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삼상 28

스네어 2014. 9. 16. 15:33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삼상 28:1-19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 지역에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수넴에 진쳤고, 이스라엘은 길보아산에 진쳤습니다. 그때 사울이 수넴에 진친 블레셋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려서 하나님께 어떤 메시지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말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그 여인에게 명령했습니다. 그 여인은 마치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것처럼 사무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불러 올렸느냐?"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요."

 

그 얘기를 듣고 여인이 사무엘 소리를 흉내내며 그럴듯한 설교를 했습니다.

 

"네가 여호와를 떠난 때문이다. 네가 아말렉을 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죽고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 버림받은 자의 모습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의 혼이 이 땅에 불려 올려진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한 사무엘이 말이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신접한 여인의 영적 사기입니다. 하나님은 영매술을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영매술은 성경적 진리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상황이 펼쳐진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여인이 풍문으로 들리는 여러 소문과 정황을 보고 판단하여 사무엘 흉내를 내어 그럴듯한 설교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아니면 사무엘로 변장하여 나타난 마귀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사실도 모르고 사무엘인 줄 알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의 몇 가지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1.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다(5). 사실상 사울은 수많은 전쟁을 치룬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자 그의 마음에는 믿음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되었습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마저 찾은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사로잡힌 버림받은 자 사울의 안간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2. 이중성을 보입니다

 

사무엘이 죽자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방했습니다(3). 백성들이 그러한 사울의 행위를 보고 칭찬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묻습니다(8). 마치 사창가를 단속한다고 하면서 본인은 사창가를 찾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은 버림받은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 바른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이 왜 사울에게 대답지 않는지를 생각지 않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물으러 간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결정적인 죄악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울의 판단력은 흐려졌습니다.

 

그리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사무엘의 영혼이 이 땅에 다시 나온 것인 줄 알았던 것! 이것도 하나님의 영적 원리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의 영혼이 이 땅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으면 그 영혼이 이 땅에 돌아올 수 없습니다(16). 영혼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천국으로 마음껏 옮겨 다니는 실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로 인해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사를 드릴 때 정말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나 할아버지의 죽은 영혼이 살아 와서 정말 제사상 앞에 있다면 우리도 절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명절 때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상에서 아버지의 죽은 영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혼을 가장한 귀신이 와서 우리의 절을 대신 받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금하신 것입니다.

 

*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울의 실패와 버림받는 길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교훈을 얻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절대로 후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믿음이 없으면 사울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2) 믿음이 없으면 몸 안에서 분열적 현상일 일어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게 됩니다. 그래서 이중적인 삶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3) 믿음이 없으면 바른 판단력이 생기기 않습니다.

 

크고 작은 정신적 문제는 대개 불안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불안함이 삶의 건전성과 창조성과 용기를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불안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려운 일에서 잠깐 안정을 잃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절대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불편함에 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잘 믿으면 불안함에 사로잡히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안 믿어도 편안하게 살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으면 참 평안도 없습니다.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불안이라는 병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시편 3편을 보면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해도 두려워 않겠다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찬송가 470장을 보면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라고 하는 찬송가 저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런 고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된 고백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평안의 근거가 어디에 비롯됩니까. 산 소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결말을 알기에 환난 중에서도 평안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황은 절망적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환난이 있어도 그 환난이 인내의 시험장이 됩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가져다주고, 연단은 결국 소망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소망이 확실하면 불안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조급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역의 1등 대합실과 3등 대합실을 가 보십시오. 개찰이 시작되면 1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여유 있게 천천히 걸어 나갑니다. 반면에 3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뛰고 밀치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왜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까.

 

1등 대합실 손님은 고급 인생이고 3등 대합실 손님은 하급인생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1등 대합실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 표에 지정된 좌석 번호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천천히 가도 자신의 보증되어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뛸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3등 대합실의 손님은 뛰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뛸 수밖에 없습니다. 자리에 대한 믿음의 소망이 확실하지 않으면 뛰는 조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인가를 향해 조급하게 뛰고 계십니까.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미래가 보장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뛰면서 서두르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소망이 있으면 현재의 삶이 어렵다고 정신 못차릴 정도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보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산 소망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더욱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꼭 붙들어 마음의 넉넉함과 여유를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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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의 3가지 모습 삼상 28:15-25 ·

 

