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2007

스네어 2010. 6. 17. 17:42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2007

추천의 글- 백금산 목사

전 장신대 학장을 역임하신 맹용길 교수님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책을 읽고 “필자는 본서를 읽고 한국 교회에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자에게 감사한다. 기성세대가 잠잠하니까 하나님께서 저자를 들어 하나님의 위치를 다시 찾으시는 소리로 들었다.”라고 서평을 해 주셨다. 그리고 “삼부작의 남은 책들을 읽을 수 있게 해 주면 감사하겠다.‘라는 기대감을 피력하셨다. 이는 제가 성호 형제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었던 수많은 독자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가장 큰 도전과 충격을 받을 부분은 최근 수 년 동안 한국 교회 성장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던 마케팅 교회의 모델인 빌 하이벨스의 ‘윌로우크릭 교회’와 릭 워렌의 ‘새들백 교회’에 대한 분석과 평가일 것이다.

이 책이 마케팅 교회에 물든 교회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 되어, 우리의 교회는 지금 성경의 진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마케팅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 일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교회 개혁은 시작되며, 이 질문을 멈추는 순간부터 교회 부패는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유행과 풍조, 대형 교회의 모습, 유명한 신학자와 목회자의 견해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우리 믿음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옥성호 형제의 책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일깨워준다.

글을 열며- 옥성호

기독교의 진리를 온 맘으로 믿으면서도 아무런 갈등 없이 마케팅을 통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너무 당연히 여기는 많은 모습이 과거에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싶다. 오늘의 익숙함 뒤에 숨은 위험들을 들추어 내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마케팅 기법들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잘못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왜 마케팅이 교회 속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 “윤리실종‘에서 오늘날의 환경을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제품 수명의 주기가 급속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졌다.’

왜 오늘날 마케팅이 교회 속에서 이처럼 득세하고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케팅이 약속하는 즉각적 효과의 유혹 때문이다. 말씀의 능력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지하기 보다 즉각적인 결과와 반응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당신의 때에 맞게 역사하심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어떻게 하든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원한다. 제가 존경하는 한 분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결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결신하는 빈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사람에게 기독교는 점점 더 가볍고 피상정인 종교가 될 뿐이다. 마케팅으로 물든 교회가 만들어 낸 한 현상이다. 마케팅은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의 즉각성을 가장 잘 충족시킨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케팅의 약속은 훨씬 더 매력적이다.

과거 루터의 시대가 말씀의 권위 대신 전통의 권위에 의지하던 시대였다면, 오늘은 말씀의 권위 대신 마케팅이 약속하는 즉각적인 결과, 심리학이 주는 자기 만족,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달콤함에 의지하는 시대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교회에 위기가 닥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부흥을 이야기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한 개혁을 외쳐야 한다.

01 마케팅 교회란 무엇인가

1.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드러커의, 마케팅의 최고목표는 고객의 필요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기업이 만드는 상품 또는 서비스가 고객의 욕구에 딱 맞아떨어져 별도의 판매가 필요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가치가 동일한 A와 B의 교환을 통해 고객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활동이다.

2. 교회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 “거룩하신 하나님”에서

‘1970년대에는 신앙고백과 신학을 강조한 복음주의의 특징이 퇴색하면서 여과되지 않은 실용주의 앞에 교회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탓에 기교가 그 중심을 차지해 버렸다. 기교를 얻기 위해 신학을 희생한 셈이다. 문화에 잘 순응하는 새로운 복음주의가 대두되면서, 경영자, 감독관, 관리자, 마케팅 전문가가 핵심인물로 각광받았고 전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학자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은 교회 성장이나 교회 성장을 위한 모든 기독교 사역이 본질적으로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성장은 교회를 훌륭하게 마케팅 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점차 팽배해지고 있는데, 조지 바나는 이런 입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조지 바나는 교회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정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급변하는 환경에 교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나, ‘교회마케팅이란 교회가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정서적,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교회의 사역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목표 고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교회가 수행하는 모든 사업 및 사역 활동을 가리킨다.’

바나, ‘복음이라는 상품을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마케팅이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마케팅이 없이는 교회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조지 바나는 다음과 같은 어록을 쏟아 놓았다.

‘목사는 우선 유능한 사업가로서 교회를 활력있게 유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많이 참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여러분이 불신자에게 전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실상 교회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마케팅 지향적인 교회는 교회의 목적과 상품(복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도 사업이다.’ ‘예수님은 마케팅 전문가다.’

데이비드 웰스는 조지 바나가 그 동안 ‘개인’의 영역에서 취급되던 ‘치료’라는 개념을 마케팅이라는 이름을 빌어 교회 차원으로 확대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이 자아 깊숙이 침투하지 못해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는 개인의 개념을 작거나 성장이 멈춘 교회에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조지 바나에게 있어서 전인격적 구원을 받지 못한 개인에 해당되는 교회는 ‘작거나 성장이 멈춘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마케팅을 거부하는 교회는 기능 장애가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개인 차원에서 심리 치료의 각종 기법을 통해 구원을 자아 깊숙이 침투시켜야 하듯 마케팅이라는 치료를 통해 교회 깊숙이 스며 있는 ‘무성장 교회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 마케팅 주창자들의 성경 왜곡

* 예수님도 친히 계획을 세우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심으로써 계획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눅 14:28-30).

* 어리석은 다섯 신부의 비유는 성공적인 마케팅을 위해서는 필요를 예견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마 25장);

* 씨 뿌리는 비유는 신앙을 마케팅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마 13장).

성경의 가르침을 마케팅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의 차원으로 읽기 시작할 때 발생하는 왜곡은 그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마케팅과 비전 그리고 리더십

마케팅의 안경을 쓰고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교회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그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교회 속에 있는 문제의 원인을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 또는 비전의 부재로 인식한다. 성경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조차도 ‘죄’라는 말을 여간해서 쓰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얼마든지 개선 가능한 비전의 결여 또는 리더십의 결여로 이해한다.

