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51:1-16절

스네어 2009. 6. 5. 15:21

너희를 위로할자 (사51:1-16절)

49장은 종의 탄생과 고난 영광을 통하여 선민의 회복과 위로를 약속하시면서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고통받고 낙심하여 있는 시온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셨다면 50장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포로가 되어진원인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순종에 있었음을 밝히면서 순종하는자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음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51장은 두부분으로 나뉘면서 52장과 연결되고 있는데

51:1-16절까지와 51:17절 - 52:12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특히 51:1-6절은 다시 세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1-8절과 9-11절 그리고 12-16절입니다. 이것은 문학적 장르상 A - B - A'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1-8절이 죄악된 세상에서 나와 회개할 때 남은자들의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이라면

12-16절또한 의로운 남은자들을 향한 거듭된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상기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들어있는 9-11절은 각성을 촉구하는 선지자의 간구라고 할수있는것입니다.

 

이러한 내용 분해를 통해서 볼때에

49,50장이 너희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짧은 무능력이 아니고 너희들을 팔아넘긴 부모들처럼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너희의 불순종이요 믿지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지만 그래도 어떠한 경우라도 결단코 외면하지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51-52장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인 회개와 의로움에 대한 정결을 요구하고 있는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의 중심내용을 볼때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해보라는겁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들을 부르고 복주어 창성케 하였던것처럼 그의 후손인 너희 이스라엘에게 복을 줄 것인데, 그 조건은 아브라함처럼 “주의 말씀을 청종하고 공의를 행할때”라는 단서가 붙은겁니다.

특히 7-8절에서는 “의를 아는자들아, 마음에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듣고”라는 의미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고 불의를 미워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자들은 세상의 훼방이나 사람들의 비방등 세상어떤 것을 두려워하거나

옷과같이 헤어지며 벌레에게 먹힐것같은 멸망할사람들을 두려워하지말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다른사람들은 다 멸망당해도 결단코 멸망치 않을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영영하고 구원이 영원하기때문이라는겁니다.

 

1-7절을 볼 때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있는 단어들이 4개가 나오는데

1절에서 의를 좆는자, 여호와를 찾아구하는자,

7절에서 의를 아는자, 마음에 하나님율법이 있는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이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되 독생자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자의 입장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자로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생활이 있는자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갈5:16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성령의 소욕을 쫒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의를 좆고저하는 마음이 어떤것인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1:1-3절말씀에서도 “악인의 꾀를 좆지아니하고 죄인에 길에 서지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쫒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는자의 심령에 어찌 걱정, 근심, 염려가 있겠는가 하는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자들은 그 마음에 율법이 있기에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나를 의를 듣고 구원을 바라보며 사람의훼방이나 비방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는겁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떄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합니까? 사람들의 눈치를 두려워합니까? 세상사람들이 자신의 비리나 잘못된행실을 눈치챌까봐 몸을 사리지만 하나님앞에서는 얼마나 태연자약한지 모릅니다. 잘못을 했어도 양심의 가책이 하나도 없는때가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보자고요 ...

세상에서 교회를 바라볼때에 신용하지않습니다.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오히려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헤대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사람이 짓는 죄에 한수 더 떠서 죄를 짓는 사람들도 교회안에 많이 있잖아요? 죄를 이기라고 구원하셨는데 죄에 지며삽니다.

교인들의 일주일동안 삶은 세상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신앙고백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는것 때문에 괴로워해야하고 아파해야합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에덴같게 하시고, 쓸쓸하고 황량한 사막을 동산같게 하셔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늘 기쁨의 노래소리가 나게하실분이 누구입니까? 세상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것같은데 이해타산 따져보고 제 이익이 있거나 소망이 있을 때 잘대해주는것입니다. 사랑하는척하는거요, 싫은내색한번만 하면 토라져버리는 것이 인간아닙니까?

우리하나님은 어찌 그러십니까? 그래서 4절에서 내백성이여 주의하라고 하지않습니까?

내게 귀를 귀우리라는겁니다. 내 팔을 의지하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는것입니다.

 

하나님께 위로받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사람들과 좀 멀어지면 어떻고 좀 외로우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의롤 쫒는 여러분의 행실을 인정하기는커녕 비웃고 조롱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위로받음이 뭔지, 하나님을 의지함이 뭔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해보세요 이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주실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난사람도, 아무리재산이 많은 사람도 의복이 해어지듯이

날만새면 죽어가는 하루살이처럼 죽어가고 떠나가지만 우리하나님만은 영영하신줄 믿으시고 그 변치않으신 미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을 마음에 새기며 말씀하시는 말씀붙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를 쫒아행하는자, 의를 아는자, 마음에 내율법이 있는자 결단코 망하게 내버려두지 아니하실줄 믿습니다.

