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아래

스네어 2010. 2. 10. 09:19

죄아래 있는자(롬3:9-18절)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중의 하나는 바로 숨을 쉰다는것입니다.

사실 밥은 한끼나 두끼 혹은 삼풍사건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로 인해 십여일을 굶어도 살수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금식하면서 40일을 굶는다 할지라도 살수있는것입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까 잠을 자지않고 285시간을 버티어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약12일이나 됩니다. 이처럼 잠이나 밥은 어느정도 괜찮은것입니다. 그렇지만 숨을 멈추고 며칠을 살았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숨을 멈추고 몇시간을 지냈다, 듣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숨을 멈추고 얼마나 버틸수있습니까? 2분, 3분 그 이상은 쉽지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이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아래 있고 한순간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는 살수없다는 증거입니다

숨을 쉰다는 것! 이것을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들어마시는 것을 흡기, 배출하는 것을 호기, 해서 호흡이 됩니다. 호흡은 숨을 쉬는운동입니다. 숨을 쉬면서 공기중의 산소를 받아들이고 체내에 있는 탄산가스를 밖으로 보내는 반복된 운동으로 사람은 1분동안 평균250ml 한시간에 15 l 의 산소를 섭취하는것입니다. 하루의 양으로 계산하면 무려 360 l 인 두가마를 섭취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쉴세없이 하고있는 호흡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물에 빠져서 인공호흡이 필요한사람이나 심장병으로인하여 호흡기를 달고살아야 할사람이나 죽을병에 걸려 호흡이 곤란한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시합니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하고, 계속되지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쉴세없이 하고있는 호흡인데도 항상 무관심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없어도 괜찮은것들에 대해서는 애착을 갖으면서도 그러나 정작 꼭 필요한것들에 대해서는 둔해 있는 모습입니다.

호흡이 매우중요한데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호흡은 내가 하는 것이 호흡을 주셨다는 개념이 없기때문입니다 자연현상이다

생물이라면 당연한 것 아니냐 사실 그 당연한 것이 정말 그렇지 않을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둘째는 그러다가보니 호흡을 주셔서 생명을 연장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 다 아울러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호흡하며 살수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150:6절을 보면 생기는 곧 호흡이고 호흡은 생명을 의미하며 “호흡있는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대화하면서 생명 주시고 호흡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라고 말할때는 전인류를 말하는것이고

죄아래 있다는 말은 많은 죄들을 말하고 있지않고 “죄”라는 단수명사를 사용함으로서 죄들이 아니고 “죄”라는 “죄의 권세자인 사단”을 말하고 있는겁니다

그런점에서 온인류는 죄의 권세자인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는 뜻이됩니다.

그렇다면 원래 인간은 에덴에 있을 때 누구아래있었습니까? “하나님아래”에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아래있을때에는 죽음과 슬픔과 고통과 어두움과 부끄러움등등을 모르는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권세자인 사단의 유혹에 그만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일에 순종하지 못해서 사단의 아래인 “죄 아래”에 있게 된것입니다.

사실 “죄아래” 있음을 모르면 “은혜아래” 있음을 모릅니다.

“은혜아래”에 있음을 모르면 “심판아래” 있게될일에 대해서도 모르는것입니다.

온 인류는 “죄아래” 있으며 그래서 “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셈입니다.

그런점에서 우리도 전에는 “죄아래”있었으나 이제는 “은혜아래” 있는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는 “죄아래” 있던지 “은혜아래” 있던지 합니다.

“죄아래” 있는자는 누구든지 “죄인”이고 “은혜아래” 있는자는 “의인”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기쁜소식이 되며 누구도 복음이 필요치 않은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것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대표자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아래있으면서부터 온인류가 죄아래 있게됨으로서 10절 이하-12절의 상태에 있게된겁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시면서 하시는 말씀으로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매우중요합니다 다시말해 복음이 필요치 않는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 생각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한때 베스트 셀러로 인기가 높은 이만재씨가 쓴 “교회가기싫은 77가지이유”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9번째질문을 보면 “종교 없어도 불편함 못느낀다” 라는 타이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 그렇게 종교인들은 전도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종교가 없어도 전혀사는데 불편함이 없다. 그냥 날 좀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보면서 교인들중에도 상당수가 이러한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체면이나 이웃, 형제나 부모 때문에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빠져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복음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지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구원받음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겠는가 하는겁니다

사실 내가 “죄아래 있다”라는 생각이 없으면 다시말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못하면 종교는 그다지 필요없는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죄인이기에 구원도 필요하고 구원자도 필요하며 구원하겠다는 말씀도 내게 기쁜소식이 되는것입니다.

