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요엘서 강의

스네어 2013. 4. 26. 12:05

요엘서 강의



개혁신학연구원







머 리 말


「요엘서 강의」는 2000년 여름 한국대학기독인회 (ESF)의 학사 수양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손질한 것이다. 이것은 전문적인 요엘서의 주석이나 강해서가 아니다. 평신도들이 쉽게 요엘서를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붙이고, 신학적인 주제를 요약한 것이다.

요엘서는 분량이 작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특히 “여호와의 날”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세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고, 배경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관계도 요엘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라고 생각된다. 성령과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는 말씀은 제쳐놓고, 성령에만 큰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신비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성령의 역사를 구원론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요엘서는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성령의 역할이나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나는 이 작은 책이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 위해서 힘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00년 여름

노량진 연구실에서


손 석태






차 례



서론


제 1 강 울어라, 부르짖어라


제 2 강 여호와의 날


제 3 강 만국을 국문하시는 여호와


미주

참고서적





여호와의 날



서론


1. 제목

전통적인 히브리 성경의 지칭법대로 저자의 이름을 따라 요엘서라고 한다. 히브리어 요엘(lawy)이라는 말은 여호와(hwhy)를 뜻하는 (wy) 하나님(<yhla)을 뜻하는 (la)의 합성어이다. 이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엘리야”라는 말은 “하나님은 여호와이다”라는 뜻이다.


2. 저자

요엘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1:1에 브두엘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브두엘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요엘서에는 성전, 제사장, 대중적인 집회, 예루살렘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 저자는 아마도 유다 사람이요, 예루살렘 사람이었지 않을가 추측된다.


3. 정경에서의 위치


히브리성경에서는 에스겔, 호세아 다음, 아모스 앞에 놓여 있고 후선지서에 속 한다. 한글 성경에서는 요엘은 다니엘, 호세아 다음, 아모스 앞에 놓여 있다. 또한 한글 성경의 구분에 따르면 소선지서에 속한다.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 주제이며, 성령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비전을 담고 있으며, 이 비전과 예언은 신약의 오순절 성령 세례로 이루어지고 있다.

4. 저작연대


저작자가 확실하지 않은 데 저작 연대를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1) 그러나 6세기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이 가장 적합한 연대로 사료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엘 2장에는 바벨론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둘째, 3:3b에는 유다가 “흩어졌다” “나뉘었다” 등의 표현은 597년의 포로로 사로잡혀간 사건을(왕하 24:10-16) 말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1:15, 2:1-11은 586년의 유다의 최후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 (왕하 25:1-21)

넷째, 요엘의 “여호와의 날”은 586년의 성전 파괴를 언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렘 5:17).

그러나 칼빈의 말대로 아무도 확실하게 아는 자가 없다.


5. 역사적 배경


요엘서에서 언급하는 역사적 배경을 약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A. 요시야 종교개혁/ 유다 왕, 요시아는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자기와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못함을 깨닫고 일대 종교 개혁을 단행한다(622). 산당을 불사르고, 이방신상을 깨뜨리고, 유월절 명절을 성대하게 치뤄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B. 앗수르의 멸망/ 앗수르 (Assyria) 왕, 앗수르바니팔 (Ashurbanipal, 669-631) 은 애굽 상류 지역까지 통치했으나 그의 죽음과 더불어 앗스르도 세력이 약화되고, 주전 612년에 니느웨 (Nineveh)가 함락되었다. 주전 609년에 하란에서 앗수르 군대는 바벨론에게 패배함으로 유다는 앗수르의 식민 통치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되었다.

C.애굽의 통치/ 요시야는 Meggido 평야에서 애굽에게 패하여 이제는 애굽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D. 바벨론의 통치/ 주전 605년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은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애굽을 무찔렀다. 따라서 그동안 애굽의 식민통치를 받은 유다왕 여호야김(Jehoiakim)은 바벨론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주전 601년 애굽이 다시 바벨론을 무찔렀다. 따라서 유다왕 여호야김은 다가 다시 애굽을 섬기게 되었다 (왕하 24:1). 주전 598년에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여호야김은 사망하였다. 주전 597년에 그의 아들 여호야긴 (Jehoiahchin)이 그의 아비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운 3개월 후 시드기야(Zedekiah)로 왕을 바꾸고 1만여 명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왕하 24:12-16). 시드기야는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헸지만 결국 주전 586년에 바베론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6. 저작목적


요엘서의 저작 목적은 첫째,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둘째, 유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여호와의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고 선포하기 위함이다.


















제 1 강 울어라, 부르짖어라


본문: 요엘 1:1-20

요절: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1:15)


서론


1.1 제목/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1:1)


1.2 듣고 말하라 (1:2-4)

1.2.1 들어야 할 사람들 (1:2)

1.2.2 말해야 할 사람들 (1:3)

1.2.3 말해야 할 내용 (1:4)


1.3 울어라 (1:5-12)

1.3.1 취하는 자들/ 포도주 마시는 자들(5-9)

1.3.2. 농부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 (9-12)

1.3.3 제사장들 (13)


1.4. 부르짖어라 (1:14-20)

1.4.1 금식을 선포하라 (14)

1.4.2 성회를 소집하라 (15)

1.4.3 여호와께 부르짖어라 (15-20)

1.4.5.1 여호와께 대한 불평(15-17)

1.4.5.2 여호와께 대한 기도 (18-20)

결론




제 1 강 울어라, 부르짖어라



본문: 요엘 1:1-20

요절: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1:15)


서론


요엘서 제 1 장은 앞으로 있게 될 역사상 전무후무한 메뚜기 재앙에 대해서 말하고 이를 대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울며,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제목 (1:1)

2. 듣고 말하라 (1:2-4)

2.1. 들으라 (1:2)

2.2. 말하라 (1:3)

2.3 메뚜기 재앙 (1:4)

3. 울어라 (1:5-13)

3.1 취한 자들아 울어라(5-10)

3.2 농부들아 울어라 (11-12)

3.3 제사장들아 울어라 (13)

4. 부르짖어라 (1:14-20)

4.1. 금식을 선포하라 (14)

4.2 성회를 소집하라(14)

4.3 여호와께 부르짖어라 (15-20)



1.1. 제목/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1:1)


1절의 히브리어 마소라 사본의 정확한 번역은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있었던 여호와의 말씀”이다. 개역 성경은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이는 히브리 성경이 갖는 제목의 성격보다는 서술적인 문장체를 택하고 있다. “이르신”이라는 동사형은 실제로 히브리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있다” “없다”의 뜻을 지닌 영어의 Be 동사와 같은 하야(hyh)라는 동사가 “여호와의 말씀”을 수식하는 형용절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1 장 1 절을 제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다. 이러한 제목은 호세야 1:1; 미가 1:1; 습 1:1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유사한 예는 렘 1:2; 겔 1:3; 욘 1:1; 슥 1:1 에도 발견된다. 브두엘 (lawtp)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설득된 ”(persuaded by God), 혹은 “하나님께 꾐을 받은” (inticed by God)의 뜻이다.1) 또한 히브리어 요엘(lawy)이라는 말은 여호와(hwhy)를 뜻하는 (wy) 하나님(<yhla)을 뜻하는 (la)의 합성어이다. 이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엘리야(whyla)라는 말은 “하나님은 여호와이다”라는 뜻이다.

1.2. 듣고 말하라(1:2-4)


2-4절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그의 말씀을 듣고 말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들어야 할 사람들, 말해야 할 대상들, 말해야 할 내용이 본문에 담겨있다. 본문은 1장의 메뚜기 재앙에 대한 서론이라 할 수 있다.

1.2.1 들어야 할 사람들 (1:2)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할 자들은 첫째로 늙은 자들이다. 나이든 사람, 혹은 장로들이다. 둘째는 땅의 모든 주민들이다. 이 경우 “모든”이라는 말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을 말한다. 특히 나이든 사람의 경우 인생의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너희의 날이나 너희의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수사학적 질문(Rhetorical Question)이다. 이러한 수사학적 질문은 많은 경우 “들으라‘고 청한 후에 사용된다 (사 5:4; 28:23-25; 66:8-9; 렘 2:10-11). 수사학적 질문은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한다. 따라서 본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답변을 전제한 질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을 말하려고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전무후무할 뿐 아니라 전혀 새롭고 유일한 일을 여호와께서는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1.2.2 말해야 할 사람들 (1:3)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그들의 자녀들이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자손 4대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손 대대에 걸쳐서 알려 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중시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가 행하시고 이루신 큰 구원을 그의 백성 대대로 자손들에게 말하여주고, 기억하기를 원하신다(출 12:26-27; 13:8; 신 4:9; 6:6-7, 20-23; 32:7-9). 그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체험한 곳에는 그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새로 짓거나 돌비를 세운다. 여호와 이레(창 22:14), 벧엘 (창 28:8), 여호와 닛시 (출 17:150, 에벤에셀(삼상 7:12)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요단강 가에 세운 열 두 돌기둥도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갈라 그들이 마른땅을 밟고 요단 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 4:1-18). 이스라엘은 역사를 아는 백성들이었고, 그들은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수많은 민족적인 고난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1.2.4 말해야 할 내용 (1:4)


“팥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2절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는 수사학적 질문의 내용이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자손 대대로 전해야 할 메시지이다. 메시지는 간단하다. 메뚜기의 재앙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 구조상 일종의 계단식 병행법이다 (Staircase Parallelism, Progressive Parallelism)이다.


