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벧후 1:1-11

스네어 2013. 11. 1. 10:03

베드로후서 1:1-11

 

사도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더 알고, 더욱 힘쓰라는 말씀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할 때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이 책을 쓴 베드로의 심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이 극렬하게 일어났었고, 안으로는 이단사상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베드로 사도는 먼저 쓴 편지를 통하여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참아 내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보낸 후서를 통하여 내부적으로 일어난 많은 이단사상이 침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배워서 알아야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더 배우고 더욱 힘쓰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많이 배워서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신앙성장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베드로후서 1: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로 시작하여 3절에서는"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라고 했습니다.

또 5절에서도 "지식"에 이르라고 하였고, 8절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4: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평생 동안 배워도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를 조금 더 알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알아야 하는가?를 본문의 말씀에서 찾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1)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도 더욱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와 평강을 얻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를 조금 더 깊이 알수록 은혜도 더 풍성해지고 마음의 평강도 더욱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막연하게 믿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본래 어떠한 분이시며, 예수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를 알고 믿으므로 예수께서 주신 은혜를 바로 깨닫게 되고,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더 확실히 앎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평강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조금 더 알기를 힘써야 할 이유 가운데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2)예수를 앎으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확인하게 됩니다.

본문 4절에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한 지극히 큰 역속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삼아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참고 선을 행하며 충성된 자에게 영광의 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할 수가 있고, 이 약속 때문에 세상의 정욕을 물리칠 수가 있고, 이 약속 때문에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고, 이 약속 때문에 세상의 모든 욕심을 참아 낼 수 있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정욕적이요, 썩어질 것을 피해야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은 성령의 능력으로 혹은 신적 능력으로 새 사람을 만들어서 의와 진리로 거룩해짐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온전하심 따라 우리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자비롭게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까닭에 바울은 빌립보서 3: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원래 지식이 많기로 이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투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더 확실히 알려고 하면 배워야 합니다.

예수를 배우기 위하여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땀을 투자해야 하고, 때로는 물질도 우리의 정열도 투자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5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 믿음을 자라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중생과 보배로운 약속들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힘쓰는 가운데 더욱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힘써야 할 것인가? 하면

(1)덕을 쌓기 위하여 더욱 힘을 쓰라고 했습니다.

본문 5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한 여덟가지 덕목은 신앙의 여덟 계단의 사닥다리라고도 하고, 여덟 가지의 덕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말씀에서는 우리의 기본적인 믿음에다가 덕을 쌓아 올리도록 더욱 힘을 쓰라고 했습니다.

1)믿음-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도의 신앙 생활의 첫 관문입니다.

믿음이 기초가 되지 않는 성도의 선행, 의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기초가 된 다음에는 덕이 필요합니다.

 

2)덕-하나님의 탁월하신 성품을 따라 모든 일에 선을 추구하는 용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용감한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3)지식-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판단력 또는 이해력입니다.

믿음에 덕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덕만 있다 보면 바보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자칫 덕이 교활한 악인의 이용물이 될 수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덕이 천사와 같은 신자라도 식별력이 없으면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빠져 들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통찰력의 지식이 더해질 때 덕 있는 사람은 더욱 풍부한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4)절제-하나님을 안 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바로 파악하고 자신을 매사에 통제할 수 있는 힘입니다. 즉 '절제'란 자제력, 자기 조절을 말합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제동장치와 같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 단계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많으면 교만해 지기 쉽고 자만심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를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5)인내-예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환난에 직면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견디어서 끝내는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단순한 참을성이 아니라,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역동적인 경고성을 뜻합니다.

절제하려면 무엇보다도 고통이 따릅니다.

이 고통을 참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신앙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환란이 와도 참아야 합니다.

욥의 인내, 선지자들의 인내와 같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함께 절제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농부의 인내와 같이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농부가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 또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절) 그랬습니다.

 

6)경건-새로운 시각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세상에 자신을 방임하는 일을 삼가는 일종의 헌신입니다.

경건은 바로 절제와 인내, 곧 하나님의 성품의 구체적인 행위들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하여 공경과 경외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바로 예배하며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고통을 참을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9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요, 삶 그 자체입니다.

딤후 3장에서 말세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15절) 라고 언급합니다.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체적인 절제와 인내의 삶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7)형제우애-경건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라면 형제 우애는 인간을 위한 희생과 봉사와 친절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경건은 외식이요, 위선입니다.