마치 머리가빠진사람이어야 머리털나는 약이 절실하듯이

불치병이 걸려야 치료제가 꼭 필요한 환자들처럼 .....

“내가 죽겠구나” 라는 절박함이 있어야 약도 필요한것입니다.

내가 병든자가 아닌데, 치료제가 아무리 좋은들 내게 좋은 소식일수없는것입니다.

내가 죄인이 아닌데 내게 죄사함을 준다는 소식은 그리 좋은 소식이 될 수없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분 나쁜소식일수 있는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죄인으로 몰고있기떄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그중 의인이라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것입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라야 의원이 쓸데있다고”

내가 병든자라는 인식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예수의 부름에 응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다는데 그 문제가 심각한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이 지배적인 부류는 바로 20대의 청년들의 경우가 심하고 계층으로는 지식층과 부유층이 대부분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그리 심각했던문제들이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에게 정말 그 어떤것보다 소중한 생명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죽음과 직결된 상황이 닥치면 이렇게 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다것입니다.

단적으로 “죄아래” 있는자들의 “절대자에 대한 상실한 마음”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처한 처지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 아래” “심판아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자들의 생각이라는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내세의 심판에 대해,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는 죄에 대한 해결점을 생각했더라면 돈이나 명예나 건강보다는 비로소 복음에 관심이 가고 죄사함에 관해 자연스럽게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을 교회는 복을 주는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는경우가 더 많다는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보니 영혼에 대한 구원이 중심이 아니고 복에 대한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의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선을 행함으로 복을받겠다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어쩌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깨닫는 지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각이 죄를 짓도록 하고 있다는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는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모든 죄악들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보고 들으면서 살고 있는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죄는 끊임없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좋은말로도 죄를 짓고, 웃는 얼굴로도 죄를 짓습니다.

같이 잠을 자면서도 죄를 짓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만나서 사랑을 하면서도 죄를 짓고, 미워하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인간입니다.

우리는 동물에게 너는 죄를 저지른 나쁜동물이야 하지않습니다.

죄라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는 그 죄를 사함받고 영혼의 구원을 얻는데 큰뜻이 있는것입니다.

누군가가 “내게 종교는 필요없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처럼 살겠다”라는 말과 같은것임을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이처럼 죄아래있는 인생은 진정 가치있는 것들을 외면한체 자기편의주의에 살면서 다가올 죽음과 다가올 심판만을 두려워한체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선행만으로 안주하려고 하기도하고 자신을 위장하기도한다는겁니다 그럴지라도 죄아래있는 인생이요 복음을 들어야 할 인생임을 피할길이 없다는겁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살피다 보면 내가 이러한 사람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극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보다 더 많은 죄와 더불어 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체의 부분들 모두가, 죄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떨쳐버릴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우리에게는 죄아래있다는 인식이 불가피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아래에서 해방받는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는 죄아래있던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이 시간 다시 묻고 계십니다.

“너는 하나님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느냐?”

“너는 왜 이처럼 열심히 살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지 아느냐고? 묻고 있으십니다.

늘 파멸과 고생의 길로만 달려가고 있는우리! 평안을 잃고 기쁨을 잃고 사는 우리!

아십니까? 물질로는 채워질수 없는 공허함과 소외감을 아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이 질문에 답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바쁘게 살다가 어느날 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가 싶어지는 인생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호흡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 이제 우리를 돌아봅시다.

인생은 두 번이 없습니다. 다시라는 기회가 주어지지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나를 위하여 구속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의인된자리에서 늘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