A가 남긴 것을 B가 먹고

B가 남긴 것을 C가 먹고

C가 남긴 것을 D가 먹었다.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이 ABCD가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메뚜기 종류들은 많다. 요엘은 성경에 언급된 아홉 종류의 메뚜기 중 네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팥종이, 메뚜기, 느치, 황충이 등은 다같이 메뚜기 일종으로, 영어로는 아삭아삭 깨무는 메뚜기(crunching-locust), 갉아먹는 메뚜기(gnawing-locust), 빻아먹는 메뚜기 (grinding-locust), 씹어먹는 메뚜기(champing-locust) 로 번역하고 있 다. 메뚜기 재앙은 일과성의 것이 아니고, 차례차례 네 번이나 반복된다. 아마도 한번 지나갈 때마다 그것들이 다 먹지 못한 남긴 것이 있는 데 마지막에는 남긴 것도 없이 다 싹쓸이를 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석자들은 이 메뚜기가 과연 무엇일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메뚜기를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힌 그의 대적이라고 생각했다.2) 이들은 네 종류의 메뚜기를 에집트인, 앗스르인, 헬라인, 그리고 로마인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역사상 이들이 차례로 이스라엘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엘서 1장의 메뚜기 재앙은 실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제 1 장의 메뚜기 재앙을 매개로 하여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고 백성들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요엘서의 메뚜기 재앙은 침공해오는 바벨론 군대에 대한 1차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메뚜기 재앙은 이미 출애굽기 10:2, 6에도 나와 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 내린 여덟 번째의 재앙이 바로 메뚜기 재앙이다.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을 애굽에 내려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를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메뚜기 재앙을 내리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신 28:38, 42에는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저주로 메뚜기 재앙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성경에서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계 9:2- 12에는 여호와의 날에 황충, 곧 메뚜기(locust)가 무저갱에서 올라온다. 황충은 전쟁하는 자처럼 무장을 하고, 군마를 타고, 금관을 쓰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빨은 사자의 이빨처럼 강하고, 머리털은 여자의 머리털과 같고, 가슴에는 철호심경을 달고, 어깨에서 소리가 난다. 이들에게는 왕이 있고, 메뚜기는 무저갱의 사자로 묘사 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늙이들과 모든 백성들은 다가오는 메뚜기 재앙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후손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1.3. 울어라 (1:5-13)


메뚜기 재앙이 다가오는 이 때에 여호와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울라”고 하신다. “너희는 울지어다”라는 말이 5절에 두번, 8절, 9절, 11절에 언급되고 있다. 메뚜기가 와서 모든 곡식을 먹어치워 버리고 남은 것이 없는 이 황폐한 상황 속에서 어느 누구인들 울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집중 호우로 홍수가 나서 온 마을이 쓸려 가버리고, 산불이 나서 가재 도구 하나 챙기지 못하고, 몸만 빠져 나온 이재민들의 힘 빠진 애처러운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울라‘고 말한다. 본문은 울어야 할 사람들과 그들이 울어야 할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1.3.1 취하는 자들/ 포도주 마시는 자들(5-9)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5)


5절은 “취하는 자들” 과 “포도주를 마시는 자,” “너희는 울지어다”와 “너희는 곡할지어다”가 서로 동의적 병행 (synonymous parallelism)을 이루고 있다.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상징이다. 반면에 기근은 심판을 상징한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인생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축제나 경사가 있는 날이라면 사람들은 포도주를 어김없이 마셨을 것이다. 여흥과 축제로 먹고 마시고, 세월을 보내는 참으로 한가하고 평안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될 것이다. 단 포도주가 그들의 입에서 끊길 것이기 때문이다.


6-7절은 단 포도주가 그들의 입에서 끊기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 왔음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한 민족은 메뚜기를 말한다. 그들의 수가 많고, 그들의 파괴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전쟁을 하기 위해서 쳐들어오는 민족에 비유한다.3) 이 같은 예는 2:25에는 이 메뚜기 떼들을 여호와께서는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또한 메뚜기들을 사자와 암사자에 비교한다. 사자는 그의 강인한 이빨로 온갖 동물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긴다. 메뚜기가 모든 것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할 것이다. 메뚜기들은 풀이나 잎사귀만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밑 둥지나 가지의 껍질까지 벗겨먹기 때문에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버리는 것이다. 12절 보면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가 다 시들었다”고 적고 있다.

재앙이 몰려오지만 이들은 포도주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울고, 곡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이 몰려오지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탐익하고 술독에 빠져 취해 있는 것이다. 쾌락과 여흥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재앙의 심각성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야 할 사람들이다.


8-9절은 술을 마시고 취한 자들이 어떻게 울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고 말한다. 옛날에 우리 나라에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다 자라기도 전에 배필을 정해놓았다. 마찬가지로 고대 셈족 사회에서도 부모들이 자식들의 배필을 정한다. 심지어는 자식들이 낳기도 전에 부모들은 장차 낳게 될 자식들의 베필을 정해놓는 경우도 있다.4) 그러나 뜻밖에 정혼한 남자가 죽어버리는 경우 그에게 정혼한 처녀는 결혼도 해보지 못하고 과부 신세가 되 버리는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면사포를 쓰고 신방을 꾸며야 할 처녀가 갑자기 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하고 처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열을 삼키고 통곡을 하는 것이다. 술 취한 자들이 바로 이러한 처녀의 심정으로 울라는 것이다.


1.3.2. 농부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 (9-12)


9-12절은 황폐해진 논밭을 보여주며 농부들에게 울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요엘은 우리의 시선을 여호와의 전으로 돌리게 한다. 제사장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 첫 열매를 제일 먼저 여호와께 드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낸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것으로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그 남은 음식은 제사장들이 먹는다. 그러나 이제는 제사장들이 더 이상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가 끊어진 것이다. 소제와 전제는 제사장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함께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이다(레 2:6; 출 29:38-41; 민 28:3-8).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그러나 여호와께 제사로 드릴 제물이 없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여 곡식이 진하고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 떨어진 것이다 (10, 신 28:51). 제사장들이 우는 것은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비참한 형편 때문에 울고, 또한 그 자신들이 배가 고파서 우는 것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지고(11), 포도나무가 시들고 무화과나무가 마르고 석류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어버린 이 상황 속에(12) 인간에게 무슨 희락이 있을 수 있겠는가? 농부는 이 황폐한 밭을 바라보며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메뚜기 재앙 이후에 이 땅에는 가뭄이 몰아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 할 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 찌어다”(11)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부끄러워하다”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호비수(wvybh)는 “시들다”(wither) 혹은 “마르다”(dry up)는 의미를 가진 야베쉬(vby)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어휘는 가뭄으로 말미암아 농작물이나 식물들이 말라 시든 모습을 표현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삼하 19:6; 호 2:7). 이 때에는 “실망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11절은 농부들이 실망하고, 포도원 지기가 통곡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2절에는 농작물만 시들은 것이 아니다. 모든 농작물이 시들자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희락이) 말랐다고 할 때, 농작물이 말랐다고 할 때와 똑같은 히브리어 야베쉬 (vby)의 사역형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배가 불러야 인생을 사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이제 먹을 것이 없게 된 상황이 된 것이다. 인생 중에 기쁨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요엘은 본문에서 제사장들이 울고 있고, 농부들이 망연자실하여 앉아 있으며, 포도원 지기들이 곡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3.3 제사장들 (13)


9절에는 제사장들이 소제와 전제가 끊겨 슬퍼하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3절은 제사장을 향하여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들을 가리켜 “제단에 수종드는 자”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라고 말한다. 요엘은 이들을 향하여 슬피 울며 밤이 새도록 누우라고 말한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밤낮으로 당번을 정하여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다 (대상 23: 30; 시 92:2-4; 134:1). 그러나 이러한 곤경의 때에는 당번이든 비번이든 다같이 나와서 함께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에 “밤이 맞도록 누울찌어다”는 “밤을 세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이해에 도움이 된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밤샘을 하라는 말이다.