성도가 덕을 쌓고, 지식을 얻으며, 절제와 인내와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곧 형제 우애와 이웃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8)사랑-이 모든 덕목 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해서 보여 주신 사랑을 더한다면 성도로서의 온전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덕목은 특권을 받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의무로서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 중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딤전 6:11절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8가지 덕목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2)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를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지런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굳게 한다"는 말씀은 "스스로 밝힌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음에 서 있는가 심사해 보고, 시험해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 행실이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성장할 때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의 행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확실히 중생한 사람인가? 내 인격이 새로워지고 있는가? 내가 믿음 안에 서 있는가? 힘써서 살피라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있는 사람인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인가? 힘써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실족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더 배우고 더욱 힘쓰는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더 배우고, 그리스도를 잘 알고, 더욱 힘써서 신앙의 성장이 있게 되면 구원의 완성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배워야 할 진리는,

(1)구원의 완성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를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은 그 어디나 천국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장차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아버지 집에 가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해 놓으시고 다시 와서 데려가 주시마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부정과 부패가 없어지고 균등한 사회 보장이 되는 곳이 천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세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물거품처럼 일어났다가는 다시 사라지고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기간이 영원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영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빛과 사랑이 영원합니다.

성도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 곳에는 주님의 일에 충성한 자들에게 시들지 않고 쇠하지 않는 면류관이 씌워지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3)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본문은 밝혀 놓기를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천국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밝혀 놓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곧 하늘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 나라가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확실히 알고, 그리스도와 긴밀히 교제하다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의 신부로서 영생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이단인지, 어느 것이 정통인지를 분간할 수 없이 혼미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아서는 아니됩니다.

디모데후서 3:13절에서 말씀하기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워서 알아야 속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힘써야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도 힘써야 하고, 믿음의 덕을 쌓기 위해서도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8절에서도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절에서는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알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했습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씀은 더욱 많이 땀을 흘리라는 뜻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마 22:44)고 했습니다.

 

일년 중에서 7월과 8월은 가장 땀을 흘리는 계절입니다.

우리 주님처럼 기도에 더욱 힘쓰고 땀을 많이 흘리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또 믿음에 덕을 쌓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

신(神)의 성품에 참여하라

벧후 1 : 1 - 11

 

베드로전서는 외적으로 밀려오는 고난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베드로후서는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 즉 거짓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특징중의 하나가 윤리의식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윤리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계명을 무시하는 방종으로 떨어졌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이단들의 주장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금방 밥을 먹고 뛰어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우유를 먹고, 몸을 뒤집기도 하고,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웁니다.

영적인 법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인격과 멋을 지니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노력해야 함을 오늘 본문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과 10절에 보면 '더욱 힘써'라는 말이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우리가 교회에 몸담았다고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어떠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

 

우리는 축복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절)라고 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죄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신기한 능력'은 신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4절에서도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요, 축복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이 많고, 많은 지식을 습득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우리가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신앙의 성숙함, 성화 되어 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받은 자의 노력이 있고, 헌신이 있고, 거룩해져가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2.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삶의 원리

 

본문 5절부터 7절에 보면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8가지 덕목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3:12-13). 다른 표현으로는 '새사람을 입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엡4:24).

성도는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8가지 덕목은 신앙성장의 사다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져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믿음에 기초해야 합니다.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이 믿음을 받아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신앙의 기초요, 시작입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믿음으로 멋진 신앙생활을 유지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덕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덕'은 덕의 실행력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덕을 행하는 만큼 신앙의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덕을 실천할 수 있는 성도만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덕은 힘과 용기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힘과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하기 때문입니다(잠28:1).

셋째로, 지식입니다.

여기 '지식'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성도가 진리에 대해 무식하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성도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식별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절제입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고전10:23).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탈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받는 성도라 할지라도 절제할 능력이 없으면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돌아갈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망이나 본능적인 욕구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도 절제되어야 합니다.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 즉 자기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용사보다 낫습니다.

다섯째로, 인내입니다.

인내는 '굳게 버티는 지구력'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환난이 인내를 가져다 준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은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 인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불평하고 원망을 터뜨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성도는 참기 힘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침묵과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로, 경건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참된 경건이 나옵니다.

야고보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어떤 것이 경건인지 우리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이러한 경건의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째로, 형제우애입니다.

이것은 곧 형제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범하기 쉬운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라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아직도 내 마음을 미움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다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형제사랑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요13:34-35).

여덟째로, 사랑입니다.

