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장 57-75
누가 예수님을 변호하겠습니까?
마 26장 57-75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 과정은 불법적이었습니다.
특히 밤에 공회가 모이고 재판과정을 하룻밤에 다 헤치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부당한 제도적 폭력에 속한다.
유대인들의 중요한 소송법에 의하면 야간 재판은 금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재판은 한밤중에서 새벽사이에 이루어 졌습니다.
이들은 전체 공회가 아니라 공회를 지도하는 핵심 공회원들이었던 것이다.
1. 산헤드린 공의회는 공회당에서 열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야바의 집 뜰에서 열렸다.
2. 예수님은 변호인이 없었습니다.
3.두증인의 증언이 일치 하지 않음에도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막14:57-59) 그것이 예수를 기소하는 법정의 증거자료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4.신성에 대한 어떠한 모독도 법적 근거가 없이 신성 모독죄로 예수님은 판결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5.중요한 소송건일 경우 적어도 이틀 동안 에 걸쳐 재판이 진행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은 유효한 재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법인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재판에 응하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요?
예수님의 어려서의 회당에서 토론을 하시고 성경을 그들에게 가르치던 모습을 보면 누가복음 2장 41절-52까지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충분히 자신을 변호 할 수도 있고 그들을 책망할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말없이 그들의 악행 앞에 굴복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메시야의 예언과 같이 성취되어야 함을 예수님은 아시고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6.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음에도 아무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편의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헤하려 하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입에는 벽박함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예수님의 변호함이 없을때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한 군중들의 폭동을 두려워 했는지 그 재판의 끝을 내려고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을 변호할 사람이 없었을까요?
예수님의 그 침묵 속에서 예수님 대신 예수님을 위해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그 자리에는 수제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3년간의 동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너무도 잘 알던 베드로, 고기를 잡던 자신에게로 와서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던 예수님 그가 지금 큰 고초에 있는데 그를 향하여 아무런 말없이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성경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멀찌기 -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제사장의 뜰까지 들어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그는 예수님의 멀찌기서 또 자신을 철저히 위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예수님의 최후를 바라보려는 베드로의 모습을 오늘 본문은 그 결국을 보려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베드로와 같은 모습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변호해 드리기는 커녕 예수님의 결국이 어떠한가? 그것을 보려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구역장이 열심히 일하면 그의 결국이 어떠한가?
어떤 교사가 열심히 일하면 그의 결국이 어떠한가? 어떤 기도자가 열심히 기도하면 그의 결국이 어떠한가? 우리는 그의 결국만을 바라보며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 예수를 변호하고 예수를 향한 충성과 헌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당시 모인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아니 베드로 외에 다른 제자들이라도 예수님을 변호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말없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침묵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진술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최후 진술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장차 임하실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진정 우리의 메시야로 이 세상 가운데 오실 분입니다.
그분이 오실 때에 모든 백성들은 모든 나라들은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이 진술이 별다른 말이 아니였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계시록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결국을 보려고 그곳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결국을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곳에서 예수님의 결국을 보았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결국은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받는 것이 예수님의 결국이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일화가 있습니다. 네로 황제의 폭정을 피해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 나오는 도중에 예수님은 로마를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내 어린양들을 버리고 도망하므로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가노라”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위해 다시금 로마로 향하는 모습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예수님를 두 번 죽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갑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요? 인간적사랑, 부모의 사랑, 친구의 사랑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는 네가 나를 사랑하냐 이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두 눈을 보았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촉촉이 흐르는 그 눈물을 본 베드로는 그의 사명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변호해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순순히 내어주셨고 베드로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결국을 지켜보았고 그 당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결국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지금 여기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부활절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부활절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촉촉한 눈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이번 부활절을 통해 이웃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고 부활하심과 그의 사랑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원합니다. 진정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참된 뜻임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