5-13절은 메뚜기 재앙이 몰려오고, 그로 말미암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떨어져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 오지만 술에 취하여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리고 농사를 지어도 거둘 것이 없는 농부들, 여호와 앞에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없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울라” “곡하라”고 권하는 말씀이다. 사람은 내일을 알지 못한다. 오늘은 부요하여 기뻐하며 수다를 떨지만 내일은 어떠한 불행이 닦쳐 눈에서 눈물을 흘릴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메뚜기가 농장을 휩쓸고 가는 모습을 영화나 TV를 통해서 보았다. 또한 메뚜기 재앙이 아니더라도 한 나라나 민족에게 닦친 가뭄이나 기근이 몰고 온 황폐함을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동포들이 사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언젠가 우리에게도 부딪칠 수 있는 재앙이다. 재앙은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우리의 대문을 두드리고, 우리의 인생과 가정을 쑥밭으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사정없이 짓밟고 농락하는 것이다. 우리는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가오는 심판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곡을 해야 할 때이다.

1.4. 부르짖어라 (1:14-20)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울라고 하셨다. 메뚜기 재앙으로 말미암아 온 땅이 황폐해져 양식이 바닥나고 인생의 즐거움이 말라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부르짖으라고 하신다.


1.4.1 금식을 선포하라 (14)


첫째로 여호와께서는 금식일을 정하라고 한다. 먹고 마시고 취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울며, 금식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금식한다는 뜻의 (<wx)이라는 말은 “영혼을 괴롭게 하다"(afflicting the soul)는 뜻이다.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굵은 베옷을 입고, 얼굴을 찡그리고, 울며, 슬퍼하며, 누워서 기도하는 모습이 금식하는 자의 모습이다. 먹고 마시고 취한 자들에게 이제 먹을 것을 삼가고 금식하는 가운데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것이다. 금식은 분명 인생의 희락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금식을 많이 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금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체중 조절이나 미용을 위하여 금식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이나 일단의 그룹이 자기의 주장과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윗사람이나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자기 파멸의 위협을 가하고자 할 때 단식을 한다.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이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하여 사용자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단식 투쟁을 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경건이나 종교적인 건덕을 위하여 금식하는 경우가 많다. 교역자들이나 성도들 가운데 40일간 금식하는 사람도 있다. 금식을 통하여 극기를 시험하고, 영적 능력이나 권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심오한 슬픔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갈망하며 금식한다. 금식은 영적은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음식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완전히 열어놓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이다. 그래서 금식에는 기도, 슬퍼함, 회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함, 경건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영교 (holy communion)에 전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몇 가지로 금식의 유형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금식은 슬픔의 표현이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들을 장사지내고 칠일 동안 금식했다. 다윗도 이 소식을 듣고 금식했다 (삼하 1:12; 3:36).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했다 (느 1:4). 금식은 사람의 깊은 슬픔과 분노의 표현이다. 둘째로 금식은 회개의 표현이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엘리야의 책망을 받은 후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왕하 21:27).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고난을 당할 때 함께 모여 금식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특히 대속죄일 (레 16:29, 31; 23:27, 29, 32)은 전 민족적인 금식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금식한다. 셋째로 금식은 경건의 훈련 (imagery of piety)이다. 금식은 사람에게 보기기 위해서 할 때 위선으로 보인다. 사 58:3-6은 이스라엘의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금식 풍습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금식하는 동안에도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친다 (사 58:4).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경건 생활은 이러한 위선적인 행위보다는 오히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사 58:6). 산상수훈에도 예수께서는 위선적인 금식을 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서 금식을 하라고 가르치신다 (마 6:16-17).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시며 복음 사역을 준비하셨다. 아마도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광야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 40일간 금식한 일에 대한 실형(antitype)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사역의 하나로서 금식하신 것이다. 그것은 분명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일과 관계가 있으며, 더 나아가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한 메시야로서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일을 본받을 수 없으며, 모든 일을 본받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따라서 지고 죽을 수 없다. 40일 금식도 마찬가지이다.

1.4.2 성회를 소집하라 (15)


금식을 선포한 후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성회란 말은 히브리어 아차라(hrxu)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아차르(rxu)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붙들다” “제지하다” “닫다”는 뜻이다. 일을 멈추는 것이다. 성결 의식에 따라 명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멈추고 사람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왕하 10:20). 따라서 여호와를 만나기 위한 준비로서 자신을 성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여호와의 총회” (Assembly of God)와는 다르다.


여호와 총회는 왕상 22:19-23에서 아합의 운명을 결정하는 하늘의 어전회의나 사 6 장에서 여호와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고,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둘러서서 여호와를 향하여 거룩하다고 찬미하는 광경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여호와께서 왕으로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시고, 모든 신적 존재들이 여호와 앞에 모여 서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작정과 명령을 받들고 집행하는 것이다. 이때에 천사들은 그의 메시지를 이 지상의 그의 백성들, 곧 여호와의 총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총회는 하늘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도 있다. “회막” (duwm lha, Tent of Meeting; 33:7-11; 민 11:16-29; 12:4-10) 앞에 모인 백성들이 바로 여호와의 총회이다. 회막은 하늘의 여호와께서 직접 내려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백성들 앞에서 말씀하시고 왕노릇 하시는 곳이다. 회막은 여호와의 이 지상 거주지이다. 이스라엘은 회막 앞에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모여 서서 그를 만나고, 그의 메시지를 받았다 (출 25:22; 29:42-43; 30:36; 40:34-38; 민 9:15-23). 고대 가나안에서는 신들이 거주하는 이러한 장소는 산이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집회의 산” (mount of assembly, 사 14:13; 겔 28:14,16)이라는 말을 쓴다. 예루살렘이 모든 종교와 예배의 중심이 되자 시온 산이 바로 여호와의 집회의 산으로 지칭된다. 여호와의 백성이 총회로 이곳에 모이고, 여호와께서는 이곳에서 그의 계명과 율법을 반포하시고 말씀과 생수를 흘려 보낸다 (사 2:3; 미 4:3; 겔 47:1-12; 욜 4:18). 따라서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들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여호와 앞에 나아와 모인 회중을 여호와의 총회라고 한다. 이 총회는 위로는 천군 천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둘러서고, 땅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모여 선 가운데 여호와께서 이들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며, 그의 거룩한 뜻을 선포하신다. 우리가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그곳도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함께 하는 여호와의 총회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회는 이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 죄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성별하고 여호와께 나와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모임이다. 민 29:35에는 “여덟째 날에는 거룩한 대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준비하는 가운데 모이는 대회인 만큼 “엄숙한 모임” (solemn assembly)이 될 것이고, 독특하고 경건한 성격의 성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아차라(hrxu)라는 이 어휘는 렘 9:2에는 이단적인 모임이나 무리에, 왕상 10:20에는 음란한 모임에도 다같이 사용되고 있다.5)



1.4.3 여호와께 부르짖어라 (15-20)


금식하며, 성전에 모여서 이들이 할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기도이다.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15-20절은 부르짖는 내용이다. 여호와께 나아와 자신들의 힘든 형편을 불평하며(15-17),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1.4.5.1 여호와께 대한 불평(15-17)


여호와께 대한 불평은 “오호라”하는 탄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다가오는 재앙을 생각하면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재앙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른다. 이 날은 전능자로부터 임하는 멸망의 날 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개역 성경의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라는 말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번역이다. “전능자로부터 임하는 멸망” (ydvm dv, devastation from the Devastator)이란 말은 이 재앙이 여호와로부터 임하는 것임을 말한다. 재앙이 스스로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메뚜기 재앙이 몰려오는 것을 말한다. 재앙으로 말미암은 멸망의 진원지가 바로 여호와이며, 여호와께서 이 모든 일의 주관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악의 세력, 특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압제하는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날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다만 그의 백성의 대적 이방인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언약 백성에게도 임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시로 이 무서운 날을 예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엘서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그의 언약 백성의 존재를 위협하는 날이다. 그러나 회개로 이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로 바뀔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고 여호와의 날을 맛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메뚜기가 엄습하는 이 재앙도 여호와의 날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날도 일종의 여호와의 날이다 (586 B.C.)

이 날의 상황이 어떤가? 먹을 것이 끊어지고, 씨가 썩어버리고, 곡식이 시들었다. 창고는 비고, 곳간이 무너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에서는 더 이상 기쁨과 즐거움이 없어졌다(16). 12절에 인간의 희락이 끊어졌다고 했는 데 16절에도 같은 의미의 말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가장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야 할 성전에 제사가 끊기고,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호와의 날은 그의 백성들에게 슬픔의 날이요, 곡하는 날이다. 멸망의 날이다.

