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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서평

스네어 2008. 3. 25. 11:47
[서평] ‘방언’에 대한 성서애호가의 아마추어적 해석 (상)
들어가는 말

작년 김우현 감독의 <하늘의 언어>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 한국 교회 여기저기서 방언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이 때 이러한 움직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 나왔다.

제목에서도 김우현 감독의 책과 연관된 주제의 책임이 드러난다. 바로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이다.

그 동안 이 질문에 대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저자 옥성호 씨는 칼로 무를 자르듯이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본서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한국 방언 연구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서적이나 신앙 서적을 막론하고 한국인이 쓴 책 중에서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방언론을 전개한, 거의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워필드(B. B. Warfield)나 개핀(Richard Gaffin, Jr.), 혹은 월부워드(John F. Walvoord)의 책들이 번역되기는 했지만 어떤 한국 학자도 이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한국 학자들의 견해는 이들의 이론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성령의 은사는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 중심으로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은사 소극 인정론’이 주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에서는 방언의 은사가 교파를 초월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까닭에 이것이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서는 오늘날 성경에 있는 방언의 은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이 아니므로 근절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지성인으로서 방언에 대한 전문 서적과 신앙서적 또 방언과 연관된 관련 주석을 섭렵해서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어조로 글을 써나가고 있다. 여기서 저자의 주장과 어조는 매우 강하다. 논지가 “현대의 방언은 성서의 방언이 아니다”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저자가 주장할 때의 어조는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문을 열어놓고 있지 않다.

나는 본서를 매우 흥미 있게 읽었다. 책을 처음 잡아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한 번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 읽으면서 저자의 집념과 끈기가 대단함을 느꼈다. 책의 전체적인 어조는 자신의 논조를 차근차근 증명해 가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한국 교회를 개혁시키려는 저자의 뜨거운 마음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 책을 쓰는 것이 필생의 사명감으로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나는 이 책에 대한 비평적 평가를 하기 위해 컴퓨터 자판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본서 저자의 전반적인 논지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개 구절의 해석과 평가에 있어서도 대부분 그렇다.

성서애호가의 아마추어적 성서해석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가장 첫 번째 인상과 전반적인 평가는 저자가 여러 전문 서적을 읽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나름대로 고도의 논리를 펼치고 있지만, 성서해석에 있어서는 결국 아마추어(amateur)라는 것이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극명하다. 아마추어는 흥미롭게는 접근하지만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비판이 나올 것을 의식해서인지 본서의 추천인은 본서의 저자가 그 누구보다도(학자들까지 포함해서) 방언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추천인의 이 말은 이런 논리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스트레스에 대한 신문, 잡지와 전문 서적을 정신과 의사를 포함해 누구보다도 더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스트레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 스트레스라는 주제의 연구 애호가다.” 전문가는 그 주제를 많이 읽은 사람이기에 앞서 그 주제를 연구할 수 있는 병리학, 해부학, 정신과학을 학문적 과정에 따라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정신과 의사로서 스트레스에 대한 책을 어떤 시점에서 설혹 아마추어보다도 적게 읽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신과 의사다. 이 사람은 바로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의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방언에 대한 본격적 논의에 앞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저자는 지금 본서에서 방언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성서를 주석, 해석함으로써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방언 체험에 관해서 썼다면 그것은 어떤 전문가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담을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체험에 대한 진술을 나름대로 진솔하게 함으로써 의미 있는 책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서 구절에 대한 주석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런 해석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의 몫이다. 이런 사람들을 성서학자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성서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 언어를 습득하고 성서 본문을 주석적, 해석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또 다른 학자들의 글을 비평적으로 읽고 그것을 논문으로 써 내는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물론 어떤 사람이 지성이 있으면 독학으로도 어느 정도는 배울 수 있지만 전문가의 책을 몇 권 읽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본서의 저자는 학교에서 학위 과정으로는 이런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은 사람이다. 아마추어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아마추어적인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다. 아마추어의 특징은 어떤 주장을 할 때 반대 주장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잘 하지 못하고, 책을 읽는 범위도 자신이 선호하는 것 위주의 매우 제한적이며, 성서학의 경우는 배경 지식이 매우 허약하거나 어떤 한 주장을 마치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본서에도 이러한 모습이 거의 매장마다 나타나 있다. 저자의 표현 중 어떤 것이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한다거나, 어떤 설이 현재 학자들의 정설이라고 말한 것 중에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 저자가 이렇듯 사실적이지 못한 주장을 한 이유는 이러한 것을 자신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어떤 학자들, 특히 옛날 책에서 빌려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함