이런 시각은 당연히 예수님을 볼 때도 그가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비전과 리더십이 결여된 사람들의 반대에 서 있는 비전을 주는 지도자 또는 리더십의 대가라는 식으로 접근하기 마련이다.

조지 바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이 사람(고객)들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교회경영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마케팅 교회란 한마디로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 상품을 갖고 있는 교회’이다.

3. 교회가 마케팅 해야 할 상품은 무엇인가

- 그들이 말하는 상품이란 복음을 의미하며 그들은 잠재 고객, 달리 얘기하면 아직까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에 교회의 가장 큰 에너지를 쏟는다.

분당의 모 교회- 흡연실을 만들고, 스포츠문화 센터를 YMCA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교회내 가장 좋은 공간에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12월 USA TODAY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올해의 경우 크리스마스가 일요일과 겹치자 오늘날 크게 성장하고 있는 미국 전역의 대형 교회들은 크리스마스 하루를 쉬기로 결정했다. 윌로우 클릭 교회는 그 대신 가정에서 예배를 보는 데 필요한 DVD를 제작해서 제공하기로 하였다.’

최고로 성공한 마케팅교회

텍사스에 위치한 조엘 오스틴의 레이크우드 커뮤니티 교회다. 그는 ‘긍정의 힘’의 저자이다.

2003년 하반기에 이미 출석하는 사람이 2만5천을 넘어섬으로 출석인 수로는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또는 켈리포니아의 새들백 교회와 같은 쟁쟁한 교회들을 제치고 미국 전체에서 1위를 차지했다.

4. 왜 교회는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가

마케팅이 가장 필요 없는 복음을 가지고 마케팅을 가장 열심히 하는 비극이 지금 교회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우리가 손보지 않으면 복음이 현대인에게 더할 나위없이 흥미로운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는 사실뿐이다” - 데이비드 웰스 -

5. 마케팅 교회에 대한 평가

마케팅 교회는 기존의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시선을 교회 안에서 밖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세상을 향하는 마케팅 교회의 방향은 올바르지만 마케팅 교회가 들고 나아가는 내용은 잘못되었다. 그들은 본질을 놓고 나아갔다. 따라서 그 외침이 세상의 외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케팅 교회의 세 가지 확신

1)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게 전통에만 집착하는 교회의 모습이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다

2) 드라마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복음을 제시하지만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3) 당장의 욕구를 채워 주라. 그러면 사람들은 진리를 향해 점점 더 나아갈 것이다

- 이 세 가지 확신은 마케팅 교회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해 지극히 피상적이며 낙관적인 사고에 바탕을 한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02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1. 포스트모더니즘

- 프리모더니즘(pre-modernism) : 초월적 존재 즉,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믿던 시대. 유일한 절대 진리 신뢰.

- 모더니즘(modernism) : 계몽주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포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간의 도전. 인간의 이성, 과학에 절대적 권위 부여. 인간의 자아 연구 활발.

-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초월적 진리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믿는 시대. 상대적 진리. 관용. 공동진리

존재하지도 않는 절대적 진리 대신, 개인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진리를 믿는다.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 대신 개인이 스스로 창조해 내는 상대적 진리이다. 확실히 느껴지는 것만을 진리로 간주한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나의 ‘존재감’이다. 살아있는 내가 느끼는 존재감을 최대한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진리이고 선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질문은 무엇이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대체된다.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진리이다. 나의 진리가 당신의 진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자아에 대한 연구로 대체시켰다

데이비드 웰스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은 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관심 갖는 인간을 ‘심리학적인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이 심리적인 인간의 가장 큰 목표는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감’이며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는 자아에로의 함몰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아를 중시하는 인간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그 어떤 가르침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한 독립적인 정의를 나 스스로 내린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각자가 내린 정의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충동질하는 사회이다. “나는 나야!”라고 외치는 광고 문구가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책임을 사라지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죄가 사라진 인간이 자신을 채우고 만족시키는 데만 열중하는 존재로 바뀔 때 우리 속에 있었던 책임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서도 질 책임이 없는 인간이 나와 동일한 다른 인간에게 어떤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법칙,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사랑하지 않는 한 결코 우리 이웃을 바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는 법칙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길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의 사랑을 갈구하는 순간 교회는 무서운 위기를 맞게 된다. 교회는 프리모더니즘의 가치관을 가진 곳이다. 초월적인 존재와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공동체이다. 초월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만이 오늘날 교회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기독교 진리의 특징

유일한 것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그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을 때만이 진리이다.

(인간의 변덕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시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이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서는 길만이 이 시대를 헤쳐갈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나도 옳고 너도 옳은 시대에 넘어지지 않는 길은 말씀을 바로 배우고 바로 가르치는 길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성과 실존적인 진실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게 완전히 대문을 열어주는 것가 다름이 없다. 기독교를 이성적 탐구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머리로만 아는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머리를 포기한 기독교는 훨씬 더 위험하다.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성경의 진리밖에 없다.

2. 프래그머티즘

존 맥아더, “프래그머티즘이란 실질적인 결과에 대해 의미 또는 가치가 결정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실용적인가 아닌가를 진리 여부의 표준으로 삼는 실용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그 뿌리를 다윈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에 두고 있다. 이 사상은 내재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절대 선과 거짓 그리고 선과 약 또한 진리와 거짓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진리란 유용한 것이며 의미가 있으며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효과가 없으며 관련이 없는 것은 거짓으로 간주돼 거부된다.”