1.4.5.2 여호와께 대한 기도 (18-20)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딱한 형편을 여호와께 불편하고 이제는 현 상황을 여호와께 아뢰고 있다. 기도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 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20절에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로 끝난다. 왜냐하면 불이 목장의 풀을 사르고, 불꽃이 들의 나무를 다 태웠기 때문이다. 시내가 다 말라 버리고, 들풀이 불에 타버린 것이다. 가뭄이 몰려오고, 그로 말미암은 기근이 덮친 것이다. 본문은 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모든 식물이 다 말라 버린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들짐승도”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생물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다 함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에는 “도”라는 뜻의 (<g)을 특별히 강조하여 문장의 선두에 내놓고 있다. 인간들의 죄 때문에 자연까지도 고난을 당하고, 멸망당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메뚜기로 말미암는 재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믐으로 말미암아 온 땅이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뭄을 몰고 와서 온 세상이 타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하고 도움을 청하며 울부짖는 것이다.


결론


이상을 살펴보며 우리는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메뚜기 재앙의 주관자이시다. 가뭄과 기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전능자로서 재앙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로서 그의 백성에게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양식을 주시며, 모든 악한 짐승이나 이방의 적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이 평안을 누리고, 부요함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 것을 보면 여호와는 그의 백성에게 행복을 주시고, 희락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본문의 여호와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그의 백성에게서 양식을 빼앗아 굶어 죽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주어 기근과 한발로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도 다 배고프고 목말라 죽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왜 그의 백성에게 이러한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본문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인 정황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의 언약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까닭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분은 아니다. 재앙도 내리시는 분이시다. 주신 축복을 언제라도 거두시고, 벌거벗은 적신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욥 1:21). 따라서 우리는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은 부요하지만 언제 우리가 먹을 것이 없어서 거리를 헤멜지 모른다. 부요하고 풍요한 날에 마시고 취하며 생각없이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나라 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튼튼한 기업이 망하리라고는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63 빌딩 주인이 바뀌고 대우가 넘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생각지 못하고 예기지 못한 날에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신다. 성공의 날, 축복의 날에 취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 본문은 재앙의 날이 다가 오기 때문에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로 모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금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슬퍼하며 울면서 금식함으로 자신의 육체적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경건에 힘쓰는 것이다. 부요할수록 하나님의 백성은 경건 훈련을 해야 한다. 성회로 모이는 것은 쉽게 말하면 교회 생활에 충실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총회나 성회는 교회의 모형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새 생명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치 우리 몸의 모든 조직이 신경과 핏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성령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를 믿는 사람들에게 무교회주의란 있을 수 없으며, 교회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모이기에 힘써야 하며, 모든 성도들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했다.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몰려오는 재앙도 막으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부요할수록 깨어 있어야 한다. 취하여 생각지 않는 날에, 생각지 못했던 재앙이 엄습해올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을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제 2 강 여호와의 날


본문 2:1-32

요절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 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서론


2.1.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시는 여호와 (2:1-11)


2.2 회개를 촉구하시는 여호와 (2:12-17)

2.2.1 내게로 돌아오라 (12-14)

2.2.2 성회를 소집하라 (15-17)


2.3 회복시키시는 여호와 (2:18-19)

2.3.1 육체의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18-27)

2.3.2 영혼의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28-29)


2.4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2:30-32)

2.4.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30)

2.4.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31-32)


결론






제 2 강 여호와의 날


본문 2:1-32

요절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 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서 론

요엘서 제 2 장은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때에 이 땅 거민들은 놀람과 두려움 속에서 그들의 낯빛이 하얗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본 장은 여호와의 날이 어떠한 날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도 여호와의 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 날을 대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본 장은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분류할 수 있다.


2.1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시는 여호와 (2:1-11)

2.2 회개를 촉구하시는 여호와 (2:12-17)

2.2.1 내게로 돌아오라 (12-14)

2.2.2 성회를 소집하라 (15-17)

2.3 회복시키시는 여호와 (18-29)

2.3.1 육체의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18-27)

2.3.2 영혼의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28-29)

2.4. 응답하는 백성들 (2:30-32)

2.4.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30)

2.4.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31-32)





2.1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시는 여호와 (2:1-11)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함을 알리는 나팔 소리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나팔 소리는 여호와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퍼져나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여 오시는 것이다.


2.1.1 본문의 구조와 배경

2:1-11은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천군의 사령관으로서 대적자를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은 6절을 정점으로 서로 대칭 관계를 이루고 있다 (Chiastic Structure).6)


a. 여호와의 날 (1)

b. 어둡고 캄캄한 날 (2-3)

c. 여호와 군대의 진군하는 모습 (4-5)

d. 창백하게 질린 백성들의 모습 (6)

c'. 여호와 군대의 공격하는 모습 (7-9)

b'. 어둡고 캄캄한 날 (10)

a'. 여호와의 날 (11)

a-a'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a는 여호와의 날의 임박성을 말하고, a'는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운 날이어서 당할 자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b-b'는 여호와의 날을 묘사한다. 2-3절은 이날이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10절은 하늘이 떨고,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어둠의 날이다. c-c'는 여호와의 군대를 묘사한다. C는 여호와의 군대의 진군하는 모습을, C'는 여호와의 군대의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d는 본문의 중심 강조점으로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몰고 심판하려 오심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겁에 질린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백성들의 반응이다.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여호와께서 강한 장수들을 거느리고, 그의 군대를 지휘하여 그의 대적자를 대항하는 날임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그의 군대는 시공을 초월한 신적 존재이다.


2.1.2 여호와의 날 (1, 11)


여호와의 날은 나팔과 호각소리로 시작된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그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림에는 대개의 경우 그의 강림을 알리고 선포하는 신호로 제사장이나 하나님의 종들이 나팔과 호각 등을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우레와 번개로 자신의 강림을 알리기도 하신다 (출 19:16-20; 렘 4:5; 6:1; 겔 33:2-4; 호 5:8).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날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로 시작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은 어떠한 날인가?


2.1.2.1 이 날은 밝은 날이 아니다. 어두운 날이다. 어둡고 캄캄하며, 빽빽한 구름이 낀 날이다 (2).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는 날이다(10). “어둡고 캄캄한 날”은 출애굽 때에 여호와께서 애굽에 내린 재앙을 연상케 한다 (출 10:22-23).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에 내리셨던 어둠과 같은 어둠을 여기서도 내리시고, 그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다. 또한 사 60:2에도 여호와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게” 하신다 (참조: 렘 31:16; 23:12; 겔 34:12; 암 5:18-20). 어둡고 캄캄한 날은 심판의 날이다. 여호와께서는 꼭 밝고 환한 가운데만 오시지 않는다. 출 20:18, 21; 신 4:11; 5:22-23; 왕상 8:12; 대하 6:1; 시 97:2 등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암흑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둠의 날이다.


2.1.2.2 이 날은 땅이 진동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세상에 어둠이 임하는 하늘의 천기 변화뿐만 아니라, 땅이 진동하고 불과 화염이 온 땅을 뒤덮는 날이다 (3, 10). 출애굽기의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는 불과 화염과 연기 가운데 임하셨다 (출 19: 18-19). 지진도 일어나고, 산사태나 해일이나 광풍도 일어날 것이다. 특히 3절에 보면 “많고 강한 백성”이라고 일컫는 여호와의 군대에 앞서 불이 땅을 사르고, 불꽃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태운다. 그래서 에덴 동산과 같은 땅이 황무한 들로 변해버렸다. 여호와의 날은 불이 세상을 태우는 날이다.


2.1.2.3.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천군 사령관으로 그의 하늘의 군대를 지휘하여 진군하고 공격하는 날이다.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많고 강한 백성이 군대의 대열을 짓고, 성읍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데 (4-6, 7-9), 이들을 총 지휘하는 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0절에는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그 명령을 행하는 자란 야전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천군 사령관으로 그의 군대를 지휘하여 그의 대적을 향하여 진군하며, 공격하는 날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심판을 집행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다. 여호와의 군대는 아무도 당할 자가 없다. 그래서 여호와의 군대가 오는 이 여호와의 날을 가리켜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1:11).