다윗이 잠시 가드로 망명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전쟁에서 사울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하나님을 찾았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신을 차리고 한 시간만 잠잠히 있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주는지 모릅니다. 사울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게 됩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무엘 소리를 흉내내며 그럴듯한 설교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셨는데 왜 내게 묻는가? 네가 아말렉을 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죽고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이것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의 영적인 기만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여인이 "습득무당"이라면 그 여인은 들리는 여러 가지 소문과 정황을 보고 판단하여 사무엘 흉내를 내어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인이 "강신무당"이라면 사무엘로 변장한 마귀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했을 것입니다. 말하는 내용을 보면 진짜 사무엘의 말 같아도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 원리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엔돌의 신접한 자의 행동을 보면서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1. 신기한 얘기를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원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신기한 얘기를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는 점이나, 사무엘의 혼이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접한 여인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마지막을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면서 거짓 선지자의 모습에 대해서 묘사하고 끝을 냅니다. 그 설교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7:22)."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진짜 선지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가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인은 체험에 참으로 약합니다. 한 번 보기만 하면, 한 번 체험하기만 하면 그 출처도 확인하지 않은 채 무조건 따라가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번 체험한 초신자가 정말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신기한 체험 하나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그 영혼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번의 체험은 종합적인 판단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상 신기한 것을 말하고, 신기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따지면 세계적인 마술사 데이빗 카퍼필드를 따를 목회자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적을 본다고 무조건 믿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신기한 이야기, 신기한 현상에 너무 매혹되지 마십시오. "돌을 떡으로 만들었네!"라는 신기한 얘기만을 쫓아다녀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은 신기한 것에 대한 유혹으로 예수님까지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그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본다는 것보다 과연 그 기적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의 지식과 경험의 지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진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때로는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기도 하고 진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처럼 사무엘이 말하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마귀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무슨 말이든 못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내세워서 영혼들을 속이고 잘못된 길로 끌어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태도와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유명한 코메디언이 종교 교주가 되려고 마음을 먹고 부흥사들의 설교를 죽 비디오로 보고 몇 편의 설교를 만든 다음, 탁월한 기교와 재능으로 그 설교를 전달한다면 어느 목회자보다 더 재미있고 잘 설교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입의 설교보다 삶의 설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산상설교를 마쳤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듯한 말을 하는 것이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행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기도하면 산다는 의미의 행함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겉으로 친절한 모습을 보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대개 처음 만날 때에는 겉으로 친절한 척 합니다. 사울이 기력이 진하니 엔돌의 여자 무당이 어떻게 했습니까. "여종이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기력을 회복하소서."라고 친절하게 권했습니다. 그때 사울이 거절하지만 여자 무당은 강권하여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해 먹입니다. 이 모습만 보면 훌륭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도 이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친절한 사람의 친절한 태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친절한 것만 가지고는 여러분의 영혼을 쉽게 그에게 의탁하지 마십시오. 교인 중에서도 친절하게 대하고 신뢰를 쌓는 듯 하다가 나중에 돈 꿔달라고 하면서 도망가버리는 사기꾼이 가끔 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일이 영혼의 문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

 

사단은 눈을 부라리며 위협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단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다가선다면 누가 사단의 뒤를 따르겠습니까. 여러분! 곁으로 드러난 현상과 언변,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친절에 여러분의 영혼이 쉽게 매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항상 깨어 근신하며 주 앞에 미혹되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함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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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삼상 28: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울에게 말씀하시고,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셨지만 사울은 늘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는 제사장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85명의 제사장과 가족들을 다 죽였습니다. 블레셋이 전면적으로 공격해 오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싶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28절을 보면 나는 심히 군급하나이다. 사울이 얼마나 답답해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작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다면 좋았을덴데.

 

사울은 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위하여 하루를 천년같이 돌아오기를 그렇고 애타게 기다리셨지만 그 때를 놓쳤기 때문에 버림 받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기다릴 줄을 몰랐습니다. 회개 할 줄 몰랐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때에도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용서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비굴하게 밤에 변장을 하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0-19절에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 그는 누구입니까? 진짜 사무엘인가 아니면 가짜인가?

 

매우 난해한 성경 본문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3가지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1) 몇 몇 신학자들은 이 사건 전체를 단순히 거짓으로 꾸며낸 것으로 간주합니다.

(2) 몇 몇 신학자들은 사무엘의 영이 실제로 나타났다고 해석을 합니다.