프래그머티즘이 교회에 미친 영향

알란 올프는 오늘날 진화하고 변화하는 프래그머티즘의 특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다름 아닌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가 다 복음주의자라는 생각이 퍼져 있다. 미국의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길을 가르쳐 줌으로 생존하고 번영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의 많은 부분을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대형 교회들의 인기와 또다른 형태들의 성장 지향주의 개신교 교회들이 미국 사회에 주는 위협은 기독교의 독선이 주는 편협함이 아니라 진부함이다. 텔레비전, 출판, 정치 켐페인, 교육, 자기 계발 등 이 모든 것이 미국인들이 듣고 싶은 말만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제 기독교마저 미국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관으로 추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교회. 이것이야말로 프래그머티즘의 특성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교회의 모습이다.

프래그머티즘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다

교회 속에 프레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연한다는 것은 결국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되었다.

사실 프레그머티즘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도 좀 존경을 받을 만한 가문에서 그럴듯한 지위를 가지고 태어나셨어야 한다. 그랬다면 예수님 당신 뿐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선택하는 데에 훨씬 더 용이했을 테니까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100% 주권을 믿을 때 십자가는 비로소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그 능력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가 달려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믿는 한 우리는 교회 속에 파고 들어오는 프래그머티즘과 전면전을 선포해야 한다.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구원 초청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프래그머티즘이 유발하는 가장 큰 위험은 수많은 가짜 크리스천의 양산이다. 가짜 크리스천, 다른 말로 하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은 프래그머티즘을 통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에서 구원초청의 승패가 테크닉에 달려 있음을 믿는 프래그머티즘벅인 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설교하면서 진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다른 요소에 직접 접근하는 순간 곤경을 자초하게 될 것이며, 쉽사리 그 곤경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하여 깨달아 ’앞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도자의 개성이나 일반적이며 막연한 두려움 또는 어떤 심리적 영향 때문에 앞으로 나오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간증 중심의 전도

수없이 넘쳐나는 간증 속에서 ‘왜 기독교만이 진리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은 내용을 찾기는 참으로 힘든다. 우리는 간증들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성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살리신 진짜 간증들이 담겨 있는 책은 성경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도 남을 자기의 체험을 얘기하는 대신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왜 예수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만 증거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는 바로 성경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 말씀을 떠난 간증들이 판을 치는 현실은 얼마나 우리의 교회들이 프래그머티즘에 물들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로이드 존스는 간증의 위험성에 대해 말한다.

첫째, 간증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모습을 정형화 또는 획일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둘째, 간증이 반복될수록 자신도 모르게 내용을 과장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셋째, 간증 속에는 마치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주를 위해’ 대단한 희생을 한듯이 포장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넷째, 간증이 주는 위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개인적 체험이 기독교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이다.

들릴라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머리털을 잃었던 삼손의 모습이 오늘날 세상의 사랑을 받기 위해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버리는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슬픈 모습을 우리는 미국의 월 마트나 한국의 대형 마트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교회는 프래그머티즘이 주는 악영향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바른 구원관의 확립이 필요하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상한 체험을 한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이 필요한 죄인 됨에 대한 깊은 각성 없이는 결코 복음이 내게는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과 성령의 능력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렇기에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 말씀 뿐이다. 존 맥아더의 말이다.

“예수님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은 아주 어렵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그는 좁은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좁을 길을 찾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다행입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값싼 복음이고 쉬운 믿음주의이며 라이트 기독교이고 얕고 감정적인 부흥사 스타일의 접근방식이다. 그렇지 않다. 좁을 길을 찾아내는 소수의 사람은 그 길을 찾기 위해 힘을 들여 노력하고 그 길은 오로지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길이다. 참으로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교회와 설교자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고통하는 사람의 것이다. 오늘날 사탄의 가장 큰 설득력 있는 거짓말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쉽다는 바로 그 거짓말이다. 그 길은 좁은 길이고 당신은 그 길을 혼자 걸으며 당신의 죄를 놓고 아파하고 용서를 갈망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인간의 공로로 천국 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신이 자신의 죄 앞에서 절망하는 순간 당신은 결코 당신의 혼자 힘으로 그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그 천국문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당신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야만 한다. 당신의 부서짐 속에서는 이제 그분의 능력만이 당신의 자원이 된다. 우리의 몫이란 단지 우리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은혜를 갈구하며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우리 주위에는 바른 복음이 아닌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다. 그런 교회로부터 우리는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한다. 우리의 영생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 그 안으로 피해야 한다.

존 맥아더는 말한다.

“그 누구라도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게 하는 희생을 치르셨다. 그리고 구원은 당신에게도 동일한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구원은 지식적으로 추론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구원은 성경 말씀에 드러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섬김을 통한 삶을 통해 나온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주 효과가 있었을 그리스도 철학의 설득력 있고 지혜로운 말을 의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의 능력은 오로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고전 2:1-5). 프래그머티즘의 정체를 바로 아는 것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과 직결된 일이다.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1. 찰스 피니와 부흥주의 출현

프래그머티즘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 중의 일등 공신을 꼽는다면 그 자리는 단연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이다. 1792년에 태어난 피니는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성령이 전기 충격과도 같은 강력함으로 자신의 몸을 씻어 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 바로 다음 날 변호를 의뢰하러 온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예수님만을 변호하면서 살도록 정해진 사람이요. 나는 당신을 변호할 수 없소.”

존 맥아더,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하나님의 독재적이고 변덕스런 주권적 행위로 치부하고 무시함으로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는 회심이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 믿음이란 철저히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것이고 따라서 구원은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함으로 미국의 교회 속에 프래그머티즘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든든한 신학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토대 위에 그의 뒤를 이어서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헤리 포스딕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20세기 프래그머티즘으로 대표되는 미국 기독교의 꽃을 활짝 피웠다.