2.1.3 천군 사령관, 여호와 (2:11)


성경에는 “여호와의 전쟁”(YHWH War)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성전"(Holy War)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도 있다. Gerhard von Rad가 처음으로 성전(聖戰)이라는 어휘를 사용할 때, 그것은 신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싸우는 역사성보다는 그의 신화성을 강조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대응 개념으로 보수 복음주의 학자들은 “신적 전쟁”(the Divine War), 혹은 성경에서 언급된 대로 “여호와의 전쟁”(YHWH war)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러나 요사이는 이 용어를 구분 없이 교대로 사용하고 있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신들은 자기의 군사들을 대동하고 있다. 지상에는 지상군, 하늘에는 천군이다. 천상의 싸움에서 이기는 신의 백성이 지상에서도 이긴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국가와 민족들의 전쟁은 천상에 있는 신들의 전쟁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다. 하늘에는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지상에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군대로 거느리신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여호와의 군대로서의 선택이다. 그래서 출애굽 때에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지칭하며(출 6:26; 12:41), 민수기나 신명기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 출정하는 군대의 모습으로 기술되고 있다. 출애굽 재앙, 시내 산 광야 생활, 여리고 작전, 가나안 정복은 다 “여호와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이 그를 순종하고 잘 따를 때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지만, 그의 백성이 그를 배반할 때는 다른 민족을 택하여 그의 백성을 공격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실 때는 우박이나 천둥 번개, 그리고 폭우 등을 천군으로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은 다만 노략물을 탈취하게 하신다. 요엘서의 메뚜기도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부리신 하나님의 Agent 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는 여호와께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그의 군사로 부렸다. 그래서 여호와는 신적 전사, 혹은 천군 사령관으로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신적 전사로 사단을 대적하여 우리를 위하여 싸우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선택도 바로 이 성전(聖戰)을 위하여 그의 병사로의 부르신 것이다 (막3:15; 20-30).7) 또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한다(딤후 3:3).


2.1.3.1 여호와의 군대의 진군 모습 (2:4-6)


4-6절은 여호와의 군대가 진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모양은 말 같다. 달리는 모습은 마치 기병과 같다.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마치 병거가 평지를 달리는 소리나 들풀이 불에 타는 소리와 같다. 그들의 모습은 강한 군사가 전투 태세를 갖추어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 셀 수 없이 많은 무장한 군병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는 백성들은 그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워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이 창백해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무장한 로마 병사들이 힘없는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여호와의 군대는 결코 나약한 군대가 아니다. 그들이 출현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군대이다.


2.1.3.2 여호와의 군대의 공격하는 모습 (2:7-10)


7-10은 4-6절에 이어 여호와의 군대가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달리는 모습는 용사와 같다. 성을 기어오르는 모습은 무사 같다. 각기 자기 길을 가고 줄을 이탈하지 않는다. 적을 향하여 나가는 모습은 적과 대면하지만 피차에 부딛치지 않는다. 적군의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지만 상하지 않는다(8). 뛰어 들어가며 성 위를 달린다. 성읍을 공격하는 데 하등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집을 순식간에 뛰어들고 창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들 같다. 육체를 가진 사람들처럼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마치 살과 뼈가 없이 영만을 가진 존재들 같다. 그들에게 어떠한 장애물이란 것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장애물을 통과해버린다. 장애물을 통과하면서도 그들은 전혀 상처를 받지 않는다. 세상에 이들을 당할 자가 없는 것이다. 그를 대적하려는 모든 세력을 다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2.1.3.3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이상을 살펴볼 때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그의 천군을 몰고와 그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이 날은 온 세상이 어둡고 캄캄한 날이다. 본문의 여호와의 군대는 마치 인간의 군대로 묘사되어 있지만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군대들이다. 사람들은 다만 이들의 출현 그 자체로서 두려워서 떨 수밖에 없다. 어둠 속에 그들 앞에는 불이 지나가고, 그들 뒤에는 불꽃이 따라가서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제 1 장에서는 메뚜기 재앙을 기술하고 있으며, 제 2 장은 제 1 장을 근거로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곧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 세상을 심판할 날을 그리고 있다. 이 날은 이미 이루어진 점도 있고, 또 앞으로도 이루어질 일이다. 말일의 예수님의 재림의 날도 분명 우리가 맞을 수 밖에 없는 여호와의 날이다. 그 날도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눅 21:10-28; 마 24:3-21; 막 13:3-27).



2.2 회개를 촉구하시는 여호와 (2:12-17)


2:1-11이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대적을 심판하기 위하여 내달려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날은 요엘 선지자 당시에는 아직 다가오지 않는 날인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 날을 대비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요엘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


2.2.1 내게로 돌아오라 (12-14)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12절에 “네게로 돌아오라” 고 말하고, 13절에 “너희 하나님께 돌아올찌라”고 간청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떠난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청하고 계신 것이다.


돌아오는 시기/ “이제라도” (12). 여호와께서는 “이제라도 ...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그 때가 빠른 때가 아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느끼는 그 때에 바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여호와의 날은 이미 정해졌다. 항구를 떠나는 배의 문은 닫혔고, 비행기의 트렙도 이제 비행기에서 옮길 찰나이다. 여호와의 군대가 무장을 갖추고 출정 준비를 완료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제라도 좋으니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종말의 때도 이와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아무도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다. 세례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했다 (마 3:1-12; 눅 3:7-18). 그래서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돌아올 준비/ “금식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기 위햐여 금식하라는 것이다.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12)고 말씀하신다. 금식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는 행위이다. 겸손을 나타내고, 자기 비하를 의미한다. 울며 애통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슬퍼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분하거나 억울하고, 마음이 슬퍼하고 상할 때 옷을 찢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식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거나 사람들을 충동질할 때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리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다”는 표현은 호 14:2; 암 5:4; 21-24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순한 제사(ritual)나 외면적인 경건 (outward piety)이 아닌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뜻이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과 뜻을 돌이키는 것이다. 여기서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는 것은 세가지 분리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욘 3:5-9; 에 4:3; 스 10:1-6; 느 8:9-10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것은 회개의 과정이요, 모습이다.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약속/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으로 그의 성품을 말하고 있다. 출 34:6-7 이나 욘 4:2에서도 이와 같은 제의적인 공식(ritual formula)을 볼 수 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오는 자에게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은혜는 하눈(/wnj)으로 호의를, 자비는 라훔(<wjr)으로 긍휼, 인애는 헤세드(dsj)는 인자, 혹은 한량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죄인이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때는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시고 하나님께 다시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시지 않으시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시 ... 누가 알겠는가?”하는 말은 회개하는 자를 받아들이느냐 아니 받아 들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 속한 문제이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든가 인간의 회개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호의와 자비와 인애를 기대할 뿐 강요할 수는 없다.

12절의 언어들은 대하 7:14을 연상케 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여호와께 봉헌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 게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 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요엘은 분명 이 약속을 근거로 그 백성에게 여호와께 돌아갈 것을 촉구했을 것이다. 여호와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회개하는 기도를 성전에서 드릴 때 땅의 회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2.2.2 성회를 소집하여 기도하라 (15-17)


여호와의 날이 점점 다가오는 이 때에라도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명하신다. 그리하여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는 것이다. 이 나팔은 1절과 달리 사람이 부는 나팔이다. 구약에서 나팔을 부는 경우는 왕의 대관식 때 (왕상 1:34; 왕하 11:14)), 전장에서 진군할 때 (신 10:6-9; 수 6:4-13, 삿 7:18-20; 삼상 13:3; 렘 51:27; 겔 7:14), 종교적 제의식에서 (민 10:10; 대하 15:24, 28; 16:6; 대하 20:28), 혹은 적군이 쳐들어올 때 이에 대한 경계령을 발동할 때 (겔 33:3, 6; 욜 2:1), 등이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몰고 진군하시기 때문에 파수병은 나팔을 불어 이를 알려 백성들이 경계하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나팔을 불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성회로 모이라

성회에는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린 아이 심지어 젖 먹는 아기까지 다 모으도록 하되, 예외 없이 급히 모으라는 것이다. 심지어 신방에 들어가 아직 첫날밤을 지내지 못한 신랑, 신부라도 급하게 나와서 모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16). 젖먹이는 어미나 (삼상 1:21-24; 왕하 11:2-3) 갖 결혼한 신랑은 적어도 1년 동안은 모든 종교적인 의무나 국가적 의무를 면제받도록 율법에 정하고 있다 (신 20:7; 24:5).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도 소집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여호와의 날은 급박하게 차별 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성회를 거룩하게 하라

성회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성회를 특별히 구별하라는 말이다.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구별하다”는 뜻으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일상 모이는 성회가 아니라 특별한 목적과 특별한 마음 자세로 모이는 성회를 뜻한다. 여기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성회이다. 따라서 이 성회는 특별한 성회이고 구별된 거룩한 성회가 되어야 한다. 각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고 거룩해야 한다.

셋째, 성회에 기도하라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낭실이나 제단 사이에서 기도했다 (왕상 8:22; 겔 8:16). 그들은 울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 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17)


이 기도는 그의 기업인 주의 백성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것이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방치함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갖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시 42:3, 10; 44:11-14; 79:10; 115:2; 미 7:10 등에서 볼 수 있다. 주님의 명예를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다.


2.3 응답하시는 여호와 (18-30)


모든 백성이 성회로 모여 금식하며 울며 기도할 때 여호와는 그 기도를 들으신다. 18-29절은 자기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18절에 “그 때에”라는 표현은 분명 성회로 모여 통회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사랑하시고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여호와께서 응답하여 이르시기를”이라고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첫째로 메뚜기 재앙으로 말미암아 황폐화 된 땅과 백성들의 생활의 복구이며, 둘째는 황폐화한 백성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회복이다.


