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편은 위기 속에서 믿음을 지킨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이 시편의 기자 자신입니다. 1절에서 그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라고 말함으로써 이 시편 11편의 내용이 기자 자신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악한 자로 인하여 위기를 맞았습니다. 저자는 그 상황을 2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저자는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악한 자는 마치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같이 그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한 것처럼 이유 없이 죽이려 하고 밝은 데서 당당히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데 숨어서 그를 해하려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스스로를 "마음이 바른 자"(2절), "의인"(3, 5절), "마음이 정직한 자"(7절)로 언급함으로써 자기를 죽이려 하는 자가 옳지 못하고 정직하지 않은 악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정직하고 의로운 이를 죽이려 하고, 앞에 나타나지 않고 비열하게 숨어서 남을 해하려 하는 상황 속에서 저자는 그의 삶의 터 즉 그가 속한 사회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말이 3절에서 보는 대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에게 피할 것을 권했던 것 같습니다. 1절에서 보듯 "새 같이 산으로 도망하라"고 종용한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한 말 가운데 "너희"는 저자의 친구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 자신의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즉 마음이 약해져 어딘가에 도망가 숨어서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의 한 쪽 모습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악한 자의 위협 그 자체보다도 그 위협에 겁을 먹게 된 것이 그에게 진짜 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위기에 처하기는 했으나 거기서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위기 속에서 그의 믿음을 지켰고 바른 믿음의 해결책을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1절 첫머리에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한 것은 그가 처한 위기상황에 대한 그의 성찰의 결론이며 이 시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답이었던 것입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하나님 생각이, 아니면 잠간 흔들렸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그에게서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은 성전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한 것은 아마도 그가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성전에 나아가 기도하다가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되찾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7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했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는 것은 본래 성전에 들어가 찬양과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성전을 찾고 거기서 찬양하며 예배하는 가운데 만유를 통치하시고 인생만사를 감찰하시며 선악 간에 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에 대한 믿음을 다시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중의 인식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저자의 이중의 인식은 4절의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한 말 속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첫째로 저자가 다시 깨달은 하나님은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했듯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그가 그의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그의 성전을 찾아 나아오는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백성의 곤고함과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저자가 다시 깨달은 하나님은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했듯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하시고 살피지 못하는 일이 없으시며 선악 간에 모르는 것이 없으실 뿐 아니라 의인을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한편 악인은 미워하시고 멸하시는 심판자이심을 뜻합니다. 4절 하반절부터 7절까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성전에 계시며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이중의 인식이 시편 11편의 저자인 환난과 위기 속의 주인공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주었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게 해주었으며, 악한 자의 공격과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시편 11편의 말씀과 그 저자의 위기의 경험과 그 신앙적 극복의 체험은 언제 어디서 같은 처지에 놓일지 모르는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위로와 지혜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처럼 악한 자들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이며 바르게 살려고 하는 나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 상황에 처할 때에, 법과 정의와 상식의 터가 다 무너져서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될 때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가 산으로 도망하듯 세상적인 자구책을 취하라고 권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피하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임을 이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흉악한 일을 꾀하고 있고 어두운 데서 무도한 일을 꾸미고 있음을 모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했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가 선한 척하고 의인을 악하다 몰아세우는 세상이라고 해도 선악을 판단 못하실 하나님이 아니심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환난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을 외면하시거나 개입하셔서 해결할 능력이 없으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이 의로운 이의 생명을 노리는 세상을 좋다고 내버려두실 하나님이 결코 아니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는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했고, 6절에서는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했습니다.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한 데에서 "잔"이란 각자에게 돌려지는 "몫"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몫이란 바로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악한 자들을 그물을 던져 잡듯 잡으실 것이고, 그들에게 불과 유황을 던지시며 태우는 바람을 불게 하시듯 그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7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 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이 세상을 뒤덮는 악에도 불구하고 이에 굽히지 않고 의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상황이 어려워진다고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다른 살 길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그를 찾고 그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위기의 때에 시편 11편의 저자는 성전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했습니다. 거기서 살아계시며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확인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에게 피하고 그를 의지함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용기와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기의 때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고 그를 찾으며 그에게 피하고 그에게 의지하며 부르짖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 가운데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즈음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해되고도 남습니다. 대통령이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다 깽판 쳐도 괜찮다고 해서 그런지 어느 분야 하나 깽판 치지 않는 곳을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결코 위기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경제학 교수 수십명이 모여 경제위기를 경고하는 공동성명을 낸 일도 있고 경제부총리까지 한국경제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속에서 나라를 대표해야 할 외교부 관료가 외국여기자를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져 나라 망신을 시키는가 하면, 우리나라를 전복할 목적으로 활동하다 잡히고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간첩과 빨찌산을 민주화에 기여한 인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우기는 자들이 현 정권과 여당에 포진하고 있고, 군대는 해상에서 포격까지 해야 했던 상황을 거짓으로 상부에 보고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겨레신문까지도 그 7월 17일자 신문 첫째 사설의 제목을 "국가기틀 뒤흔드는 군 허위보고"라고 뽑은 것을 봤습니다. 정말로 국가기틀이 뒤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편의 기자가 3절에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했듯이 사회기강뿐 아니라 국가의 기틀이 다 무너져 내리는듯함을 느끼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하는 국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본문 2절에서 저자가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했듯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슨 말 좀 했다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부터 인격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설과 험담을 들어야 합니다. 반대와 비판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옛날 군사독재시절에 못지않게 말도 자유롭게 못할 무서운 세상으로 이미 변해버린 듯 합니다. 청와대나 정부여당이 밀어붙이려 하는 일에 대해 반대나 비판을 하는 것은 곧바로 "저주의 굿판"으로 몰릴 판입니다. 제1야당 당수를 불륜으로 패러디한 사진을 청와대 홈페이지가 버젓이 게재하고 있었던 일은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 아니 지금 이 나라 정치를 주무르고 있는 자들의 한심한 인격과 의식수준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최소한의 정치도의마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보고 있어야 하는 국민의 심정이 참담할 뿐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떤 전문직 계층의 사람들은 요즈음 만나기만 하면 인사말이 "이민 갈 준비 됐어?" 하고 묻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편 11편의 기자가 어둠 속에서 그의 생명을 노리는 악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자 주위에서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권했던 것처럼 나라가 심하게 흔들리고 민심이 뒤숭숭한 것입니다.
이럴 때의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답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 더 확고한 믿음 가지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시편 11편의 기자는 위기의 때에 성전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의 의인의 승리를 확신하며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더 힘썼습니다. 오늘 이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예배 때마다 교회가 차고 넘치고 기도의 소리가 높아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위기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기회입니다. 이 위기의 때에 우리 모두의 믿음이 더 연단되어 정금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이 나라의 기틀을 근본적으로 뒤엎으려는 사악한 세력이 아무리 득세한다 할지라도 이 나라의 기틀은 하나님 손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길을 열심히 걷고 그의 구원을 간구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