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4
애통하는자의 행복(마5:4절)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분이십니다. 그러나 애통할때에는 더욱 좋으신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환란을당했을 때만이 알 수 있는 은혜요 비밀인것입니다.
아랍격언에도 “좋은땅도 햇빛만 비치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사안일때는 피상적으로 살아가기 쉬우나 큰 슬품을 당할떄는 깊은 영혼의 호소를 듣게 되는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에는 애통하는자는 복이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것임이라고 되어있고
누가복음에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것임이요라고 되어있습니다.
애통이라는 말은 “펜데오”로서 극도의 슬픔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나 자식 형제들이 죽을떄의 표현입니다.
이런 극한 슬픔이 오히려 인간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슬픔은 하나님을 찾게하고 거기서 위로를 받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애통하는 문제에 직면한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동정합니다. 인간적으로보면 애통은 행복이 될 수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여러분들은 인생중에 고난이나 고통을 겪지마시고 순탄한 삶을 사십시오” 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복이 될 수도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않았습니다.
메디슨이라는 분의 시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온 시절이 다 여름뿐이라면 눈같이 희게 씻어준다는 말씀을 나 어찌알수있으리요
모든날이 봄처럼 화사하다면 슬픈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그말씀을 나 어찌 알수 있으리요
고통이 내게 없었다면 사랑하는자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주님의약속을 나 어찌 내마음속에 간직할수 있으리요, 무덤이 내 앞에 없다면 영생은 꿈이 아니라고 나 어찌 믿음을 가질수있으리요
나는 믿노라 겨울과 눈물과 괴로움 저 무덤까지도 그 모두가 주님의 축복임을....
애통하는자에게 위로할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다 개인주의요 자기 유익에 빠진 이 세상에서 누가 남을 생각하고 위로한다는 말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애통하는 부모에게 자식도 찾아오지않고 애통하는 자식을 위로하는 부모마저 사라져가는 삭막한 세상가운데 있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지못하고 아내의 마음을 알아주지못하는 삭막한 마음가운데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은 연약한 갈대입니다. 험악한 인생행로에 마음과 육체가 상처가 나고 꺽어집니다.
성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저마다 위로받기를 원하나 위로하여줄이가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날만한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떄에 부르라고”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8-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난 좋으신분입니다. 애통할때는 괴로울때는 더욱좋은분이십니다.
복음송에도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에 주님바라보아라”합니다.
시46:1절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말씀합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오직 하나님되시는 예수그리스도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보면 애통할 때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난당하고 문제당하고 괴로울 때 함께 울어주며 위로하시는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잘못 살고있지는 않습니까
말로만 예수를 믿고 있지 실제적으로는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려고 하지는 않느냐는것입니다.
“주여! 불러놓고 이세상의 복만을 구하고 있고 주여! 불러놓고 세상사람들보다 더 낫게 해달라고 하지는않습니까?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자기가 나의 주인이되어있지는 않는가하는것입니다.
이제 우리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그리스도를 인하여 만족을 얻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행복을 얻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위로를 얻어야 하겠습니
두 번째는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는것입니다.
가난한자들의 고난을 마음 아파하면서 나아갈 때 우리는 더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자들을 향해서 내 마음문을 열 때 오히려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지금 시대는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모르는 시대이며 어려움에 처해있어도 누구하나 관심가져주지않는 악한세대인것입니다. 우리심령이 너무나 각박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위로해주어야할자를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위로해주면서 곧 내자신이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성프랜시스의 평화를 위한 기도문을 보면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위로를 받기보다는 위로를 하고, 이해를 받기보다는 남을 이해하며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이해를 받으려고만 했지 남을 이해하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사랑을 받고 위로를 받으려고만 했지 남을 사랑하고 위로하지는 못했습니다.
위로는 흘러가야합니다. 사랑은 흘려가야 합니다.
만약 위로나 사랑을 받기만하면 가슴에서 썩어져버리는것입니다. 곪아 터지는것입니다.
우리의 모든위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게 주어지고 있다면 이웃에게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4절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적으로 일치해갈 때 참위로가 됩니다.
죄떄문에 애통하고 슬퍼할 때,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는것입니다.
내죄가 하나님의 심정을 얼마나 아프게 했고,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얼마나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지 깨닫고 슬퍼할 때 애통하며 아파할 때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것입니다.
애통의 절정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어찌하여 나를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서의 절규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의 고통을 대변하시는 말씀이요 가장 고통스러운 절규였던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의 인생이요 절규의 인생이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고통의 일생이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해야할 그 자리에 예수그리스도를 세우셨고 우리가 써야할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쒸우셨고 우리의 손과발에 관통해야할 쇠못이 예수님의 손과발을 찔렀고 우리의 가슴을 향해 꽂혀야할창이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을 찔렀던 고통의 종말이셨습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앞에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면서 위로를 받는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위로를 소망하며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는것입니다.
곤고나 핍박을 당하나 담대해게 되는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믿음이우리에게 있기에 믿음으로 위로를 받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위로는 천국에서 얻는것입니다. 우리인생이 끝나는날 눈물을 씻기시며 애통하는것이나 고통하는것이나 슬퍼하는 것이 없다는 말씀으로 매일 위로가되는것입니다. 애통하는자는 복이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것이라는 확신으로 예수님을 만나 위로를 받고 애통하는자와 함께 애통함으로서 위로맏는 기도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