(3) 그리고 또 다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악령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올라간다거나 내려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올라간다는 것은 하늘나라로, 하나님의 영광에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내려간다는 것은 음부, 지옥의 고통으로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올라간다는 말은 천국을 의미하고 내려간다는 말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이 지금 땅에서 올라오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은 내가 지금 지옥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나를 귀찮게 올라오라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음부로 내려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은 진짜가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온 가짜 악령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십계명에 내 앞에 다른 신을 만들지 말라. 우상숭배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죄가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점쟁이를 찾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탄이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수반하고 있다고 살후2:9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석이 가까워옵니다. 제사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조상신이 보살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예배드리십시오. 제사문제는 슬기로워야 합니다. 내가 결정할 권한을 가진 분은 어려운 핍박이 와도 제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드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나 어른을 모시고 계신 분은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절대로 죽은 조상 앞에서 절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문제로 다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리를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기도로 동참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맺음말

 

길을 가다가 목사님 하고 부르면 수십 명이 돌아본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많다는 한국의 목사도 사실은 6만 명이 안 되고, 전국에 모든 교회가 약46,000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속인 수가 6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입니다. 얼마 전 모 방송보도에서는 이들이 벌어들이는 복채가 1년에 8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추측 보도했습니다.요즘 경치 좋고 조용한 곳에는 최신식 건물들이 들어서는데, 그 건물들이 바로 굿당이라고 합니다. 그 굿당이 요즘 그렇게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전호진 박사님이 한 잡지에 "부흥하는 샤머니즘, 쇠퇴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쓰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이 멈추었고 반면에 무속신앙은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점쟁이를 찾은 사울 왕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였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대상 10:13-14절에 보면 사울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패망의 원인이 불순종, 교만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갔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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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침묵하실 때 삼상 28:

사무엘의 죽음 이후

 

이미 25장에서 사무엘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습니다. 28장 본문에 그 사건이 다시금 기록되고 있는 이유는 사무엘의 죽음에 따른 사울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의 죽음을 당하여 온 이스라엘이 애곡하며 라마에 장사 지냈습니다. 이때 사울도 일종의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온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죽음이 사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름대로 하나님과 관계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울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는 사무엘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블레셋의 군대가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가운데 그는 사무엘이 약속한 기일이 되도록 오지 않자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백성들과 함께 크고 존귀하고 좋은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상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였음을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다윗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때때로 다윗을 축복합니다.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는 줄곧 자기의 왕권을 넘본다는 이유로 다윗 죽이기에 골몰합니다.

 

이러한 사울이 사무엘의 죽음 앞에 온 이스라엘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분명히 잘한 일입니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딘지 불안합니다.

 

이러한 때에 영원한 이스라엘의 적 블레셋이 싸움을 걸어옵니다. 블레셋이 수넴에 진을 치자 사울은 길보아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블레셋의 군대에 비해 형편없습니다. 그의 눈이 블레셋의 군대에 머물게 될 때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크게 떨립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응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사울에게 반응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사울 왕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있어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뜻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우는 일이 사실상 사울 왕의 숙제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러한 사실을 놓친 채 그저 하나님의 뜻만을 알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일평생 사울에게 있어 바로 이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의 삶이 줄곧 하나님과 관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울에게 있어 하나님은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과 관계하여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관련하여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하나님과 관계하여 살아가십니까? 정말로 교회와 관계하여 살아가십니까? 하지만 상당수의 경우는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형편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행위를 인정하실 것이라는 착각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매인 사울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사울은 재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무엘의 죽음 앞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던 바로 그들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 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섬긴 것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도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가 병원을 찾고 찾다가 별로 회복이 되지 않을 때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효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곤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나름대로 종교적인 행위를 했음에도 막상 자기가 필요할 때 아무 도움을 되지를 않자 결국 점쟁이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입니다. 삶이 힘겹기로 본다면 다윗의 힘겨움은 사울의 힘겨움과 족히 비교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는 참으로 힘겨운 삶을 청소년기부터 지냅니다. 청년의 때에 다윗은 계속해서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순간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구하며 위기의 순간을 헤쳐 나갑니다. 이렇듯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다윗에게서 우리는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사울에게서는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미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래가 없는 사울은 과거에 자신에게 기름 부었던 사무엘에 매입니다. 비록 사무엘이 죽었다 할지라도 사무엘의 혼이라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사울이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은 과거에 매여 있습니까? 미래를 향하여 열려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할 때에는 과거에 매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놓치게 되면 그 모든 배후에서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만을 찾아 나섭니다. 바로 그 시간을, 바로 그 장소를 찾아갑니다. 이것이 사울이 죽은 사무엘을 찾아 나선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하는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 매이지 않습니다. 과거의 그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지금 교제하며 내일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엔돌에 한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사울은 왕의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변장을 한 채 그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사무엘로부터 경고 받은 행위일 뿐입니다. 사무엘은 앞서 살펴본 대로 1523절에서 여호와의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던 사울이 결국 점을 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침묵 속에 신접한 여인 찾아 나서기