존 맥아더, “ 피니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은 결코 복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피니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들에게 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 자체를 부인했다. 피니는 로마서 3,4,5장에서 분명히 가르치는 이 칭의의 교리를 ”신학적 소설“이라고 결론 내렸다. 간단히 말해 피니는 결국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을 부인한 것이다.”

피니는 어떤 소원이 있을 때 ‘최대한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새로운 기도의 법칙까지 만들어 냈다. 오늘날 널리 퍼진 왜곡된 기도의 진원지인 셈이다.- 이안 머레이, “부흥과 부흥주의”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구원 초청’도 피니가 시작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피니가 이룬 대중적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신학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주게 된다. 숫자가 이룬 그의 성공은 여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 너 똑똑하다. 그런데 똑똑한 너는 사람들을몇 명이나 모았는데?”

제리 파웰(미국 극우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목사), “피니는 나의 영웅 중의 한 명이다. 나뿐 아니라 빌리 그레이엄을 포함한 많은 복음주의자의 영웅이기도 하다.” 키스 그린과 같은 복음송가 가수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빈야드 운동, 교회 성장 운동, 정치적/사회적 켐페인, 텔레비전 부흥사들, 그리고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끝이 없다. 휘튼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던 한 인물은 “피니여, 영원하시라!”라고 말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피니야말로 오늘날 복음주의와 관련한 혼란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약해져 가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복음 캠페인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준비, 광고, 발족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피니는 다양한 이벤트 성의 행사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데 집중했다.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피니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움직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영역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에 설교를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를 집중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의 출현

현대신학은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칸트 이후 이론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신학을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립하여 제시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을 보자.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다.

“나는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그 사람이 진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결코 완전을 요구하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을 전혀 완전하지 않게 창조하셨으니까요. 물론 인간이 완전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요.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이 완전함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을 영원한 벌에 처하실 리도 없지요.”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신학의 초대로 삼은 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개개인이 느끼는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느낌은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신적 영혼에 대한 자각이다. 이 느낌은 나의 이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지성적으로 불 때 나는 철학자다. 그러나 감정으로 볼 때 나는 매우 헌신된 사람, 아니 바로 크리스천이다.”

그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이란 애초에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의 느낌을 적은 주관적인 기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개인의 체험 모음집에 불과한 성경 위에 나 자신의 체험을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놀라운 업적은 성경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무시하거나 아예 전면 부정하더라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인간 속에 체험을 통해 발견되는 내재된 진리가 있는데 굳이 외부의 성경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

슐라이어마허가 이룬 신학적 업적이란 신학의 대상을 성경 말씀에서 인간 내부로 전환한 것이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로 바꿔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그 중심에 인간을 둔 신학 아닌 신학, 즉 ‘자유주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의 도전에 응답한 신학적 방법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피해는 끔찍하다. 성경의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환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런 장실품일 뿐이다. 신앙을 삶으로 정의하는 순간 나름대로 고귀하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산 사람들은 다 천국이 보장되는 길이 열렸다.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삶 자체가 믿음이 되어 그는 구원 받는다. 입으로는 비록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그는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의 영어권 속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그가 열어놓은 이 자유 신학의 길은 성경을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실종시켰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피니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과 결합하여 말씀을 점점 더 신앙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냈다.

그 영향으로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으로 크리스천의 충분조건이 채워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교회 속에 활발한 소규모 모임은 피차간에 감동적으로 살았던 생활 이야기들로는 차고 넘치지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경의 진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결코 없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유명한 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성경 구절인 줄 알고 있다. 교리에 무지한 복음주의 교회 속에서 뭔가를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성령운동파와 오순절 계통의 가르침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3.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출현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집회를 현대적 오염으로부터 지키기 원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공들은 그의 이 결심을 약하게 만들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을 수용하는 것에서 한 걸음이 아니라 수백 걸음 나아가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서둘러 취소하는 등의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독교의 몇몇 교리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2006년 4월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도 빌리는 변함없는 자신의 다원주의적 구원관을 피력했다. 빌리의 주장이 슐라이마허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풀러신학교의 시작도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도 또 이들이 힘을 합쳐 만든 ‘크리스차너티 투데이’의 발간도 분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열정이 그 발판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넘치더라도 우리에게는 분명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성경의 진리에 대한 원칙을, 세상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그 양보는 조만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새로운 기독교, 자유주의 사상으로부터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나라는 영국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사망한 183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스펄전 목사는 그의 생애 마지막 4년간을 자유주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 전체를 휩쓴 ‘연합 운동’과의 싸움으로 힘겹게 보내야 했다. 일반적으로 the Down-Grade Controversy로 알려진 이 논쟁은 말씀의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는 스펄전 목사의 외로운 목소리와 당시 대다수 교회가 지향한 ‘교리를 넘어선 일치’의 목소리 간에 벌어진 일대 격전이었다. 교리를 수호하려는 스펄전 목사의 외로운 싸움은 ‘하나’를 외치는 거대한 목소리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복음주의자로부터 예외 없이 수십 년에 걸쳐 존경을 받았던 스펄전 목사는 어느 날 갑자기 복음주의 진영 내부의 비판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당시 복음주의 진영 전체는 하나 됨, 조화, 합동 그리고 형제애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통합으로 치달은 영국은 20세기에 들어서자 로이드 존스 목사 등을 대표로 하는 복음주의, 성경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하는 복음주의 세력은 개신교 내에서 아주 작은 세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작은 세력조차 1954년의 빌리 그레이엄의 영국 집회를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영국의 복음주의 세력들마저도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자유주의를 포함한 세력들과 힘을 합칠 때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집회를 보고 모든 교단이 힘을 합칠 때 하나님의 ‘부흥’이 도래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18세기의 휫필드와 웨슬리 시대가 빌리 그레이엄을 통해 다시 올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영국은 1966년을 기점으로 존 스토트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영국 복음주의 성공회는 공개적으로 ‘교회의 일치’ 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표방한다. 1950년대 로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교리를 넘어선 일치에 대해 가장 큰 반대 목소리를 내던 제임스 패커 목사마저도 이 일치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 오늘날 교회 역사가들은 20세기 중반에 세계를 휩쓴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는 단 두 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프랜시스 쉐퍼 박사이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는 단지 분열주의자라는 오명만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뿐이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 중 한 명은 “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영국에서 복음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는 사탄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953년 영국 집회를 시작할 때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가장 먼저 지지를 요청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였다. 실패한 빌리는 1960년대 들어 존스에게 다시 공개적인 지지를 요청한다. 이와 관련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도를 위한 켐페인 조직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믿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콜링 시스템은 더더욱 반대하고요. 한 가지 분명히 말하면 나는 빌리 그레이엄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순수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963년에 베를린이 아니라 로마에서 개최되기로 한 첫 번째 복음주의 연합회의 의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제안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자유주의자들과 가톨릭에서 받고 있는 지원을 거절하고 그들을 강대상에 세우지 않고 또 사람들을 앞으로 부르는 콜링 시스템을 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나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의장직도 당연히 맡겠습니다.’라고요. 우리는 그 문제로 약 세 시간 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전도를 위해 조직화에 힘쓰는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꿇고 자신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다. 켐페인적 접근은 내가 보기에 성령의 능력 대신 테크닉에 더 의존합니다. 나는 진정한 교제는 인간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봅니다. 나는 근본적인 진리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진정한 교제가 가능한지 잘 모르겠군요.“

