이 능력을 주시겠습니까?
지난 목요일 저녁에 주유소 2층에서 성경공부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그 길목에 은행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 아실 것입니다. 그 땅 아래에 가을도 아닌데 이 초여름에 한창 자라나야 될 나무에 상당히 많은 나뭇잎이 낙엽이 되고 떨어져 있습니다. '이상하다. 이 여름에 이 은행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 있을까?' 그래서 함께 했던 분들의 의견이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견이 그랬습니다. 콩크리트로 흙을 다 발라놓아서 이 뿌리와 나무들이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서 떨어지는 낙엽이 있는 것 같다. 제가 자동차를 타고 1단지 옆을 지나가니까 1단지 옆에 은행나무들이 많이 있지요. 그 은행나무 잎을 보세요. 완전히 꺼멓게 죽은 은행잎들이 많아요. 거기도 역시 콩크리트가 되어 있어서 영양분과 공기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습니다. 제가 있는 제 방의 창가 뒤에 은행나무가 하나있습니다. 저는 그 은행나무와 굉장히 친한 관계인데요. 커튼을 열고 그 은행나무를 보니까 한 잎도 죽은 잎이 없어요. 푸르게 잘 자라 있습니다. 그곳은 그래도 차지하고 있는 흙의 면적이 넓습니다.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하고 그리고 공기를 잘 받아들이니까 저렇게 죽은 잎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능력 주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잘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아니하고 능력을 주시어서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한다는 것을 눈을 열어 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감옥 속에서도 빌립보서 4장 13절의 고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내게 능력 받는 자가 될 수 있고 그 사람이 세상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참 만족과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 땅을 바라보며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 세상을 살리는 소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여기에 참 만족이 있습니다. 여기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감옥 속에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다 이 은혜를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며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말씀의 의미는 길게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것은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옛 것, 이 세상의 것은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없어질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까? 없어질 것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까? 없어질 것에 집착하고 살아갑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희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 지금은 영적으로 자다가 깰 때입니다.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남과 북의 문이 열리는 것 같고,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무지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때 무지개 꿈을 꿀 때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자리를 지키고 오늘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될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씨를 심읍시다. 그리고 이 소망의 삶을 오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주시는 능력으로 온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확장해 나가는 주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귀여워하시는 그릇이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