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3:31-33, 44-50
보잘 것 없이 숨겨져 있는 천국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지난주에 기독교 교육의 목표를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없는 사람들을 예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오늘 예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방 종교의 거대 조직 및 오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온 유대교의 장엄함에 비해 기독교는 매우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종교로 보인다.
유대교의 종교의식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거대한 성전에서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성소 위에 피어오르는 연기 제사장의 에봇의 화려함 당시의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 했을 때 아무런 호감도 줄 수 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 유교와 불교에 비하면 기독교는 매우 작은 것으로 보여진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처음 쓰는 제자들의 모습에 비춰진 예수님의 모습이나 자신들의 모습은 겨자씨와 같은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예수님이 천국의 왕이라면 천국이 왜 그리 작아 보이는가에 대한 대답을 천국은 바늘 끝 만큼 작은 겨자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역할이 왜 이리 약해보이고 작게 보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영역보다 예수가 작게 보인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나면 4미터정도의 눈에 띠는 관목이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영역에 오시면 그 예수님이 너무나도 크게 보여진다라는 것입니다.
극히 작은 씨에서 경이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깃들이는 것 구약적인 표현으로는 안 좋은 표현일수 있으나 에스겔 17:23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이 되고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것이다.
다니엘 4:12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가지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렸으며 들짐승이 그 그늘에서 쉬고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며 온 세상 사람들이 그 과일을 먹었다.
예수님은 보기에는 작은 이 씨가 엄청나게 성장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이방인까지 집을 제공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자체도 한사람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될 수도 있고 아담이 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하늘에 별과 같이 능히 셀 수 없는 다수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정에도 이처럼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으로 겨자씨하나가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가정을 변화시키고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우리의 관습과 습관 행동양식이 너무 거대하다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유교의 내 자아의 물질의 명예의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천국은 그토록 숨겨져 있는 것인가요?(13:33)
그것을 누룩비유에서 말씀합니다.
밀가루반죽에서 누룩이 섞여 있는 것처럼 천국은 숨겨져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보이지는 않아도 덩어리 전체로 퍼져 갈 것입니다.
천국 역시 그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 전부로 천국은 확산 되어 질것입니다.
누룩은 유대교에서 그다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전날 가정은 누룩을 빈틈없이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누룩을 써서 빵을 만들지만 평시에 그들은 누룩이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예가 맞을지 몰라도 사철탕을 즐겨 먹으나 사람들끼리는 이 이야기를 내놓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누룩을 비유로 사용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존경받는 유대인들에 비해서는 평범하고 혐호스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혐호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을 취하시고 그들을 변화 시키시고 그런 다음 그들을 통해 사회를 변화 시키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 잘난 삶들이 아닌 그들을 통하여 일을 시작하고 계실까? 이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 받는 모습입니다.
수세기동안 형편없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보였는데 이일은 성공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첫걸음이 달라시우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무료진료소가 아폴로니우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첫 번째 병원이 파비올라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토마스 선교사가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걸음을 띠어 이 땅에 복음이 누룩과 같이 확산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눈에 안띠고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천국은 계속해서 사회에 부정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또 계속해서 행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밀가루 속에 들어 있는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것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미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그들이 희망이고 그들이 밀알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을 어떻게 사람들은 발견할 수 있나요?(13:44-45)
보화와 진주의 비유 두 가지가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계산할 수 없는 천국의 무한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룰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한 가난한 사람이 보화를 발견합니다.
매일의 일상적인 노동을 하고 지친 모습으로 아무런 기대도 없이 밭을 일구는 일을 일상을 보내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의 농기구에 한 상자가 발견되어 집니다. 그는 상자를 퍼올렸는데 그 안에는 값진 보물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는 흥분했고 그 보물을 다시 땅에 묻고 그 밭을 사기 위한 조치를 취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행동이 비윤리적인 행동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만일 사람이 흩어진 돈을 발견하면, 그 돈은 발견한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비유의 요지는 이러합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모습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상 속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모든 대가를 치루더라는 것입니다. 진주 또한 그러합니다. 필리핀에 진주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진주처럼 보이는 가치 없는 진주 목걸이를 팝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와서 필리핀 다녀온 기념품정도로 쓰이는 값어치 없는 진주입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도 진주 매장에 가면 가치 있는 진주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보석 감정사입니다. 가치있는 진주를 알아보고 그것을 필리핀에서 싸게 사서 한국에서 비싸게 팔았다라는 것입니다.
고대에 진주를 좋은 것 나쁜 것으로 비교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크기, 광택, 색 등등의 방법으로 진주를 평가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진주를 여러 개를 놓고 서로 비교를 하는 것이고 자기가 가진 것보다 크고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에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를 또 신앙을 경험하면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알게 되었을 때에 그것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2세기에 저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날 들판에서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 받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확신했고요, 그는 기쁨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나중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지만 그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값진 진주를 찾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천국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발견하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내하며 찾다가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던지 그것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고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 라도 얻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수님은 여러분을 향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13:47-52) 우리가 이렇게 변하고 우리의 태신자들이 이렇게 변화 되어야합니다.
여기서의 도전은 마지막까지 인내하라고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심판과 분리의 비유입니다.
천국에 가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정하신 임무를 완수 한 후에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기까지의 모습은 분명 예수님이 바라보실 때에 분리의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 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인가를 분리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해하고 반응한다면 좀더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반응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뭉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과 충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끝에 질문합니다. 깨달았니?
여러분은 깨달았습니까? 아멘 그러면 충성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봉사하십시오, 기도하세요, 말씀보세요.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하시고 분명결과가 있습니다. 배척받고 자기의 가장 가까운 곳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지금 세계의 곳곳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이 숨겨져 있는 천국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우리의 눈을 크게 뜨고 찾고 대가를 지불하여 듣고 이해해서 찾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여러분만 찾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태신자도 이 천국을 찾을 수 있는 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