자유주의 신학에서 비롯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져다 준 큰 비극은 크리스천의 정의가 성경의 가르침과 관계 없이 너무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로버트 슐러의 인터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무자격 의사를 양산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복음과 관련 없는 크리스천의 양산이다.

가톨릭과의 연합은 카톨릭 교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의 시대보다 더 잘못된 가톨릭과 어떻게 교리를 떠나 하나 될 수 있는가? 얼마 전 사망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누구라도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 비록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로마 카톨릭을 믿지 않더라도 관계 없다.”

필립 얀시는 사실상 기독교의 교리를 버리고 또 종교라는 굴레를 벗고 전 인류가 하나 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스컷 펙의 심리학 책이 미국의 저명한 신학교들에서 교재로 채택되는 현실도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필립 얀시가 그의 책에서 제시하는 은혜가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양 포장되어 한국 교회에서 많은 목사들의 추천사를 등에 업고 꾸준히 팔리고 있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필립 얀시와 같은 사람은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일치와 화합과 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예이다.

하나 되는 것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연합하느냐이다. 큰 교회들일수록 분명한 신학 대신 각종 방법만이 넘쳐 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신호이다. 이 모든 현상은 교회 속에서 지켜야 할 교리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년에 많은 사람에게 ‘고집불통 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는 누구보다도 교리의 회복이 진정한 복음주의의 회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가 교리를 통해 하나 되는 것만이 진정한 하나 되는 길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안 머리, “로이드 존스에 대한 기억은 철저한 강해 설교, 기독교 교리의 필요에 대한 주장, 일치 운동의 위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의 회복에 대한 갈망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복음주의자였다. 교리에 무지하거나 교리를 무시하는 사각 지대에 빠진 교회는 마케팅의 유혹에 벗어나기 어렵다. 일치와 단합에 의해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신복음주의의 열망에 마케팅이야말로 날개를 달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케팅은 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세상이 좀 더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기 때문이다.

0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1.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복음의 변질

효과적인 상품의 판매를 위해 상품의 강점은 최대한 부각시키지만 약점은 철저히 감추어야 한다. 사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품을 최대한 단순명료하게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들은 고난과 핍박이라는 부정적 용어들 외에 성경 여러 곳에 영생, 평안, 범사에 잘 됨 등의 긍정적인 문구를 강조한다. 이처럼 고객의 기호에 맞추는 복음은 애초에 성경의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복음은 상품으로는 하자가 너무 많다. 따라서 고객에게 거부감을 주는 약점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거하는가가 복음 판매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다행히 복음에는 조금만 손을 보면 고객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장점도 아주 많다.

알란 울프, “오늘날 심리학적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미국의 주류 종교들의 설교와 출판물들 그리고 소그룹 속에 파고 들었다. ‘낮은 자존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고 우정을 쌓지 못하게 하며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지 못하게 한다’고 어느 감리교 잡지는 청소년들을 향한 기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기사는 ‘낮은 자존감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언제 어디든지 심리학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죄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가장 큰 장애물인 죄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면 죄와 함께 복음 상품의 약점으로 부각되었던 다른 교리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지옥이 사라지고,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재포장된다. 죄를 짊어지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없게 된다. 십자가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예수가 사라지면 안 되니까 죄와 관련시키지 않은 채 계속 보존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 우리가 힘들 때 항상 친구처럼 위로해 주는 분으로 계속 남아 계셔야만 한다. 십자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사랑의 표현으로 간직하면 된다. 다행히 예수님은 성경에서 무서운 말씀만 하시지 않았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씀도 하셨다. 게다가 예수님은 병을 많이 고쳐 주셨다. 이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

곽선희목사는 세미나에서 말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교회 근처 신학교 교수와 그 교회 성공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조엘 오스틴의 설교는 교회 밖에서도 사용된다. 공항에는 그의 책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많은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로 오래 믿는 사람들만 이해하는 설교를 한다. 교회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말라. 나는 신학박사가 목회를 잘해 교회를 부흥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설교가 탈 신앙하여 중생이 되어야 한다. 설교는 세속화되어 교인들의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강해설교는 교회를 죽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경 강해를 통해 교인들은 지식만 늘고 비판의 능력만 생기게 하여 더욱 의심을 가지게 한다.”