2.3.1 육체의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18-27)


18-27절은 여호와의 응답으로 제 1 장의 메뚜기 재앙에 대한 복구이다. 19-20절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풍성한 추수를 주시고, 침략군을 몰아내어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21-27절은 여호와께서 그러한 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모두들 기뻐하라는 것이다.


2.3.1.1 곡식과 평화를 주시는 여호와 (19-20)


여호와의 회복은 그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는 것이다(19). 그의 백성을 흡족하게 해주심으로 그의 백성이 다시는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메뚜기 재앙으로부터 황폐화된 토지를 회복함으로 다시 곡식이 나고, 포도와 올리부가 생산되는 것이다.

둘째는 그들을 쳐들어왔던 북쪽 군대들을 멀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신다는 것이다(20). 마치 출애굽 때에 애굽 군대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처럼 그들도 동해와 서해로 빠져 들어가며, 거기서 송장이 썩는 악취가 올라올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북쪽 군대”란 문자적으로 “북쪽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나안 신화에서 북쪽은 신들의 거주지로 언급되고 있다. 성경에서도 북쪽을 그와 같이 묘사하는 곳이 있다(욥 37:22; 시 48:3; 겔 1:4). 바벨론 왕은 북쪽의 집회의 산 위에 앉겠다고 뽑낸다(사 14:13). 놀랍게도 예루살렘의 성전도 성읍의 북쪽에 있다. 한편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대적들이 그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침투하는 방향이나 길이 북쪽이라고 지목한다 (사 41:25; 렘 1:13-15; 4:6; 6:22; 10:22; 13:20; 15:12; 25:9, 26; 46:10, 20, 24; 50:3, 9, 41; 겔 26:7; 38:6, 15; 39:2; 단 11; 슥 2:6; 6:6-8). 뿐만 아니라 “북쪽 땅”은 “묵시적인 대적” (Apocalyptic foes)으로 이해되기도 한다.8) 그들이 어떠한 존재이든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을 그의 땅에서 몰아내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 일이다.


2.3.1.2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여호와 (21-27)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라던 여호와께서 이제는 땅과 들짐승과 시온의 자녀들에게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1절은 땅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2절에는 들짐승에게 두려워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하일(lyj)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산물” (produce)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탈굼에서는 “그들의 열매” (their fruits)로 번역하고 있다.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그들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23-27절은 시온의 자녀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여호와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예전처럼 주시기 때문이다 (23).9) 이스라엘에서 이른 비는 10-11월에 내리는 비를 말하고,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가을과 봄에 적당한 양의 비를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가뭄으로 말미암아 들짐승도 할딱거리는 곳에 때를 필요한 비를 주시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밀과 포도주를 풍성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적절한 때에 비를 주신 결과라고 할 것이다. 셋째는 메뚜기가 해친 햇수대로 그들에게 갚아주셔서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25).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를 가리켜 여호와께서는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들 메뚜기 떼는 분명 여호와께서 보내시고, 부리시는 여호와의 군대임을 알 수 있다. 넷째로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제 여호와의 백성들은 풍족히 먹게 될 것이다. 재앙으로 말미암아 배고프고, 굶주려 울부짖던 백성들이 이제 풍족히 먹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여호와의 백성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회복은 그의 백성이 메뚜기 재앙 이전대로 풍성한 곡식을 얻게 되며, 여호와와 계약적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제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백성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차고 넘치는 것이다. 재앙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3.2 영혼의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28-30)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재앙으로부터 구원하신 후, 그들과 계약적 관계를 회복하신다. 27절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 너희가 알 것이다”라는 말은 계약공식(Covenant Formula)과 인정공식 (Recognition Formula)을 조합한 양식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계약공식이며,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인정 공식이다. 27절은 바로 이 두 공식을 결합한 것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말씀이다. 특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라는 표현은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여 계약을 맺고 동거하듯이,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주하시는 동거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형적인 계약 개념이다. 그의 백성들에게 육체의 만족을 주신 여호와께서는 이제 이들에게 새로운 영적인 만족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2.3.2.1 성령을 약속하시는 여호와 (28-29)


“그 후에”는 성경에서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요엘서는 지금까지 앞으로 있게 될 두 가지 재앙을 말했다. 하나는 임박한 메뚜기 재앙이고 (1장), 다른 하나는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전쟁이다(2:1-11). 그리고 선지자는 이 재앙의 때에 여호와께서 하실 큰 일을 말했다. 2:18-27은 임박한 메뚜기 재앙에 대하여 여호와의 회복과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2:28-3:21은 여호와의 전쟁과 장차 있게 될 유다와 이방인들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시온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는 여호와 전쟁의 날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그 후에”라는 말은 메뚜기 재앙으로부터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회복하신 이후의 때를 가리킨다.10) 여호와께서는 물질적 영역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그들을 만족스럽게 하시는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28) 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육체”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자녀” “젊은이” “늙은이”, 그리고 29절에는 “남종과 여종” 등은 다같이 “모든 육체”를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대상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엘은 회개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의 우주적인 회복을 말한다. 성령을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은 겔 36:22-31 에도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잡혀간 나라로부터 다시 인도하여 내시고, 맑은 물을 그들에게 뿌려서 정결케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 음을 제 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 라.” (겔 36:26-28)


여호와께서는 새 영을 우리 속에 두시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함으로 사람들은 새 마음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언약 관계를 새롭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요엘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부어주실 때,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 (28)


고 말씀하신다.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는 새 마음을 받고,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하게 될 일을 말하고 있다. 성령을 받고 새 사람되어, 새로운 신분을 취득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별한 징조와 역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부어주실 때에 사람들은 장래 일을 말하며, 꿈을 꾸며, 이상을 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그들이 선지자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 12:6에 보면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라고 말하고 있는 데, 이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지자가 할 일이다. 요엘서에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의 영을 부어주실 때에 그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볼 것이다” 고 말하고 있는 데 이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서 선지자가 된다는 말이다. 특히 여기서 여호와께서 모든 육체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실 때,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보며 이상을 본다는 것은 민수기 11:1-12:8의 사건을 연상케 한다. 모세가 일이 과중하여 홀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것을 하나님께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칠십 명의 이스라엘 장로들을 장막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셨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권위와 능력을 이들에게 부여하여 주시고, 이들로 하여금 모세가 하였던 일을 같이 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통하여 장로들이 그의 권위를 가진 지도자임을 인치시고 확인시켜 주시고 계신 것이다. 한편 엘닷과 메닷은 그 장막에 나가지 아니하고, 자기 진영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진영에서 그들과 같은 방언을 했다. 이를 본 여호수아가 그들이 방언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모세에게 청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 11:29)고 말한다. 이는 방언하는 칠십인의 장로가 다 선지자가 되었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도 된다.

요엘서는 분명 이 모세의 기도를 염두에 둔 말씀임에 틀림없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시고, 모든 여호와의 백성이 다 선지자 되기를 바란다. 요엘서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실 때에, 그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다는 말이다.

이제 모세와 요엘을 거쳐 여호와께서 주신 이 약속, 즉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고, 모든 사람이 선지자가 되게 하는 이 약속은 신약의 오순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베드로는 오순절의 성령 세례를 요엘 선지서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 선언한다. “술취한 자”는 요엘서에 언급된 사람들이나 오순절 성령 세례받은 자에게 다 같이 연관된 주제이다. 오순절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선지자들을 세워 그들에게 신적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모세의 때나, 요엘의 때나, 오순절 때가 다같이 지향하는 점은 하나님의 성령 강림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선지자의 역할이다.


그래서 3 장에 이어지는 여호와의 꿈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의 땅을 이루는 것이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시고, 그의 성전에서 샘이 훌러나와 온 세상에 흘러 넘치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2.3.2.2 하늘과 땅에 이적을 약속하시는 여호와 (30)


30절은 여호와 날, 곧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날에 있을 이적과 징조를 언급하고 있다. 하늘과 땅에 있을 이적은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다. 피와 불은 성경에서 심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쓰인다 (사 9:5; 겔 21:32). 여호와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날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광스럽고 복된 날이 될 것이다. 30절은 여호와의 날, 곧 심판과 구원의 날에, 특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구원과 축복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31-32절에는 남은 자에 대한 주제가 뚜렷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겪고 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장차 새로운 하나님의 중심적인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온이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될 것이지만 이를 피한 자들, 곧 살아 남은 자들이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32). 따라서 본문을 심판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내리실 복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발화되는 심판의 불이 아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께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외쳤다.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할 때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같이 위에서 내려왔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것임을 증거한다 (행 2:14-22). 따라서 요엘서에서 말하고 있는 불이란 성령이 임할 때의 모습인 불의 혀를 말한다.11) 불은 특히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를 선지자로 세웠다(사 6:6-7). 예수께서는 성령의 불을 내려 그의 제자들을 그의 증인인 선지자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신 것이다.