 

두 번쪠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시라고 간구하는 선지자의 노래가 있습니다.

9-11절인데 9절에 보면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입니까? 팔이있으시게!! 이것은 신인동형법이라는 문학적인 형태로서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이스라엘문학의 톡특성입니다. 여기서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깨소서”라는 단어를 더욱 풍성하게 강하게 연출하기위해서 팔을 가져다 쓴겁니다.

팔이 있어야 깰것아닙니까? 여기서 깨소서는 히브리어로 “우르”로서 “사용하소서”, “발휘하소서”입니다. 그러니까 다시한번 구원의 능력을 베푸소서라는 아주 간절한 소망이 담긴 간구올시다. 옛날 엣시대에 깨신것같이 해 달라는것입니다.

 

그러고서 예를 들었는데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깊은곳에 길을 내어 구속얻은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첫 번쨰 예가 되고있는 라합은 기생라합을 의미하는말이 아니라 교만, 교만한자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30:7절에서도 사용했던것처럼 그 시대의 교만한자 바로 애굽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그 거대한 나라 애굽을 멸망케 하실분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예는 홍해를 가르신 역사를 빗대어 말씀하고 있는데

그 애굽은 수장시키시고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던 그 능력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렇듯 과거를 들추고 있는 것은 바벨론의 포로생활가운데 있어 70년생활동안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에대하여 회의적이며 믿지못하고 소망하지못하는 안타까운현실을 풍자해서 과거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을 다시 의지하면서 나아가자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괴로움이 오래가면 사실 소망하는것마저 잃어버리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낙망하는때가 있기마련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자들에게 끝까지 견딜수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데 절망중에 하나님의 손길을 놓치않도록 하시는 것을 봅니다.

지금 대합실이나 지하도에 노숙자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중에 하나는 절망이며 체념, 포기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번, 두 번은 그런대로 견디어 보겠는데 연이어 닥치는 괴로움은 견디지를 못하는것입니다 소망이 보이지않고 끝이 없는터널같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해버린 상태의 암흑은 아무것도 할수없다는 포기그 자체인겁니다.

그러나 믿는사람은 다릅니다. 소망을 누가주신겁니까? 신실하신 하나님!

욥이 고난가운데서 죽고싶은 심정이었지만 내어머니가 낳으신날 내가 죽었더면 나의 난날이 없었더면 이라고 노래하던 욥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며 견딜수있었던 것이 바로 여호와께 구속입은자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붙들어주실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떄문입니다. 영영한 기쁨,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자에게 결단코 슬픔과 탄식은 달아날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12절 이후에 다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고 이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강조되고 있는것입니다.

12절 보세요 너희를 위로할자 누구십니까? “나여늘, 나여늘,”

13절에서는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자 여호와를 잊지마라”

14절에 “결박된 포로에서 속히놓일 것이다. 죽지도 아니할 것이다.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 양식이 핍절되지도 않을것이다.”

얼마나 멋진 약속들입니까? 그 약속을 주신분이 바로 여호와하나님이시라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지않습니까? 여호와는 너희 구원주라는 뜻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세상에 교인들의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18-20절을 읽습니다. “네가 낳은 아들중에서 너를 인도할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아들중에서 그 손으로 너를 이끌자도 없도다 이 두가지일이 네게 당하였으니 누가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명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거리모퉁이에 누웠다고 묘사하고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주님을 만나는 영광이나 감격을 맛보지 못하고 주일마다 시간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교인들의 어둡고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왜 그렇습니까?

찬송을 부르는 얼굴이 밝지못하고 기쁨이 없는 것은 왜입니까?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못하고 기도하면서도 응답의 확신없이 기도하는 것

말씀을 읽어도 깨닫는 기쁨이나 순종하는 기쁨이 없이 바라보는 것은 왜입니까?

영적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생활이 안되면 거룩함도 알지못하고 죄를 이기는 자유도 없고 맏음으로 사는 재미도 없습니다. 자기를 이기고 정욕을 이기는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은 죄를 버리고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 뿐입니다. 다른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사실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아갈 때,

한 마디로 세상에서 죄를 이기는 영적생활이 시작될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앞에 살아갈 때, 그때 여러분을 “너는 내백성이라” 확증해주실줄로 믿습니다. 그 엄청난고통과 시련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면서 끝까지 붙들고 의지할 때 믿는자에게 회복의 놀라운역사가 있을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을 위로하고 회복시키실 유일한 그분! 오직 만군의 여호와한분이신줄 믿고 그분앞에 서서 세상에 하루살이같은 어떤방해의세력이나 훼방하는무리들의 조롱과 비방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진정한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생활의 재미가 느껴지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