“한 랍비는 그가 해석해 주는 만큼 믿으라고 말했다. 목사가 설명해주는 만큼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자훈련 등으로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교회가 망한다. 목사를 내보내는 사람도 성경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다. 자살하려다 설교에 은혜를 받고 살아난 성도가 성경을 읽고 사랑과 용서로 가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죽이라는 이야기가 더 많다고 놀란 적이 있다. 성경을 너무 많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에서는 성경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랍비가 정해 준 것을 묵상한다. 렉시오디비나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성경을 집중해서 읽는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보는 법이다. 개신교는 뜻도 모르고 성경을 너무 많이 배웠다. 성경을 많이 배울수록 비판만 늘어나 권위가 떨어진다.”

“교회는 큰 성경책을 한 권 그냥 강대상에 올려 놓고 하나님 말씀의 상징으로 여기기만 하면 된다.”

“목사들이 지적 설교를 하니까 교인들은 피곤하다. 교인들은 감동을 원한다. 하지만 목사들은 감동은 없고 지겹게 말만 많이 한다.”

마케팅교회에서 왜 죄가 사라지는가? 복잡한 교리는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을 지겹게 하는 죄를 짓기 때문이다. 상품은 최대한 단순, 간편, 간단해야 한다는 철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교리이다. 그냥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내게 축복만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통일해서 일관성 있게 전달하면 충분하다.

마케팅교회에서의 죄인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이 불쾌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죄짓는 사람들을 향한 무서운 질책을 들어보라.

“도대체 당신들 왜 그렇게 삽니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건가요? 당신이 자신을 더 사랑하고 당신 속에 있는 그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어요.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며 당신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 그거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분이 죽었어요. 그런데 당신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렇게 밖에 못삽니까?”

마케팅 교회는 기독교의 용어 중에서도 고객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는 직접적인 표현들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쓴다. 가치 중립적이며 부드러운 용어들을 중심으로 사용한다. ‘죄인’은 ‘교회 안 나오는 사람’으로 바뀐다. 진리라는 무거운 단어보다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거룩한 삶도 행복한 삶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말씀은 회개에 대한 것이었다. 죄가 없는데 회개가 왜 필요한가? 죄인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 교회가 무슨 회개가 가능하겠는가?

로이드 존스목사, “그 부인은 섬세하고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를 특별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교인으로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잘못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지적으로는 성경을 받아들였어도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능력을 맛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회개한 적 또한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죄를 슬퍼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로는 신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의미 있도록 하는 복음의 교리들이 사라진 마케팅 교회에서 들리는 구원은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아마도 낮은 자존감으로부터의 구원일지도 모른다. 정서적 불안감으로부터의 구원일 때도 있을 것이다. 다 맞다. 나름대로의 구원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어 설 수 있도록 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은 결코 아니다.

마케팅 교회가 눈을 뜨고 보아야 할 사실은, ‘고객 만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반복음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개념은 기독교의 복음과 관련해서는 결코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복음은 죄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오로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이 ‘고객 만족’에서 ‘하나님 만족’으로 바뀌어야 한다.

2.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예배 실종

오늘날 청소년들은 교회의 각종 찬양 집회가 제공하는 은혜의 혜택이 아닌 감정주의의 위험에 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서 사람의 ‘감정 고조’가 목적이 되는 오늘날에 대해 데이비드 웰스는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앞에서 포기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요, 우리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워서가 아니라 마케팅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할 대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는 것’이라 말한다. 요일 5장에서 ‘안다’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 말은 로이드 존스목사가 지적한 대로 단순히 ‘지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교란 감정적 흥분 또는 감정적 고요함 사이의 왕복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하나님의 사역은 감정의 포장 아래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성령 하나님의 신학처럼 한국 교회 속에 왜곡되고 편협되게 알려진 것이 또 있을까요?

진정한 희열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감정은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체험하는 그런 희열이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을 때 느끼는 희열이다. 진리만이 줄 수 있는 희열이다.

내용이 없는 무조건적인 감정적 고조를 경계하자. 내용 없는 ‘희열’을 ‘은혜’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을 본다. 일어서서 노래는 한 시간이라도 부르는 사람들이 성경만 펴면 졸거나 도대체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바른 찬양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자. 웰스는 그의 책 <윤리실종>에서 오늘날 불리는 찬양의 약 60%가 말씀의 교리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주관적 느낌에 의거한 가사들로 채워져 있다고 경고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감정 고조는 마케팅의 큰 무기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자라나는 기독교의 진리와 가치가 하나님을 느껴 가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음악 목사’라는 티이틀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기 위한 목사의 영광스러운 직책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3. 복음의 상품화로 인한 설교 실종

마틴 로이드 존스, “설교는 이제 상당 부분 하나의 직업화가 되었다. 진짜 기독교 설교문 대신 우리는 중고차(이류)수준의 심리학 강해를 듣고 있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청중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이다. 지나친 예화들로 차고 넘치는 설득의 설교로 변질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예화가 메시지를 압도하는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가? 과연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가 배꼽을 잡고 웃다가 받아들이는 그런 진리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개인의 꿈을 충족시켜 주는 종교로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성경 말씀은 본문의 의미를 상실한 채 너무 자주 개인의 동기 부여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복음이 상품으로 전락한 교회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신앙이 상품화될 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이다. 오늘날 사탄은 면죄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모습으로 교회 속에서 복음을 상품화 시키고 있다.