여기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이제 형제사랑을 뛰어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더욱 힘써 이런 덕목을 세우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의 축복

 

본문 8절부터 11절에 보면 다양한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덕목을 가진 자는 열매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열매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앎으로 얻어지는 영적인 결실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소경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덕목을 무시하는 자들은 원시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멀리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에 것만 보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덕목을 가진 자는 내세의 영광을 바라보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실족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인격자들은 무슨 일을 만나도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것입니다.

====================================================================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

본문 벧후1:3-7

오늘 이시간은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 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과 생각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관계 되어진 것, 영생과 관계 되어진 것, 생명과 관계 되어진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그때 그때 따라서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도 타락 하였는데 삼손도 그러하였고, 사울왕도 그러하였고, 솔로몬왕도 그러하였습니다. 많이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신기한 능력이 무엇인지 본론으로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 나로 하여금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신기한 능력

본문에 말씀 하시기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고 하셨습니다. "신기한 능력" oJ qei'o" duvnami" 란 거룩한 힘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고난을 당하였고,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들을 당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안에서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①내가 변화받은 것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포악스러운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스코틀랜드에 성격이 포악하고 잔소리가 심한 아내를 둔 목사가 있었다. 어느 날 목사가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돌아온 아내가 벌컥 화를 내더니 성경을 빼앗아 불속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성경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자 목사는 슬픔에 찬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하였다. "이렇게 따뜻한 불은 처음 쬐어 보는 구려." 이 부드러운 대답이 그녀를 변화시켜 새롭고 자상한 아내가 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②원수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마5:46절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됩니다. 막9: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하신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신에 성품에 참여하는 신기한 능력

본문에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된 성질, 불의와 거짓, 악과, 교만등의 요소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이야 말로 신기한 능력입니다. 그러며 우리가 어떻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①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인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어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와 허물투성이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아무런 과정도 거치지 아니하고 주의 나라를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과 진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켜서 주를 본받는 자가 되게 하신 다음 주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약2:5절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향한 약속된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보배로운 것이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서 언약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믿는 자를 향하여 요15: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말합니다. 사람의 약속은 깨지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은 깨지지 않습니다. 속임이 없는 것이 복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피하라고 하셨는 신약을 찾아보면 고전6:18절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 하셨고, 고전10: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고 하셧습니다. 딤전6:20절에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고 하셨습니다. 딛3:9절에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기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있어야 할 자리와 피해랴 할 자리를 구분해야 합니다. 시편1:1-2절에 말씀 하시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길를 피해서 복음의 길로 바로 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인줄을 믿습니다.

3)신기한 공급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말씀 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고 하셨습니다. ejpi +corhgevw 는 골고루 분배해서 충분히 공급하는데 이 일에 솔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은 기계적으로 뜯어맞춘 로버트식의 몸이 아니라 감각이 있고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고 표현이 있고 느낌이 있는 유기적인 교회입니다. 유기적 지체에는 어느 부분에서든지 아픔을 당하면 같이 고통을 느끼고, 같이 괴로움을 느낍니다. 교회란 한 사람의 기쁨이 전체의 기뿜이 되고, 한 사람의 슬픔이 전체의 슬픔이 됩니다. 교회는 마치 사람의 신체와 같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막히면 고통을 당합니다. 공급해야 할 항목중에서 두가지만 말씀 드립니다.

①믿음에 덕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믿음의 덕을 공급하지 못하고 유익을 주지 못하면 이는 방해자가 되어집니다. 믿음의 덕을 공급하는 신앙이라야 복된 믿음이요. 하늘의 상이 큼니다. 믿음의 덕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순종이 있습니다. 충성이 있습니다. 허물을 덮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정승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을 때의 일입니다. 오래참습니다. 절재합니다. 믿음의 덕을 풍성하게 공급하는 은혜로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사랑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요일4: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복음의 완성이요. 구속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없이 죄인이 용서받을 길이 없고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는 사랑이요.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이요. 불쌍한 사람을 긍휼이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에 붙들린 사람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에 붙들려서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충성하며 믿으며 살아갑니다.

결론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계가 믿어지는 일이 신기한 일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용서받고 천국백성 되었다는 것이 신하고 놀라운 복이요. 은혜입니다. 신기한 일은 어떤 특별한 은사로 인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처럼 악한 세상에서 내가 주의 자녀된 것이 큰 축복인 줄을 믿읍시다.

 

==================================================================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본문 : 벧후 1:3-11.

