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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짓 영의 현재 주소(피터 와그너, 조엘 오스틴)

스네어 2010. 1. 9. 10:54

거짓 영의 현재 주소(피터 와그너, 조엘 오스틴)

 
 
                                                                                                                                                                 스데반 황 


피터 와그너

 

피터 와그너 (Peter Wagner)는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이다. 그의 신사도 운동이 한국에 상륙하여 큰 붐을 일으키고 있다. 신사도 운동은 최근에 시작된 것으로서 1997년 피터 와그너의 중보 기도 사역과 함께 한다.

 

1980년 경부터 피터 와그너는 기독교계에서 유명인사였다. 특히 교회 성장에 관한 책들과 성령의 제 3의 바람 같은 책들은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초교파적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미국 풀러 신학교의 실천 신학 교수로서 설교를 가르치는 교수였으니 아무도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견제하지 않았다.


와그너에 따르면 20세기에 기독교 내에 세 가지 성령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다고 한다. 제1의 물결은 1900년 초엽에 일어났던
오순절 운동이고, 제2의 물결은 1960년대에 개신교 여러 교파로부터 일어나서 천주교까지 영향을 끼친 은사운동이다. 이 운동은 교단을 초월한 성령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급성장했다. 개신교 내부만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교회 내에서도 은사 운동이 크게 일어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이곳 저곳에서 은사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제 3의 물결은 존 윔버에 의해 발생한 빈야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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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와그너는 1997년, 오순절 은사운동 및 빈야드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들에게 세계적인 연합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그 연합을 신사도적 개혁운동 (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으로 칭하고 새로운 교회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신사도 운동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입신, 영의 세계를 다녀 오는 강신술 등의 초자연적인 것과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은사를 강조한다.

 

지금 신사도 운동 및 성령 치유 운동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기 위한 사탄의 기만이다. 특히 강신술은 전형적인 이교의 특징이다. 하나님께서는 강신술에 대하여 철저하게 금하셨다. 신접한 자, 무당, 마술사와 같은 강신술자들을 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현대는 이러한 무당들을 심령 과학자라는 고상한 신분으로 바꾸고 또한 신령한 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능력이 나타나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로 믿고 있다. 이 뒤에는 철저한 사탄의 역사가 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31)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 20:6)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 20:27)

 

(신명기 18:9-14)

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가장 무서운 것은 사탄은 자신을 성령으로 속이고 있다. 그래서 사탄의 전공인 강신술을 성령은사,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용어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불러대면 그들이 원하는 어떤
신비 체험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은 복음을 위해서 오셨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또한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셔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영광 받으시는 길은 성도의 거룩한 삶과 사랑의 삶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성령은 언제나 십자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십자가의 죄사함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의 깊은 의미를 알려 주신다. 주의 부활로 인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그들 대신에 매일의 일상의 삶에서 사시도록 하신다. 따라서 주의 백성은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자들은 신비 체험을 하여도 여전히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 몸이 뒤집어지고 헛소리가 나오고 눈이 뒤집히는 체험을 하면서 십자가의 도가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은 체험 후에는 언제나 자신이 체험이 가장 중요하게 그 사람에게 남아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절대 기준이 된다. 이제는 그에게 절대 기준은 성경도 아니요 성령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체험이 절대 기준이 된다. 즉, 자신의 체험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이러한 약점과 죄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탄의 역사는 반드시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교리에서 떠나게 만든다. 나아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게 된다. 바로 신사도 운동이다.  그러나 새로운 계시는 다른 복음, 곧 거짓 복음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거짓 복음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받은 계시로 절대 기준을 삼을 수 있으니 뭐든 "하나님의 뜻"이라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절대화하게 된다.

 

필자는 신비체험을 하는 사람의 모습과 현상을 본다. 그리고 그 현상이 예수님의 모습인가 라고 질문한다.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이 지금 대신 사시는 모습인가 라고 묻는다. 거룩과 사랑의 삶과 어떤 관계인가를 본다. 예수님께서 저렇게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가 질문한다. 지극히 비정상적인 모습들이 성령의 역사인가 마귀의 역사인가 질문한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가를 묻는다. 성경 66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의 성경 해석이 성경적인가, 성령의 해석인가를 묻는다. 성령의 해석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높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1-2)

 

 


조엘 오스틴


이러한 신비주의의 은사 은동이 세계를 향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또 다른 붐을 일으키는 기독교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믿음 신학(Theology of Faith) 또는 (Word of Faith)믿음의 말 운동이다. 이 운동은 노만 빈센트 및 그에게 수학한 로버트 슐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믿는 대로 된다)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이 성령운동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고 있다. 특히 조용기 목사 같은 경우, 전형적인 성령 운동 및 믿음 신학의 핵심 멤버이다. 믿음 신학은 일종의 쇠뇌이다. 긍적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마저도 이 원칙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말의 힘이다. 언어의 힘이다. 발설된 말의 힘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하느냐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통 신학과 믿음 신학은 같은 노선에 서게 된다. 특히 밖으로 나오는 말의 힘은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쇠뇌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적극적인 말, 좋은 말, 형통의 말을 한다. 인간적 차원에서 볼때 나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기 때문이다.

 

조엘 오스틴의 가르침은 일종의 최면이다. 적극적인 생각과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쇠뇌된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명상과 자기 최면에 빠지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된다.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며 "뭐가 잘못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얻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주지할 수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허다하며 뉴에지 운동도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란 점이 기독교와 다르다.

 

이들 믿음 신학에 속한 자들의 책들을 보면 제목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네 안에 잠재 되어 있는 거인을 잠 깨워라 "우리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예언이다" 믿는 대로 된다 긍적적인 말의 힘 형통의 원리와 말의 원리 우리 속에 잠자는 거대한 거인을 깨우라.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가르침은 자기최면과 긍정적인 명상일 뿐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나아가 범신론적인 뉴에이지와 연결되는 첫 단계이다. 그 이유는 긍정의 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쇠뇌이며 나아가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발생하는 힘과 능력이라고 하니, 뉴 에이지가 추구하는 사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기독교신앙은 언제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있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십자가를 피하여 만나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신 길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길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는 길로서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깊은 비밀들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이 땅의 고난의 문제를 그 누구도 풀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신비는 이 땅에서 죄의 저주로 인한 고난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비한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거룩하여지며 고난을 통과한 이후의 영원한 영광을 바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7-18).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5-6).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 잠재된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면 죄 가운데 영원히 멸망 받는다는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그래야 영벌을 받지 않는다. 그래야 멸망하지 않는다. 믿음 신학을 믿으며 이 땅에서 잠깐 형통을 누린다고 착각하며 복의 하나님, 마치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하나님, 나아가 온 종일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어떤 영에 속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부터 시작하여 날마다 자신과 싸우며 죄에 죽는 과정이 이 땅의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치열한 싸움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형통할 것이라는 말을 입으로 반복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상관인가? 이러한 긍정의 힘 신학, 믿음 신학, 형통 주의 신학은 기복주의를 부르짖는 샤머니즘적 주문을 외우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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