05 마케팅 교회의 모델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1.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의 신선한 등장

빌 하이벨스 목사의 중요한 세 명의 스승

1) 경영 스승, 피터 드러커 : 빌 하이벨스 목사가 사역자들에게 신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피터 드러커의 책은 반드시 읽도록 한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 경영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2) 신학 스승, 빌리즈키안 교수 : 빌리즈키안 교수에게 받은 아르미니안적 신학과 ‘친구되신 하나님’의 강조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그의 설교를 조금만 들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목회 스승, 로버트 슐러 : 슐러가 강조한 심리학을 통한 인간 필요의 충족은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 내용과 윌로우 크릭 속에 뿌리박은 문화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윌로우크릭 교회의 첫 번째 특징 : 심리학에 물든 교회

내가(프리차드) 연구하던 해 주말 메시지에서 하이벨스와 다른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치료를 생각해 보라고 최소한 21번에 걸쳐 권유했다. 하이벨스는 다음과 같이 권했다.

“ 우리는 상담센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걸었던 수치와 그림자를 버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담 치료와 그것의 심리학적인 골격은 목회에 대한 윌로우크릭의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도구로 받아들여진다. - 윌로우크릭 구도자 예배, G.A.프리차드, 서로사랑 -

심리학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집어 삼킬 때 나타나는 결과는 죄의 자리에 상처가 들어오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신 치료를 권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종교이다.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양보하는 유혹은 참과 거짓에 대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유혹과 다름이 없다. 심리학은 바로 이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3. 윌로우크릭 교회의 두 번째 특징 : 구도자 예배

“윌로우크릭의 성공 원인은 대부분의 교인들을 고객으로 인식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전통적인 비즈니스 개념을 바로 실천한 데 있다”

구도자 예배의 문제점들

1) 구도자 예배는 관련성을 추구함으로써 복음을 변질시킨다.

“일단 마케팅이 지배하게 되면, 관심은 그들의 메시지를 들을 청중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청중이 들어 줄 메시지를 찾는데 있다. 결국 메시지가 아닌 청중이 주도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것이다.”

2) 구도자 예배는 하나님의 권위를 끌어내린다.

복음 앞에 서 있는 해리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무릎 꿇지 않는다. 대신 그는 사랑에 목마른 하나님에게 자신의 응답의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

3) 구도자 예배는 불신자에 대한 잘못된 미래를 전제로 한다.

윌로우크릭은 해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4. 윌로우크릭 교회가 미친 영향

윌로우크릭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숫자를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는지에 대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교회가 되었다.

윌로우크릭의 성장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해리가 부담 없이 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담 없이 온 해리는 언제나 부담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명료합니다. 마케팅 전략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에 충실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 존 맥아더

06 마케팅 교회의 모델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1. 릭 워렌과 목적 열풍

릭 워렌 목사의 저서 속에 나타난 그의 목회 철학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그들을 이끌고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다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2. 새들백 교회의 핵심: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라

종교라는 단어 대신 삶으로 인식되는 기독교에 있어서 삶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인 각종 방법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즉각적 필요를 채우는데 민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채워 주심으로써 그들의 환영을 받기는커녕 예수님이 말씀을 하면 하실수록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급기야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온다.(요 6:65~66 ; 7:1)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의 필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평가

인간의 필요를 가장 확실하게 채웠다는 점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 마케팅적으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이유이다.

새들백의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은 구도자 예배가 가진 구조적 결함을 패키지된 상품과 단기간의 이벤트라는 두 가지의 무기를 가지고 극복한 케이스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속에는 십자가는 두 부분에 등장한다.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구원의 문제를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교회는 자신의 필요를 채워 심리적으로 만족한 삶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약속해서 하는 것은 비록 고통스러운 삶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어야만 한다.

07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교회의 수적 성장 여부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더하게 하시는 것이다.

교회는 더 크게 성장하고 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해지고 작아져서 세상 속으로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과 더불어 진짜 만나야 할 컨설턴트들은 바로 교회사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다. 백금산목사가 쓴 <큰 인물 독서법>은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읽기를 통해 큰 인물에게 왜 배워야 하는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책이다.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나 영적 거인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소명이다. 경쟁이 판을 치는 곳은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교회 속에 소명 대신 경쟁이 자리잡을 때 목회자가 소명자가 아니라 한낱 기술자, 전문가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경쟁시키기 위해 교회들을 세우지 않으셨다. 교회가 서로 다른 것은 교회마다 예수님이 주신 소명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1. 마케팅 교회의 최고 가치는 숫자다.

마케팅 교회는 큰 것이 옳고 진리라는 세상의 가치로 하늘의 가치를 매기고 있다.

숫자가 꿈이 되고 숫자가 비전으로 둔갑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다.

교회가 크고 많은 것이 옳다는 가치를 수용하는 순간 교회는 회사가 되고 목사는 사장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최근 교회 속에 파고든 가장 무서운 적은 숫자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2. 성경은 교회의 숫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예수님은 숫자로 사역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숫자라는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전혀 성공적이지 못하셨다. 한 때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도 예수님을 떠나가고 결국에는 단지 열두 명만을 데리고 계셨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예수님은 사람들을 최대한 증가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도리어 있던 사람들마저도 떠나도록 하셨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진리가 보여 주는 하나의 아이러니이자 핵심이 아닐까?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기준은 교인 수의 증감이 아니다. 칭찬을 들은 교회도 교인 수가 늘어서 칭찬을 받은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칭찬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생명을 걸고 지켜 냈기 때문이다. 책망의 이유는 자기 착각과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거짓 가르침의 수용이다.

3. 숫자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

크고 많은 것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흥이 아닌 것을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열매를 보고 똑똑히 인식해야만 한다. 왜 하나님은 루터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셨는가? 다들 하나 되어 세계를 하나로 묶는 대 사역 속에서 왜 루터를 통해 교회를 ‘분열’ 시키셨는가? 그것은 당시의 교회가 성경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믿음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부흥과 위기를 가늠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부흥이냐 위기이냐를 결정짓는 시금석은 교회가 지금 말씀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말씀 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숫자가 진리이면 이집트가 진리이고 바벨론이 진리이며 로마가 진리이지 않겠는가? 작고 작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진리 근처에나 가겠는가? 큰 것이 바르고 진리라는 이 세상의 넓은 길을 향해 교회가 좁은 길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아직도 많고 큰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있다고 여전히 선포해야만 한다. 교회가 그 넓은 길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1. 복음의 능력 회복

친절한 하나님이 넘치는 교회는 마케팅이 넘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교회는 인간의 기획에 의지한 마케팅 대신 하나님의 주권에 무릎 꿇는 예배자들로 넘치게 될 것이다.