베드로전서에서는 주로 대외적인 박해로 인하여 그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역경 중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를 인내로 극복하고 성결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이 베드로후서에서는 그릇된 사설로 성도들을 도덕적인 타락에 이르도록 미혹하는 이단에 대한 경계와 교훈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1.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4)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처럼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게 되는 것, 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 이상근-직역하면 "신적 교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믿고 약속을 받은 자들은 다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적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부패한 우리 인생들이 속죄함 받아 지난 죄는 사함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2. 그러면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참된 평화가 깃들이게 됩니다.

2)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3)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사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4)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5)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때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5)

1) 먼저,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5).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품성은 믿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초는 믿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신앙을 바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자임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은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먼저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믿음에 덕(德)을 더해야 합니다(5).

어떤 사람은 믿음은 좋은데 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덕은 'moral excellence(도덕적으로 뛰어남)'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볼 때, 나무랄 데가 없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덕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유교에서는 "도(道)와 덕(德)과 인(仁)을 이해하면 그 진리를 다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덕(德)은 득(得)이라 하여 몸에 얻는 것을 말하고, 스스로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덕(德)은 수양(修養)을 통하여 얻는 것이며, 인격으로 체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공자는 인(仁)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인(仁)은 '어질다', '착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한 품성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인격입니다. 엡 5:8-9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덕(德)을 지닌 분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거기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빛의 자녀인 성도가 갖추어야 할 품성인 것입니다.

 

3)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5).

오래 전에 자동차를 몰고 밤에 서울에서 울산으로 오는데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헤드라이트가 꺼지면서 앞이 캄캄하여 큰 사고가 날 뻔하였습니다. 퓨즈가 나갔던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운전만 했지, 자동차 퓨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차가 도와주어서 괜찮았습니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고생을 할 뻔했던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퓨즈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 신앙의 삶을 살려면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캄캄한 밤길도 헤드라이트가 빛을 발하면 문제 될 것이 없는 것같이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시 119:105절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은 그렇게도 귀한 빛인 것입니다. 말씀은 인생 길에 분별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4) 지식에 절제를 더해야 합니다(6).

인간에겐 기본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종족의 본능, 식욕, 성취욕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이 지나치면 그것은 헛된 욕심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문제의 이슈 가운데 하나가 사치와 향락입니다. 사치와 향락은 반드시 죄악을 유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삶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검소하게 사는 훈련과 근검 절약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복된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 절제에 인내를 더해야 합니다(6).

성 그레고리는 말하기를 "분노는 모든 악의 문이니 인내로서 분노의 문을 막으면 악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모든 덕이 마음에 생긴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한 때의 분을 참으면 백 날의 근심을 면케 되느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인내로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옛날 한나라 5대왕 무제 때 주매신이란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는 글읽기를 좋아하는 가난한 나무꾼이었습니다. 집안이 어찌나 가난한지 그의 아내는 가난을 참지 못하고 도망하여 재가했습니다. 주매신은 그의 아내를 붙잡았으나 그를 조소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주매신은 왕께 글을 올릴 기회가 있어서 글을 올렸더니 왕은 감탄하며 주매신을 불러 춘추(春秋,역사)와 초사(楚辭,논문)를 강하게 하니 놀라운 학문의 경지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벼슬을 주고 금의환향하게 하였는데 주매신이 그 고을 도지사가 되어 사두마차를 타고 관모를 쓰고 나타나자 주매신의 전 부인은 너무도 자기의 처지가 부끄럽고 비참하여 자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인내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약 1:12.에 보면,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6)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6).

'경건(godliness)'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누워도 하나님이요, 일어나도 하나님이요, 앉아도 하나님이요, 먹어도 하나님이요, 서도 하나님이요, 걸어도 하나님이요, 뛰어도 하나님이요, 넘어져도 하나님입니다. 그는 목에까지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조금만 배를 누르면 하나님이 입에서 툭 튀어나옵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를 쓰기 위해 붓을 들면 그 첫마디가 "여호와는"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요"라고 합니다. 그저 붓만 들면 여호와입니다. 이것이 '경건(敬虔)'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거룩한 행실"(벧후 3:11)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넬료는 로마 백부장으로서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 10:2). 경건한 고넬료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삶을 사는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7).

하나님은 사랑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요일 4:20)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 쫓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 가운데 형제우애와 사랑의 공급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는 놀라운 힘을 지녔습니다. 다시 말해서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사랑이란 힘을 통해서 해결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