 

사울은 엔돌에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왕의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변장을 한 것입니다. 왕의 옷을 벗은 사울은 밤에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불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여인은 사울 왕이 행했던 종교개혁을 상기시키며 사울의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사울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왕된 사울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음에도 실상 자기의 필요를 따라 언제든지 뒤집어 버립니다. 곧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사울의 종교 개혁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른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요구에 대해 두려워하자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해가 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자 이 신접한 여인은 사울의 청을 들어줍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녀의 안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울이나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그것을 믿고 있는 여인이나 참 재미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그것으로 인해 서로 신뢰합니다.

 

그래요. 바로 이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없이도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원하는 것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무 반응을 하시지 않는데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것이지요.

 

가끔 병원을 심방하다보면 성도만 아니라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분들에게도 기도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사형선고를 받은 암 병동에 가면 그런 경험이 더 많은데요. 실상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왜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꼭 복음을 함께 전하곤 합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 줄 것을 요청하자 여인은 곧 이 남자가 사울이란 것을 알고 기겁을 합니다. 여인이 땅에서 올라오는 형상에 대해 설명을 하여 주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형상을 신접한 여인만 볼 뿐 사울은 보지 못합니다. 신접한 여인을 통해 들려지는 말에 사울은 의존할 뿐입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안심시키고는 사무엘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이미 15장 이후에 계속해서 사울에게 들려졌던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또 다시 선포하였습니다.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선포됩니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함께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이 말 앞에 사울은 더 이상 어떤 호소도, 항거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사울은 사무엘의 말을 듣고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그 자리에 쓰러져 땅바닥에 넘어질 뿐이었습니다.

 

신접한 여인에게서 주어지는 최후의 만찬

 

사무엘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종일토록 음식도 먹지 못해 기력이 진하였습니다. 그의 고통이 더욱 심하여지자 신접한 여인은 자기가 생명을 걸고 왕의 말을 들었듯이 왕도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해서 온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울은 결국 여인의 말을 듣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여인이 챙겨준 음식을 먹은 사울은 그 밤에 돌아갑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이 아닌 신접한 한 여인의 말을 듣고 그녀가 챙겨주는 식물에 의지하여 돌아가는 사울의 뒷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 사울의 최후의 만찬은 신접한 여인으로부터 주어진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신학적인 해석을 하는 역대기의 기자는 역대상 1013-14절에서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고 언급을 합니다.

 

평안인가? 편안인가?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의 삶을 잠시 돌아봅시다. 우리의 삶에서 교회를 빼놓으면 무엇이 남을까요?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참으로 많은 부분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관계하여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이 과연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을까요?

 

우리들 역시 사울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한다 하면서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을 교제하기 보다 그저 하나님은 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기도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자신의 삶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에게는 분명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주어집니다. 이 평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 평안은 돈이 없어도, 질병이 있어도, 사업이 실패하였어도 빼앗길 수 없는 평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니고 있는 평안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많은 이들이 평안과 편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편안을 구합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편안하기에 그것을 평안이라고 착각합니다. 건강이 있으면 편안하기에 그것을 평안이라고 착각합니다. 사업이 잘 되고 넓은 집에 살기에 편안하면 그것을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평안은 힘겨움이 주어지면 쉽사리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니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의 모습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이후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왕의 편안함과 안락을 알았습니다. 그 권세의 편안함을 알았습니다. 그 편안함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다윗 죽이기를 나선 이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다보면 그 편안함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사울과 다윗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윗은 편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난주와 다음 주에 살펴볼 말씀에서 다윗이 잠시 편안을 추구하다가 힘겨움에 사로잡히는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만 다윗의 일생에 있어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평안을 소유하기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여 주시기를 구하였고, 주의 성신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말 것을 그토록 간구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있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평안을 경험하고 소유함으로 진정한 삶의 승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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