“기둥”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티마롯(twrmyt)은 대추야자(date palm)을 뜻하는 타마르(rmt)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 기둥 모양이 마치 대추야자나 송이버섯 구름 모양의 기둥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연기는 하나님의 존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을 당시 그의 거처인 시내산은 온통 연기로 가득했다(출 19:18, 20:18). 아울러 이 산들은 또한 “구름”으로 가득했다(출 19:9, 16; 24:15, 16, 18). 또한 출 33:9에는 회막에도 구름이 임했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의 가는 길을 인도했다고 했다(출 13:21). 이로 보건데 구름기둥과 연기기둥은 같은 의미의 말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가 계신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연기가 충만한 곳이었다(사 6:4). 따라서 연기 기둥이란 여호와께서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을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던 그 때의 “구름 기둥”을 회상케 한다.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바로 구름기둥이요, 연기 기둥이다. 높이 들린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로 내려오신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남은 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바로 성령의 전이 되는 것이다.


2.4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2:31-32)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성회를 소집하고, 기도할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 육체인 필요를 충족시켜 줄 뿐 아니라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바로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직전의 상황을 말한다.


2.4.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31)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있을 징조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리라”는 것이다. 자연의 징조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가 어두워지고, 또한 달빛이 핏빛같이 되는 두 개의 징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을 말한다. 즉 낮 동안에 어두움이 임하는 징조이다(1:2; 수 10:12-14).12) 이는 출애굽 때를 연상시키는 징조이다.13) 출애굽 때에 애굽에 흑암이 임했다. 이것은 다가올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징조였다. 마찬가지로 해가 어두워지는 자연의 변화가 일어나면 바로 이것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가 될 것이다. 특히 애굽에서 태양은 그들이 숭배하고 섬기던 신이었다. 따라서 태양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대 재앙 그 자체이고, 또한 더 큰 재앙을 예고하는 징조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날도 태양이 빛을 잃는 징조 가운데 임할 것이다. 따라서 이 날이야말로 크고 두려운 날이 아닐 수 없다.

2.4.2.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남은 자 (31)


출애굽 때에 죽음의 재앙이 온 애굽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렸다. 믿음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죽음의 재앙 가운데서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이제 똑같은 원리가 여호와의 날에도 적용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살아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 크고 두려운 날에 살아남을 자는 오로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밖에 없다. 여호와는 믿음으로 살아 남은 자를 부르시겠다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요엘 제 2 장을 살펴보며 특별히 다음 두 가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여호와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는 날이다. 여호와께서 군대를 지휘하며 그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과 거룩한 전쟁 (Holy War)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여호와께서는 전쟁을 위하여 천상의 군대를 거느리신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은 그의 지상 주둔군이다.14)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다. 그리고 승리하게 하신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영적 사령관(divine warrior)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탄과 싸우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신 것이다. 거룩한 전쟁은 우리가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싸우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전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 그의 성전(聖戰)을 위한 병사로 모집하였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신 사건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병사를 모집하고, 병사를 선별할 때 사용하는 경우과 똑같은 어휘를 사용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신 목적은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막 3:14)고 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한다는 말은 바로 제자들이 귀신과의 싸움을 싸우도록 부르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딤후 3:3은 성도들을 가르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칭하고 있으며, 엡 6:10-20은 우리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싸우는 자가 아니고 정사와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 총칼을 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다. 즉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등으로 무장하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날마다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자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의 대장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거룩한 싸움에 참예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맛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도 여호와의 날,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 될 것이다.


2. 성령 세례를 주시는 여호와


요엘서 2 장은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자에게 식량을 주어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어 삶의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셔서 다 하나님의 선지자, 곧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은 사람을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일을 하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서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하신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는 자이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곧 땅끝까지 이르러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는 증거가 없이는 선지자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선지자 노릇도 할 수 없다. 성령은 이 새로운 선지자들에게 신적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한 것이다. 하늘에서 불의 혀가 갈라진 것과 같은 것이 그들 위에 임함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객관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며, 성령을 받은 자들이 방언을 함으로 제자들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할 선지자라는 자기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세례는 결코 개인의 중생이나 성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제자, 곧 선지자들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고 능력을 덧입히기 위한 것이었다. 성령을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신적 권위와 능력을 받게 된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주셔서 선지자가 되게 하신다. 성령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신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령과 말씀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제 3 강 만국을 국문하시는 여호와


본문 : 3:1-21

요절 : 3:1, 2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



서론


3.1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여호와 (3:1)

3.2 만국을 심문하시는 여호와 (3:2-8)

3.2.1 이스라엘을 위하여 심문하시는 여호와 (3:2-8)

3.2.2. 사면의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 (3:9-13)

3.3.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는 여호와 (3:14-21)

3.3.1. 심판의 골짜기에 임한 여호와의 날 (3:14-17)

3.3.2. 샘이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성전 (3:18-21)


결론





제 3 강 만국을 국문하시는 여호와


본문 : 3:1-21

요절 : 3:1, 2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


서론


제 1 장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메뚜기 재앙을 예고하고, 제 2 장은 메뚜기 재앙을 근거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 곧 심판과 구원의 날을 예언하고 있으며, 특별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셔서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메뚜기 재앙으로 말미암은 손실을 보상해주시며, 더 나아가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의 선지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비전을 보여주신다. 이제 제 3 장은 여호와께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데려오시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로잡아간 이방 민족들을 여호와께서 불러모아 심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울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다. 본문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3.1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여호와 (3:1)

3.2 만국을 심문하시는 여호와 (3:2-8)

3.2.1 이스라엘을 위하여 심문하시는 여호와 (3:2-8)

3.2.2. 사면의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 (3:9-13)

3.3.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시는 여호와 (3:14-21)

3.3.1. 심판의 골짜기에 임한 여호와의 날 (3:14-17)

3.3.2. 샘이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성전 (3:18-21)

3.1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여호와 (3:1)


제 3 장은 “그 날”로부터 시작한다. 곧 그 날은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실 날이다. 또한 그 날은 그 동안 메뚜기의 엄습과 가뭄으로 말미암아 기근이 창궐하고, 온 대지가 황폐화 된 이스라엘을 예전과 같이 다시 회복하는 날을 말한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대적자들을 심판하시고, 처벌하시는 날이다. 그리고 그를 불순종하여 이방 땅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그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날이다. 역사적으로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그를 배신하고 이방신을 섬길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 그리고 70년 동안 이스라엘은 이방 땅에서 종살이를 했다. 그 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의 포로 생활에서 구출하여 그의 옛 땅으로 데리고 오신다(습 3:20; 겔 39:25).



3.2 만국을 심문하시는 여호와 (3:2-8)


사로잡힌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날, 여호와께서는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로 내려가신다. 그곳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을 심문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그의 기업의 땅에서 내쫓아 흩어버리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만국” 이란 히브리어로 콜-하고임(<ywgh-lk)을 쓰고 있는 데, 이는 “모든 백성”이란 뜻이다. 모든 백성들은 심판을 받거나 여호와와 더불어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부름을 받고 모인다 (사 43:9; 66:18; 겔 38:8; 호 10:10; 믹 4:11; 습 3:8; 슥 12:3; 14:2; 마 25:32; 계 20:8).

“여호사밧 골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가 어디에 있는지에 의견을 내놓았다. 첫째는 대하 20:26에 언급된 브라가 골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왜냐하면 이곳이 바로 여호사밧이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예루살렘의 성읍을 가로지르는 계곡으로 타이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 일명 치즈 장사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해서 치즈쟁이 골짜기(Valley of Cheese Monger)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삼하 17:29). 셋째로는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여호사밧 왕 이름을 붙인 이유는 실재 여호사밧 왕을 일컫는다는 것 보다는 여호사밧이라는 말이 “여호와”(hwhy)와 “판단하다” (fpv)는 말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판단하신다”(YHWH Judges)라는 뜻이다.15) 일종의 말재롱(paronomasia)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심판의 장소로서 ”여호사밧“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골짜기는 대개 죄인들이 처형된 장소이다. 이 심판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민족들을 불러다가 보응하려는 것이 여호사밧 골짜기의 심판이다.