아마추어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문제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본서는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이 방언이 정의된 유일한 구절로서 이것을 통해서 보면 바울의 방언론과 누가의 방언론이 하나로 꿰어져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바울의 방언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특히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번역, 뜻, 인용, 문맥, 정황, 바울의 신학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저자는 이 모든 것을 해보지도 않고 단순한 문제로 본다. 특히 이 절은 단어 하나하나의 번역, 구문법 등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해야만 본뜻을 알 수 있는 이른바 난해구절인 것이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누구나 문법과 문맥과 정황을 분석하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문서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일 측면만 옳다. 성경은 어떤 면으로는 모두에게 쉽게 이해되는 책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주석적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의 분석이 필요하기도 하고 전문가들 간에도 해석이 다양해 질 수 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말씀과 체험의 관계도 저자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쉽게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성경을 주석해 내려가는 것은 말씀 중심으로, 체험을 하고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체험 중심적으로 하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본다. 하지만 어떤 문서의 해석에 있어 전제(일종의 경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해석학자들이 오랫동안 밝혀왔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체험의 문제도 그리 간단히 결론 내릴 문제가 아니다. 말씀과 해석자와 해석자의 체험은 서로 역동적으로 맞물려 간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말씀과 체험의 관계에 대한 단순이분법적 견해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다소 엉뚱한, 증명되지 않은 상상

아마추어의 또 다른 특징은 다소 엉뚱한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증명되지 않은 전제 하에서 논증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주장들은 성서학자라면 전제하지 않는 매우 엉뚱한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물론 소수의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저자의 아마추어리즘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무엇이 학자들의 핵심 동의 사항이고 무엇이 개인의 이상한 주장인지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1)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기 전에 고린도전서를 읽었다.(34)
2)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사도들에게만이었다.(47-49)
3)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표적이다.(67)
4) 바울이 주장한 방언은 외국어였다.(101).
5) 방언 통역이 있다는 것은 방언은 실제 언어라는 것이다.(181)
6) 하나님은 폐품을 쓰지 않는다. 방언은 이방 신전에서 쓰던 폐품이었다.(199-200)
7) 사도행전을 쓴 목적은 구속사역의 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후대의 모범을 위한 것이 아니다. (82ff.)

아마도 정상적인 신약학자 중 90% 이상은 위 주장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 논증을 자세히 해야 하나 지면 상 다음과 같이 줄인다.

1) 누가가 고린도전서를 읽고 사도행전을 썼다는 말은 전혀 증명되지 않은 상상이다. 나는 이런 상상을 처음 접한다.
2) 사도행전 내러티브를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행 1:13, 15) 계속 그곳에 있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들 중 어떤 사람도 그곳을 떠났다는 기록이 없다. 사도행전 2:1의 “그들”은 120명의 사람들이다.
3)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표적이라는 논증은 성경 구절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결론을 이끌어 낸, 그야말로 아마추어 수준의 논리 전개이다.
4) 방언이 실제 외국어였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4:2의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말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5) 오히려 실제 외국어였다면 어떤 경우에는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게 된다. 방언이 통역되려면 이것은 오히려 실제 인간이 쓰는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
6) 이 주장은 성경과 그 배경의 기본을 전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구약의 제사, 계명들이 고대 근동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것이 많은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상당한 정도로 폐품을 쓰신 것이 된다. 이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다.
7)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서의 패턴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기도의 사람이었고 모든 중요한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면, 사도행전에서도 구속사의 중요한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은 후대 신자가 예수를 따라, 제자들을 따라 살도록 신앙의 패턴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사도행전 신학에 대한 감소주의적 해석이다.

모순 혹은 과장

모순과 과장은 아마추어만 범하는 실수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전문가보다는 아마추어가 더 많이 범하는 실수이다. 저자는 은사에는 등급이 없다(130)고 말하면서도 바울의 은사 목록에는 바울의 은사에 대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126). 즉 목록의 처음에 나오는 은사가 선호하는 은사이고 나중에 나오는 은사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에는 우열이 없다는 기본 전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의 논리에 모순된 주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방언이 성서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방언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이 부분은 매우 자의적이고 과장됐다(214ff.). 저자는 “방언은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214)고 하면서 방언의 기원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하고 있다. 저자가 보다 공정하게 접근하려면 ‘이러한 심리적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제안 정도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은 지나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148ff.) 자신의 생애 혹은 근시일 내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바울이 300년 후에나 정경화 과정이 완성된 성서의 완성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그 말을 썼을까? 이것은 전문 성서학자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주장이다. (계속)

[편집자 주] 평택대 신학과 교수이자 평택대학교회 담임목사인 김동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졸업한 후 서울신대 신학대학원(목회학 석사), 하버드대 신학부(신학 석사)에서 공부했으며, 켐브리지대학에서 ‘요한복음의 교회론’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요한신학 렌즈로 본 요한복음>, <복음이냐 볶음이냐>, <예수님이 꿈꾼 교회>, <누가신학 렌즈로 본 사도행전> 등이 있다.
김동수 논설위원 / 평택대 신학과 교수(뉴스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