(1)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의 회복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믿는 것 외에는 결코 다른 길로는 믿을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말이 안 되는 구원의 방법이 바로 십자가이다.

(2) 복음에 대한 담대함의 회복

성령님의 능력이 드러날 때는 교회에서 눈 감고 노래 부르며 감정에 젖어 있는 때가 아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은 십자가의 거친 복음이 가감 없이 선포되는 자리이다.

(3) 구원의 내세성의 회복

복음은 오늘날 나의 현실에 유용한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이 복음 속에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 현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다.

(4)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진노가 상실된 복음은 결국 능력이 사라진 복음으로 교회 안에 넘쳐나게 된다. 능력이 상실된 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교만을 더 키워주는 데 사용한다. 죄를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면서까지도 지키셔야 하는 거룩인 것을 보여 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거친 십자가, 인간을 모욕하는 십자가를 부드러운 십자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십자가로 바꾸려는 마케팅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주권에 대한 도전 행위이다. 공의의 하나님을 오로지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바꾸는 것은 복음을 반쪽 자리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주인공을 인간으로 바꾸는 시도이다. 인간이 복음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려는 노력이다. 정죄함이 실종된 복음은 인간을 더 나은 삶의 길로 인도하는 삶의 윤활유 내지 활력소 이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스펄전, “그들이 처한 위험을 바로 감지하고 죄인들이 죄 속에서 안심하지 않도록 바로 가르치라.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라. 살고 죽는 문제가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계속 두드리라. 당신의 호소, 당신의 열심, 당신의 애탐을 하나님이 보시고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로이드 존스, “죄에 대한 교리 없이는 바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 단순히 ‘예수께로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친구로 소개하며 놀라운 새 삶을 얘기하는 것은 결코 신약이 가르쳐 주는 복음이 아니다. 죄에 대한 정죄함이 없이 신약의 복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5)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회복

회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이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를 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회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회심은 단지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회심을 과도하게 감정과 연결시키는 순간 감정주의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회심한 자는 분명 그리스도로 인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나를 쓰러뜨리는 나의 약함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전보다 더 치열하고 더 교묘하게 공격한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 가운데세서 나를 의지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시험과 유혹이 나에게서 사라지는 것이 회심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대항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 내가 회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나는 여전히 절망하고 또 쓰러진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다. 내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말이다.

회심은 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죄에게 때로는 패배하지만 죄를 미워한다. 죄를 증오한다. 회심자는 죄에 대한 증오와 함께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회심은 내 자신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회심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과 일정한 수준의 긴장을 유지한다. 그 긴장을 영적 훈련이라고 해도 좋다.

회심은 행동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회심자는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뒤에 숨은 의도를 관찰하고 그 의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회심자는 말씀의 진리를 사모한다. 회심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잡는다.

가장 두려운 것은 회심하지 않았는데 회심한 줄 알고 사는 것이다. 철저한 자신에 대한 성찰 대신 ‘입으로 쉽게 하는 고백’과 ‘익숙한 교회 생활’을 구원의 가장 큰 증거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선한 삶이 아니라 의로운 삶임을 알 때 찾아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친구에게서 점심 얻어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오늘날의 ‘거듭남의 회심’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로 선포될 때 숫자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자랑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

인간의 입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대신 인간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주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 마케팅의 정체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실종시키지 않는 한 마케팅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예배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본성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분의 초월성이 물러나게 되면서, 현대에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관련성이 두드러지게 강해졌다. 설교 내용도 이런 현상을 반영한다. 이렇게 변모된 기독교 신앙은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빠져서 ‘환각제’를 원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에게 아주 매력적이다.- 웰스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은 대부분 주님의 거룩성에 대한 통찰력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실용적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생활의 수단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유혹받는다. 만앾 우리가 주님의 거룩성에 타협한다면 반드시 이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치중하는 마케팅 교회의 설교는 축복과 위로가 그 중심을 차지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복음의 실종을 의미한다. 거룩이 없는 곳에 죄가 있을 수 없고 죄가 없는 곳에 구원도 없다. 마케팅 교회 속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듣는다고 해도 성경이 말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로부터 도움을 받는 각종 형태를 총합해서 표현하는 용어일 뿐이다. 자존감 회복의 구원이고 자아 성취의 구원이다. 자신의 사상과 이상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예수라는 청년과 기독교 이념을 가져다 쓸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무서운 시대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하나님의 거룩’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경계’도 하나씩 사라진다.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희미해져 간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긴장하였을 때보다 내 영혼에게 더 도움이 되는 때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는 긴장은 우리 영혼에 보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마케팅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긴장은 사라진다. 친절한 하나님 앞에서의 ‘친밀감’으로 대체된다.

바른 분노가 회복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긍정적 성숙과 관용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어야 할 곳에 경계를 긋기 위한 거룩한 분노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심리적 필요르 채우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보고 맛보아 알아야 한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허접잖은 정신 상담을 통해 삶을 회복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책임질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우리 형상의 본질인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그 길은 교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로 선포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항상 어느 시대에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지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마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진리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교회가 바른 성경의 진리대로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행동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사의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된다. 워필드는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 진리는 믿는다고 고백할 가치도 없는 진리”라고 했다. 진리를 믿고, 진리대로 살며,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진리는 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진리는 다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있다.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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