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을 보기 전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생각을 잠깐 정리하고 말씀을 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흔히 말하는 전통적인 예배를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의 예전, 의식 형태를 중요시 하는 분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현대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음악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혼합적인 예배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예배가 규정지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뜨거운 예배를 추구하는가 하면 수도원형태의 예배를 추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그림심산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루살렘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우리는 흔히 말을 합니다. 이번에 다른 지방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영적인 예배를 드렸어, 이번에 다른 지방에 갔는데 예배가 형편이 없었어!
우리의 취향이나 생각으로 그곳의 예배나 우리의 예배를 최상이나 최하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예배를 우리는 스스로 폄하합니다.
사실 지방의 교회들 열악한 상황 속에서 최상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니다. 김삼환 목사님 경북영양 흥국교회 대설교가가 쫓겨갔습니다. 쫓겨난 분입니다. 그 상황을 누구도 평가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는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의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장소나 우리의 취향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하고 우리는 준비되어야 함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져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예배의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우리의 예배는 새롭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자세인가요? 백부장의 아들이 아플 때 그의 아버지의 갈급함입니다.
38년된 병자의 갈급함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의 갈급함입니다.
장소나 형태, 우리의 취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며 성령님의 생기를 체험하는 예배라면 그 예배는 일생의 최대 변화를 체험하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갈급의 형태가 잘못되면 그러한 갈급은 생명이 없고 예수님이 없는 갈급이 될 것입니다.
오늘 6장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갈급한자들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고 그들의 갈급을 채워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채움을 위해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갈급함이 떡과 물고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온 겁니까?
그들의 시각은 왜곡되고 있습니다.
나아가는 마음과 신비한 체험을 하는 동안에 그들의 마음과 생각은 다르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나올때 하나님이 부르셔서 나왔습니까? 여러분이 나오고 싶어 나왔습니까?
현대 예배인도자들의 멘트는 충운 날씨가운데 나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사랑이 섞인 말 같으나 추운 날씨에는 나올수 없다. 새벽에도 말씀드린 말이지만 주일학교나 중고등부아이들을 볼 때 추운데 어떻게 나왔니? 인사를 합니다. 은연중 추운 날이나 더운 날에는 예배를 등안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내포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교회 깊은 곳까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아이들도 헌신할 때 공부하기도 힘든데 열심히 봉사까지 하니 격려의 말 같지만 공부나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지향적인 이야기보다 비 신앙지향적 이야기를 훨씬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 6장에서는 세 가지의 떡이 나옵니다.
첫째로 모세의 때 만나와 메추라기가 나옵니다. 과거의 그들은 만나를 공급 받았습니다. 만나를 볼 때 그들은 무엇인지를 몰라 ‘만후’라고 불렀습니다. 만후의 뜻 이것이 무엇인가 불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6:32 모세가 제공한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공한 떡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급한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그들은 우선 그들에게 공급된 만나를 공급 받고 그것이 더 만족했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추앙하는 모습으로 그들은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가 더 넘쳤을까요. 아니요. 하나님보다 우선 그들은 떡이 좋아 그것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탐욕이 넘쳤습니다. 창고에 쌓았습니다. 마치 우리가 좀 더 많은 제화를 쌓아서 미래를 확정하려는 의지처럼 그들은 쌓고 샇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것은 쌓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 전에는 이틀간의 양식을 쌓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쌓아놓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쌓기를 바랍니다. 또 그 양식이 물질만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쌓아 놓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양식은 매일 매일 쌓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길 원합니다.
두 번째 떡은 오병이어의 떡을 먹었습니다. 오병이어를 먹은 사람들 너무 은혜가 되고 축복의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엔 예수님 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야심만이 가득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고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이기보다 자신들의 일차 만족을 채우는 일이 우선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굉장한 일을 목도합니다. 지금까지 볼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시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심중을 보고 그들을 피합니다. 혼자 산으로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붙잡는다고 붙잡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운데 오셔야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세는 영접입니다. 불신앙의 모습으로는 그분을 만날 수 도 없고 영접 할 수 도 없습니다. 다시금 신앙의 열정, 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제 세번째 떡이 나옵니다. 영원한 떡 되신 예수님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에게 받는 떡은 어떤 떡인가요? 그의 살과 피 그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목적 목표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예배의 목표 목적은 현대적, 전통적, 혼합적인 말에 멈춰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맛보는 일입니다.
저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자녀를 보고 공부의 결과를 보고- 일주일, 새로운 자전거를 사고- 한 달, 진정한 예배의 감격을 느끼고, 기도의 감격을 느끼고 먹지 않아도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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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거린다. 60절 무슨 이야기야....너무 어려워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예수님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어보세요 너무 쉬운 진리입니다.
학생들 신앙 생활하는 것 힘듭니다. 왜요? 신앙을 아직 확립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해서입니다.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66절 소수가 그 가운데 남는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어떤것을 원하십니까?> 신비한 떡 만나, 현실의 오병이어, 아니면 장차 우리가 받을 영원한 축복인 예수그리스도 이분이 생명입니다.
이분이 길입니다. 이분이 진리입니다. 어떤 것 보다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 공급받고 진실한 공급받고 생명가운데 거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