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26-43
오늘 본문은 사실상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없었습니다면 기독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습니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인류의 평화도 화해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이 단어만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움이 올라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속에 담긴 그 의미가 우리의 작은 가슴에 감히 담을 수 없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메고 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숨지시는 장면입니다.
그 의미를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강해]
1. 용서. 내가 너를 끝없이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시다가 한 밤중에 잡히셨습니다. 밤중부터 새벽까지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온갖 조롱을 당하신 후에 빌라도와 헤롯에게까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 동안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손에 갈대 지팡이를 들리고서는 그 앞에서 절하는 시늉을 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채찍질을 하였는데 가죽 끈 끝에 뼈 조각이나 쇠붙이를 붙여서 휘두르면 살점이 찢겨나갑니다. 채찍질만으로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중입니다.
이미 탈진상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란 커다란 나무기둥입니다. 형장에는 수직으로 높이 세우는 나무기둥에 준비되어 있고 죄수는 그곳까지 가로지르는 나무기둥을 짊어지고 가서 그곳에서 옷을 벗기고 눕혀서 손발에 못을 박아 나무기둥을 수직으로 세워서 처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자꾸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너무 심하면 죄수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곁에 한 사람을 잡아 그 십자가를 대신 매고가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인데 이곳에도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기록한 중에 구레네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몬도 유월절에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고 봅니다. 제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로마 군인에게 잡힌 것입니다.
(눅23:26-49)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질 때도 있지만, 비자발적으로 주님을 도와 십자가를 감당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왜 내가 섬겨야 하지? 할 때.. 구레네 시몬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 십자가를 지셔야 된다면 나의 작은 힘으로 예수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 저도 함께 지겠습니다. 조금 어렵고, 귀찮고, 수고하고 땀 흘려야 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저도 함께 지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뒤로는 구경꾼과 울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을 동정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차올 심판을 말하고 ad70년경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의 슬픔이 클수 있으나 장차의 슬픔이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푸른 나무인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하지만 장차 마른 나무인 너희 곧 로마, 관리, 총독, 황제, 바리새인들은 더 큰 환란이 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ad66년 열심당원들이 있던 맛사다라는 천연요새엔 절벽에 흙을 쌓아 그곳을 함락시켰고 960명이 그곳에서 자결
실제 ad70년 예루살렘은 titus 장군의 공격에 토벽을 쌓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있다. 유대인들은 금은 보석을 입에 넣고 탈출했으나 그들의 대변에서 보석이 나오는 것을 보고 2000명을 배를 갈라죽였고 참혹한 일들이 그들에게 있을 것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결의 고통, 배를 가르는 고통을 들으며 눈을 찌푸리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은 비교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에도 단 한가지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ex/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떠한가? 용서… 은혜.. 이런 단어를 들어도 가슴에서 깨달아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선행과 악행을 저울로 달아 항상 미달 점을 찾아내는 계산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자랐다. 우리의 잘못된 죄만 찾아서 벌 주시는 공의롭기만 하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비 은혜의 냉혹한 율법을 기어코 깨뜨리시는 자비롭고 관대하신 하나님.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그 복음서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평가표가 그렇게 잔혹하다면 우리는 한사람도 구원받을 자가 없다.
하나님은 그런 계산표를 다 찢으시고 충격과 반전으로 의외의 결말을 낳기에 으뜸인 단어, 은혜의 새로운 계산법을 도입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류는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당신을 정죄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죄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용서 받았습니다. 당신은 자유자 입니다.
십자가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의 곳입니다. 비참한 자리입니다. 성전과는 불과 800m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두 명의 죄수도 못 박힙니다. 그러나 그곳에 깨달음이 있다면 그곳도 구원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세상적인 평가표는 최악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평가표를 다시 작성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입니다. 나는 내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징벌 받음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지금의 이일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음성을 듣게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