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벧전 4:12-1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즐거워하라.

스네어 2012. 6. 7. 18:18

벧전 4:12-1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가장 신앙의 실패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회의주의이다.

바꾸어 말하면 회의주의는 누구나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생각이 되면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것 같은데 주변에서 누가 힘들다. 주변에 누가 순교를 했다. 누가 음행을 한다. 누가 향락에 빠져있다. 누가 우상숭배를 한다 하면 이것이 사람들을 회의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현대로 바꾸면 예수를 믿으면 시험당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시험이 오고, 물질, 자녀, 축복이 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먼 곳에 있다면 회의주의에 우리는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불시험이 온다고 말한다. 불시험이 올 때 놀라야 하는가? 놀라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이런 난이 왜 오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받으면서 즐거워도 기뻐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 두 측면

첫째,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의미를 발견하는데 언젠가 영광에 참여할 것처럼 고난에 참여한다.

둘째,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정련시키는 하나님 연단의 불이 된다

연단의 불은 우리 안에 이전 죄들을 도말하게 될 것이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다는 것은 욥기와 시편의 수수께끼가 된다.

그 고난당함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고난 그리스도인의 고난

초대 순교자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은 -황제를 향하여 충성을 맹세하라, 그러면 풀어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그의 대답은 나는 86년간 그리스도를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일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반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의 절개는 불의 연단을 통한 신앙의 절개가 되어집니다.

14절에 그리스도를 위해 치욕을 당하는 것이 영광의 영 곳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세상의 일로 고난을 받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15절엔 세상의 일로 고난을 받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일들은 의미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것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르만도 바야다레스 그는 쿠바의 기독교 인입니다. 그는 카스트로 시대에 독재에 항거해서 감옥생활을 합니다. 22년간의 감옥생활입니다.

그리고 처형장에 끌려갑니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이시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타도 공산주의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울림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형수들은 그를 따랐고 처형장에 간수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악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 그것이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이 된다.

항상 이러한 정화 운동은 하나님의 뜰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참 믿는 사람들은 죄를 많이 졌어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거야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하여 기준이 엄격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사랑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의인들이 이렇게 고난과 심판이 있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준은 얼마나 높으며 엄격할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준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신앙과 삶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신약에서 ‘창조주’라고 말씀되어 있는 곳은 단 한곳이다.

그분은 새들을 먹이시고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신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바라라. 그분의 고난에 들어감을 즐거워하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