3.2.1 이스라엘을 위하여 심문하시는 여호와 (3:2-8)


본문은 마치 법정에서 검사가 죄인에게 그 죄목을 나열하듯이, 여호와께서 만국을 불러 여호사밧 골짜기에 세워두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위하여 부름 받은 족속들은 두로, 시돈, 블레셋 등이다 (3:4). 이들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로 흩어버리고, 그 땅을 서로 나눠가졌다 (3:2). 또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소년 소녀들을 끌어다 팔았다 (3:3). 기생이나 창기와 더불어 놀고 난 화대나 꽃값으로 이스라엘의 소년이나 소녀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또한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 그 땅으로부터 내쫓다 (3:5).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기업의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내쫓고, 그들을 끌어다가 팔아먹는 인신매매의 범죄를 여호와께서는 심문하시고, 각자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하려고 하신다.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너희 자녀를 유다의 손에 팔리니 그들을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3:7-8).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대신 이스라엘을 팔아 넘긴 족속들을 유다의 손으로 다른 족속에게 팔겠다는 것이다.


3.2.2. 사면의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 (3:9-13)


여호와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할 메시지를 주신다. 첫째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들을 다 가까이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다 (9).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고 하신다 (10). 무기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농기구를 가지고 전쟁 무기를 만들라는 것이다. 약한자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강하게 되라는 것이다. 둘째는 사면의 민족들을 속히 모이라는 것이다 (11). 여호와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오라고 명하신다 (12). 왜냐하면, 그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왕이요 심판장이 되셔서 그의 보좌에 앉으신 것이다. 한 때 메뚜기들이 차고 넘치던 예루살렘 성읍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셋째는 여호와의 판결이다.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이제 곡식이 익었고, 포도주 틀이 가득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기 때문에 낫으로 베고 밟으라고 명하신다. 마치 곡식과 포도가 무르 익어 낫을 대고, 포도주 틀을 밟을 때가 된 것처럼 여호와의 심판이 무르익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 17:4-6; 63:3; 호 6:11). 여기서 여호와의 심판을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거나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고 밟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이들의 악행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잔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포도원이고(사 5장) 장차 이스라엘의 산들이 단 포도주를 생산하게 될 것이다 (욜 3:18). 사도 요한은 종말론적인 수확을 묘사함에 있어서 요엘서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계 14:14-20).

여호와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모아놓고 그의 군대들과 병사들을 동원하여 처단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사밧의 골짜기는 여호와의 대적들을 재판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그의 대적들을 처형하는 하나의 거대한 포도주 틀이며, 낫을 대서 추수하는 논밭인 셈이다.


3.3.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는 여호와 (14-21)


여호와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을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아두고, 그의 백성을 그가 주신 기업의 땅에서 쫓아내고 이방 나라에 노예로 팔아먹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심판의 날에 그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신다.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은 항상 병행한다. 14-21절은 여호와의 날에 그의 백성들에게 주실 여호와의 복을 기술하고 있다.


3.3.1. 심판의 골짜기에 임한 여호와의 날 (3:14-17)


11절에 여호와께서는 사면의 민족을 향하여 속히 여호사밧의 골짜기, 곧 여호와의 포도주틀로 모이라고 재촉하신다. 이제 14절에는 사면에서 모여든 수많은 무리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의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 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사람들이 모여듬에 따라 이제 여호와의 날도 점점 다가온다. 15절에 해와 달이 캄캄해지며 별들도 그 빛을 거둔다. 여호와께서 부르짖고, 그의 목소리를 내신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천둥을 의미할 것이다(왕상 19:12; 시 29; 암 1:2). 2:1-3, 31에서 말한바와 같은 실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의 피난처가 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실 것이다(사 25:4; 시 146:2). 그의 백성들은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바로 시온에 거하시는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특별히 구별된 성읍이어서 이방 사람들이 다시 넘보거나 통행하지 못할 것이다. 심판을 퍼붓는 가운데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출하신다.


3.3.2. 샘이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성전 (3:18-21)


18-21절은 여호와의 온전한 회복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제 1 장에 언급된 재앙에 대한 회복이다. 이스라엘 땅에는 물이 넘쳐 만물이 소생을 하지만, 애굽과 에돔은 황무지가 되고 만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고,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비와 가뭄을 주관하시고, 옥토라도 황무지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에는 산들이 단 포도주를 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다.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게 될 것이다. 싯딤은 아카시아 나무 (acacia tree)이다. 싯딤은 모압평지 사해 동북쪽에 있다 (신 25:1; 33:49). 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이곳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학자들 가운데는 싯딤 골짜기는 기드론 골짜기를 가르킨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에스겔(47:1-12)이나 스가랴(13:1; 14:3-9)는 종말론적인 샘물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엘에서도 샘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온다면 싯딤 골짜기는 자연스럽게 기드론 골짜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16) 이 구절은 가뭄과 기근의 땅에 물이 차고 넘쳐서 포도가 익고, 풀이 우거져 양떼들이 젖을 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때 성전에는 여호와께 드릴 제물이 없어서 제사장들이 곡을 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성전이 샘이 되어서 물이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여호와의 전이 목마르고 갈증나는 인생들이 그 해갈을 풀고, 그들의 생명을 의탁하는 곳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전이 인생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요엘서의 마지막 말씀은 여호와의 보상에 관한 말씀이다.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3:21)


이 말씀은 첫째로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둘째로는 예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 그들을 외면하셨다. 오히려 이방인들을 동원하거나 자연을 불러 그들을 처벌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그의 백성이 흘렸던 피를 보상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여오와께서 시온에 거하시기에 아무도 시온을 침략할 수 없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시며, 그의 백성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시온에 거하신다 (히 12:22-23; 벧전 2:6; 계 14:1). 여호와께서 계신 곳이 바로 시온이다.



결론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예루살렘과 성전은 동일시 사용되고 있으며, 바로 이 성전에서는 첫째로 성전에서는 물이 흘러나온다.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18)는 것이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이 모습은 겔 47장이나 슥 13:1; 14:3-8에서도 볼 수 있다. 겔 47:1-12는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점점 그 수량이 많아져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 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 . . 강 좌우 가에는 각 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 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 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그래서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생명수이다. 바다를 살리고, 나무를 살리고, 각 양의 생물을 살린다. 한편 슥 13:1은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고 말하고 있으며, 14:8에는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반절씩 동해와 서해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하는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바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물이다. 사죄와 용서의 샘물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다섯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물을 청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고 말씀하시며, 계속하여 그가 주시는 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생물을 살리는 물이요, 예수께서 주시는 물도 사람을 살리는 물이다.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가르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맺게하고, 만국을 소성케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예수께서 주시는 생수는 무엇인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 7:37-38)


예수님으로부터 강처럼 흘러 넘치는 그 생수는 다름 아닌 성령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고 베드로는 가르친다. 성전에서 흐르는 물, 곧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물은 성령이요, 그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살리는 일을 한다. 사람을 중생시키고, 변화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만국의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성령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온다. 이사야 2:1-4에는 하나님께서 말일에 이루실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보다 뛰어나게 될 것이다. 고대 셈족 세계에서는 신들이 각자의 산에서 거주한다고 믿었다. 여호와의 거처는 시온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산이 다른 산보다 뛰어나게 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신들 위에 왕노릇하게 되는 때를 가르키는 것이다. 바로 이 때에 열방이 여호와의 전을 향하여 올라가며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 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 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이 나오는 시온이나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는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의 전을 가르키는 것이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여호와의 전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이 나오고 율법이 나오는 것이다. 세상의 민족들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이사야 11장은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말씀을 받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 되면(사 11:9) 이 세상은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암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젖먹는 아이와 독사가 함께 어울려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을 그리고 있다. 적자생존의 상극적인 적대감이 해소되고 서로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시어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요한 1:14). 그래서 열방으로부터 사람들은 예수님께 말씀을 받으러 나온다 (막 3:8-9; 요 12:20). 이사야서의 열방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나왔다는 것은 바로 성전된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열방의 민족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말씀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전에서 말씀이 나오고, 그 성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이상을 살펴볼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이다. 말씀과 성령은 다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뗄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벧전 1:23). 중생은 씻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유월절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이미 목욕한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 13:10)고 하신 말씀은 바로 말씀으로 씻음을 받고 새 사람된 제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중생의 사역은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한다. 에스겔 37장은 말씀과 성령이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마른 뼈를 향하여 대언하라고 지시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5). 그래서 에스겔이 “명을 쫓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였다”(겔 37:7). 말씀하시매 생기가 역사하여 죽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힘줄이 붙어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고, 말씀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곳에 성령은 임하시고 일하시는 것이다.


결론


2장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육체에 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본다는 것은 선지자가 된다는 말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성령을 주셔서 그들에게 선지자로서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입히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3장에서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비전을 보여주신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말씀과 성령이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세상에 죽은 모든 것을 소생시킨다. 물고기가 살고, 모든 생물이 산다. 마른 뼈들이 살아난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을 받은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차고 넘친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온갖 적자생존의 상극적인 존재들이 화합하고, 화평을 누리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꿈은 만물이 소생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차고 넘치며, 그래서 더 이상 서로 “여호와를 알라”고 말하지도 않을 만큼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다 선지다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은 바로 이 종말론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